평화의 길을 찾아서 (삼하 18:5~9, 31~33, 엡 4:25~5:2, 요 6:35, 41~51)
성령강림절 12 (210808)
지난주에 이어서 오늘도 평화와 통일에 관한 주제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 교회가 광화문 시대를 준비하며 두 개의 화두를 잡았는데, , 하나는 '생태적 전환'이고, 다른 하나는 ‘한반도의 평화’입니다. 다음 주일까지 '한반도 평화'의 주제를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제가 그간 해온 고민과 활동을 교우들과 나누며, 교회 안의 관심과 논의를 촉발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삶의 비극과 평화의 전망 / 사무엘하서 18장 5~9, 31~33절]
먼저 성서를 보겠습니다. 오늘 제1성서의 본문은 다윗의 셋째 아들 압살롬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다윗의 여러 아들 중 압살롬은 매력적인 야심가였습니다. 그는 ‘흠잡을 데 없는 매력남’이었지만 (삼하 14;25),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켜서 결국 죽음에 이르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이 아들 때문에, 다윗은 두 번의 비애를 경험합니다. 한 번은 아들이 일으킨 반란 때문이요, 다른 한 번은 아들의 죽음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아들의 죽음을 놓고 비탄에 차서 부르짖는 다윗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골육상쟁의 비극을 대표하는 것으로 사람들의 기억에 오랫동안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나라의 분열과 통일과정에 얽힌 폭력에 관한 이야기로만이 아니라, 누구나 한번은 겪는 인생의 비애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로 알려집니다. 권력의 정점에 절대적으로 비어있는 것, 그것은 평화였습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영광스러운 삶이라 할지라도 평화가 없다면 참혹한 비극에 이른다는 교훈을 줍니다.
이 이야기를 더 자세히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분열과 폭력으로 얼룩진 비극은 역사에서 반복되고, 오늘 우리도 그것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단과 전쟁의 상처가 깊이 새겨진 한국의 역사에는 폭력적인 일상이 있고, 그 폭력의 이면에는 삶의 비극을 경험한 영혼의 고통스러운 외침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평화에 관한 갈망이 큽니다.
우리 사회에는 정치적 입장을 막론하고 평화와 통일에 관한 원론적인 동의는 있습니다. 그런데, 들여다보면 여러 차이가 있음을 느낍니다. 점차 커지는 것 가운데 하나가 세대 간의 차이입니다. 기성세대는 통일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젊은 세대는 평화에 방점을 찍는 분위기입니다. 그런데, 한반도에서 평화와 통일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지요. 새청 회원들이 얼마 전 독서모임에서 읽은 [한국평화학의 탐구]가 그 문제를 분명하게 말해준 책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음 주일에는 그 책의 저자인 서보혁 님이 하늘뜻펴기를 해줄 것입니다.)
제가 그 책에서 배운 것은 ‘통일평화’라는 개념입니다. 이 개념을 설정하고 나니까, 평화와 통일의 관계를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평화를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통일이 필요하다는 점을 포괄적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우리 사회가 추구할 가장 큰 가치와 이상을 ‘평화’로 보고, 그것을 이루는데 필요한 네 가지 과제를 말합니다. 생태평화, 민주평화, 연대평화, 통일평화가 그것입니다.
생태평화는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이라는 근대적 패러다임을 극복하는 것으로서 코로나 사태와 기후위기로 인해 더욱 긴급한 과제가 되었습니다. 민주평화는 인권의 가치를 포괄적으로 이루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군사정권 시대가 지나갔지만,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극복해가는 긴 과정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연대평화는 성장과 경쟁의 시대를 지나오며 잃어버린 공동체적 가치를 찾기 위해, 협력과 우애로 사회적 네트워킹을 해가는 실험입니다. 통일평화는 통일 없이는 평화가 오지 않는다는 분단된 한반도에서 현실적인 당위에서 출발합니다.
통일평화는 그간 사용해온 개념인 ‘평화통일’과는 강조점이 다릅니다. 평화통일이라는 말은 통일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 평화를 이해한다면, 통일평화에서는 평화를 수단이 아니라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통일을 그 중간목표로 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평화와 통일을 이분법적인 선택이 아니라, 조화롭게 함께 추구할 것임을 알게 됩니다.
통일평화라는 개념이 주는 또 다른 장점은 분단상황이 유발하는 폭력을 극복하는 길을 명확히 하는 것입니다. 저자는 분단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네 가지 경우의 수를 언급합니다. 그것은 분단폭력, 통일폭력, 분단평화, 통일평화입니다. 우리가 지금 분단폭력을 겪고 있다면, 나머지 셋은 그 대안에 관한 것입니다.
분단폭력에 대한 첫 번째 대안은 분단평화입니다. 이 관점은 무리하게 통일을 추진하기보다는 분단상황에서 남북의 평화적 공존과 번영을 모색하자는 실용주의적 견해입니다. 최근의 여론조사를 보면, 통일이 쉽지 않겠다고 보는 경향이 커지고 있는데, 그 배경에는 북한에 대한 이질감이나 혐오감, 그리고 통일비용에 대한 계산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분단평화가 남과 북, 두 체제의 공존과 번영을 추구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가능한지는 회의적이라 하겠습니다. 언제든지 분단폭력으로 회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폭력을 통해서라도 통일을 이룬다는 통일폭력입니다. 과거에 남과 북은 이런 입장을 가졌습니다. 남은 북진통일을 외쳤고, 북은 적화통일을 추구했습니다. 하지만 서로에게 깊은 상처만 남기고, 오늘날에는 거의 폐기되었다 하겠습니다. 여전히 북의 급변사태에 대한 수구세력의 허망한 기대 안에 통일폭력에 대한 욕망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방식의 통일은 한반도에 평화를 주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남은 선택으로서, 분단폭력을 극복하는 최선의 전망은 통일평화라고 하겠습니다. 통일평화는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는 통일을 반드시 통과해야 하며, 통일 후에도 평화공동체를 수립하기 위한 노력은 지속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이렇게 보면, 통일평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해집니다.
저는 우리가 앞으로 포괄적인 평화의 전망 속에서 ‘통일평화’를 잘 살려가는 일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평화와 통일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기에, 평화를 찾는 과정에서 통일평화의 과제를 감당할 지혜로운 길을 넓혀갔으면 합니다.
[생명의 빵, 통일평화의 꿈 / 요한복음 6장 35, 41~51절]
하지만 평화의 길을 찾고 열어가는 과정은 사실 쉽지 않습니다. 현실적인 어려움이 발목을 잡기도 하고, 세속적인 욕심이 앞을 가로막기도 합니다. 말뿐인 평화는 몸짓을 공허하게 하고, 정서에 치우친 평화는 파당적인 만족에 그치기도 합니다. 평화의 길, 특히 통일평화의 길은 더욱 깊은 성찰과 지혜를 요구합니다.
그것은 마치, 오늘 복음서 본문에서 예수가 하신 말씀과도 같습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내게로 오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요, 나를 믿는 사람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요 6:35) 이 말씀은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생명의 빵은 진시황이 찾던 불로초 같은 어떤 구체적 실체가 아니라, 삶의 과정을 인도할 어떤 궁극적인 가치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현실 속의 어떤 실체로 혼동한 유대인들은 예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져 묻습니다.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부모를 우리가 알지 않는가? 그런데 이 사람이 어떻게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는가?” 이것은 하늘의 평화를 이 땅에 도입하기 위한 예수의 꿈, 그 가능성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그들은 현실에 충실하면서도 현실에 깃든 평화의 가능성 즉, 생명의 빵을 보지 못했고, 생명의 빵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현실은 죽음의 질서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어떤 철학자의 말처럼, 만일 평화가 ‘문명이 완성을 향해 나아가도록 만드는 궁극적인 힘’이요, ‘진리와 아름다움을 모험적으로 추구하게 만드는 무엇’이라면, 그것은 단순히 미래에 대한 희망이 아니며, 현재에 대한 세세한 관심도 아닙니다. 그것보다, 평화는 영원에 대한 감각, 어떤 무한성에 관한 파악, 다시 말해서, 현실의 제약과 한계를 초월하는 갈망과 함께 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평화는 욕망을 억제할 때 얻는 것이라기보다는 생명적 현실을 향한 모험적인 도약에 통해서 경험하게 됩니다. 삶의 고통과 좌절, 상실과 비극 속에서도, 보다 진실하고 조화로운 삶을 위해 대담히 나아가도록 이끄는 삶에 평화가 담깁니다.
의심하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예수는 두 가지 말씀을 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빵을 먹으면 죽지 않는다’ (50절),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생명의 빵을 얻을 수 없다’ (44절).
평화의 길을 찾는 우리가 구할 생명의 빵, 하늘에서 내려오는 빵은 무엇일까요? 광화문 시대를 앞두고 기도하는 우리 교회가 열어갈 통일평화의 길은 어디에 있는가요?
먼저 우리가 지나온 발자취를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발행한 문서에 담겨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통일 선교에 관한 과제를 분명히 한 것은 창립 40주년이던 1993년의 문서에서 “오늘의 한국교회는 분단된 남북 동족 간에 화해, 평화, 통일의 실현을 최우선적인 선교과제로 가진다.”고 밝힌 것에서 비롯된다고 봅니다. (향린의 신앙고백과 교회갱신 선언) 같은 해, <통일공화국 헌법> 초안을 발표하여 남과 북의 미래에 대한 민간차원의 과감한 제안을 하기도 했습니다.
창립 50주년을 맞은 2003년에는 <희년 통일 선언서>를 발표하여, 3년 전의 <6.15선언>과 보조를 맞춰 10가지 목표를 제안했으며, 60주년에는 <교회갱신과 사회선교 실천을 위한 제안>에서 5가지 주요 과제 중 두 번째로 ‘평화통일’을 제시하고, 7가지 실천사항을 담았습니다. 70주년이 되는 2023년에는 어떤 과제를 새롭게 설정할 수 있을까요?
오늘날에는 통일평화의 열정이 줄어들었고, 세대 간의 연계과정도 약해졌습니다. 이것은 광화문 시대를 준비하는 우리 교회의 고민이며, 올해부터 우리 교단의 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으로서 교단의 통일평화 선교에 봉사하고 있는 저의 고민이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가 맞고 있는 문제는 한국교회 에큐메니칼 운동이 맞는 문제와 다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기독교 통일 운동의 경험에 대한 성찰과 반성에서 얻은 교훈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한국교회가 해 온 통일평화 활동은 크게 보면 두 가지로서, 하나는 남과 북의 교회 대표들이 직접 만나서 화해의 물꼬를 열어온 대화 프로세스이고, 다른 하나는 인도주의적 북녘돕기 사업입니다. 먼저, ‘도잔소 프로세스’로 알려진 대화 운동은 남북관계가 얼어붙은 8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이 운동은 세계교회와의 연대를 통해서 남북의 교회가 화해와 협력을 해온 에큐메니컬 운동의 상징적 활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도 2019년 중국 심양에서 이 대화모임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또 한편으로, 한국교회는 <6·15선언> 이전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인도주의적 대북지원사업을 펼쳐왔습니다. 우리 교회도 ‘남북나눔헌금’을 통해 북녘 동포를 직접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지만, 우리 교단도 1996년부터 20여 년 동안 다양한 방식으로 인도주의적 지원사업을 진행해왔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 전반적으로 통일평화 운동이 후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내부 역량이 줄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를 향한 외부의 요청도 줄었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한국교회는 신자유주의라는 불안의 시대를 지나오며 가치-중심적 활동에 대한 관심과 역량이 현저히 줄어들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정부 차원에서 남북관계가 개선되자 이전에 교회가 해오던 선도적인 주장과 상징적인 활동이 의미를 잃게 된 면이 있습니다.
저는 이런 과정을 보면서, 앞으로의 통일평화 운동은 몇 가지 점에서 과거의 모습을 탈피하고 새로워져야 한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소수의 교계 지도자나 선도적인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주도하는 운동보다는, 신앙의 문제로 씨름하는 평신도들과 크고 작은 교회가 함께 참여할 수 길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통일평화 운동이 자기 만족적인 게토에 머물지 않고 연대 속에서 보람과 기쁨을 갖도록, 교회 간의 협력을 넓게 모색하고, 종교 간의 협력과 시민사회와의 연대를 넓히는 것입니다. 또한, 돌파구를 여는 과감한 활동과 아울러, 장기적으로 남북 교류협력의 토대를 쌓아갈 수 있는 지속사업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인도주의적 지원의 시혜적인 활동을 넘어, 남북의 상생 구도를 조성해 갈 수 있는 사업을 도입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2012년 기장 교단이 북녘 교회와의 협력사업으로 제안하여 일부 진행되었지만, 남북경색으로 인해 중단된 ‘북녘 평화의 숲 가꾸기’ 사업이 그것입니다. 최근에 교단의 기구인 <평화공동체운동본부>를 중심으로 하여, 평양 인근 대동강변에 위치한 40만 평의 땅에 종묘장을 지어서 북녘의 들과 산을 가꾸는 일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기장의 28개 노회가 각자의 소임을 갖고 임하며, 교류협력의 빗장이 풀리면 각 교회 신도회가 함께 농활/임활을 가서 북녘의 땅을 가꾸는 일을 꿈꾸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농촌교회와의 협력을 통해서, 북측이 요청하는 농법을 소개하고, 농업정보 교류와 기술 협력을 하면서, 상생의 실험을 확대하는 방안도 꿈꿉니다. 또 더 나아가, 남과 북이 생산과 판매의 순환구조를 갖는 협동조합을 함께 만들고, 교류협력을 통해서 신앙공동체의 영적 자산만이 아니라 물적 자산도 생산/축적되는 구조를 만드는 꿈도 꿀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 단계에 이르면, 남과 북의 교회가 하나의 교단을 이루는 일도 꿈꿀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통일평화 체제를 향한 첫 단계인 이런 교류협력의 시대를 염두에 두고, 우리 교회가 든든한 보급기지 역할을 할 수 있게 되기를 염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꿈과 계획을 구체화하여, 70주년 즈음에는 그 이름이 <홍근수 재단>이든 뭐든 간에, 한반도의 통일평화를 향한 활동이 가능하도록 함께 지혜를 모아가기를 기대합니다.
[평화를 향한 새 삶의 규범 / 에베소서 4장 25절~5장 2절]
통일평화를 향한 일은 단지 사회적 차원의 활동만이 아니라, 공동체를 안에서 다시 지어가는 것이자, 우리 자신의 실존적/신앙적 차원을 새롭게 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남북의 통일평화는 정치적인 문제를 넘어서 삶의 윤리요, 신앙의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통칭하여,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면서, 하나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엡 5:1)
서신서 본문에서, 바울은 여러 가지 생활규범들을 제시하는데, 마지막 3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서로 친절히 대하며, 서로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런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가까운 곳에서부터 평화의 길을 넓혀갈 수 있을 것입니다.
평화의 길을 돈이나 힘으로는 열어갈 수 없습니다.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영역에서 평화를 시도할 수 있지만, 종교가 정치나 자본의 아류가 되면 그 맛을 잃고 말 것입니다. 평화의 길을 찾는 우리의 꿈이 당위에 묶이기보다는 동경(憧憬)으로 구성된 복음의 부름을 입고, 비판과 저항을 넘어서 대안을 실험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시기를 빕니다.
잠시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평화의 길을 힘차게 열어갑시다. 분단폭력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통일평화의 사업을 펼쳐갑시다. 통일평화를 하늘에서 오는 이 시대의 ‘생명의 빵’으로 삼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살아갑시다. 목마르지 않은 삶의 길로 부르시는 주님의 요청에 응답하여, 평화를 심는 일을 위해 다시 일어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