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약속 위에 서서 (렘 31:7-14, 엡 1:3-14, 요 1:10-18)
2022.01.02. 성탄절 2 / 새해 주일
[새해의 약속]
새해를 맞아 어떤 계획을 세우셨는지요?
한 학년씩 진급하는 어린이들, 청소년기를 마치고 대학이나 삶의 현장에서 꿈을 펼쳐갈 푸른이들, 모두 보람 있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 신앙공동체를 이루는 각 가정에 평화가 늘 깃들고, 질병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교우들도 떨쳐 일어나시기를 마음 모아 빕니다. 특별히, 창립 70주년을 앞두고 광화문 시대를 열어가는 임인년, 올해 제직으로 임명될 138명 집사님의 마음에 소명감이 또렷하게 담겨서, 유무형의 교회를 잘 지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올해를 ‘검은 호랑이’의 해로 부릅니다. 열 개의 천간에서 임(壬)이란 글자는 ‘검은색을 띠는 물(水)’을 가리키고, 열두 개의 지지 중 인(寅)이란 글자는 호랑이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 의미를 조금 더 살펴보면, 앞의 ‘임’(壬)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지혜와 창조성이고, 다른 하나는 책임과 험난함입니다. 뒤의 ‘인’(寅)은 음양오행 가운데 목(木), 자라나는 나무처럼 무언가 시작하기 좋은 기운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임인년 올해에는 비록 삶의 여건이 험난하다 해도 곧게 서서 책임감을 펼쳐가면, 나무처럼 싹이 나고 열매 맺을 수 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올해 사회적으로는 코로나를 이겨내고 새로운 삶의 문화를 지어가고, 교회적으로는 광화문 시대를 알차게 준비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신년예배의 화두를 ‘약속’으로 잡았습니다.
성서에 나오는 신앙공동체는 늘 약속의 공동체였습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선물’로 받고, 그 약속에 자기 삶으로 ‘참여’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성서의 내용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약속의 내용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무슨 약속을 안고 사느냐는 것입니다. 성서도 이점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성서를 전체적으로 보면 커다란 변화가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이 성숙해지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이해도 바뀐다는 점입니다. 처음에는 자기중심적인 소원성취를 약속의 내용으로 삼다가, 점차 그 중심축이 하나님으로 이동하면서, 마침내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변화시키는 방향으로 전환합니다.
예를 들어, 신앙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아브라함과 야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은 ‘풍요와 번성’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약속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까지 이어져서 왕조 이데올로기로 표현되었습니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그와 같은 승리주의적인 약속은 계속되지 않았고, 결국 나라의 패망으로 인해 사라졌습니다. 새로운 약속이 필요했습니다.
분열된 왕조가 대결과 갈등으로 인해 피폐해져 갈 때 솟아난 예언 정신, 그리고 더 시간이 흘러, 민족 패망이라는 쓰디쓴 경험을 딛고 꽃핀 포로기의 신앙을 보면, 하나님의 약속은 더는 풍요와 승리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에게 주어진 약속이나,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주어진 약속은, 풍요와 승리에 관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에 관한 약속입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새 시대의 약속’은 아주 강력한 것이면서 동시에 매우 취약한 것입니다. 그것은 볼 수 없고 잡을 수 없어서 허상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만일 그 약속이 삶을 이끌 때는, 이 세상의 난관을 모두 넘어 진군하게 합니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약속이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과거 산업 문명이 만들어낸 치명적 결과를 우리는 코로나 사태와 기후위기로 절감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넘어서 나아가도록 이끄는 약속이 필요합니다. 옛 세계에서 경험한 고통과 슬픔, 그것을 씻어낼 지혜를 지닌 약속이어야 합니다.
[새로운 약속이 구성되는 곳 / 예레미야 31장 7~14절]
성서를 구성하는 종교적 세계관이 거대한 전환을 이룬 시기는 기원전 6세기 즉, 포로기입니다. 이 시기를 이끈 세 예언자 즉, ‘포로기의 삼총사’는 예레미야, 에스겔, 제2이사야입니다. 이들은 풍요와 승리로써 무언가를 더 쌓으려는 종교사상을 해체하고, 삶을 돌이키고 변화를 이끄는 전환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오늘 제1성서 본문 예레미야 31장은 ‘새로운 약속’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때가 오면,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유다 가문에 새 언약을 세우겠다. 나 주의 말이다. 이것은 내가 그들의 조상의 손을 붙잡고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오던 때에 세운 언약과는 다른 것이다. / 나는 나의 율법을 그들의 가슴 속에 넣어 주며,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렘 31:31-33)
과거의 약속은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돌판에 기록하거나, 할례를 한 몸에 표시되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약속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가슴에 담기고, 마음 판에 새겨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새로운 약속은 남에게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간직한 사람만이 꿈꾸는 것입니다. 외부적인 효과나 증거로는 그 약속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도록 안내하는 살아있는 지침일 때에만 감지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약속은, 그것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있어야 담깁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약속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은 역사에 대한 성찰입니다. 약탈과 경쟁, 갈등과 대립의 역사에 관한 성찰이 없이는 하나님의 약속을 담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새로운 약속’(new covenant)을 말하기 전에, 먼저 북 왕국 이스라엘의 회복(1~22절)과 남 유다의 회복(23~30절)을 말합니다. 그것이 31장의 전체적인 구조입니다.
오늘 본문 12~14절은 북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신탁(神託)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물 댄 동산과 같아서, 다시는 기력을 잃지 않을 것이다. 젊은이와 노인들이 함께 즐거워할 것이다. 내가 그들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놓고, 그들을 위로하리니, 근심에서 벗어나 기뻐할 것이다. 그때에는 내 좋은 선물로 내 백성을 만족하게 하겠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신탁이 전해진 역사적 상황입니다. 북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이 신탁이 전해진 곳은 멸망해가는 남 유다입니다. 북이스라엘은 이미 약 150년 전에 패망해서 사라진 때입니다. 그런데, 왜 북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선포가 여기 나오는 것일까요? 위기에 빠진 남녘땅에서 왜 북녘의 회복에 관한 비전이 먼저 제안되고 있는 것인가요?
저는 이 본문을 두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예레미야는 남녘 땅의 절망 속에서 먼저 북녘의 회복을 꿈꾸었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것은 멸망한 이웃 나라의 과거를 소환함으로써, 지금 무너지고 있는 자기 세계의 수치를 가리려는 의도는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봅니다. 그것은 북의 자매/형제를 저주했던 과거의 삶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요, 다윗 왕조 이데올로기에 흠뻑 취해서 자신들은 절대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거짓 예언자 하나냐와 같은 자칭 의인들의 관념적 잔치판을 걷어차 버리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남녘의 예언자가 북녘의 구원을 꿈꾼 이유는, 오랫동안 적으로 여긴 북녘에 대한 남녘의 저주를 부끄럽게 여기는 마음이요, 자신의 회복이 타자의 회복과 분리될 수 없다는 깨달음으로 보입니다. 그것이 멸망을 앞둔 남녘 땅에서 먼저 북의 회복을 선포한 이유였을 것입니다.
본문 묵상을 위한 마지막 질문은 이것입니다. 여기서, 회복의 약속을 받은 사람은 누구인가 하는 점입니다. 어떤 이들이 새로운 말씀을 가질 자격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과거에 하나님의 약속을 가진 사람은 율법을 준수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돌에 새기고, 책에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약속을 가슴에 담고 마음 판에 새길 사람은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옛 질서에서 고통을 겪은 사람들, 고통으로 얼룩진 삶의 흔적이 몸에 남은 사람들입니다. 본문 8절에 열거된 이들은 ‘눈먼 사람과 다리를 저는 사람’이요, ‘임신한 여인과 해산한 여인’이라고 말합니다. 옛 율법의 기준으로 보면, 모두 정상 사회에서 배제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바로 이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돌아올 새 약속의 주인공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을 가리켜 7절은 ‘남은 자’(sheerith, שְׁאֵרִית)라고 표현하는데, 예레미야는 이 약속의 주인공을 24번이나 반복해서 부르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렇게 전합니다. “그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돌아올 것이며, 그들이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을 인도하겠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특권 / 요한복음 1장 10~18절]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 다시 말해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부여됩니다. 그 약속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입니다. 이 특권은 사회적 신분이나 육신의 자격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13절을 보면, 하나님의 자녀는 “혈통에서나, 육정에서나, 사람의 뜻에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서 났다.”라고 말합니다.
이점에 대해 18절은 달리 표현합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은 자신이 마치 하나님의 진리를 모두 소유했다고 여기는 어리석음에 대한 비판입니다. 그들은 자신만을 선으로 간주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벽에 갇혀 있는 사람들입니다. 섬기기보다는 지배하려는 자들이 보이는 존재적 무지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 다시 말하여 진리를 얻을 수 있는 길은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통하는 것뿐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참여하는 것, 그리스도를 통하여 일하는 것이 그 길입니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14절의 성육신 사상입니다.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어디에 있는지를 묻습니다. 예수가 없는 어두운 세상에 절망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은 누가 인정해야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자기 눈에서 비늘이 벗겨질 때, 하나님에게서 난 은총의 세계가 보입니다. 그것이 요한의 가르침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자 하는 우리의 영적 갈망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 에베소서 1장 3~14절]
에베소서 본문은 하나님의 약속에 관한 바울의 증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세상 창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해 주셔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예정하신 것입니다.” (엡 1:4~5)
하나님의 자녀가 되리라는 약속, 이 약속에서 반복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편지에서 백번도 넘게 이 문구를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하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ἐν Χριστῷ)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신앙의 가장 큰 목표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삶은 단순하고 실제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내려놓고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배우지 못하면, 신앙은 헛것이 되고 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새로운 사람, 새로운 피조물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이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하고, 이웃과 평화를 이룬 삶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갈 때, 그리스도를 닮아 자신을 비우고 낮아질 때, 우리는 자신의 길을 더욱 뚜렷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모든 지혜와 총명을 넘치게 주신다’고 말합니다. (8절) 기독교 신앙의 참된 깨달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을 믿고,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며, 그분의 죽음을 본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깨달은 기독교적 각성, 예수로 인해 얻은 돈오(頓悟)입니다.
혼돈과 대결의 시대를 지나며 바울이 지녔던 믿음의 꿈,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 그것은 불가능한 욕망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구할 것은 성령입니다. 바울 역시 성령의 도움을 구하며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여러분을 구원하는 복음을 듣고서 그리스도를 믿었으므로, 약속하신 성령의 날인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은, 하나님의 소유인 우리가 완전히 구원받을 때까지 우리의 상속의 담보이시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십니다.”
새해를 맞은 우리 모두, 다시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서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삶을 헤쳐갈 수 있기를 빕니다. 우리가 온전히 구원에 이를 때까지, 성령께서 우리 모두의 삶을 지켜주시기를 빕니다.
잠시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새해의 새 약속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빕니다.
하나님의 약속 위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갑시다.
거룩한 영이 이끌어주시도록 자신을 내어주십시오.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 하늘의 은총이 우리 모두의 삶에 깃들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