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의미 (렘 33:14-16, 살전 3:9-13, 눅 21:25-36)
2021.11.28. 대림절 첫째 주일
[대림의 갈망, 어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가]
교회력으로 대림절은 새로운 해의 시작입니다. 이 기간은 과거에 대해서는 성찰과 비움의 시간이지만, 미래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초대에 임하는 시간입니다. 대림절의 주제는 멸시와 천대의 땅에 피어나는 임마누엘의 신비입니다. 이 신비가 우리 삶을 씻어내고, 문명의 길을 밝히는 등불이 되기를 원합니다.
올해 대림절 우리는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를 기다립니다. 2년간 코로나 사태로 위태로운 시기를 지나왔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인류는 고통과 고독을 겪고 있으며,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요청을 받고 있습니다.
토마스 베리를 비롯한 많은 스승이 일러주었듯이, 인류가 맞은 이 생태적 위기의 본질은 영적 위기입니다. 인류는 교만과 오만의 문명을 살아왔습니다. 무한 성장과 무한 소비 이데올로기에 휘말린 인간은 ‘한계의식’을 잃은 채 자연을 약탈하고, 편견과 차별로 동료 인간을 억압해 왔습니다.
기후위기 앞에서도 성장을 포기하지 못하는 인류는 파국으로 가는 길을 멈추는 해법을 아직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이달 초 영국 글래스고에서 열린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에서, 세계는 ‘1.5도의 지구 온난화 안전 한계치를 지키는 일에 합의하지 못했습니다. 의미 있는 결정이 여러 가지 있었지만, 여전히 지구 온난화 상한선을 상당히 초과하는 경로를 지속하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WCC실행위 성명서, 2021년 11월 17일)
그리고 보면, 세계가 위태롭게 유지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 문명의 동력이었던 성장주의 신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뒤척이고 있습니다. 그러는 중에, 사회 곳곳에는 ‘근본주의’가 번성하면서, 혐오와 배제의 압력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할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촛불혁명이 펼쳐낸 개혁과 연대의 기운은 모두 사라진 것만 같습니다.
교회도 큰 위기에 놓였습니다. 생태 문명을 향해서 청빈과 긍휼의 영성의 배를 지어 항해하기보다, 종교적 배타주의라는 수렁에 빠져 걸려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과연 지속 가능할까 하는 물음 앞에서 스스로 회의하는 듯합니다. 진보적 교회라 할지라도 아직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시대의 매듭을 풀지 못한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도 위태로운 시간을 믿음으로 일구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미래선교연구위원회 <진보신학팀>에서 주관하는 발표회가 있었지요. 미래지향적인 주제에 관한 대화가 의미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진보적인 교회가 겪는 갈등의 성격과 해법에 대해서 정리해보고, 어린이와 엄마/양육자가 배제된 세계에서 여성과 성 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어떻게 번성하는지 생각해보고, 코로나 사태로 변화된 세계에서 경험되는 사람과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앞으로의 세계를 상상하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인 적인 것은 ‘가족 구성권’이라는 개념이었습니다. 전통적인 가부장제 가족만이 아니라, 동성 가족을 포함하여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로 구성된 교회는 어떤 모습일까 그려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대림절 예수의 의미를 묻습니다. 과연 어떤 예수가 우리 시대의 상처를 싸매주고, 아픔을 위로해 줄 수 있을까요? 과거에 등장한 기독교의 모습으로는 오늘의 대림절 신학을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맞아야 할 그리스도 사건에는 무언가 더 묵직한 체험적 요소가 필요합니다.
예수를 모신다는 것, 자기 삶의 가장 깊은 곳에 그리스도를 모시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안으로는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요, 밖으로는 역사의 어둠을 뚫고 사랑과 평화를 꽃피우는 것입니다. 거듭난 존재로서 하나님 나라를 향한 믿음의 행진을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기독교 종교가 지향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그 삶을 향한 갈망과 기다림에는 어둠과 절망의 경험이 있지만, 고통의 세계 한가운데 피어나는 은총에 대한 신뢰도 있습니다. 거기에서 믿음의 용기가 쏟아져 나오겠지요.
[의로운 가지에 핀 공평과 정의, 예레미야 33장 14~16절]
대림절 첫째 주일 제1성서 본문은 예레미야서 안에 있는 작은 <위로의 책, 30~33장>, 그 끝부분입니다. 예레미야는 여기서 회복의 약속을 전합니다.
알다시피, 예언자 예레미야는 나라가 패망하던 시기에 활동했습니다. 그가 긴 침묵을 깨고 공식적인 활동을 재개한 때는 소생의 기회를 완전히 잃은 절망의 시기였습니다. 개혁가 요시야 왕은 전투에서 죽고, 뒤이은 왕들은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폐위되거나 제국의 봉신이 되고, 급기야 신흥제국 바빌론에 나라를 빼앗기고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나라를 잃고 사슬에 묶여 끌려가는 사람들, 감옥에 갇혀 죽음에 직면한 사람들, 그들은 깊이 좌절했을 것입니다. 현실은 참혹했지만, 더욱 절망스러운 것은 희망이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거대한 악에 직면한다고 하여 절망하지 않습니다. 인간을 절망시키는 것은 자신의 분투가 의미를 잃을 때입니다. 하나님을 잃은 영혼, 구원이 없는 몸짓에 절망이 깃듭니다.
그런데, 다른 예언자들과는 달리 예레미야는 희망을 먼저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차라리 절망하라고, 포로로 끌려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그가, 오늘 본문에서는 위로와 회복의 말을 전합니다.
“보아라,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유다 가문에 약속한 그 복된 약속을 이루어 줄 그 날이 오고 있다. 그때 그 시각이 되면, 한 의로운 가지를 다윗에게서 돋아나게 할 것이니, 그가 세상에 공평과 정의를 실현할 것이다.” (렘 33:14-15)
국운이 완전히 기운 상태에서, 자신은 근위대 뜰에 갇힌 상황에서 계시의 말을 전하는데, 그것은 죽어가는 나무에서 ‘의로운 가지’ (branch of righteousness)가 나와서, 세상에 공평과 정의를 실현할 때가 올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이것은 시기적으로 도착(倒錯)된 것으로서, 역사적으로는 실행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제1성서의 핵심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두 단어, 토라/율법의 지향점이자 예언의 알맹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사상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 15절에서 ‘공평(justice)과 정의(righteousness)’로 번역된 히브리어 mishpat(מִשְׁפָט)와 tzedaqah(צְדָקָה)입니다.
‘미슈파트’는 남성명사로서 제1성서에 421번이나 나오는 단어입니다. 그것은 본래 재판관(shofet)이 내리는 판결(judgment)을 뜻하는데, 한글로는 공평(새번역), 정의(개역개정), 규범 등으로 번역됩니다. 미슈파트는 각 사람에게 그의 몫을 주는 엄격한 ‘행동 양태’(mode of action)를 가리킵니다.
이런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체다카’입니다. 성서에 157번 나오는 체다카는 여성명사로서, 정의로운 행동이 가능하게 하는 ‘인격의 질’(quality of personality)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체다카는 규범과 법령의 엄격함을 넘어서, 억압받는 약자를 향한 ‘친절과 박애와 관용’을 포괄합니다. 체다카는 자비롭게 실현되는 하나님의 정의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16절에서, 유다가 구원을 받고, 예루살렘이 안전한 거처가 될 때 사람들이 그곳을 가리켜 ‘야훼 체드케누’ 즉, ‘야훼는 우리의 체다카’라고 부를 것이라 말합니다.
생태 문명의 철학적 기초를 놓았다고 평가받는 사상가 알프레드 N. 화이트헤드는 진화하는 인류가 향상되어가는 기준을 무엇으로 삼는 것이 옳으냐고 물으면서, 그것은 ‘체다카’(righteousness)의 감각에 달려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이루는 것을 ‘체다카’로 여기는 단계에서,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미덕을 닮기 위해 자신을 갱신하는 것을 체다카로 여기는 단계로 나아가는 것을 ‘인류의 향상’으로 본 것입니다. (진화하는 종교, 38)
예레미야는 자기 시대의 고통 속에서 ‘의로운 가지’(branch of righteousness)가 돋아나는 환상을 봅니다. 거기에서 ‘공평과 정의’가 이루어지고, 마침내 그곳에서 야훼의 구원이 흘러나올 것을 그려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언자는 단지 비난하고 나무라는 자들이 아니라, 감싸고 위로하는 사람이요, 그들의 시선은 주체에서 객체로 곧장 이어지는 직선이 아니라 하나님을 심장을 통과하여 대상에게로 가는 삼각선이라고 말한 랍비 아브라함 헤셀의 말은 의미심장합니다. (아브라함 헤셀, 예언자들, 63)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종교의 지혜의 의미합니다.
[깨어있는 신앙 / 누가복음 21장 25~36절]
예레미야가 기원전 6세기 유다의 멸망을 배경으로 한다면, 누가복음 21장 본문의 배경은 주후 1세기 예루살렘의 멸망(20~24절)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둘 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전 시대의 종말’입니다. 예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민족의 소란과 세상의 혼란이 일 때, 그때가 바로 인자가 와서 구원이 베풀어질 때라고.
성서 본문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혼란과 파국에 주목하지만, 성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가시적인 파국의 증상 너머에 있는 구원의 시간에 대한 분별입니다. 그것이 이어지는 ‘무화과나무의 비유’에 담긴 뜻입니다. 무화과나무의 잎이 돋아나는 것을 보고 여름이 오는 것을 알 수 있듯이, 가까이 오는 하나님 나라를 분별하도록 깨어 있으라고 본문은 권면합니다.
교회는 오랫동안 이렇게 무거운 본문을 대림절 첫째 주일의 묵상으로 읽어왔는데, 그것은 새로운 시작을 하는 데 필요한 지혜를 제공합니다. 파국의 시간에도 하나님 나라를 분별하고, 그리스도 앞에 서 있으며, 기도하며 깨어 있는 것, 그것이 대림절을 여는 믿음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깨어지고, 실패하고, 상처 입은 경험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깨어 있는 사람이 되기 원하고, 깨어 있는 공동체를 이루기 원합니다. 절망의 시대에도 가까이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맞을 수 있는 깨어 있는 믿음을 원합니다.
깨어 있는 공동체는 세상의 질서와는 다르게 움직입니다. 체다카의 감각을 잃은 세상의 정의는 승리와 성공을 위한 욕망의 무기가 되곤 합니다. 하지만, 깨어 있는 공동체는 공공연한 실패에서도 두려움과 수치의 장막을 깨뜨리고 은총의 세계를 향하는 지혜를 구합니다. 깨어 있는 사람은 하나님에 이르기까지 더 진실하고, 더 실제적이며, 더 근원적인 곳을 향해 나아갑니다. 생명의 샘물이 흐르도록 자신을 낮추고, 시련의 시기에 자신의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흘려보냅니다.
함석헌 선생의 어록 중에 제가 좋아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종교와 진리를 바꾸지 않는 사람이 종교를 가진 사람이요, 진리와 생명을 바꾸지 않는 사람이 진리를 아는 사람이요, 생명과 하나님을 바꾸지 않는 사람이 생명을 가진 사람이다.” 종교보다 더 큰 진리를 향해, 진리보다 더 실제적인 생명을 향해, 생명보다 더 근원적인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기다림의 시간 / 데살로니가전서 3장 9~13절]
예수를 기다리는 대림절은 깨어 있는 믿음의 시간입니다. 믿음의 시간은 기다림의 시간이요, 그리움의 시간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가운데 모신 바울과 데살로니가 교회의 관계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7장을 보면, 바울이 유럽으로 건너가 데살로니가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베뢰아를 거쳐 아테네에 이릅니다. 이 과정에서 바울은 많은 고난을 받고, 어려움에 놓였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역시 사정이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테네에 있던 바울은 사정을 살피기 위해 디모데를 데살로니가 교회로 보냅니다. 다행히도, 디모데가 돌아와서 들려준 이야기는 희망적인 내용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공동체는 믿음과 사랑을 지켰고, 그 소식이 바울의 위로가 되었습니다. (살전 3:6-8)
오늘 본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바울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바울은 무엇보다 서로 만날 수 있도록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11절) 바울의 이 간절한 마음은 코로나 상황에서 단절된 삶을 사는 우리에게도 절실하게 느껴집니다.
바울이 다음으로 빈 것은, 데살로니가 공동체가 안에서 나누는 사랑과 밖으로 베푸는 사랑이 풍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12절) 밖을 향한 사랑의 원심력이 크려면, 안으로 묶인 사랑의 구심력이 강해야 합니다. 믿음과 사랑이 아니고서는 환난의 현실에 압도당하는 시대에, 사랑의 공동체를 짓는 것은 시대적 과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이 비는 것은 데살로니가 교우들이 ‘마음을 굳세게 하여 거룩함에 머무는’ 것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비는 믿음은, 자기 신념에 대한 충실이 아니라, 예수께서 오실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다림이란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영적인 겸손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두려움에 물든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은 ‘기다림의 영성’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미래를 두려워하고, 다른 사람을 두려워하며,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두려움에 물든 시대는 서로를 적대시하고 파괴하도록 부추깁니다. 갈등과 대결이 일상화되고, 용서와 화해가 어렵습니다.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예수를 우리 삶에 오시도록 기다리는 것입니다.
대림절에 우리는 예수를 기다립니다. 예수를 향한 우리의 기다림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다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의 은총을 따라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예수의 은혜를 얻기 위해 기다리는 삶에 대림절의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정의와 평화의 주님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침묵으로 기도합시다.
[파송사]
대림절의 기다림 속에서 그리스도의 평화를 바라봅시다. 절망의 시기에도 예언의 꿈을 간직한 예레미야는, 의로운 가지가 돋아나 공평과 정의가 이루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를 바라봅시다. 시대의 아픔을 위로해주는 예수, 우리의 상처를 싸매주는 예수를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갑시다. 이 어둠과 절망의 시대를 예수의 사랑과 믿음으로 이겨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