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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우리가 가는 길 | 김희헌 | 2021-12-19

by 김희헌 posted Dec 20, 2021 Views 133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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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1-12-19

우리가 가는 길 (5:2-5a, 10:5-10, 1:39-45)

2021.12.19. 대림절 넷째 주일

 

[지옥마저 속량하는 평화 / 미가 52~5a]

대림절 넷째 주일, 하늘의 평화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빕니다. 지난주부터 코로나 사태가 심각해지면서 비대면 예배로 전환을 앞두고 있습니다. 언제쯤 이 어둠의 터널을 다 지날 수 있을지요? 코로나 팬데믹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지만, 그 보자기를 걷어보면 밑에 겹겹이 쌓인 우리 시대의 고통이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 사회에는 헬조선이라는 말이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최근 넷플릭스 드라마 가운데, 정말 지옥이라는 작품이 나왔습니다. 공개된 지 하루 만에 전 세계 1위를 차지했다고 하는데요.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갑자기 초자연적인 존재가 사람들에게 나타나 지옥에 갈 시간을 고지하는 기이한 일이 생깁니다. 그리고, 어김없이 그 시간에 악마 같은 존재가 찾아와서 지옥에서나 경험할 끔찍한 죽음을 시연하죠.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이 두려움과 혼란에 빠진 틈을 타서 <새진리회>라는 사이비 종교가 발흥합니다. 그들은 이 사태가 정의로운 삶을 살라고 하는 신의 뜻이라고 말하며, 사람들을 통제하고 점차 권력을 키워갑니다.

그런데, 지옥에 갈 것이라는 고지가 한 번은 갓 태어난 아이에게 전달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두려움에 빠진 엄마는 <새진리회>를 찾아가서 아이를 살릴 길을 묻는데, 여기에는 이 신흥종교를 파산시킬 수도 있는 거대한 문제가 담겨있지요. 왜냐하면, 아직 죄가 무엇인지도 모를 갓난아이에게 지옥 고지가 전달되었다는 사실은, ‘정의롭게 살면 지옥에 가지 않는다는 교리가 거짓임을 말해주는 반증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진리회>는 아이를 빼앗아 진실을 감추려는 본색을 드러내었고, 이에 맞서 부모는 아이를 지키기 위해 탈출합니다. 하지만 부모라 해도 피할 수 없는 초자연적 사태인 죽음의 시연이 다가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악마가 찾아와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아이를 안고 있는 부모에게 불을 쏟아붓습니다. 부모는 검게 탄 숯 더미로 변하지요. 하지만, 그 가운데서 살아난 아이를 보여주며 묘한 희망을 남깁니다.

종교적 색채가 짙은 이 드라마를 보며, 제 마음에 두 가지 느낌이 박혔습니다. 하나는 신학적 물음이요, 다른 하나는 교회에 관한 반성입니다. 이 드라마는 전체적으로 커다란 삶의 질문을 던집니다. ‘갓 태어난 아이에게도 찾아오는 지옥의 현실을 보여주며, 선과 악이 뒤섞인 이 고통의 세계에서 과연 무엇이 참된 의미인지를 묻습니다.

대부분 교회는 이 심각한 신정론의 질문에 대해서, 마치 <새진리회>처럼 대답합니다. ‘죄를 짓지 않으면 신의 진노를 피할 수 있다는 손쉬운 답변을 하지만, 그것은 초자연적 현상처럼 막을 수 없이 다가오는 현실의 지옥 경험앞에서는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성서에는 <욥기>를 비롯한 심오한 지혜가 있지만, 이 드라마는 그런 목소리를 전해주지 않습니다. 대신, ‘새진리회와 같은 사이비종교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것이 우리 사회에 비친 교회의 모습 아닌가 하는 자책감이 들었습니다.

더욱 뼈저리게 다가온 부분은 아직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새진리회>의 행동부대처럼 움직이는 화살촉이라는 집단에 관한 것입니다. 이 집단을 선동하는 대변자는 온라인에서 최신 정보를 공급하며 활동하지만, 실제로는 자폐증에 걸려 자기만의 벽에 유폐된 사람입니다. 이 사실은 아이러니한 교훈을 줍니다.

장공 김재준 목사가 진취적 종교의 모습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 상징이 화살촉이라는 단어입니다. 역사의 맨 앞에서 마치 화살촉처럼 날아가고자 했던 진보적 신앙인은 이 드라마를 보면서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향해 날아가고 있는가?’ 하는 물음을 심각하게 갖게 됩니다. 김재준 목사의 가르침을 따르며 한국교회에서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라는 기장 교단이나, 거기서도 더 진보에 속한 우리 교회도 이 질문에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우리는 지금 무슨 길을 걷고 있나요?

최근 두 곳에서 강연을 맡아서, 우리 시대의 고민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생각하다 보니, 마치 우리 현실이 길을 잃은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과거에 사람들의 맘을 격동시켰던 해방의 기획은 이젠 좀처럼 작동하지 않고, 진리는 저마다 파편화되어서 함께하는 마음을 품기는 요원해 보입니다. 이천 년 전 바울이 자기 시대를 가리켜,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고 있다고 했는데, 우리 시대 또한 모든 생명이 탄식하는 것만 같습니다.

우리는 오늘 시편 803절을 함께 읽었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회복시켜 주십시오. 우리가 구원을 받도록, 주님의 빛나는 얼굴을 나타내어 주십시오.이것이 그리스도의 성탄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심정일 것입니다.

오래전 예언자 미가는 불운한 시대를 살면서도 평화의 꿈을 놓지 않았습니다. 남북으로 나뉜 조상들의 땅은 북쪽부터 앗시리아 제국에 멸망하고, 남쪽은 속국이 된 상황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희망의 거처를 잃고, 무엇을 위해 자신의 용기를 바쳐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적군에게 겹겹이 포위되어 멸망이 임박한 상황에서, 놀랍게도 미가는 이 위기의 시간을 뚫고 하늘의 신탁을 전합니다. 대표적인 메시아 예언입니다.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의 여러 족속 가운데서 작은 족속이지만,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다.” 그가 평화를 가져다줄 것입니다. 지옥과 같은 현실을 속량하는 평화, 고통의 시간을 믿음으로 건너게 할 평화를 전해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평화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거룩한 믿음, 더 큰 발걸음으로 / 히브리서 105~10]

예언의 시대도 혁명의 시대도 지났지만, 인간의 삶에는 늘 고통이 있습니다. 하늘의 평화를 경험한 인류의 가슴에도 죄악의 무늬는 남아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인생이란 참 무거운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 나라 역시 고난이 없는 행복의 온실은 아닐 듯합니다. 한 철학자는 천국이란 악으로부터 분리된 선의 나라가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겨가는 나라라고 말하는 데,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을 꿈꾸는 삶에도 악()이 사슬처럼 매여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27절에서, 고난의 의미를 모르고, 또 고난을 받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은 고난 없는 삶이 아니라 고난을 이기는 삶이요, 그것이 가능한 것은 고난 너머의 거룩한 뜻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성탄의 또 다른 의미입니다.

기독교 철학에서, 고통으로 부르짖는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온 신을 가리켜 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는 신 자체가 아니라, 몸을 입은 신 화육한 신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왜 신이 기어코 몸을 입고 이 세계에 오는 것일까요? 오늘 히브리서 본문은 상상력을 발휘하여, 그리스도가 세상 올 때 하나님과 이렇게 대화했을 것으로 보고 시편을 인용하여 말합니다.

주님은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입히실 몸을 마련하셨습니다. 주님은 번제와 속죄제를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하였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 나는 주님의 뜻을 행하러 왔습니다.’” (10:5-7)

그리고 이어서, 예수는 그 뜻을 따라 자기 몸을 단번에드렸고,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단번에 자기 몸을 드린 그리스도로 인해 거룩하게 된다면, 우리가 가야 할 믿음의 길도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아 걷는 믿음의 길은 단선적이지 않습니다. 믿음이 자라는 단계에 따라서 지나는 고개의 높이가 다릅니다. 처음에는 이기심과 싸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권리와 의무의 충돌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진보는 권리를 주장하고, 보수는 의무를 강조하지만, 실은 둘 다 같은 싸움입니다. 이기심과 싸움입니다.

그다음의 싸움은 감각에 관한 싸움입니다. 무엇이 허용된 것인지, 아니면 장려할만한 것인지를 분별하는 감각이 중요합니다. 현실의 한계로 인해 허용된 것을 마치 장려할 것으로 여기면, 태만의 잠에 빠집니다. 반대로, 장려해야 할 것을 마치 현실이 모두 허용하는 것처럼 여기면, 교만의 늪에 빠지게 됩니다. 영적 분별의 공동체가 형성되기 전까지, 이 두 감각의 싸움은 멈추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마지막 싸움은 다른 데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을 단번에 드리는 존재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에도 맹점이 있습니다. 존재의 무게를 내팽개치고 단번에 하늘에 오르려는 관념종교의 헛된 약속 때문입니다. 하지만, 거룩한 꿈을 품고 존재의 침체를 씻고 도약하는 삶에는 늘 하늘의 흔적이 일렁입니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발걸음을 내딛는 삶에 그리스도가 탄생하기 때문입니다.

신학자 존 캅은 그리스도를 가리켜 창조적 변혁’(creative transform -ation)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삶에 정의와 평화를 향한 창조적 변혁이 이루어지는 곳에 그리스도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기적 욕망이 얼마나 쉽게 종교적 거룩함으로 변하는지 경험하곤 합니다. 하지만, 절망하지 않습니다. 고통과 역경에서도 믿음의 길을 걷는 큰 발걸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축복의 발걸음 / 누가복음 139~45]

오늘의 누가복음 본문에 나오는 내용은 마리아를 향한 엘리사벳의 축복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와 어머니 엘리사벳은 신비한 체험을 하고 아이를 가졌습니다. 그것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비슷한 경험을 통해 아이를 갖게 된 사건의 전조(前兆)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비범한 아이를 품은 두 여인이 만나 축복의 인사를 나눕니다. 이 장면은 두 사람만의 사적 교감이 아니라, 마치 영감 어린 우주적 연대의 사건처럼 보입니다. 아이와 엄마, 하늘과 땅, 역사의 갈망과 우주적 기대가 교차하는 가운데 이루어진 발걸음이요, 나누어진 축복입니다.

어쩌면 죽음처럼 두려운 일을 경험한 마리아가 그 삶에서 일어나서’(Ἀναστσα) 부활의 발걸음으로 엘리사벳을 찾습니다. 그러자 다섯 달 동안 숨어 살던 수동적인 모습의 엘리사벳은 놀라운 축복의 사람으로 거듭납니다. 그리고, 둘 다 주님이 하신 말씀이 이루어질 줄로 믿은 행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잉태한 아이는 척박한 식민지 땅에서 다시 믿음의 발걸음이 시작되도록 이끄는 사람이 됩니다.

시인 윤동주는 식민지 땅 고통이 드세진 1941년 암울한 시기에 새로운 길이라는 제목의 시를 짓습니다. 거기 묘사된 발걸음이 참 싱그럽습니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우리의 발걸음도, 우리가 걸어갈 길도, 하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행복한 길, 평화의 발걸음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한 해를 지나온 삶에 회한이 있지만, 다시 생명의 발걸음을 뗍시다. 지난 일 년 동안 우리에게 부족했던 것을 오시는 주님께서 속량해 주시고, 삶의 힘겨움 속에 흘린 눈물이 주의 위로를 통해 씻겨지기를 빕니다.

잠시 침묵합시다.

 

[파송사] 평화의 길을 걸읍시다. 고난의 길일지라도 평화롭게 걸어갑시다. 침략의 위태로움 속에서도 평화의 왕이 작은 고을에서 나올 것을 꿈꾼 미가처럼, 두려운 경험을 딛고 일어선 마리아가 축복의 발걸음을 내디딘 것처럼, 평화의 길을 걸읍시다. 고난의 시간일지라도 평화롭게 걸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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