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절에 열리는 세계 (잠 22:1-2,8-9,22-23, 약 2:1-10,14-17, 막 7:24-37)
창조절 1 (210905)
[창조절 묵상, 수동의 영성]
새로운 신앙의 계절인 창조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자연의 계절도 바뀌어 새 마음으로 출발하기 좋은 때입니다. 세계교회가 ‘창조절’을 지킨 지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교회는 그리스도의 탄생에서 부활에 이르는 기간을 기념하는 방식으로 교회력을 구성했기 때문입니다. 성부 하나님의 창조에 주목하는 기간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삼십여 년 전에 동방정교회가 창조절 묵상을 제안하고, 그것이 점차 퍼지면서 오늘날에는 가톨릭을 포함하여 세계교회 대부분이 창조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최근 생태적 위기가 가중되면서 창조세계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특히 1991년 세계교회협의회(WCC)가 JPIC 대회를 가진 이후, 기독교 신학은 정의(Justice)와 평화(Peace)라는 가치에 더해, ‘창조세계의 보전’(Integrity of Creation)을 중요한 시대적 가치로 정착시켰습니다. 생태환경의 위기에 대한 교회의 대처가 단지 환경보전 활동에 머물지 않고,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과 추구하는 믿음의 내용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로 깊어지고 있습니다.
창조절 묵상 주제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묵상이요, 다른 하나는 인간의 창조행위에 대한 성찰입니다. 이 두 주제는 분리된 것 같지만,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기 삶을 성찰하는 방식과 유신론적 믿음이 구성되는 방식은 얽혀 있기 마련입니다.
종교사상이 변해온 흐름을 크게 보면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단계는 신의 창조적인 힘을 흠모하고 두려워하는 유신론적 경배의 시대였습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우주 만물의 질서와 인간의 생사화복을 절대적 힘을 가진 신이 결정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기적을 베푸는 신에 관한 믿음이 종교와 철학의 언어였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신의 창조성 대신 인간의 창조적 힘을 신뢰하는 무신론의 시대입니다. 신에 관한 유신론적 믿음은 실체가 없는 비진리로 여겨졌고, 그것은 단지 인간의 욕망이 투사된 것이거나 (포이에르바하), 연약한 존재의 병리 현상으로 설명 (프로이트) 되었습니다. 종교는 민중을 몽매에 빠뜨리는 아편으로 취급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도 거의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세 번째 단계는 인간의 창조성에 대한 회의와 함께 시작되었고, 오늘날에는 인간의 무신론적 능동성이 초래한 파국적 결과에 대한 성찰로 깊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과거의 유신론적 믿음으로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힘에 대한 경배는 야만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이제, 신은 있는 듯 없는 듯 수동적으로 존재합니다. 없다 하는 이들에게는 존재하지 않고, 있다고 여기는 이들에게는 있는 묘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역사를 개관해 보면, 신은 기적을 베푸는 능동적인 존재에서, 점차 수동적인 존재로 변해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신의 환골탈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영적 성숙을 의미합니다. 성서의 흐름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모세의 신이 기적을 베푸는 능동적 신이라면, 예수의 신은 아들을 십자가의 죽음에 내버려 두는 수동적인 신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무신론적 침묵이라기보다는, 너무 커서 인간의 눈에 띄지 않는 은총의 세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교우 여러분은 어떤 하나님을 경험합니까?
이번 창조절 말씀을 묵상하면서, 가톨릭 신부 이제민 님의 책을 읽었습니다. <수동의 영성: 제3의 인생>이라는 제목입니다. 이 책은 인생을 세 단계로 구분합니다. 제1의 인생은 자신의 힘에 의존하는 때이고, 제2의 인생이 그 힘의 한계를 체험하는 좌절의 시기라면, 제3의 인생은 그 힘을 극복하고 진정한 자유와 내적 충만을 누리는 시기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 제3의 인생에서 필요한 것은 ‘수동의 영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앞으로의 ‘인류의 과제’는 “세뇌된 능동의 우상을 타파하고 수동의 삶으로 전환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수동의 영성, 21)
저는 그 주장이 결코 과장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삶이든, 교육이든, 영성이든 수동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서는 헛똑똑이에 불과합니다. 과거의 교육은 능동적인 존재를 만드는 것에 목표를 두었습니다. 경쟁에서 승리하고 자연을 정복하는 교육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감하는 능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오늘날의 교육은 타인과 공동체에 대한 감각을 키우는 것에 관심합니다. 그것은 수동의 힘을 키우는 것입니다.
종교 영성도 비슷합니다. 진정한 영성은 자신을 깨뜨리며 생겨나는 것이지 자신을 강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내어주는 마음이 아니고선 신의 은총을 경험하기 힘듭니다. 제힘으로 천국을 건설할 수 있다고 믿는 능동적 신앙은 얼마간 원숭이처럼 까불다가 결국 잦아듭니다. 영성이란 성령께서 우리를 어떻게 이끌어가시는지를 보는 것이지, 자신의 노력으로 무언가를 성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도, 하나님과 만남도 자신의 노력으로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절을 보내면서 우리 삶에 열리기를 바라는 것은 우리를 새롭게 하는 은총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에 참여하는 삶을 기대하며, 성서의 가르침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바른 마음가짐 / 잠언 22장 1~2, 8~9, 22~23절]
창조절의 믿음으로 먼저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잠언의 가르침입니다. 잠언은 삶의 의미를 냉정하게 성찰하도록 이끕니다. 오늘 본문은 ‘복 있는 존재’가 누구냐고 묻는데, 그것은 마치 에리히 프롬이 던진 ‘소유냐 존재냐?’ (to have or to be, 1976) 하는 물음과도 같습니다.
그는 소유를 중심으로 살아간 근대적 삶의 방식을 비판적으로 보았습니다. 근대문명은 자연을 통제하여 많은 물질을 소유하는 것이 인간에게 행복과 자유를 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무한한 소비를 하는 것을 신과 같은 삶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프롬은 그것이 과연 인간이 추구할 만한 창조적인 삶인지 묻습니다. 그는 ‘인간의 실존이 소유에 따라 구성된다면, 그 소유를 잃었을 때 과연 그는 어떤 존재일 수 있는가?’ 하고 묻습니다.
소유를 중심으로 하는 삶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행위를 요구합니다. 수동적인 태도를 나태나 무능으로 여깁니다. 종교도 능동적 영성을 중시합니다. 미국의 전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최고의 설교자’로 존경했다는 노만 빈센트 필 목사(Norman Vincent Peale)는 ‘적극적 사고의 힘’(the power of positive thinking, 1952년)이라는 책을 출판하여 미국 기독교의 번영신학을 대변한 적이 있습니다. 그 책은, ‘성공한 당신을 상상하라’ 그리고 ‘부정적인 생각을 쫓아낼 적극적 사고를 하라’는 등의 10가지 규칙을 설파합니다. 그것은 소유를 늘리는 삶에 편승하여 인간을 추동하고, 기능적 존재로 점차 변해가는 삶에 동반된 암울함을 종교가 해결해 줄 수 있다고 약속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성서의 가르침과 동떨어진 것입니다. 존재를 복되게 하는 것은 능동적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열망을 밀고 나가는 것만으로 세계가 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단지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인생의 문제입니다. 잠언은 여기서, 예언적 열정보다는 삶의 의미에 대한 냉정하고 압축된 통찰을 전해줍니다.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가난한 사람이든 부유한 사람이든 공통과제가 있는데, 그것은 부귀보다는 아름다운 이름을 얻고 은총을 택하는 삶(1-2절)입니다. 본문은 이어서 삶의 일반윤리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하나는 ‘불의와 분노로 살지 않고 관용과 베풂으로 사는 것’이요 (8-9절), 다른 하나는 ‘가난한 자의 것을 빼앗지 않고 고생한 사람을 억누르지 않는 것’입니다. (22절).
창조절 첫 번째 본문 잠언의 가르침은 은총의 세계를 향한 열린 마음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욕심을 줄이고, 이웃과 함께 조화롭게 살아가는 삶입니다.
[생명력 있는 말 / 마가복음 7장 24~37절]
마가복음 7장 본문에는 병 고침에 관한 두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방지역에서 일어난 이 두 사건에서 인상적인 것은 예수와 등장인물 사이의 대화입니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예수는 대화에 실패합니다. 유대주의적 편견에 사로잡힌 그의 말은 비수가 되어 상대방을 찌릅니다. 딸의 병을 고치려고 찾아온 이방 여인에게 예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이방인을 ‘개’로 표현한 예수의 말은 그의 실패를 보여줍니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면 (M. Heidegger), 예수는 여기서 존재의 집을 짓는 작업에서 실패하고 있습니다. 그는 생명력을 불어넣기보다, 굴레를 씌우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닫힌 언어를 사용하는 예수의 실패를 보면서, 우리는 언어가 가진 한계를 여실히 봅니다. 그런 언어는 최선의 기능을 수행할수록 존재를 더욱 줄이는 말이 됩니다.
반면 아이의 어머니가 사용하는 말은 낡은 틀을 깨는 말이요, 자신을 낮추며 생명을 흘러오게 하는 말입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이 말에는 과도한 요구도, 과장된 해석도 없습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꼭 필요한 요청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예수를 움직이고, 예수를 구원합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치유하는 사건입니다. 이 사람의 병을 고치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말보다는 행위요, 예수의 치유행위에서 말은 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예수가 한 말은 아주 절제된 한 마디뿐입니다. “에바다!” 그 뜻은 ‘열려라!’입니다. 이 말은 수동적 의미입니다. ‘열어라’ 하지 않고, ‘열려라’고 한 이 말은 행위를 요구하는 말이 아니라 존재를 일깨우는 말입니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 자기 경계 안에 갇힌 이 사람을 살린 말은 ‘에바다’입니다. 그것은 경계가 허물어지고 새 삶이 열리게 하는 살아있는 언어입니다. 생명력 있는 관계를 지어가는데 ‘말’은 매우 중요합니다. 말은 단지 의사소통의 도구만이 아니라, 존재에 생명력을 전달하는 통로입니다. 자신을 일깨우는 소리에 귀 기울일 때 새로운 세상이 열립니다.
[사랑이 흐르는 자리 / 야고보서 2장 1~10, 14~17절]
야고보서는 이웃사랑이라는 고귀한 율법을 실천하는 방식에 대한 구체적인 가르침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차별 없는 사랑입니다. 그것을 말하기 위해서 본문은 회당에서 방문자를 맞는 사람이 가진 이중적인 태도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그는 부자를 맞을 때는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말하면서 호의를 보이지만, 가난한 사람에게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치에 앉든지 하라’고 업신여깁니다.
본문은 노골적인 표현으로 읽는 사람의 얼굴을 화끈거리게 만듭니다. 이런 묘사는 이중적인 태도를 비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것은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으로 이웃을 대하고, 세상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는 태도에 대한 비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을 왜곡하여 보고, 잘못된 증언을 합니다. 이웃을 압제하고, 법정으로 끌고 가고, 모독하는 이들은 부자들이지만 오히려 그들은 존중하고, 거꾸로 가난한 사람들을 멸시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야고보서는 그것을 윤리와 영성의 실패로 봅니다.
따라서, 본문은 그런 실패를 피할 수 있는 성서의 가르침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기나긴 성서 역사에서 일관되게 흘러온 거대한 사상으로서, 5절에 나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그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택하여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 되게 하셨다.’라는 이 믿음은 가난에 대한 미화도, 부유한 삶에 대한 역차별도 아닙니다. 그것은 다만 역사를 이끌어가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또 다른 편견과 억압을 낳는 편향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우리의 불완전한 세계가 교만과 질곡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성서의 장치입니다.
성서가 ‘서로 사랑하라’ 말할 때, 그것이 사랑의 행위에 대한 요청만은 아닙니다. 야고보서가 강조하듯이, 행위가 없는 믿음과 사랑은 죽은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사랑의 행위가 운반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은 사랑이다’라고 선언하는 성서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요일 4:8) 그것은, 하나님이 사랑의 주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가는 자리일 뿐이라는 고백입니다.
자신을 사랑의 주체로 여기는 사람들, 자신을 정의의 수호자로 여기는 정치인들, 자신을 국가적 풍요의 근거로 보는 경제인들, 자신을 전능한 믿음의 거처로 보는 종교인들, 그들은 허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사랑이 아닙니다. 완고하고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의 은총이 흐르는 삶이 되도록 우리를 열어야 합니다.
온 세상이 코로나의 긴 파국 속에서 새로운 창조 세계가 열리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서는 우리에게 세 가지 묵상 주제를 던져 줍니다. 첫째는 소유가 아닌 존재에 주목하고, 부귀보다 은총을 선택하는 삶입니다. 둘째는 편견에 사로잡힌 말을 버리고 내면을 일깨우는 말에 주목하는 것이요, 셋째는 차별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삶에 흐르도록 자신을 여는 것입니다. 창조절의 풍성한 하늘의 은혜가 우리 모두의 삶에 깃들기를 빕니다.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창조절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주의 사랑이 삶에 머물도록, 소유보다는 존재를 택합시다. 편견에 사로잡힌 말을 버리고, 에바다! 외치는 예수의 말씀을 들읍시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가는 자리일 뿐, 이 수동의 영성으로 진정한 자유와 충만을 누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