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지혜 (잠 1:20-33, 약 3:1-12, 막 8:27-38)
창조절 2 (210912)
[좋은 삶을 향한 변화와 영성]
어제는 9월 11일, 20년 전 미국 맨해튼의 110층짜리 쌍둥이빌딩 국제무역센터와 미 국방본부인 펜타곤이 민간 항공기를 이용한 테러로 폭파된 엄청난 비극이 있던 날입니다. 평온한 아침에 발생한 이 사건은 막대한 인명과 재산 피해만이 아니라, 생중계되는 영상을 통해서 잊을 수 없는 폭력과 파괴의 장면을 사람들의 마음에 각인시켰습니다.
이 사건은 풍요롭고 평화로운 세계가 될 것으로 기대했던 21세기가 그 바람과는 다르게 펼쳐질 것을 알린 전주곡이 되었습니다. 미국은 즉각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고, 국민의 자유와 인권을 제한하며, 외부 세계에 대한 적대와 증오 정치를 펼쳤습니다. 미국이 주도한 지난 20년간의 국제질서는 선과 악의 경계선이 극명하게 그어진 흑백논리가 지배했고, 평화를 기대하기 힘든 시대였습니다.
그것은 미국을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었습니다. 미국 브라운대 왓슨 연구소의 보고에 따르면, 미국이 지난 20년간 해외에서 수행한 전쟁비용으로 5조8,000억 달러를 썼고, 여기에 앞으로 참전군인을 치료하는데 필요한 비용(2조2,000억 달러)을 합하면 8조 달러(약 9,348조 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미국이 싸워야 할 상대는 탈레반이 아니라 ‘전쟁 빚’이라는 말이 생겼는데요. 며칠 전 미 재무장관(Janet L. Yellen)은 “10월까지 연방정부 부채 상한을 조정하지 않으면, ‘국채 디폴트’(채무 불이행)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미국이 그간 보여온 패권적 삶의 한계를 알리는 신호처럼 들립니다. 또한, 문명을 추구하는 방식의 변화를 암시한다고도 하겠는데, 그것은 코로나와 기후위기 사태를 맞으면서 더욱 분명해진 사실이기도 합니다. 이제 인류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계발해야 할 과제를 맞고 있습니다. 무엇이 좋은 삶일까요?
며칠 전 신문에서, ‘제3의 좋은 삶’에 관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이전에 사람들이 좋은 삶으로 여긴 두 가지는 ‘행복’이나 ‘의미’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즐거움을 누리는 행복을 추구하고, 어떤 사람은 세상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꿀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들과는 다른 제3의 유형이 있는데, 그것은 ‘마음이 풍요로운 삶’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풍요로운 삶이란 ‘참신하고 다채로운 경험’을 하면서 관점의 변화를 동반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세계를 이전과는 달리 볼 수 경험을 하는 것이 좋은 삶이라는 것이지요.
일반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현상유지를 선호하는 보수적 성향을 띱니다.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이 진보적일 것으로 생각하는데, 흥미로운 것은, 심리적 풍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더 진보적이고 사회 변화에 긍정적 태도를 보인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진보가 자기신념이 확고한 가치추구형이었다면, 앞으로의 진보는 마음이 풍요로운 사람, 호기심이 많고 전체적인 관점으로 사고하는 사람에게 맡겨질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경우, 행복추구형은 70%, 의미추구형은 14%, 심리적 풍요를 추구하는 유형은 16%였다고 합니다. (한겨레신문, “제3의 좋은 삶, 심리적 풍요에서 온다,” 210908)
여러분의 삶은 어떤 모습을 띠고 있습니까?
세상의 흐름과 함께 종교의 모습도 변해가는 듯합니다. 성장과 성공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세계에 잘 적응된 종교는 개신교회였습니다. 개신교의 믿음은 주로 교리적 지식에 의존하고, 그 종교 영성은 도덕적인 가치를 강조하는 경향을 띠었습니다. 최근 들어, 그 한계를 자각하며 신비적 교감에 자신을 맡기는 ‘향심기도’(centering prayer)와 같은 관상 수련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상처 입은 영혼이 은총의 빛 아래에서 침묵하고 안식하는 영성은 개신교회에서 부족합니다.
보수적인 교회는 교리를 중요하게 여기지만 그 한계가 분명합니다. 교리 자체가 시대에 뒤처져 잘 믿기지 않는 낡은 사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진보적인 교회는 정치-신학적 명료성을 선호하지만, 그 한계 또한 이미 경험되었습니다. 한국 개신교의 실험 가운데, 정치-신학적 의미를 강조하고 사회선교의 가치를 가장 중시한 흐름은 1980년대 민중교회 운동이었다고 봅니다. 약 120여 개의 민중교회는 국가폭력에 의한 민중의 억압이 가시적인 상황에서 참으로 헌신적인 활동을 했습니다.
하지만, 사회제도가 민주적으로 개선되고, 선과 악이 극명하게 대비되던 상황이 지나가면서, 민중교회 또한 현저히 약해졌습니다. 그 흐름이 여러 모습으로 변화되었는데, 기본적인 방향은 기독교적 고유성을 더 깊이 깨닫고자 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고 봅니다. 살아있는 종교라면 살아있는 지혜를 얻기 위해 부단히 나아갈 것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종교적 삶의 길은 두 가지 모습을 가진 듯합니다. 하나는 ‘노예로 사는 이들에게 자유를 누리며 사는 법’을 가르치는 길입니다. 그것은 모세가 걸었던 어려운 길입니다. 다른 하나는,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그것이 실제로는 노예로 사는 것임을 일깨우는 길’입니다. 이것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걸었던 더욱 어려운 길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우리는 어떤 삶을, 어떤 믿음을, 어떤 지혜를 향해야 할까요? 오늘날 사람들이 느끼는 정의의 감정은 서로 충돌하고, 선악의 경계는 뒤엉켜 있습니다. 사태에 뛰어드는 민감성보다는 상황에 적절히 대처하는 문해력(文解力, literacy)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살아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혜로운 삶으로의 초대 / 잠언 1장 20~33절]
제1성서의 본문, 잠언은 독자들을 지혜로운 삶으로 초대합니다. 지혜는 의인화되어서 여성 예언자처럼, 사람들이 오가는 길거리와 광장에서 외칩니다. 그가 자신의 영을 보여주고 자신의 지혜를 깨닫게 하고자 초대한 사람들은 선택받은 소수나 거룩한 특권층이 아닙니다. 그가 초대한 사람은 세 부류의 사람들로서, 본문은 그들을 어리숙한 사람, 비웃는 사람, 미련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여성 예언자는 이들을 지혜의 삶으로 초대합니다.
이렇게 외치는 ‘의인화된 지혜’를 마치 여성 예언자처럼 묘사한 것에는 깊은 상징이 있습니다. 사회적 고통이 중첩된 지점은 여성을 향한 억압과 폭력이 있는 곳이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구원을 향한 삶에는 여성적 목소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불러도 듣지 않고, 손을 내밀어도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삶으로의 초대를 비웃고, 자기 삶에 안주하는 어리석은 삶을 이어갑니다. 그 삶에 재앙과 공포가 뒤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깨닫기를 싫어하고, 주님을 경외하는 삶을 외면’하였기 때문입니다. 잠언은 바로 여기에 모든 삶의 실패가 달려있다고 보았습니다. 이 책은 애초에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7) 우리 삶이 잠언의 이 가르침처럼 주님을 향해 부단히 나아가며 무르익는 삶이라면 좋지 않겠습니까?
인도 사람들은 생애를 네 단계로 이해한다고 합니다. 맨 처음은 ‘학생’ 단계입니다. 십대가 되면 구루에게 맡겨져서 지혜를 배우고, 명상과 요가를 통해 몸과 마음을 단련합니다. 두 번째 단계는, 생업에 충실한 단계입니다. 가족을 돌보고 사회적 번영에 이바지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회가 이 둘째 단계를 삶의 최종 목표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삶은 계속 이어집니다. 세 번째 단계는 구도자의 삶입니다. 자녀가 자라서 생계를 이어가고, 손주 볼 나이가 될 즈음에는 인생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면, 경전을 읽고 명상하며 삶을 큰 관점에서 보는 일에 들어갑니다. 아직, 마지막 한 단계를 남기고 있습니다. 영적 발전의 마지막 단계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다양한 경험을 의미 있는 것으로 묶어낼 수 있는 지혜를 갖추는 이 단계를 위해 인생 전체를 가꿔가는 가는 것입니다. (리차드 로어, <야생에서 아름다운 어른으로>, 135~140)
이 이야기는 더욱 넓고 큰 세계를 향해가는 삶을 멈추지 말라는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미래를 보고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지혜로운 삶은 미래보다 지금 여기에 더 큰 관심을 기울입니다.
[침묵의 지혜 / 야고보서 3장 1~12절]
야고보서 3장은 말과 혀의 중요성과 위험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이 경고는 21세기에 더욱 중요하게 느껴집니다. 포스트 모던 시대에 해체된 진리는 뿔뿔이 흩어진 말의 향연이 되었고, 우리는 언어의 홍수 속에서 지쳐버리는 경험을 자주 합니다. 가짜 뉴스를 양산하는 정치의 언어, 욕망에 길든 경제의 언어, 책임 없는 자유에 물든 삶에서 언어는 진리를 나르는 수레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본문 6절이 말하듯이, 혀는 ‘불의의 세계’요, 온몸을 더럽히며, ‘인생의 수레바퀴에 불을 지른다’는 표현이 틀린 말이 아닙니다. 따라서, 본문은 온전한 사람은 입에 재갈을 물린다고 말합니다. 지혜롭지 못한 말은 ‘시기심과 경쟁심’에서 촉발된 말로서 혼란을 더할 뿐입니다. (16절) 따라서, 차라리 침묵이 지혜에 가깝습니다. 침묵하지 못하면 하나님과 대화도 불가능합니다.
불교 수행에서 중요한 책으로 알려진 입보리행론을 읽다가 오늘 야고보서 본문과 의미가 통하는 대목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나무토막처럼 굳건하게 머물 수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중 몇 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말일 자기 마음에 애착과 화내는 마음이 일어난다면, 그때는 아무것도 행하지 말고, 말하지 말며, 나무토막처럼 머물러야 한다. / 거칠고 비웃으려 하거나, 자만심이 크게 차오르거나 남의 허물을 들춰내려는 생각이 일어나고 남을 속이려는 마음이 일 때, 나무토막처럼 머물러야 한다. / 스스로 칭찬하고 싶고, 남을 얕보고 업신여기며, 또 나무라고 싸우려 할 때, 그때는 나무토막처럼 머물러야 한다. / 재물과 존경과 명예를 원하고, 하인을 부리기 위해 찾거나 내 마음이 공경을 받고자 하거든, 그때는 나무토막처럼 머물러야 한다. / 참을성 없이 게으르고 비굴하며, 염치없이 허튼소리를 일삼고, 자기만 생각하는 마음이 일어날 때, 그때도 역시 나무토막처럼 처신해야 한다. (입보리행론, 제5장 호계정지품, 48~53절)
[예수의 요청 / 마가복음 8장 27~38절]
그렇다면, 예수와 제자들이 나눈 대화는 어떠했나요? 마가복음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길을 걷다 묻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은 들었던 이야기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또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대화는 더욱 깊은 물음을 위해 준비된 것입니다.
이제 스승은 본질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은 자신의 실존을 다 걸지 않으면 안 될 질문 앞에 섰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입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이 대답은 자기도 잘 알지 못하고 한 말로 판명됩니다. 그것을 알려주는 내용이 뒤에 이어집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자신의 수난과 죽임당함을 예고’합니다. 그것은 베드로의 기대와는 다른 것이었나 봅니다. 그래서 그는 스승을 잡아당기며 항의(rebuke)하지요.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심하게 책망합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베드로는 스승이 원하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의 실패는 두 가지 차원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십자가의 고난 없이 영광의 신학만을 추구하는 행위의 실패요, 다른 하나는 자신의 장벽에 갇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는 존재의 실패입니다.
베드로에게 마지막으로 주어진 예수의 말씀은 우리에게도 익숙합니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
명동의 옛 예배당 앞에 붙어있던 이 성구는 긴박하고도 신중한 생각을 요구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 제 목숨을 구하려는 것, 복음을 위해 제 목숨을 잃는 것에 관한 예수의 말씀은 균형 있는 지혜가 동반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문자 그대로 무언가를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현실 세계는 불행한 곳입니다. 카불공항의 자살폭탄 테러처럼 극단적 행위를 동반하는 세계는 파멸을 향할 뿐입니다. 제자들을 향한 예수의 요청은 대립적 세계를 녹이는 따뜻한 헌신에 관한 것이요, 자기중심적 삶을 놓음으로써 해방을 이루는 길에 관한 것입니다. 흑백논리의 세계에서 벗어나 더욱 깊은 지혜의 길로 나아가는 수행을 요구합니다.
우리 세계는 썩지 않는 플라스틱으로 구성된 물품을 끝없이 생산하고 소비하는 악순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심화하는 사회적 불평등을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며, 갈등과 증오의 전선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도대체 무엇을 부여잡으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것일까요?
다른 세계를 받아들이는 풍요로운 삶, 도덕적 주술에 걸려들지 않고 신비로운 공간을 열어가는 삶, 하나님을 경외하며, 역사와 함께 인생을 따라 익어가는 삶을 가꾸는 지혜가 이 가을 우리 모두에게 내려지기를 기원합니다.
침묵으로 기도합시다.
[파송사] 예수의 말씀을 듣습니다.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얻기 위해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오히려 구할 것이다. 이 말씀이 우리 모두의 삶을 지켜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