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조건이 평화를 만드는가?” | 김정원 | 2021-12-26

by 나비정원 posted Dec 26, 2021 Views 200 Replies 0
Extra Form
날짜 2021-12-26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사무엘기상 2:18~20,26골로새서 3:12~17, 누가복음서 2:41~52

 

 

어떤 조건이 평화를 만드는가?”

 

 

 오늘의 제1성서 말씀에는 어린 사무엘이 등장합니다. 사무엘은 한나가 간절히 기도해서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한나는 하나님의 선물인 사무엘을 하나님께 받치겠다고 작정하였지요. 이에 사무엘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대제사장 엘리와 함께 자라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한나와 그의 남편이 대제사장 엘리가 머무는 성소에 찾아가 그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고, 사무엘에게 옷을 전달하는 장면입니다. 엘리는 한나의 믿음을 칭찬하며 복을 빌어주었고, 성서는 사무엘이 커 갈수록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더욱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며, 향린교회의 교육부를 담당하는 목사로서 오늘 예배에 참여하고 계신 부모님과 양육자분들게 긴히 요청 드립니다. 새해에는 우리 아이들이,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더욱 사랑받을 수 있도록 예배에 참여할 수 있게 힘써 독려해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우리 교우들은 모두 자유인이셔서, 아이들에게도 신앙이나 교회출석을 강권하지 않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만, 유년시절의 교회의 경험이 신앙의 토대가 된다는 것 역시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참 좋은 것으로 교육하고자 노력하고 있으니, 새해에는 우리 아이들을 교회로 인도해 주십시오. 마침 이 말씀을 전할 수 있는 본문인지라 냉큼 부탁드려 봅니다.

 

공교롭게도 오늘의 복음서에도 어린 예수가 등장합니다. 주현절을 앞둔 오늘, 성서일과는 어린 예수를 불러옵니다. 유월절이 되어 열두 살의 예수는 그의 부모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향하였습니다. 절기를 마친 후,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암만 찾아도 예수가 보이지 않자 부모는 화들짝 놀라게 됩니다. 유월절 예루살렘에는 예배를 드리러 오는 사람으로 그득하였고, 또 예루살렘에 오는 이들은 대개 형편이 넉넉한 사람들이 많았기에 그들에게 구걸하려 모인 거지들, 또 복잡한 틈에 그들의 주머니를 노리는 강도들까지 많은 사람으로 우글거리는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온 가족이 함께하는 행렬들도 많았을 것이기에 마리아 역시 아들 예수가 어디 다른 친척들 무리 속에 있겠거니 하고는 말았나 봅니다. 그런데 여기를 찾아보고, 저기에 물어봐도 예수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아들이 없어졌으니, 결국 마리아와 요셉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무려 3일을 헤매게 됩니다. 그러던 중 성전 안에서 랍비들과 함께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예수를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아들에게 무어라 말할 것 같으신가요? 시쳇말로 등짝 스매싱을 날려야 맞는 상황 아닌가요? 제 서러운 경험 한 가지를 소개하자면, 중학교 시절, 막차 버스를 타고 조는 바람에 종점에 내린 적이 있었습니다. 정신없이 내리느라 지갑을 두고 내려 한 밤중에 집까지 걸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집에 도착하니 새벽 2시가 다 되었고, 집에 당도하자 안도감이 찾아왔고, 엄마, 아빠가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그런데 두 분 다 이놈 자식, 아주 잘하는 짓이다!”하며 큰 소리로 저를 혼내는데, 서러움에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요~ 그런데 마리아는 제 부모님과는 달랐습니다. “얘야~ 이게 무슨 일이니? 너를 찾느라 나와 아빠가 무척 애를 태웠단다.”라고 말합니다. 예수가 예수로 살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의 엄마가 마리아였기 때문이라고 누군가가 말하였는데, 그말이 참말인가 봅니다. 그런데,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했던가요? 이 비범한 엄마의 아들은 훨씬 더 범상치 않은 대답을 합니다. “어머,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제가 하나님의 집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셨습니까?”

 

살짝 얄밉기까지 한 이 소년 예수의 말 몸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건져올 수 있을까요? 구원자 예수는 역시 어린시절도 엄청난 영적 대가였구나, 하고 이해해야 할까요? 아니면, 당대의 권위 있는 율법학자들을 감탄시킬만큼 예수는 역시나 이 다른 인간이었구나, 라고 이해해야 할까요? 물론 그렇게 해석하고 고백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만, 저는 오늘 인물 예수에 집중하기보다는 이 이야기를 확대 재해석하며 하나의 의미를 발견해보고자 합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에게 요청했던 것이 일상’, 혹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이었다면, 예수는 그것과 방향을 달리하는 의미혹은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것을 말하고 있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육신의 부모가 요청하는 것이 어쩌면 먹고사는 일, 소유의 일을 묻는 것이었다면,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 속에 있음을 표명하며 소유가 아닌 존재론적대답을 부모에게 던지고 있는 것을 아니었을까요? 사실 일상을 지켜내는 것과, 의미를 지향하는 일 모두 다 중요합니다. 그런데 보통의 우리는 결국 인간이기에 먹고사는 일에 매일 때가 많다 보니, 예수는 우리의 먹고사니즘너머의 하나님의 일을 제안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어린이의 지혜로운 말에 무릎을 탁 쳤던 경험이 있었듯, 소년 예수가 던진 말이기에 보다 긴장하며 듣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표현되었던 말의 원전을 살펴보면, 내 아버지의 집은, ‘내 아버지의 것들혹은 내 아버지의 일들로도 읽을 수 있다 합니다. , 소년 예수가 맹랑하게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메시지는 내가 있을 곳이 거기가 아니라, 바로 여기, ‘하나님의 일들 속에 있습니다.”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일은 무엇일까요? 오늘 저는 하늘뜻펴기의 제목을 어떤 조건이 평화를 만드는가?라고 정했습니다. , 맞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평화로 연결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평화가 무엇인가라는 것을 묻기 전에 평화의 선결조건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 바울하면 뭐죠? 편지죠. 지치지도 않는 우리의 바울은 골로새 교회 교우들에게 옥중에서도 편지를 씁니다. 바울이 썼든, 다른 이가 썼든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 편지가 왜 쓰였을까에 있을 것입니다. 골로새 교회 역시 유대교적인 예식, 관습, 대표적인 것이 할례겠지요. 교회에는 율법주의와 율법주의자들로 인해 많은 분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삶을 부정하는 철학이나 사상 등으로 언쟁이 잦았고, 혼란스러움이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울이 권면하며 강조했던 것이 온유, 오래 참음, 수용, 용서, 사랑, 그리고 평화였습니다. 이 언어들은 신앙인들이라면 이제는 너무 자주 들어 되레 감동이 없는 단어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언어들은 결국 어떠한 통념에 사로잡히거나, 변화가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분명 필요한 개념일 것입니다. 그리고 평화란 유대주의와 같이, 불변의 전통을 넘어서는 것이자, 세상의 원리와는 전혀 다른 그리스도의 뜻이라는 것 역시 우리는 잘 알고 있지요.

 

그런데 사람이 온유하고, 수용하고, 오래참고, 친절할 수 있으려면, 즉 평화를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예의나 예절만으로는 평화를 만들지 못합니다. 모든 이가 사이좋은 상태란 불가능하며, 만약 그러한 불가능한 일이 조직에서 일어났다면 이는 약자가 인내함으로써 가능한 것입니다. 온유하고, 수용하고, 오래참고... 이러한 것들을 힘이 없는 이들에게 강요하게 되면 이는 다시 폭력이 되고 맙니다. 약자들에게 폭력적이지 않은 상황이 되기 위해서는 약자의 인내가 아닌 강자의 양보가 있을 때 가능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역사적으로 강자의 양보로 평화가 실현되는 경우는 거의 없지요.

 

이쯤에서 원근법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사진1)

image01.png

 

그림이 보이시나요? 원근법의 창시자인 브루넬레스키가 원근법의 논리를 설명한 그림입니다. 관찰자는 성요한 성당을 보는 중인데요. 종이에 작은 구멍을 내고 거기에 눈을 고정시킨 상태에서, 거울을 왔다갔다 하면서 소실점을 찾는 모습입니다.

중세까지만 해도 신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았었지만, 르네상스 시대가 오면서 왜 눈에 보이지 않는 신만이 관점을 갖느냐? 나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겠다.”라는 생각이 사람들 속에 퍼져나갔고, 그 즈음에 발견된 원근법은 라는 시점으로 세상을 재편할 수 있게 하는 도구가 됩니다. 보티첼리, 다빈치, 미켈란젤로 모두 원근법에 기댄 작가들입니다. 이 원근법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객관적으로 그리고 합리적으로 재현하는 완벽한 도구로 인식되어졌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도 꽤 유효합니다. 그러나 원근법에는 여러 모순들이 있지요. 사진에서 보듯, 보는 이의 시선이 바늘구멍을 통해서 타자를 바라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세상을 보는 것은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고정되게 됩니다. 결국, 원근법은 객관성과 합리성의 기준이 즉 자의적인 것이 되고, 타자의 재현이 누군가에 시선에 의해 지배되고 있기에 권력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서구의 과학적 사고라 여겨지는 객관성과 합리성은 원근법으로부터 출발했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서구의 이러한 사고는 이 권력을 은폐하며 서구 밖 세상을 지배해 왔습니다.

 

모든 물질이 존재하는 이상 갈등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고, 변화되고 얽히고설킬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시선을 독점하는 사람들에 의해 나 외의 타자들은 고정되고, 재현된 대상으로 전락되고 맙니다. 물론 역설적으로, 그 원근법을 적용하려는 사람, 그 바늘구멍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 역시 그 구멍 앞에 고정되어버리겠지요. 신의 절대권력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시도는 르네상스시기에 와서도 결국에는 보는 사람의 관점대로 질서 정연하게 배치하는 되는, 결국 또 다른 절대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게 된 것입니다. 대내적으로는 시민 혁명과 인권을 외치면서도 대외적으로는 잔혹한 제국주의자가 되었던 서구의 오류는 이런 원근법 문화의 일방적 발전의 귀결입니다.

 

준비한 두 번째 그림이 이를 잘 설명해 줍니다. (사진2)

화면 캡처 2021-12-26 130029.png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가 쓴 책 인체비례론에 들어가 있는 그림인데요. 원근법의 부정적인 측면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원근법적 구도는 보는 사람(주체)가 보여지는 대상(객체)로 세상을 이분화시킵니다. 보는 사람이 만물의 척도가 됩니다. 이 그림에서 보는 사람은 서양, 백인, 남성입니다. 객체 쪽에 있는 인물은 능동성을 잃어버린 타자화 된 여성입니다. 타자화된 대상이 어떤 의도를 가졌는지, 어떤 상태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고, 그저 주체의 시각에서 재구성되어서만 표현될 뿐입니다.

 

우리는 시간을 멈출 수 있는 능력이 없기에 지금, 여기에 영원히 머무를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만 시간 속에서 흘러갈 뿐이고, 우리의 움직임에 따라 소실점도 달라집니다. 진실은 서로 다른 관점의 가능한 것들의 총합으로만 존재할 수 있지, 한 사람의 관점에서만 유일하게 잘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이진숙).

 

평화의 조건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평화는 진실이 가장 잘 보이는 위치와 방법을 찾기 위한 분투가 가능할 때만이 실현될 수 있습니다. 평화는 결국 고정된 관념이나 하나의 이데올로기 혹은 지배담론이 아닌, 아주 약하고 타자화된 것의 출현과 병합, 통합, 분절 등을 통해 변화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의 과정을 인정하는 행위를 타고 오는 것입니다. .

 

분명 골로새 교회에도 당권파과 비당권파가 있었을 것입니다. 당권파가 생각하는 고통과 비당권파가 생각하는 고통이 달랐을 것입니다. 당권파가 생각하는 정상과 비당권파가 생각하는 정상 역시 달랐을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 역시 용납하여 주고 용서하라고 권면하지 않았겠습니까? 저는 우리 교회에도 당권파와 비당권파가 존재하며, 여러분이 속한 조직에도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떤 갈등이 일어났을 때, 당권파는 그것을 비상사태라고 선언하며 계엄령을 내릴 수 있겠지만, 비당권파는 민중의 각성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이는 철학자 발터 벤야민의 역사철학에 대한 이해이기도 한데요, 그는 억눌린 자들이 일으키는 봉기를 비정상이나 혼란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지배자의 시선, 지배자의 역사관에 의존돼 있기 때문이라 밝히며 그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비당권파 운동의 한 예로 페미니스트들이 요구해야 하는 평화는 무조건적인 평화나 비폭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권력이 규정해온 평화의 개념을 재구성하는 일이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지예의 국힘당 합류는 평화만들기의 철저한 실패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진정한 혁명은 왕의 목을 친 때가 아니라, 오래된 습과 체제에서 배제돼온 존재들이 새로운 질서를 상상하는 바로 그때 도래하기 때문입니다(오혜진).

 

무작정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로 묶으려 한다면 그것은 폭력일 수 있습니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이 우리네의 역사와 일상에 얼마나 많은지요? 게다가 구조나 정치의 변화 없이 계속된 오래참음과 온유함의 요청이 전체주의적일 수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제가 몇 차례 이 자리에서 밝혔듯, 운동은 공감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 되었을 때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어린 예수가 말한 하나님의 집에 해당하는 일, 바울이 말한 공동체의 평화, 이를 이루기 위한 선결 조건으로서 횡단의 정치를 제안하며 말씀을 마치려 합니다. 이제 말씀드릴 횡단의 정치 내용은 장애학연구자 김도현 선생의 연구에 의존되어 있습니다.

 

횡단의 정치에서는 위치의 고정성에서 벗어나, 다시 말해 원근법과 소실점에서 벗어나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기본적으로 부분적이고 상황적인지식과 경험을 지닌다는 것, 누구나 어느 정도의 공백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 대화의 규칙이 됩니다. 이때 기억해야 할 두 단어가 있습니다. ‘뿌리내리기 rooting’옮기기 shifting‘입니다. 대화 참여자들은 각기 자신의 멤버십 및 정체성에 뿌리내기리를 하지만 동시에 다른 멤버십 및 정체성을 지닌 주체들과의 교류 및 공감을 위해 옮기기를 시도합니다. 이와 같은 형식의 대화를 추구하는 것이 횡단주의입니다. 횡단주의는 배제로 끝나버리는 보편주의나, 너랑 나랑은 다르니까 서로 간섭하지마,로 끝나는 상대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론이 됩니다.

 

이때 유의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옮기기의 과정이 자기중심을 부정하거나 포기하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이는 자신의 뿌리내리기와 자신이 가진 가치들을 잃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옮기기의 과정이 타자를 동질화하려는 것, 즉 내 편을 만들게 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횡단은 다른 집단의 구성원들과 대동단결하여 일괄적으로 함께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뿌리를 달리 내리면서도 자신과 양립할 수 있는 가치와 목표를 공유하는 이들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되기(들뢰즈, 가타리)의 정치와도 같은 맥락입니다. 되기의 정치를 쉽게말하자면 입장 바꿔놓고 생각해보기”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그간 계속해서 약자였던 사람들이 되어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소수자되기, 동물되기, 아이되기, 여성되기가 될 수 있습니다. 남성은 여성되기, 비장애인 여성은 장애인 여성 되기, 이성애 여성은 동성애 여성되기, 동성애 여성은 난민이자 동성애 여성 되기 등 소수자 개체 내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교회로 컨텍스트를 옮겨와 볼까요? 권한을 가진 자가 권한이 없는 자 되기, 오래된 교우가 새교우 되기, 남성 목사가 여성 전도사 되기, 청년이 노인되기, 발언을 할 수 있는 교우가 말주변이 없는 교우되기, 남성 장로가 교회학교 어린이 되기 등, 우리교회처럼 장로가 가진 권한이 특수한 상황에서는 평교우가 장로되기, 586 세대가 비정규직 취업준비생 되기 등..

 

이러한 횡단의 정치, 되기의 정치는 메시지가 메신저에 의해 선험적으로 결정돼버리는 과오를 범하지 않기 위한 노력입니다. 이 노력이 기반이 되어야만 비로소 사랑의 띄로도 묶일 수 있고, 평화가 우리 공동체를 지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 역시 이렇게 평화의 조건을 장황하게 말하고, 페미니스트로 살고, 젠더감수성을 말하지만, 장애인 비하 발언을 하거나, 서울 중심적 표현을 하거나, 아니면 후배 전도사님들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일을 진행하며 사과를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답니다. 저 역시 장애인이 아니고, 지방 사람이 아니고, 트렌스젠더가 아니고, 전도사가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기존 권력자의 언어에 포로가 되어 살기 때문에 죄성을 쉽게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지가 아니라 무지를 깨달아 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로이트는 나에게 가장 중요한 환자는 바로 나 자신이었다라고 밝힌바 있습니다. 이에 대해 여성학자 정희진은 모든 앎은 자신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보편과 중립, 진리를 계속해서 말한다면 그 사람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자신을 우주, , 과학 등과 동격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라 합니다. 즉, 평화의 조건은, ‘보편과 진리를 계속해서 말하는 사람 경계하기’, 그리고 보편과 진리의 중심에 있다고 믿어왔던 나 자신을 반성하기일 것입니다. 이것이 조건지어질 때, 우리의 용납과 용서는 비로소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한 해를 마감합니다. 한 해를 이끌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다시 묻습니다. 오늘의 향린은 우리가 기도하고 바랐던 향린이었습니까? 우리의 향린은 평화를 맞을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예수의 지혜와 키가 자라듯, 우리의 평화가 자라고 커가는 새해를 기다려 봅니다. 우리 각 사람이 평화의 조건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잠시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어린이들의 지혜와 키가 자라듯, 우리들의 평화가 자라납니다.

  한 해를 견뎌낸 이들에게 평화를 전합니다.

한 해를 다시 살아낼 모든 존재들에게

   평화의 인사를 건넵니다, 샬롬, 샬롬,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