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뜸 | 김희헌 | 2021-10-24

by 김희헌 posted Oct 24, 2021 Views 188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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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뜸 (42::1-6, 10-17, 7:23-28, 10:46-52)

창조절 8 (2021.10.24)

 

[신앙공동체에 관한 단상]

명동에서 내자동으로 교회 사무실을 옮긴 지 넉 달 되었습니다. 건물 입주자나 근처 식당에서 일하는 분들이 인사도 건네고, 또 어떻게 알았는지 교회는 잘 지어지느냐며 묻기도 합니다. 새로 이웃이 된 분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하지만, 어쩌면 그분들의 눈에 우리가 좀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교회라고 하는데 교인들은 없고, 주일날 좁은 사무실 한쪽에 몇몇이 모여서 장구 치며 온라인 방송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지난 2년간의 코로나 시기를 힘겹게 지나왔지만, 어쩌면 앞으로 더욱 교회의 위기 현실을 실감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최근에 교단총회와 서울노회에 참석하면서 우리만이 아니라 대부분 교회가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 어려움은 함께 모여 활동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여러 가지 위축 현상에서도 나타나지만, 그 저변에는 영적 공동체를 묶어주던 지난 시기의 구심점이 희미해지거나 해체된 데서 오는 한계 경험이 무겁게 흐르는 것을 느낍니다.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느낌이 커진 것은, 비대면 시기에 난동을 부린 몇몇 몰지각한 교회의 행패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한국교회가 지난 시기에 영광과 권위로 삼았던 것들이 더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동안 한국교회의 눈부신 발전과 규모가 세상의 감탄을 낳은 적이 있었습니다. 웅장한 교회당 건물이나 대형 집회에 사람들이 놀라며 부러워하였고, 정치인들도 그 힘을 빌기 위해서 기웃거렸습니다. 하지만 인간이란 본질에서 영적인 존재라서, ‘진정으로 거룩한 것거룩으로 도금한 것정도는 구별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 영광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이제는 교회가 시쳇말로 진검승부를 해야 할 때입니다. 종교가 위기를 겪는 것은 사람들에게 종교의 가치나 체험이 필요 없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 모양만 보기 좋게 덧칠하고 도금한 것들이 많아서 당분간 진정한 종교를 만나기는 어렵겠구나 하고 낙심하게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진지한 신앙의 물음을 가진 사람의 마음에도 한국교회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의심합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교회가 혼돈과 위기에 처할 때 믿음의 좌표처럼 제시되는 것이 보이지 않는 교회’(invisible church)라는 개념입니다. ‘보이는 교회가 제도와 예전을 갖추고 존재하는 현실 속의 공동체라면, ‘보이지 않는 교회는 역사 속에 있지만, 눈으로 볼 수 없는 신비하고 특유한 공동체입니다.

기독교 교회는 역사 속에 존재하지만, 그 시선은 역사 너머를 응시합니다. 역사 속의 보이는 교회가 사람들이 만든 제도와 질서에 의해서 운영되는 것이라면, 보이지 않는 교회는 그 공동체를 이끄는 힘의 근원을 하나님의 거룩한 영에 둡니다. 이 두 교회, ‘보이는 교회보이지 않는 교회는 구별되지만 분리된 것은 아닙니다. 이 두 교회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뿌리내리는 통로가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메마르고 거칠어진 종교를 회복하는 힘이 됩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에 대해 눈 뜨는 것이 필요합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에 대한 공동체의 교감이 부족하면 현재의 비극에 갇히기 쉽습니다. 그것은 종교 공동체만의 일이 아니라, 코로나 시대를 지나는 인류가 맞고 있는 과제와도 같습니다.

예배 시작 때 함께 읽은 시편의 시인은,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사람은 기쁨으로 단을 가지고 돌아온다라고 노래합니다. (126:6) 앞으로의 삶에서는 무엇이 기쁨으로 거두는 단이 될 수 있을까요?

길게 보면 일만 년 전 농업혁명이 생겨난 이후로, 짧게 보면 오백 년 전 과학혁명이 시작된 이후로 인류는 특정한 방식의 문명을 살아왔습니다. ‘자산의 축적이 목표가 된 문명이었습니다. 그 속에서는 많은 생산과 풍요로운 소비가 기쁨의 단이었습니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와 기후위기 시대를 겪고 있는 인류는, 더는 그런 방식의 삶을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삶의 방식에 눈뜨는 일이 인류의 가장 큰 과제가 된 것입니다.

 

[욥이 이르고자 했던 지점 / 욥기 421~6, 10~17]

오늘 제1성서 본문은 <욥기> 마지막 부분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고난을 겪던 욥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친구들과 논쟁하다가, 마침내 하나님의 훈계를 듣고 회개하면서 처음보다 두 배나 되는 복을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욥기가 이렇게 마무리되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해석하는 사람들은 그 교훈을 하나님에게 회개하면 더 큰 축복을 받는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하지만, 이런 결말은 사실 어이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욥의 맘 깊은 곳에서 불타오른 열정과 양심은 물거품처럼 허무한 것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열 명이나 되는 자식의 죽음으로 비탄에 잠긴 아버지 욥은 하나님까지 기소하면서까지 길고 긴 논쟁을 벌였는데, 그 끝에 회개하고 대신 축복을 받는 것으로 만족하고 끝난다면, 그것은 그토록 긴 투쟁을 벌인 욥을 모독한 것이거나, 아니면 끝까지 양심을 지키며 투쟁하는 욥을 지켜본 독자를 기만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욥기의 마지막 부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찾게 됩니다. 성서학자들이 찾아낸 답은, 욥기의 진정한 결론이 5절과 6절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욥이 10명의 자녀를 새로 얻고 재산을 이전보다 두 배나 얻었다는 10~17절의 이야기는 후대에 첨가된 것이요, 욥기의 논리적 결론은 6절에서 끝난다고 보는 것입니다.

6절에서 욥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우리는 묻게 됩니다. 왜 그토록 오랫동안 자신의 결백을 격렬히 외쳐온 욥이 자신의 주장을 거둬들이게 되었을까? 그 단서는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대화 끝에 욥은 5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이 고백은 욥이 새롭게 눈을 뜬 사건을 말합니다. 새로운 진리 체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남의 말을 듣고믿는 방식이었다면, 이제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게되었다는 말입니다.

욥은 자신의 고통을 두고 친구들이 하는 말을 통해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인과응보의 논리를 가진 친구 엘리바스는 심는 대로 거두는 법이니 네 죄가 있는지 먼저 살펴보라 훈계했고, 성공 논리를 따른 빌닷은 네가 하나님을 믿으면 그 시작은 미약하여도 나중은 창대하게 될 것이라고 조롱했으며, 신비주의자 소발은 하나님의 뜻은 인간이 다 알 수 없으니 고통을 받아들이라고 충고했습니다. 욥은 그들의 말에서는 자신에게 고통을 준 신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잿더미가 된 삶 속에서 고통스럽게 외치던 욥은 그 씨름 끝에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마침내 하나님을 자기 눈으로 직접 보았다고 고백하기에 이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보게 되자, 욥에게 더 이상의 논쟁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비록 티끌과 같은 인생이요 잿더미에 불과한 삶을 살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에게 더는 요구할 것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런 어마어마한 선언이 5절과 6절에 나온 욥기의 결론입니다. 그것은 고통 속에서 신의 얼굴을 본 사람의 고백입니다.

따라서, 자기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회개한다고 말하는 6절의 표면적인 문구를 오해해서는 안 되고, 욥이 자신의 고통을 어떻게 대처해 왔는지 그 경로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는 오늘 본문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역경을 뚫고 왔습니다. 고통스러운 삶을 짊어지는 것뿐만 아니라, 친구들의 그치지 않는 냉소까지 맞서야 했습니다. 그런 고통 속에서도 욥은 한 번도 자신의 고통 외부에서 신을 찾으려고 한 적이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새로운 초석을 자기 삶의 위기가 시작된 곳에 두었습니다.

모든 것을 잃은 욥은 광활한 세계 그 어느 곳에서도 안식을 누릴 수 없는 지독한 고독을 겪었지만, 하나님의 진리를 찾아 자기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마침내 탄성을 지르지요. “이제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욥의 이 모습은 종교적 진실이 드러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참된 신앙이란, 친구들처럼 형식 논리(교리)로 삶을 매끄럽게 해석한다고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욥처럼 자기 삶 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직접 구성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만나면서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욥기가 훗날 대중적으로 들려지면서 10절 이후의 내용이 덧붙여지면서 인과응보의 교훈으로 각색된 것은 이해할 만하지만 아쉬운 대목입니다. 그렇게 되면서, 욥이 얻은 축복의 내용은 재산의 회복에 관한 것이 되었고, 본래 이 이야기의 교훈인 진리의 발견과 존재의 눈뜸에 관한 내용은 잘 보이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눈을 뜬 바디매오의 행선지 / 마가복음 1046~52]

복음서의 본문은 마가복음에 나오는 여러 가지 치유 기적 가운데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예수를 만나서 눈을 뜨게 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앞을 보지 못한 사람이 눈을 뜬 이야기는 복음서에 모두 일곱 번 나옵니다. 이런 치유 기적에 관한 이야기를 읽을 때 독자들은 두 가지 방식으로 오해하곤 합니다. 먼저 근대과학의 눈으로 뜯어보면서 그런 일이 가능할까?’ 하고 의심하거나, 기적 종교의 눈으로 왜곡하면서 가식적인 믿음을 주장합니다. 둘 다 성서의 가르침을 비켜 가는 것입니다. ‘눈을 뜬다는 것은 단지 육체적인 질병의 치유만이 아니라, 영적 차원의 새 세계가 열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지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 일행이 여리고를 지날 때 간절히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마가는 그것을 가장 전형적인 기도문으로 전합니다. “예수, 엘레에손 메”(Ἰησοῦ, ἐλέησόν με), ‘예수여,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외치는 바디매오를 향해 사람들은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지만, 예수의 시선은 보잘것없는 그를 향했습니다. 예수의 심정을 전달받은 제자들이 가서 전합니다. 이제껏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못한 사람에게 뜻밖의 격려가 이릅니다. “용기를 내어 일어나시오. 예수께서 당신을 부르시오.”

이것은 이제껏 그가 들어온 것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말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아무런 기대도 받지 못하던 눈먼 거지에게 전달된 이 묵직한 한마디 말이 그의 존재를 움직였습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는 이 말의 무게를 다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모든 것을 상품으로 만드는 세상을 오래 살아온 우리는, 겉모습을 치장한 채 화려한 조명을 찾아 사는 세계에 익숙해졌습니다. 존재의 무게를 잃은 매끈한 말이 넘쳐서 차라리 입을 닫고 사는 것이 낫다고 여기는 사회에서, 우리는 말의 힘을 잃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디매오는 자기를 흔드는 말을 듣고,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께로 갑니다.

예수께서 말씀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랍니까? 만일 이와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우리에게는 어떤 대답이 준비되어 있을까요? 바디매오에게는 분명한 대답이 있었습니다. “선생님, 내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여기서 다시 보다는 의미의 단어 아나블레포’(ἀναβλέπω)는 복음서에 스무 번 사용되는데, 육체적인 것만이 아니라 영적인 눈뜸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합니다. ‘가십시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다시 보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가 가시는 길을 따라나섭니다. 8장에 나오는 벳세다의 소경이 집으로 돌아간 것과는 달리, 마가의 치유 기적 이야기의 마지막 주인공인 바디매오가 향한 행선지는 예수와 동행하는 길이 됩니다.

이 이야기가 말해주듯이, 예수를 만나는 경험은, 보이지 않은 사람을 찾고, 그를 불러내어 일으켜 세우며, 가야 할 길을 보고 가게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통해서 길과 진리와 생명을 경험합니다.

 

[예수를 향한 창조적 삶 / 히브리서 723~28]

히브리서 기자는 자신이 체험한 예수에 대한 경험을 영원한 대제사장이라는 표현에 담아 전합니다. 히브리서 7장부터 10장까지 나오는 대제사장에 관한 묘사는 1세기 유대교를 배경으로 쓴 것으로서 우리 시대와는 문화적 간격이 크기 때문에 그 의미를 다 알기 어렵습니다. 앞으로 몇 주간 읽게 될 히브리서가 묘사한 예수의 모습 가운데, 오늘 본문이 말하는 것은 다른 대제사장과는 다른 예수의 독특한 모습입니다.

27절을 보면, 다른 대제사장은 자기의 죄를 위하여 먼저 희생제물을 드려야 하지만, 예수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예수는 자기 자신을 바치셔서 단 한 번에 이 일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기자에게 경험된 예수는, 다른 희생제물을 잡아서 자신의 죄를 씻기보다, 자기 자신을 바쳐서 단번에 죄를 속량하는 모습입니다.

자신을 바쳐서 단번에 우리 사회의 죄를 속량하는 진리의 사태가 벌어지기도 합니다. 평화시장의 전태일이 그러했고 광주도청의 유동운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을 통해 역사 속으로 되살아오는 예수를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편견과 차별 속에 스러져 간 변희수 하사의 삶에서, 보금자리를 약탈당한 젠트리피케이션 현장에서, 남북이 서로 총부리를 겨누다 함께 묻힌 비무장지대에서 예수를 보는 것이, 눈뜬 종교가 되는 길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예수의 교훈을 가르쳐준 안병무 선생은, 진리와 평화란 낮은 곳에 있다 하였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25주기 기일을 맞아 기후위기와 민중신학이라는 주제로 추모강연회를 가졌습니다. 내년은 탄생 백 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의 제자들은 여러 흐름으로 진행되고 있는 한국의 진보신학을 안병무의 이름으로 호출하여 함께 지혜를 모아갈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눈을 뜨고 새로운 길을 걷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내년에 우리 교회는 예배당을 짓는 손길이 분주할 것입니다. 이와 함께, 안병무의 신학적 유산을 통해 우리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면서, 보이지 않는 교회도 다시 세워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지난주 읽은 한 묵상 글에서, 삶의 창조는 더하는 것이 아니라 덜어내는 것이 아니겠냐는 내용을 읽었습니다. 마치 불필요한 부분을 계속 깎아내는 조각처럼, 더는 덜어낼 것이 없는 단순한 상태에 이르는 것이 창조적인 삶의 목표라는 말에 공감이 되었습니다. 가을을 보내는 우리의 삶도 예수를 향해 열린 눈으로 가꾸어가며, 더욱 단순해지고 더욱 단단해지는 알곡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잠시 침묵으로 기도합시다.

 

[파송사]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느냐?’ 눈먼 사람이 대답합니다. ‘선생님, 내가 다시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이 바디매오의 외침이 이 가을 우리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좁은 식견의 움막을 부수고, 하나님께서 지어가는 광활한 창조세계를 향해 우리 모두 힘차게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