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을 추모하는 이유 | 김희헌 | 2021-11-07

by 김희헌 posted Nov 07, 2021 Views 229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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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을 추모하는 이유 (3:1~5,13~17, 9:24-28, 12:38-44)

2021.11.07. 창조절 10, 전태일 추모주일

 

[존재의 씨름, 윤리적-영적 차원의 두 의미]

지난 월요일 구기동에 있는 한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이북오도청 맞은편 언덕에 있는 영광교회라는 곳입니다. 그 교회가 2012년에 새로 지어지기 전에는, 40년 넘은 석조건물을 개조하여 사용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주춧돌만 남아 있는 그 석조건물은 예전에 임마누엘수도원으로 불렸고, 완공된 때는 1970815일입니다.

제가 이 터를 찾은 이유는 23살의 청년 전태일이 넉 달간 노동하며 머문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평화시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열악한 근로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바보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갖은 노력을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조직을 해산한 다음 실의에 빠진 전태일은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삼각산 기슭의 수도원 공사장으로 올라온 것입니다.

19704월 말부터 전태일은 그 공사현장으로 자신의 우편 주소를 옮길 만큼 거처로 삼고, 넉 달가량 머물며 노동과 기도에 힘씁니다. 그는 여기서 머잖아 감당해야 할 일을 준비하는 영적 씨름을 한 것입니다. 그가 싸운 대상은 쪼개야 하는 바윗돌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자본가나 관료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집중한 것은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존재를 건 사람의 씨름은 두 가지 차원에서 가치와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는 윤리적 가치요 다른 하나는 영적 가치입니다. 윤리적 가치는 사람들의 관계 안에서 벌어진 행위의 의미에 관한 것이요, 영적 가치는 그 행위를 뒷받침하는 존재의 실존적 의미에 관한 것입니다. 전태일이 삼각산 수도원 공사현장에서 벌인 싸움에는 두 의미가 모두 있습니다.

먼저 윤리적 차원의 의미를 보자면, 그가 4년 전 1966년에 기독교에 입교하여 대단히 독실한 신앙 세계로 들어갔는데, 그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인연에 대한 보답이라고 할까요, 전태일은 가난한 기독교인으로서 몸 밖에 드릴 것이 없어서 노동 봉사를 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임마누엘수도원 전진 원장과의 인연이 있습니다. 그는 전태일의 식구들이 화재로 보금자리를 잃고 도봉동 천막촌으로 옮겨온 때부터 인연을 맺었습니다. 어머니 이소선 여사는 이때 화재의 충격으로 시력을 잃었다가, 화재민 집단 거주지에 있는 천막교회에서 백일기도를 드리고 눈을 뜬 일이 있었는데, 그 모든 과정을 이끌어준 사람이 전진 원장입니다.

전태일은 그 천막교회에서 동생 태삼과 새벽종을 치며 신앙생활을 하였고, 마지막 사건을 앞둔 118일 주일에도 그 교회의 어린이부 교사로 예배드렸습니다. 1968년 창현교회로 이름을 단 교회가 건축을 할 때, 전태일은 육체노동으로 봉사를 했습니다. 이때 실무를 맡은 사람이 훗날 NCCK 총무가 된 김동완 전도사인데, 2년 후에 삼각산 수도원의 건축과정에서 김동완 전도사가 실무를 맡고 전태일을 다시 부릅니다. 전태일에게는 깊은 인지상정의 마음이 있었다고 봅니다.

하지만, 전태일을 삼각산 공사현장에 머물게 한 것은 도덕적 의무감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어떤 윤리적 가치를 얻기 위해서 일한 것이 아니라, 존재의 의미를 하늘로부터 받기 위해 노동과 기도를 바쳤습니다.

잘 알려진 대로,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책자를 읽고 현실에 눈을 떠간 때는 스무 살이 되던 1967년 여름입니다. 그렇게 2년간 생각이 무르익자, 19796월 본격적으로 바보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활동했습니다. 하지만, 미미한 활동(설문지 작업, 시청과 노동청에 진정서 제출)을 하다가, 반년 만에 빚을 지고 해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갈 곳을 잃은 그는 실패에 관한 성찰이 필요했습니다. 그 시기에 전태일은 유서와 같은 글을 처음 씁니다.

그리고 4개월가량 흘러 1970423일에 결심을 담은 일기를 쓰고 며칠 후 산을 올랐으니, 그가 수도원 공사장에서 한 노동의 의미는 이런 맥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건물이 거의 지어지던 89일 전태일은 우리가 아는 유서를 씁니다. 그 글에는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815일에는 건물이 완성되었지만, 전태일은 두세 주 더 머물며 기도를 드립니다. 증언에 따르면, “그의 기도는 막힘이 없었고, 그 소리가 마치 불덩이가 지나가는 듯하였다라고 합니다. (최재영, 전태일실록 II, 253) 전 존재를 건 엄청난 싸움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전태일 추모주일에 우리는 무엇을 추모할 수 있을까요? 연약한 이들을 위해 자신을 모두 내어준 전태일을 추모하기 위해서는, 그가 벌인 영적 몸부림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전태일을 통해 드러나는 역사의 뜻이요, 하나님의 섭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전태일을 통해서 세 가지 의미가 드러났다고 보고, 그것을 오늘 함께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첫째로 인간의 의미요, 둘째는 신앙의 의미며, 셋째는 삶과 역사의 의미입니다. 그것을 성서 이야기와 함께 엮어서 하나씩 생각해보겠습니다.

 

[인간의 의미, 존재 방식에 관한 물음 / 룻기 31~5, 413~17]

1성서 본문에 나오는 룻의 이야기는 재미있는 우화입니다. 가난한 두 과부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자신들의 궁핍한 삶을 탈출하기 위해, 부자 남성을 유혹하려고 공모하는 모습이 익살스럽습니다. 이 이야기를 윤리적 관점에서 보면 나오미와 룻은 부도덕해 보입니다. 둘의 공모는 가중처벌을 받아도 좋을 듯합니다. 절박한 사람의 처지에서는 불가피한 일이라고 하겠지만, 만일 보아스 아내의 처지라면 배은망덕한 사태일 것입니다.

하지만 룻기의 저자에게 그런 윤리적 관심은 부차적인 것 같습니다. 룻기는 그보다는 영적인 관점에서 믿음의 전승이 이어지는 문제에 더욱 관심합니다. 도덕성도 중요하지만, 거기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룻기는 당시 홀로된 여성을 위한 사회적 배려인 형사취수(兄死取嫂) 제도를 활용한 나오미와 룻이 부도덕하지 않았다고 묘사하지만, 실제 이 책의 관심은 그런 변명이 아니라 다른 데 있습니다. 그것은 나오미와 룻에 대한 윤리적 변호가 아니라, 그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전승의 계승입니다. 그래서, 이야기는 룻의 아들이 다윗의 할아버지가 되었다는 말로 마칩니다.

윤리와 도덕은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지만 존재의 관점에서 보면, 윤리는 때로 기만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영적 모습을 깊이 들여다보면, 윤리적 관찰로는 보이지 않던 모습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에고가 움직이는 모습입니다. 인간의 에고는 윤리 규범을 활용하여 자신을 더욱 강화하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윤리는 에고를 증폭시키는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이기적인 에고일수록 윤리적 겉모습에 집착하는 이유입니다.

종교적 존재는 윤리적 차원으로 모두 환원될 수 없는 영적/실존적 차원의 문제를 안고 씨름합니다. 종교는 윤리 규범을 초월하려는 기질이 있고, 더욱 중요한 본질적인 문제를 붙잡고자 합니다.

티벳 불교에는 미친 지혜’(crazy wisdom, divine madness)로 불리는 수행법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윤리 규범을 초탈하여, 어떠한 장애에도 갇히지 않는 무애’(無㝵)의 정신으로 종교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불교 화엄경에 따르면,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난다 (一切無㝵人, 一道出生死)’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을 따르는 실천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도 비슷했습니다. 그는 갈릴리 민중들과 격의 없이 어울리는 무애의 삶을 사셨고, 그랬기 때문에 먹보와 술보라는 별명을 얻고,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7:34) 그것은 어떤 기이한 모습을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경천애인(敬天愛人)의 원대한 삶에서 나타나는 자유로운 모습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도덕적인 차원이 아니라, 영적인 차원에서 봐야 의미가 드러납니다.

전태일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에서 영적인 차원은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이 추구해야 할 존재의 가치에 관한 그의 치열한 삶을 통해서, 우리는 인간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가난이 주는 두려움을 이긴 사람의 사랑이요, 그 사랑을 끝까지 밀고 가기 위해 벌이는 투쟁이라 하겠는데, 우리는 거기서 오늘날 잃어가는 인간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존재로써 우리에게 물음을 던집니다. 이것이 우리가 전태일을 추모하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신앙의 의미, 오늘의 예수에 관한 물음 / 히브리서 924~28]

히브리서 본문은 예수의 죽음에 관한 독특한 신학적인 해석을 줍니다. 예수는 자기 자신을 단번에 제물로 바쳤고, 그래서 곧바로 하늘 성소에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그것과 대비되는 것은 다른 생명을 희생제물로 바친 제사장들이 들어간 곳으로서, 그것은 참 성소의 모형에 불과한 것, 즉 사람의 손으로 만든 가공된 성소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배당 건물을 짓고 있는 우리에게 사뭇 심각하게 들릴 만합니다. 우리는 그곳을 어떤 성소로 삼을지 고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전태일이 전해주는 두 번째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남긴 수기를 보면, 분신을 삼 주가량 앞두고 식구들과 함께 드린 구역예배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전태일은 그날 부른 석 장의 찬송가와 성서 본문을 기록해 놓았는데, 성서 본문은 히브리서 1113절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에 대해서 말합니다. 먼저, “믿음으로 살아간성서의 인물을 하나씩 거명하다가, 1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약속하신 것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반겼으며, 땅에서는 길손과 나그네 신세임을 고백하였습니다.마치 이 본문은 얼마 있지 않아서 벌어질 일을 암시하는 듯한 내용입니다.

전태일 역시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는 평화시장 앞에서 분신을 감행하고, 을지로 6가에 있는 지금의 국립중앙의료원으로 옮겨집니다. 거기서 어머니와 친구들에게 유언하고, 치료를 위해 현재 가톨릭회관이 된 명동 성모병원으로 옮겼지만, 몇 시간 지나서 죽음을 맞게 됩니다.

전태일의 죽음을 대하는 두 가지 신학적 태도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이소선의 헌신과 전태일의 노동으로 세워진 교회의 목사가 보인 모습입니다. 그는 영안실을 지키고 있던 이소선을 찾아와서, 정부가 제시한 합의금을 하나님이 주신 돈이라고 말하면서 타협하라고 설득했고, 또 다른 한 사람, 전태일 가족의 신앙에 절대적인 영향을 준 전진 원장은 분신했으니 빨갱이 놈들이 좋아서 춤을 추겠다는 악담을 전했습니다.

이들만이 아니라, 당시의 한국교회 대부분이 그런 태도를 가졌습니다. 영안실 맞은편에 있는 영락교회의 담임목사는 장례식 장소를 요청하는 교인 오재식을 향해, ‘자살한 사람의 장례식은 교회에서 치르지 못한다고 거부했으니, 한국교회의 수준을 한탄할 뿐입니다.

하지만, 이 과정을 지켜본 오재식은 당시에 도시산업선교운동을 주도하고 있었는데, 장례식을 모두 마친 다음에 추모의 글을 기독교사상에 싣습니다. 전태일을 예수로 본 최초의 글로서, 제목은 어떤 예수의 죽음, 고 전태일 씨의 영전에입니다. 시작하는 한 문단만 읽으면, 이렇습니다.

예수, 내가 너의 나이를 아는 것은 서른세 살뿐. 남 같으면 장래의 포부로 부풀었을 때 십자가를 지고 예루살렘 거리를 지나던 그 나이밖에는. 아무리 우둔했어도 몸 하나 사릴 만한 지혜는 들었을 나이에 조소와 모멸 속으로 걸어야 했던 미련을 몰랐었네. 예루살렘에 안 갈 수도 있었지 않았는가? 아끼던 제자들도 말리지 않았던가? 너 하나 그런다고 해서 질서가 달라질 것도 아니었는데, 종교도 이미 안전을 도모하고 사람들은 통치자 로마의 눈치를 살피던 중인데도, 천군만마를 거느린 것도 아니요, 대중의 지지를 얻은 것도 아닌 주제에 무슨 계산으로 그렇게 함부로 말을 뇌까렸단 말인가. (기독교사상, 197012월호)

이 글은 예수를 조롱하는 듯한 문체로 쓰였지만, 실제로는 그의 진실을 밝히려는 역설적인 내용입니다. 그리고 전태일을 1970년 한국에 나타난 예수로 보며, 그를 2천 년 전 예루살렘의 예수에 비견합니다.

오늘 히브리서 본문 28절도 비슷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자기 몸을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이 말씀은 마치 전태일의 삶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불붙은 전태일의 몸은 오늘 그리스도가 나타난 성례전의 자리가 어디인지를 물었습니다.

우리는 전태일을 통해서 오늘의 예수를 묻는 물음을 듣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전태일을 추모하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그는 자신의 믿음과 삶으로, 우리에게 신앙의 의미에 관한 물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역사의 방향, 어떻게 살 것인가 / 마가복음 1238~44]

마가복음 12장에서 예수는 율법학자와 과부를 비교합니다. 둘의 대비를 통해서, 무엇이 참된 믿음이요, 충만한 삶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율법학자는 사회에서 존중받는 위치에 있지만, 실제 삶은 위선적인 것으로 그려집니다. 반면, 과부는 약자로서 무시당하고, 가난하여 먹을 것도 넉넉하지 않습니다. 그가 바친 두 렙돈 즉, 한 고드란트는 당시 주화의 최소단위로서 푼 돈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예수는 이 가난한 과부가 가장 많이 넣었다고 칭찬합니다. ‘자기의 모든 것를 털어 넣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예수의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보면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가 주신 가르침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바친 존재에 관한 주목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절대적 존재는 때로는 역사일 수 있고, 전 생명 세계일 수도 있으며, 전태일이 그런 것처럼 사랑하는 이웃일 수도 있습니다.

전태일은 자기 모든 것을 그 사랑에 다 털어 넣었습니다. 처음에는 열악한 환경에서 병들어가는 동료 노동자를 위해 자신의 가난한 지갑을 나누었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는 모범업체를 설립하여 직접 대안을 만들고자 자기 눈을 기증하여 그 기금을 마련하려고도 했으며, 부당행위를 바로 잡고자 행정기관에 호소하고, 조직을 만들어 모든 투쟁을 밀고 가다가 마침내 죽음의 자리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전태일은 말 그대로 자기 모든 것을 다 털어 바친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우리 삶과 역사가 나가야 할 방향을 봅니다. 진보하는 인간의 미래를 봅니다. 그것이 전태일을 추모하는 세 번째 이유입니다.

그가 마지막까지 굴린 돌을 이어서 굴리는 일에서, 종교는 깨달음을 얻었고, 자본의 횡포에 갇혔던 우리 사회는 역사의 방향을 찾았습니다. 역사의 방향을 가리키는 그의 교훈은 오늘날 더욱 중요합니다. 코로나 팬데믹과 기후위기를 동반한 전환의 시대를 지나면서 전태일의 뜻은 더욱 뚜렷하게 이어져야 합니다. 그는 단지 노동 이슈를 드러낸 사람이 아니라, 생명이 피어나는 세계를 위해서는 먼저 자기를 비우며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함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전태일이 가르쳐준 인간의 의미, 믿음의 의미, 역사의 의미를 마음에 담고 살아가야겠습니다. 그의 삶을 기억하며 그의 뜻을 추모하는 우리의 마음에도, 오늘 우리 시대에 살아오는 예수의 미소가 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잠시 침묵합시다.

 

[파송사]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간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 치오니, 하나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주시옵소서.” 전태일의 이 기도와 이 사랑을 우리가 이어가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