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도약 (욥 23:1-9, 16-17, 히 4:12-16, 막 10:17-31)
창조절 6 (2021.10.10)
코로나 사태를 2년 가까이 길게 보내면서 지난 생활양식에 대한 성찰과 반성이 깊어진 것이 사실입니다만, 실제 삶에서는 더욱 좁아진 세계에 갇힌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다음 시대로 가는 문을 아직 열지 못하고, 마스크로 가려진 얼굴, 인원이 제한된 모임에 익숙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면 답답해지기도 합니다. 앞으로의 시대가 상생의 문화에 기초한 생태적인 문명이어야 한다는 거시적 합의는 이루어가는 하지만, 현실은 낡은 시대의 익숙한 고통이 여전합니다.
지난달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오징어 게임’이라는 한국 드라마를 보신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 내용은 빚에 쫓기는 사람들이 거액의 상금을 타는 최후 승자가 되기 위해 목숨을 건 서바이벌 게임을 하는 이야기입니다. 어린 시절 추억이 담긴 놀이를 잔혹한 죽음의 게임으로 진행하면서 극한 경쟁에 몰린 우리 시대를 풍자합니다.
이 드라마는 넷플릭스가 진출한 세계 80여 개국에서 모두 시청률 1위를 차지했다고 하지요. 그것은 ‘생존’이 시대정신이 된 우리 시대의 무한경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세계인의 공감을 얻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 평론가는 이 드라마가 마치 정글과 같은 우리 사회에 조용히 던져진 ‘트로이 목마’와 같다고 말합니다. 단지 폭력적인 현실을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본주의 시대의 비극적 현실에 관한 반성으로 관객들을 초대한다는 것입니다. 게임에 참여한 사람은 포기하고 돌아갈 수도 있지만, 결국 지옥과 같은 현실 앞에서 다시 죽음의 게임으로 발길을 되돌리는 모습에서 우리 시대에 둘러쳐진 사회적 덫을 함께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 죽음의 덫을 걷어내는 지혜를 발휘할 수 있을까요? 때론 이 모든 현실의 무게를 단번에 걷어내는 깨우침을 문득 맞기도 합니다. 생명의 끝을 대면하는 때입니다. 지난주 저는 함께 활동하던 두 살 터울 선배 목사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았습니다. 그의 이른 죽음이 주는 충격은 다름이 아니라, 모든 것을 무(無)로 만드는 시간 앞에 서 있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묻게 되지요. 왜 허상에 잡혀 살아가는가! 이건 저만의 경험이 아니라고 봅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를 묵상하는 신앙의 절기에, 우리는 함께 읽은 시편의 시인처럼 기도합니다. “주님, 우리에게 우리의 날을 세는 법을 가르쳐주셔서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시 90:12)
[생명의 길로 가자는 초대 / 마가복음 10장 17~31절]
마가복음 본문은 ‘영생’을 얻고자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마태는 그가 ‘부자 청년’이었다고 말하고, 누가는 어떤 ‘지도자’였다고 각색하지만, 마가의 원래 이야기는 ‘어떤 사람’(εἷς, one)으로 표현하면서, 모든 사람에게 해당한 이야기로 풀어갑니다.
예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한 사람이 달려와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물었습니다. ‘선생님,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어지는 내용을 읽어보면, 그는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으로서 어려서부터 성서의 계명을 다 지켜온 도덕적인 사람입니다. 그가 얻고자 한 영생은 무엇이었을까요? 아니, 그는 왜 영생을 얻고자 했을까요?
그를 이해하는 마음으로 보면, 그가 예수께 영생에 관해 물은 것은 사사로운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더욱 근원적인 삶을 갈망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가 추구한 영생은 자신이 현재 누리는 도덕적 중산층의 삶을 계속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새 삶의 길을 여는 것이었다고 봅니다. 복음서 기자 역시 그렇게 보며, 그 사람을 향한 예수의 시선을 묘사합니다.
예수께서는 무릎을 꿇고 영생의 길을 묻는 그를 ‘눈여겨보고 사랑스럽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영생을 살 수 있는 길에 관해 말해줍니다. 그 비법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의 이 말씀은 영생에 관한 기존의 가르침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성서 전통에서 영생을 얻는 길은 세 가지입니다. 생명 나무 열매를 따 먹거나 (창 3:22), 하나님의 축복을 받거나 (시 133:3), 죽었다가 천사의 부름을 받고 다시 일어나는 (단 12:2)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신화적이고 영적인 전통과는 다른 지극히 세속적인 요청, 다시 말해서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어야 영생한다니, 그것은 마치 사이비 교주가 하는 말처럼 들립니다.
예수의 말씀을 들은 그는 진지하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근심하며 떠나갑니다. 성서는 그가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가 만일 가난한 사람이었다면 쉬웠을까요? 그렇다면 아마 다른 과제를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재산 많은 그가 영생을 얻기 위해 넘어야 할 산은 가진 것을 모두 나누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그는 물음을 접고 돌아갑니다.
복음서가 말하는 ‘영생의 가능성’이 단지 재산의 많고 적음에 달린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만일, 영생의 함수관계를 재산문제로 본다면, 우리는 가식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안정된 삶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부유함이란 삶에 안정을 줄 수 있는 하나의 여건입니다. 삶을 평온하게 항해할 수 있도록 하는 여건으로서의 부유함은 축복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삶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우리 삶은 거대한 생명의 망으로 이루어진 것이요, 수많은 관계를 바탕으로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관한 성찰이 철학이요 도덕이요 종교입니다. 만일 나의 부유함이 타인에게 돌아가야 할 몫을 빼앗음으로써 만들어진 것이라면, 나의 구김살 없는 삶이 생존마저 위협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외면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나의 풍족한 삶이 나의 생명을 지탱해주는 생태환경을 파괴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라면, 우리는 번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복음서 본문 속의 주인공도 고민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근심하며 떠났습니다. 이야기는 이제 제자들과의 대화로 이어집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합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보다 더 쉽다.’ 이 말씀에, 제자들은 놀라면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냐’고 합니다.
혼돈에 빠진 제자들에게 주신 예수의 말씀은 알쏭달쏭합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나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 무슨 의미일까요? 어차피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것이니까, 부자에게도 천국 통행증을 내줄 수 있다는 말일까요? 자본주의 시대 교회는 그렇게 설명하곤 했지만, 성서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다고 봅니다.
그게 아니라면, 부자도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자기를 버리는 삶’을 살도록 주께서 이끄신다는 뜻일까요? 성서는 그것이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많은 재산을 바쳐 역사에 헌신한 사람의 이야기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 문제로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마치 ‘오징어 게임’이라는 드라마가 던진 물음처럼, 죽음의 게임에서 풀려날 길에 관한 이야기로 복음서를 읽는다면, ‘하나님의 가능성’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초대’에 관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억압과 대립의 시대, 저항과 갈등의 시대를 너무 오래 살고 있습니다. 그 피로감에 젖은 사회와 공동체를 향해 푸르른 생명 세계로 초대하는 성서의 외침을 어떻게 들을 수 있을까요?
[진리의 산을 오르는 욥 / 욥기 23장 1~9, 16~17절]
욥기 23장은 하나님을 갈망하는 욥의 탄식을 담고 있습니다. 그의 탄식은 고통스러운 삶 자체가 아니라, 그 고통의 의미를 설명할 수 없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고통의 의미에 관한 마지막 대답을 줄 수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욥의 갈망은 고통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그의 진리 투쟁에서 생겨납니다. 그는 이렇게 탄식합니다. “아, 그분이 계신 곳을 알 수만 있다면, 그분의 보좌까지 내가 이를 수만 있다면, 그분 앞에서 내 사정을 아뢰련만, 내 정당함을 입이 닳도록 변론하련만.” (욥 23:3~4)
이렇게 욥을 번민에 빠뜨린 것은 고통 자체가 아니라 고통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현실입니다. 욥은 외칩니다. “내가 무서워 떤 것은 하나님이 내 용기를 꺾으셨기 때문이지, 어둠 때문도 아니고 흑암이 나를 덮은 탓도 아니다.” 고통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욥의 현실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현실, ‘신 부재(不在) 상황’입니다. 그는 ‘하나님만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갈망하면서, 동서남북 어디에서도 그분을 만날 수가 없다고 탄식합니다.
욥이 경험한 이 신 부재 현실을 대신 채우고 있는 것은 친구 엘리바스의 현실 논리입니다. 친구는 위로와 권면의 목소리로써, 진리의 산을 오르는 욥을 끌어내립니다. 22장에 나오는 엘리바스의 논리는 네 가지입니다.
첫째는 인간의 취약성에 관한 논리입니다. 아무리 슬기로운 사람이라도 보잘것없는 인생을 살 뿐, 하나님께는 유익을 끼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욥 22:2). 둘째는 인과응보의 논리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심판을 받겠느냐, 네 죄가 크기 때문에 이런 꼴을 당한 것 아니냐고 책망합니다 (22:4-5). 셋째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관한 논리입니다. 하나님이 뭘 아시고 우리를 심판하시겠냐고 여기는 생각의 어리석음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22:12-14). 마지막으로, 이 고통을 하나님의 징계로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과 화해하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21~30).
친구 엘리바스가 욥에게 들여준 이 네 가지 권면은 번민하는 인간이 마주하는 익숙한 논리입니다. 하지만, 그 번민 끝에 결국 현실주의를 선택하게 만드는 반쪽짜리 진리입니다. 위로와 경건의 모양을 한 엘리바스의 주장은 생명의 모험을 좌절시키는 현실 논리입니다. 하지만, 욥은 자신을 그 논리에 맞추기보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세우고자 합니다. 반쪽 논리에 만족하여 자기만의 땅에 머무르지 않고, 고통스럽더라도 진리의 산을 오릅니다. 조금씩 존재의 보폭을 벌려서 위로, 진리의 언덕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도약합니다. 그것이 욥이 보여준 믿음의 실재입니다.
한 철학자는 종교의 핵심이 ‘철저한 신실함’(penetrating sincerity)에 있다고 하는데, 그것을 분명히 보여준 성서 인물이 욥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진리 앞에 자신을 세울 때까지 끝까지 밀고 갑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진리 앞에 세우고자 하는 열망, 그것을 잘 표현한 것이 오늘 히브리서 본문입니다.
[말씀 앞에서 / 히브리서 4장 12~16절]
히브리서 4장 12절 말씀은 유명한 성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 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요, 종교적 진리체험의 특징을 말해줍니다.
종교체험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리의 시험대 위에 서는 것과 같습니다. 그 자리에 서는 것은 사실 두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삶을 평가받는 일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은 자신을 그 자리에 세웁니다. 왜냐하면, 그 자리는 심판의 자리가 아니라 회복시키는 은총의 자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도덕성이란 아이러니한 면을 갖고 있습니다. 도덕적인 사람은 자신의 도덕성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철저히 자신을 성찰할 뿐입니다. 반대로, 죄악의 구조에 사로잡힌 사람이 오히려 자신의 신념체계를 도덕성으로 주장합니다. 죄악의 체제에 사로잡혀 있을수록 죄를 느낄 수 없는 아이러니한 죄악의 심리적 구조입니다.
이것은 종교적으로 중요한 과제를 제시합니다. 존재의 도약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존재의 도약이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 앞에 자신을 세우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종교가 꿈꾸는 것은 바로 존재의 도약입니다. 종교가 몰락하는 것은 ‘존재의 도약’을 더는 꿈꾸지 않을 때 옵니다. 단지 ‘사회적 종교’로서 기능하는 것에 만족할 때입니다. 보수종교만이 아니라 진보종교도 사회적 종교로서 자신의 기능과 역할에 만족하곤 합니다. 하지만, 존재의 도약을 위해 나아가지 않고 종교가 살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서 나누어주라는 요구를 듣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을 신뢰합니다. 존재의 도약을 꿈꾸는 믿음의 사람은 은혜의 보좌로 담대히 나아갑니다. 이것이 히브리서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격려의 말씀입니다.
푸른 하늘을 마음에 담아 맘이 조금씩 푸르게 되고, 하나님이 말씀 앞에 서기 위해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는 삶이 이 가을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기원합니다.
침묵으로 기도합시다.
[파송사]
창조절의 은혜를 맞이합시다. 우리는 지금 긴 고통과 어둠의 시간을 힘겹게 지나고 있습니다. 지친 영혼과 피로에 잠긴 공동체를 일깨워 푸르른 생명 세계로 초대하는 성서의 부름에 응답합시다. ‘우리의 날을 세는 법을 가르쳐주셔서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기도하는 시인의 간구가 우리 마음에 울리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