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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화목하게 지내어라 l 김지목 목사 l 2021-09-26

by 김지목 posted Sep 26, 2021 Views 23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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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1-09-26

 화목하게 지내어라

7:1~6, 9~10, 9:20~22, 5:13~20,  9:38~50

 

 

오늘 우리는 에스더기를 읽었습니다. 1성서의 에스더기는 역사적으로 참 많은 논란거리였던 성서이고 또 잘 펼치지 않는 성서입니다. 야훼라는 단어를 비롯해서 하나님을 지칭하는 단어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 성서이기 때문일까요? 서구 교회개혁의 대표 주자였던 루터는 에스더기가 성서 정경에 포함되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에스더기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평하기도 했습니다. 그 내용에 이교도적인 것들이 많이 담겨있고 유대교 중심적인 내용이 다분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에스더기는 잘 선포되지 않는 성서 중의 하나입니다. 에스더 왕후가 멸망 직전에 놓인 민족을 살리기 위해 죽으면 죽으리라며 결의한 것을, 3.1절기념예배에서 항일독립에 기여한 기독교인의 신앙을 기리면서, 에스더기를 펼치는 정도입니다. 향린 강단에서 언제 에스더기 본문으로 하늘뜻펴기를 했는지 뒤적여보니 3년에 한 번씩 읽혀졌습니다. 성서정과에 맞춰서 주일예배 하늘뜻펴기 본문이 정해지다보니 그렇게 3년마다 한 번씩 에스더기를 읽게 된 것인데, 우리 교회는 비교적 이 성서를 그렇게 외면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성서정과에 맞춰 하늘뜻펴기 본문을 정하는 것의 장점이 이와 같이 성서를 고루 읽게 된다는 점입니다. 오늘 3년 공전주기에 맞춰 읽게 된 에스더기를 조금은 반갑게 맞이하면서, 정경화된 66권 성서 안에 자리한 에스더기의 존재를 조금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에스더기의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1성서에서 에스더기는 역사서에 해당합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보는 이스라엘 역사서는 사무엘기, 열왕기, 역대기에 이어 에스라기, 느혜미야기 그리고 에스더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무엘기와 열왕기와 역대기는 왕조국가로서 이스라엘이 생성되고 다윗과 솔로몬 왕조 때 전성기를 누리다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분열되기까지의 역사가 담겨있고, 그 뒤에 이어지는 에스라기와 느혜미야기 그리고 에스더기는 앗시리아와 페르시아에 의해 이스라엘 왕조가 패망하고 포로로 끌려갔다가 페르시아의 정책에 따라 이스라엘이 본국으로 귀환하여 나라를 재건하는 역사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에스더기는 이스라엘 포로기 때, 더 자세히는 이스라엘이 본국으로 귀환하고 나라를 재건할 때, 그 시기가 이 성서의 배경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에스라기와 느혜미야기의 공간적인 배경은 팔레스타인 안에 예루살렘인 반면, 에스더기의 공간적인 배경은 페르시아라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미처 또는 어쩔 수 없이 귀환하지 못하여 페르시아에 머물러 있는 이스라엘 포로민들의 이야기가 바로 에스더기입니다.

 

페르시아가 서남쪽의 강대국인 이집트를 견제하기 위해 침략의 완충지대 또는 침공의 전진기지로 삼으려고 이스라엘 포로들을 본국으로 귀환시켰습니다. 페르시아의 귀환정책에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본국으로 돌아간 포로민들은 20%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페르시아에 잔존하거나 동서남북 사방으로 퍼져서 흩어져 살게 되었는데, 80%에 해당하는, 흩어져 사는 이스라엘 포로민 공동체를 일컬어 디아스포라 공동체라고 합니다. 넓은 지역에 걸쳐서 흩뿌려진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에스더기는 본국으로 귀환하지 못하고 페르시아에 잔존했던 하나의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기록입니다. 포로로 끌려와서 두 세대가 넘도록 노예처럼 살다가 이제는 귀환정책에 응하지도 않고 배척당하는 천덕꾸러기들의 이야기가 바로 에스더기입니다.

 

그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는지 그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봅시다. 물론 이 내용은 페르시아의 신화와 문화를 바탕으로 하여 유대주의적 관점으로 창작한 것입니다. 에스더기에 등장하는 페르시아 아하수에로 왕은 헬라문화권에서는 크세르크세스(Xerxes, 486-465) 왕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페르시아가 그리스와 전쟁하던 때를 대략 떠올리시면 됩니다. 그리스의 승전보를 전하기 위해 42.195km를 뛰었다던 마라톤의 역사가 만들어지던 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역사적인 배경은 가미된 것일 뿐, 에스더기 전반은 창작된 것으로 여기고 여기에 내포된 문학적 메시지가 무엇인지 살피는 것이 더 중요하겠습니다.

 

페르시아 아하수에로 왕은 자신의 왕국의 찬란함을 과시하기 위해 백팔십 일동안 잔치를 벌였는데 왕후 와스디가 법도를 따르지 않고 어전에 나아오지 않자, 이는 가부장 문화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어 왕후는 폐위됩니다. 폐위된 왕후의 자리에 에스더가 등극합니다. 에스더는 유대인 모르드개와 사촌지간인데 에스더가 부모를 여의었을 때 모르드개가 딸로 삼았다고 합니다. 에스더는 왕에게 총애를 받는 왕후였습니다. 한편 아하수에로 왕에게는 하만이라는 신하가 있었는데, 하만은 모르드개를 괘씸하게 여겼습니다. 모르드개가 자신에게 절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만은 모략으로 왕의 조서를 받아내어 모르드개와 유대인 공동체 전체를 멸족시킬 수 있는 권한을 얻었습니다. 이 일로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민족을 구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심으로 금식 기도를 한 후, 왕에게 가서 소원을 청합니다. 에스더의 소청이라면 나라의 절반이라도 떼어주겠다는 왕에게 에스더가 청한 소원의 내용이 바로 오늘 읽은 7장에 나옵니다. 몰살당하게 된 이스라엘 겨레를 살려달라는 에스더의 청이었는데 이는 곧 하만의 즉결처형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만이 모르드개를 공개처형하려고 높은 장대를 장만해 두었는데 왕은 그 장대에 하만을 매달아 죽게 하여 에스더의 소청을 들어줍니다. 이 일로 유대인들은 살 길을 얻었고 죽음을 맞이할 뻔했던 아달월 십사일을 부림절로 정하고 민족의 축제절기로 삼았습니다. 죽음이 삶으로 바뀌고 슬픔이 기쁨으로 극적으로 뒤바뀐 선물같은 날로 부림절을 유대민족의 최대 명절로 삼게 된 것입니다. 이 명절에는 이틀 동안 잔치를 열어 서로 음식을 나눠먹고 가난한 자들에게 선물을 주는 풍습이 이어지게 했습니다.

 

이처럼 에스더기는 디아스포라 유대공동체의 명절인 부림절의 내력을 전승하기 위한 일종의 제의문학으로 판명됩니다. 권력자들의 변덕스러운 정책과 결정에 따라 하릴없이 파리 목숨이 되고 마는 가여운 처지에 있던 페르시아 내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현실 속에서, 통쾌한 역전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문학적으로 그려내면서, 민족의 명절인 부림절을 전승시켜 주고 있습니다. 이렇듯 부림절의 기원과 내력을 밝히기 위해 에스더기가 집필되었고, 또 부림절을 전승하는 것이었기에 제1성서에 자리매김할 수 있었습니다.

 

에스더기 내용이 읽혀지는 데 있어서 거리껴지는 불편함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을 지칭하는 단어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그 내용이 과할 정도로 유대교적이며, 내용을 채우는 소재들이 이교도적인 것들이 다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표현하는 단어가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양하는 신앙의 메시지가 꼭꼭 숨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성서라기보다 페르시아 신화를 각색한 디아스포라 소설이 아니냐 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합니다.

 

그러나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페르시아 사람들 눈치를 보느라 자신들의 성서에조차 야훼 이름을 쓸 수 없었던 디아스포라 공동체가 아니었을까 상상해봅니다. 페르시아 사람들에게 차별받고 억압받는 현실이 한번쯤 뒤집어지기를 소망하면서 부림절을 꿈꾸는 사람들, 슬픔과 두려움의 삶을 뒤집어서 한번쯤은 떵떵거리며 평안하고 기쁨 넘치는 삶을 살고 싶었던 사람들. 부림절은 그들의 간절한 소망의 표상이었습니다. 페르시아에서는 신년에 부르(pur)’라는 주사위를 던져서 점을 치고 또 선물을 나눠주는 축제를 벌였다고 합니다. 부림절은 그 부르에서 유래한 말인데, 한번쯤은 주사위를 던질 수 있는 주체가 되어보고 또 선물을 나눠가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디아스포라는 에스더기를 전승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자유와 해방을 향한 간절한 소망을 신앙으로 승화시키는 종교입니다. 그날에 하나님나라가 도래한다는 종말사상이 그 증거입니다. 부림절을 명절로 지키면서 자유와 해방을 갈망한 페르시아 내 디아스포라의 소망을 목도하면서, 민중신학은 에스더기에서 야훼를 향한 디아스포라의 간절한 탄원과 신앙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9장을 보면 다소 과도한 표현이 나오기도 합니다. 부림절에 유대인들이 합법적인 보복의 권한으로 원수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는 장면입니다. 이 같은 표현은 성서 전반에서 종종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런 표현을, 마치 복수를 자기중심적으로 정당화하며 타 생명을 경시하는 야만적 사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차라리 이러한 표현은 부당한 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당해온 유대 사람들을 애도하는 심정에서 표출된, 해원의 은유적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에스더기가 약자의 편에서 서술된 기록이라면, 오늘의 제2성서 야고보서는 기득권자들을 향한 권면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주후 60-70년 경에 비교적 이른 시기에 예루살렘 내에 있는 야고보 후예들에 의해 집필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서신은 예루살렘에서 발신하고 디아스포라 교회들에게 보내진 것입니다. 권면 대상은 기본적으로 섬김을 받는 부자들, 발언권을 지닌 기득권자들이었습니다. 5장 오늘 본문에서 부자들에게 주는 경고가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고, 3장에서는 혀를 빗대어 언권에 의해 죄를 짓지 않도록 경고하고 있는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사도 바울이 강조한 칭의믿음보다 행함을 강조합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오직 믿음으로만!”이라고 주창하며 교회개혁을 외쳤던 루터에게 야고보서는 지푸라기와 같은 성서로 치부되었고 신약성서 수록 위치도 맨 뒤로 배치되었습니다. 에스더기 만큼은 아니지만 야고보서도 바울 사상과 배치된 인상 때문에 그런 수모를 당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믿음으로 의에 이른다고 했고, 야고보서는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강조합니다. 루터는 야고보서의 행함을 유대교의 기계적인 율법준수행위 정도로 이해하면서 중세가톨릭의 형식주의를 비판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폄하해도 야고보서가 지닌 진정성은 곡해될 수 없습니다. 읽을수록 진수가 느껴집니다. 성서주석가는 야고보서가 강조하는 행함이 바울 사상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호작용으로 신앙을 완성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방선교사 사도 바울과 베드로를 중심으로 모인 예루살렘 교회 사이에서 할례와 음식 등의 문제로 적잖은 갈등이 있었음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야고보서는 사도 바울과 적대적인 것으로 오해받은 것 같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설교를 왜곡하면서 이방선교를 훼방하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공박하였습니다. 일부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준수의 유리한 처지를 이용하여 기득권을 지키려 했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틀을 깨면서 이방선교를 하는 바울을 공격했습니다. 할례 등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 자신들이 가진 권위인데 사도 바울이 그 기득권의 질서를 무너뜨린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종교회의에서 바울의 사도권까지 부정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끊임없이 그들과 대적하면서 사도권을 고수하는 변증을 쉬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의 서신서들 중에는 바울이 직접 집필한 것이 있는가 하면 바울의 후예들이 바울의 권위를 빌려서 쓴 것들이 있습니다. 이때 바울이 직접 집필한 것을 판별하는 기준 중에 하나는, 그 서신서 안에 바울 자신이 사도권을 변증하는 대목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방선교의 사도권을 부정하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고약한 비난을 일평생 안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만큼 바울에게 있어서 일부 유대 그리스도인은 비판의 대상이었고 그들처럼 형식적인 율법준수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와 같은 믿음’,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의 가르침은 이방선교에 필요불가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바울과 달리 행함을 강조한 야고보서의 구체적인 수신 대상은 누구였을까요? 발언권 남용으로 약한 이들에게 상처주는 죄를 범했던, 교회 내 기득권자들이었습니다. 성서주석가는 이들 역시 일부 유대 그리스도인들일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바울이 첫 번째 선교여행 시에 동행자 바나바와 함께 이방 안디옥에 가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때 바울의 설교를 예루살렘에서 간접적으로 전해 듣고 그 뜻을 곡해하며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말씀드렸던 대로 그들은 교회에서 발언권도 컸고, 화려한 옷을 입고, 금반지를 낄 수 있는 자들이었습니다.(2:2) 야고보가 보기에 교회에 미치는 그들의 해악이 크다고 판단하여 디아스포라 온 교회들에게 이 서신을 보낸 것이었습니다. 야고보서가 말하는 행함의 핵심은 바로 차별 없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2:8-9) 기득권을 남용하며 말로만 이웃을 사랑한다고 운운하지 말고 행함으로 그 믿음을 증명하고 완성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교회 내 가난한 자들이 무시되고, 그들의 경건과 신앙이 상실되는 현상을 극복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야고보서가 강조하는 행함은 사도 바울을 대적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을 일평생 괴롭힌 교회 내 일부 기득권자들이 경고의 대상이었습니다. 율법을 빌미로 태생적으로 권력을 이어받았으면서도 이웃사랑으로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기득권 행사를 저격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마가복음서 38절 말씀에서도 기득권 행사가 눈에 띕니다. 요한의 보고내용 안에 그것이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축귀하는 자가 있기에 그러지 못하도록 막았다고 합니다. 왜 그랬나 보니, 그가 우리를 따르는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랍니다. “우리를 따르는 사람을 분별해낼 수 있다면, 우리 조직을 공고히 하고 효율적으로 일처리를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를 따르는사람들을 따진다는 것은 이를테면, 충성스레 따르는 사람과 한 발 빼고 따르는 사람을 구분하고, 발빠르게 따를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나누어서 구분짓는 것 아닐까요? 나누고 구분지어서 조직을 편성하고, 권력의 상하관계를 형성하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을까요? 이런 것들은 인간적인 차원에서 일면 필요한 일일런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제자의 보고에 이어지는 예수의 대답은 하나님나라의 차원에서 답변됩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막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따르는 것을 따지면서 발생하게 되는, 앞뒤-위아래 구분을 짓지 말아라, 하나님나라의 일을 하는 데서는 기득권의 논리에서 벗어나라, 앞뒤-위아래 재면서 옹졸하지 말고, 넓은 가슴으로 서로를 품어주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나라의 일을 하는 데 있어 우리가 갖춰야 할 마음가짐의 한 가지로 여겨집니다. 하나님나라의 일을 할 때에는 넓은 가슴으로 서로를 품을 수 있는 넉넉함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어지는 말씀, 42-48절까지 말씀은 작은 죄라도 경계하면서 마음을 지키도록 가르치십니다. “네 손이 죄짓게 하거든 손을 찍어버려라! 한 손을 잃은 채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며 매우 극단적인 윤리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이것들은 삶에 직접적으로 적용하는 윤리규범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자기 자신 스스로를 철두철미하게 관리하고 마음을 지키라는 강조 말씀으로 듣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나님나라의 일을 할 때 지녀야 할 품성은, 함께하는 이들은 넓은 가슴으로 넉넉히 품어주되,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한 마음가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품성이라야 인간적인 기득권에 천착하지 않고 하나님나라의 일꾼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겠다고, 예수의 말씀을 이해해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세 본문을 기반으로 하늘뜻펴기를 묵상하면서 마가복음서 본문 50절 후반부 구절을 요절로 선택했습니다. 특히 마지막 문구 서로 화목하게 지내어라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정한 음성이 들리는 듯했습니다. 화목하게 지내라는 그리스도의 당부에 화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조금 더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때때로 원치 않게도 시행착오가 나서 우리 안에 갈등도 생겨나고 마음의 상처도 곧잘 덧나곤 합니다만, 그럼에도 우리를 하나의 공동체로 불러주시고 사랑의 띠로 엮어주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는 화목을 희망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화목하게 지내어라하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이 우리 공동체 안에서 매 순간 다정한 메아리로 맴돌기를 기원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서로 화목하게 지낼 수 있게 하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도 언급해주셨습니다. 그것은 소금에 빗댄 어떤 것입니다. 이번 하늘뜻펴기 준비는 그 어떤 것, 소금에 빗댄 그것이 무엇인가 추적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적용되면 우리로 하여금 화목하게 만들 수 있다는 소금의 그것이 무엇일까 하는 물음이었습니다. 예전에는 소금의 짠맛에 집중했던 것 같습니다. 유일하게 짠맛을 내는 소금이 그 맛을 잃어버리면 간이 맞지 않을 텐데, 이거 정말 큰일이다, 이런 생각으로 이 말씀을 읽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 소금의 짠맛이 부패를 방지한다면서 그 짠맛의 의미를 부가시켰던 기억도 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소금의 다른 특성에 주목하였습니다. 녹는 특성입니다. 녹아야 짠맛도 나는 것이고 49절에 표현된 대로 녹아야 무언가를 절일 수도 있겠지요. 소금이 녹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쓸데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소금은 녹기 때문에 비로소 소금일 수 있습니다. 소금이 녹아서 사라지지만 녹아 사라지는 까닭에 그 본연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쳐 두어야 할, 소금에 빗댄 그 무엇이란 바로 녹는 것’, ‘스스로 녹일 수 있는 능력이 아닐까 합니다. 스스로 낮아져서 하나님나라의 일을 알뜰히 수행하는 사람은 소금과 같이 자기를 녹여서 본연의 짠맛을 내는 사람으로 비견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 가운데 소금을 쳐 두라는 예수의 말씀은 우리들이 소금과 같이 스스로를 녹일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래서 소금이 본연의 짠맛을 내듯, 우리에게 약속된 본연의 삶으로, 곧 화목하게 지낼 수 있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소금처럼 스스로를 녹인다는 것은 군림하는 권력을 탐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권리를 빼앗긴 디아스포라 공동체에게는 하만이 점유했던 기득권을 빼앗아 되돌려 주어야 한다고 에스더기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한편 이웃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주어진 기득권에 자기 책임을 다하라고 야고보서는 그들에게 경고합니다. 자기들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축귀를 막았다던 제자 요한의 보고에서 기득권을 탐하는 의식이 엿보였습니다.

 

소금처럼 녹을 수 있는 성품을 훈련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과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은 소금과 같이 자기를 녹인, 가장 아름다운 표본입니다. 소금처럼 녹아서 우리에게 맡겨진 본연의 일을 수행해 나갈 수 있도록, 위해서 힘써야 하겠습니다. 기도와 묵상 등 예배 프로그램들 통해서, 또한 일상생활에서 이 품성을 수련해나가는 향린 공동체, 그래서 늘 화목하게 지내는 교회이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소금처럼 녹는 교회가 되어 이 세상에 평화를 전하는 공동체 되기를 또한 빕니다. 하나님과 세상이 화목하게 지낼 수 있도록 소금과 같은 향린교회 되기를 빕니다.

 

소망을 담아 침묵으로 기도합시다.

 

.....................

 

 

 

(파송의 말씀을 전합니다.)

 

서로 화목하게 지내어라

다정하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읍시다.

가능한 대로 함께 듣도록 마음을 모읍시다.

화목한 삶은 우리에게 약속된 본연의 삶이지만

저절로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기도와 훈련이 필요합니다.

너희 가운데 소금을 쳐 두어서, 서로 화목하게 지내어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메아리치기를 빕니다.

 

 

(함께 축복기도를 나눕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 주시는 친교가

우리 가운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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