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폭력에서 통일평화로 | 김희헌/서보혁 | 2021-08-15

by 김희헌 posted Aug 15, 2021 Views 147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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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1-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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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폭력에서 통일평화로 (왕상 2:10-12,3:3-14, 5:15-20, 6:51-58)

성령강림절 13, 평화통일주일 (210815)

 

[성서 묵상, 평화를 찾기까지 있는 힘을 다하여라 / 시편 34:14]

말씀드린 대로, 오늘 평화통일주일의 하늘뜻펴기를 서보혁 님이 해주실 텐데요. 먼저 성서 묵상을 짧게 진행하겠습니다. 세 개의 성서 본문을 잇는 공통주제는 지혜라고 하겠습니다. 그것을 분명히 하는 곳이 함께 읽은 에베소서 515절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살피십시오. 지혜롭지 못한 사람처럼 살지 말고, 지혜로운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바울은 여기서 어리석음을 피하고 지혜롭게 살라고 권합니다. 물론, 누군들 어리석게 살고 싶겠습니까! 하지만 지혜로운 삶을 살기는 쉽지 않습니다. 생명을 길을 걷는 지혜,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롭게 사는 지혜를 갖추는 일은 마치 필생의 과제처럼 느껴집니다.

역사적으로 우리 민족은 생명과 평화의 지혜를 얻기 위해 험난한 세월을 헤쳐왔습니다. 해방과 함께 시작된 분단의 고통, 그리고 전쟁의 참화를 입고 상처 난 몸과 마음에는 지혜로운 성찰보다는 생존을 위한 본능이 앞서곤 했습니다. 대결과 갈등의 시기에는 자기만의 진리에 물들며 궁극적인 이상을 잃곤 했으니, 자본의 탐욕이 지구촌 곳곳을 파괴하는 시대에도 욕망이 지혜의 옷을 입고 등장하는 것을 오히려 환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진리에 대한 공동체적 감각을 잃고 저마다의 영역에 고립된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작은 행복을 추구하는 소확행’(a small good thing)의 시대 이면에는 거대한 회의가 자리 잡고 있으며, 자기만의 집착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을 잃어버린 것만 같습니다. 스승은 사라진 지 오래이며, 늘어난 우상만큼 삶은 분주해졌습니다.

그렇게 생존의 시대, 갈등의 시대, 탐욕의 시대, 고립의 시대를 지나오면서도, 우리 안에 생명과 정의와 평화를 향한 갈망이 남아 있다는 것은 신비롭습니다. 우리는 생존을 넘어 생명을, 대결을 넘어 평화를, 탐욕을 넘어 정의를, 고립을 넘어 연대를 구축할 지혜를 갈망합니다. 인류의 가장 끈질긴 열망 가운데 하나가 지혜를 얻으려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3장을 보면, 지혜를 구한 솔로몬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솔로몬이 소위 일천번제(一千燔祭)를 드린 후에 야훼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 묻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주기를 바라느냐?’ 솔로몬은 기특하게도 자신을 겸손히 낮추며,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기뻐하시며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지혜로운 마음을 주겠다고 약속하며 축복까지 더해주십니다.

성서는 이 이야기가 솔로몬의 꿈이었다고 말하고 있으니, 역사적인 사실은 아니라는 말이겠습니다. 성서의 전통에서 솔로몬은 지혜의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왕조 이데올로기를 빼고 보면, 그는 먼 미래를 내다본 지혜의 사람이라기보다는, 영화로운 삶을 살면서 자기 시대의 자산을 탕진한 사람에 가깝습니다. 그의 영광이 지나고 나자, 나라는 남북으로 분열하고 다시는 하나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솔로몬의 영광 이면에는 역사의 회한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솔로몬의 설화를 채색한 직접적인 요인이 왕조 이데올로기라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민중들의 꿈이라고 하겠습니다. 솔로몬 설화를 입에서 입으로 전하고 기록으로 남게 만든 것은, 민중들의 절망과 염원이 뒷받침하는 역사의 거대한 회한과 소망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이야기를 통해서 묻는 것이지요, 영광의 욕망으로 탕진되지 않을 지혜는 과연 무엇이냐고 말입니다.

이 끈질긴 물음이 이어져 요한복음에 이르면, 영원한 생명에 관한 지혜, 참된 양식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지혜에 관한 물음으로 구체화합니다. 그것이 오늘 요한복음 본문에서 예수의 목소리를 통해서 들려지는 말씀입니다.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같지 않은, 한 번 먹으면 영원히 살 수 있는 생명의 양식이 무엇이냐 하는 물음입니다.

우리는 코로나의 대재앙 속에서, 기후위기와 생태적 전환이 요청되는 길목에서, 여전히 우리 한반도 역사가 오랫동안 안고 있는 물음을 묻습니다. 분단된 땅을 치유할 지혜에 관한 물음입니다.

평화통일주일을 맞아 배포된 세계교회와 함께하는 공동기도주일 문서를 보면, NCCK 회장이신 한국정교회 암브로시오스 대주교의 설교문이 있습니다. 거기에 나온 올 평화통일주일의 주제는 예배를 시작하면서 읽은 시편 34편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 가운데 14, “평화를 찾기까지 있는 힘을 다하여라!이 말씀을 화두로 삼은 설교문의 일부를 읽으면서, 성서묵상을 마치겠습니다.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평화는 과연 어떤 평화인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분열되지 않고 하나였던 4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성 대 바실리오스는 이 시편의 구절을 이렇게 주석하였습니다. “평화와 관련하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14:27) 그러니 주님의 평화를 찾고 추구하십시오. 다른 것이 아닌, 오직 높은 곳으로 부르시는 상’(3:14)을 받으려는 목적으로 달려가십시오. 참 평화는 하늘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육신에 매일수록 우리를 불안하게 뒤흔드는 많은 것들에 매이게 됩니다. 그러니 마음을 평화로이 하십시오. 그래서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는 하느님의 평화’(4:7)를 구하십시오. 평화를 구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갈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평화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평화를 가져와 둘을 결합시키셔서 새로운 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2:15) 또한 하늘과 땅의 만물을 당신과 화해시키셨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면서 하늘과 땅에 평화를 이룩하셨습니다.’ (1:20)”

 

[서보혁, 분단폭력에서 통일평화로]

광복 76돌을 맞이하는 오늘, 당시 우리 선조들이 꿈꾸었던 나라를 생각해본다. 자주독립 국가가 많이 회자되었다. 분단 이후에는 자주독립통일국가를 희망하였다. 외세에 의해 분단된 민족의 하나 됨, 곧 민족통일이 지상과제가 되었다. 통일지상주의로 불릴 정도로 이 과제는 국가와 시민, 남과 북을 막론하고 거역할 수 없는 목표가 되었다. 문익환 목사님이 방북을 결행한 1989년 벽두에 써 내려간 시, ‘잠꼬대 아닌 잠꼬대에서 노래한 것도 민족통일의 꿈이다. “오늘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온몸으로 분단을 거부하는 일이라고/ 휴전선은 없다고 소리치는 일이라고.”

 

이렇게 민족주의 통일론이 기성 통일론의 주류인 것은 당연해 보인다. 단일 민족, 민족 자주, 민족 동질성과 같은 테제들이 통일 논의에 자주 회자된 것도 민족주의론의 영향력을 잘 보여준다. 물론 이때 민족주의는 혈연, 언어, 지역, 문화 등에 걸친 동질성을 바탕으로 오랜 시간 생활을 함께하며 만들어진 공동체의 정서적 유대감을 강조한다. 민족주의 통일론에서 민족은 문화민족의 시각에서 정의이다.

그러나 민족주의 통일론의 독점적 지위도 약화하기 시작한다. 1980년대 후반 이래 민주화가 진전되고, 냉전이 해체되고,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민족통일론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민족의 재결합이 통일의 제일 이유로 남아 있는 것은 변함없으나 그 비중이 줄어들고 다른 통일의 이유가 부상하기 시작한다. 통일의 필요성과 그 제일 이유로 민족 재결합은 새천년이 시작할 때만 해도 70%를 나타냈지만, 이후 그런 비중은 서서히 그러나 뚜렷하게 줄어들었다. 서울대와 한국갤럽의 2020년 국민 통일의식조사에서 통일 지지도는 50%, 그중 청년층에게는 30%대로 나타났다. 통일의 이유로 민족 재결합과 함께 전쟁 방지가 공동 1위를 나타냈고, 그 외에도 한국의 선진국화, 이산가족 고통 해소 등이 뒤를 이었다. 여기에는 남북 간 이질감과 대북 불신은 물론 대내적으로 권위주의 및 집단주의적 통일관에 대한 반감도 작용하였다.

이와 같은 변화에 직면해 민족주의론은 통일이 민족의 재결합에 그치지 않고 대내적으로는 민주주의, 인권, 다원화를 수용하고, 대외적으로는 국제협력과 보편가치 증진에 동참하는 방향으로 변용을 시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성 민족주의 통일론이 문화민족론에 근거하고, 민족 자결권과 자주성을 추구하고, 가부장제 및 권위주의 문화와 결합해 지속해온 점을 어떻게 지양할지는 남아 있는 문제이다. 사실 이런 점들이 민주화 세대, 새천년 청년 세대들에게는 민족주의 통일론이 시대착오적이고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 이유로 작용한다.

 

다음으로 국가주의 통일론도 기성 주류 통일론의 한 자리를 차지해왔다. 민족주의 통일론이 분단된 민족의 재결합에 초점을 두었다면, 국가주의 통일론은 분단 이후 두 체제가 경쟁해온 사실에 근거한다. 국가주의 통일론에서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천명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주권이 한반도 전역에 행사되는 것을 비전으로 한다. 이때 민족은 그 자체로 선이라기보다는 부국강병의 도구이다.

국가주의 통일론은 냉전 시기 반공 권위주의 정권의 공식 통일담론으로 기능했다. 체제경쟁을 자양분으로 하는 이 통일 담론은 그 영향력이 줄어들었지만, 관련 헌법 조항에 대한 편협한 해석에 정당성을 두고 있다. 남한 체제의 우월성과 북한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그리고 흡수통일에의 기대감 등을 바탕으로 정치권과 시민사회 일부에서 일정한 지지를 형성하고 있다. 국가주의 통일론에서 국가는 통일의 주체이고 심지어는 통일국가의 존재 이유로 부상할 수도 있다. 결국, 국가주의 통일론은 민족 단일성 회복, 민족 재결합이 아니라, 남한 체제로 북한을 흡수하고 그 결과로 남한 체제의 이념과 자본이 한반도 전역을 지배하는 것을 추구하는 공격적인 통일 담론이다.

 

그러나 이 두 집단주의적 통일론은 민주화, 개인주의, 다원화 등 시대 추세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이 높다. 이런 기성 통일론은 장기 경제불황으로 미래가 불투명해진 청년층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 왜냐하면, 통일이 집단에게 큰 이익을 줄지 모르지만, 개인에게는 그만큼 주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집단과 개인에 줄 통일의 이익 차이가 점점 커지는 현상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앞의 서울대 통일의식조사에서 2007년 둘의 차이는 25.5% 포인트였는데, 2020년에는 33.3% 포인트로 커졌다.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2020 통일의식조사, p. 52) 나 자신의 미래가 불안한데 북한을 돕고 통일을 준비하는데 비용을 내놓을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위 두 형태의 집단주의 통일론이 강력한 비판에 직면한 것은, 기성 통일담론이 민족 혹은 국가의 이름 아래 개인과 약자의 존엄이 침해되어온 사실에 소홀한 점도 크게 작용한다. 이름하여 분단폭력을 말한다. 분단폭력은 분단이 만들어 내는 폭력적 활동과 구조, 담론이자, “분단체제가 생산하는 생명유린행위을 말한다. 여기에는 분단을 이용한 다양한 측면과 차원에서 자행된 폭력이 망라된다. 그중에는 남·북의 분단권력이 체제통일과 민족통일을 명분으로 시민을 억압하는 경우를 포함한다.

이와 같이 각양의 분단폭력을 초래한 분단의 장기화로 인해 통일 지지 여론의 약화는 물론 통일의 이유가 다변화되고, 나아가 통일보다 평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때 평화는 남북 평화공존을 말한다. 여기서 평화를 통일 앞에, 통일을 준비하는 남북 공존의 관계가 아니라 통일을 대신하는 분단평화로 나아갈 수 있다. 분단평화론은 통일 과정은 물론 통일이 또 다른 폭력을 초래할 것을 우려하며 그 차선책으로 평화로운 남북관계를 선호한다. 이 담론은 아직은 소수이지만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서서히 지지세를 넗힐 수 있다. 분단평화론은 남북 간 체제 공존, 상생·호혜를 추구하지만, 체제경쟁을 본질로 하는 분단체제를 전제로 하고 있어 그것이 얼마나 타당한지는 의문이다.

 

통일에 대한 기대의 축소에도 불구하고 통일 지지도는 일정한 지지대를 유지하고 있다. 또 평화정착에 대한 높은 지지에도 불구하고 평화는 도구적 의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평화와 통일의 공존관계를 적극 검토할 필요성을 발견한다. 이는 집단주의적 통일론의 지양을 통해 통일의 정당성을 구조하는 대신, 평화통일을 초월해 기존 통일론의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이 바로 통일평화론이다.

평화통일은 평화를 수단으로, 통일을 궁극적인 목표로 간주한다. 그에 비해 통일평화는 평화를 궁극적인 목표로, 통일은 평화로 가는 길에 달성해야 할 중간 목표로 본다. 통일평화는 통일을 거쳐 한반도에 평화공동체를 건설하는 비전과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노력의 총체로 정의할 수 있다. 통일평화는 한반도 미래 비전을 민족주의, 국가주의와 같은 집단주의에서 그려온 기존의 관행과 결별한다. 그렇지만 분단폭력을 잉태하고 정당화해 온 분단을 무시 방관하지 않는다. 분단폭력 극복 없이는 통일도 평화도 불가능하다. 이는 통일도 부정할 수 없는 목표이지만, 평화도 (수단이 아니라) 목표로 보아야 함을 말해준다. 통일을 목표로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통일된 한반도의 미래상을 평화공동체로 설정함이 타당하다. 통일론은 어떤 형태이든지 통일을 이유로 한 폭력에 눈감거나 통일 이후 한반도 미래상에 깊은 관심을 두지 않아 왔다. 주로 권력 형태만 논의해왔다. 통일평화는 분단 극복의 과제를 품으면서도 그 방향과 대안을 평화주의로 사유한다. 평화공존, 평화통일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평화는 통일 논의에 꾸준히 관여해왔다. 전쟁을 겪고 전쟁 위험을 안고 살아가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 평화는 민족통일이나 체제통일의 수단과 절차에 머물러 있었다.

 

지금까지 집단주의적 통일론을 비판하고 새로운 통일 담론으로 통일평화를 제안하였지만, 평화공존이나 분단평화는 통일평화로 가는 긴 여정의 일정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분단평화는 2국가 2체제, 통일평화는 1국가 1체제를 이상적으로 본다면 그사이 2국가 1체제 혹은 1국가 2체제도 가능할 것이다. 평화통일은 통일평화 여정에 결정적인 분수령이자 가장 가까이 있다는 점을 둘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기존의 집단주의적 통일론과 도구주의적 평화론의 한계를 넘어 한반도 미래를 평화주의로 그려보자. 그 길은 평화공존-평화통일-통일평화로 나아갈 것이다.

문목사님이 위 시에서 원수가 되어 대립하던/ 사상이니 이념이니 제도니 하던 신주단지들을 부수어 버리, 북녘 동포를 괴뢰라고 인민이라고 부르지 않고 동무라는 우리말로 부를 것을 제안한 것은 분단폭력을 극복하는 좋은 방법이다. 목사님은 또 통일의 목적이 민족의 재결합만이 아니라 자유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자유를 당신 살아생전에 이루지 못하면 넋으로 그 깃발을 높이 들 것이라고도 힘주어 말했다.

 

[파송사]

평화를 이루기까지 있는 힘을 다하라.”라는 하나님의 소리가 들려지기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우리 안에 가꾸고, 이웃과의 평화를 넓혀서 한반도 전역에 평화가 이뤄지도록, 통일평화를 위해 열정적으로 일합시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불리는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