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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소명 | 김희헌 | 2022-02-06

by 김희헌 posted Feb 06, 2022 Views 13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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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2-02-06

소명 (6:1~8, 고전 15:1~11, 5:1~11)

2022.02.06. 주현절 5.

 

대통령 선거가 한 달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교우들은 현재 상황을 어떻게 보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불만족스러운 느낌입니다. 한국사회에서 대통령 선거는 국가 비전이 재정립되고, 민주적 열망이 솟구치는 계기인데, 이번 선거는 그런 비전과 열망이 잘 드러나지 않는 듯합니다. 국민 다수가 이번 선거를 정권 교체의 관점에서 본다는 점도 당혹스럽습니다만, 그에 앞서 촛불 혁명으로 세워진 문재인 정권에 대한 과거 지지층마저 현 정부의 무능과 실책에 대한 심판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태에 맘이 착잡합니다.

정책을 시행하는 담당자들의 항변도 있겠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사태에 정부가 비교적 잘 대처해 왔고,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도 우리나라가 경제적/문화적으로 국제사회에서 위상이 높아진 것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촛불 정부를 자처한 현 정권이 도대체 무엇을 하였는지에 대한 냉정한 평가도 있습니다. 정권 초기부터 집중했던 남북관계는 결국 공염불에 그쳤고, 검찰개혁을 바라는 열망은 오히려 거꾸로 된 결과만 낳아 검찰 대통령 후보라는 적반하장의 현실을 초래했으며, 성 평등 관련 정책은 미숙하게 처리되어 성별 갈등과 세대갈등으로 표출되는 아이러니가 생겼습니다. 그런 대립과 갈등 위에서 보수정치의 포퓰리즘이 득세하는 현실을 보면, 환멸의 감정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현 상황에 대한 부정적 감정에 휩싸이기보다는 우리 사회가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지 되돌아볼 필요도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이 현 상황에서 진보적 가치에 대해서 회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청률 40%에 이른 지난 목요일 대통령 후보자 TV 토론회에서 진보적인 목소리는 듣기 어려웠습니다. 서로 옳다는 주장은 있지만,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가치를 찾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우리는 묻게 됩니다. 도대체 진보적 가치는 무엇인가? 불평등의 해소인가? 억압으로부터의 자유인가?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평등과 자유의 이상이 인류의 공동체적 삶 속에서 구현되는 데에는 고려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10년 전 미국에서 일어난 <Occupy Wall Street> 운동을 이끈 사람 중 한 명이 David Graeber라는 인류학자입니다. 그는 당시 잘 알려진 구호 우리가 99%”(We are the 99%)를 제시하고, 1%에 불과한 소수에게 부가 편중된 현실을 비판하며 부채탕감 운동을 주도한 사람입니다. 그가 지지난해 60이 채 되지 않은 나이에 때 이른 죽음을 맞기 전 마지막으로 쓴 책은 방대한 인류학적 연구를 바탕으로 서구의 진보주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재해석한 것입니다. (D. Graeber and David Wengrow, The Dawn of Everything: A New History of Humanity, 2021)

그는 이 책에서 서구의 민주주의 사상이 실상은 매우 협소한 것으로서, ‘땅을 확보하고 재산을 늘리는 것을 문명으로 이해한 정복주의 사고와 얽혀있다고 비판합니다. 한 예로, 16세기 서구 정복자들의 활동보고서를 보면, 자유롭고 평등한 삶을 살아가는 원주민들의 모습을 가리켜 야만인들의 사악한 자유’(the wicked liberty of the savages)라고 평가하는데 (DW, 43-44), 그것은 본질적인 가치에 따라 살아가는 공동체를 파괴하고 지배하려는 욕망이 만들어낸 왜곡이라 하겠습니다.

저자는 인류 사회의 불평등 역시 특정 시대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인간 삶에 늘 있던 문제였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평등한 공동체를 세우려 한 인류의 오랜 실험에 주목하자고 제안합니다. 그는 자유와 평등에 관한 이상이 서구적 지배욕에서 벗어난 새로운 상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데, 그 상상은 공동체의 감각과 연관된 듯합니다. 역사의 진보는 개인의 탁월한 성취보다는, 공동체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데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하는 소명이라는 주제와 관련됩니다. 소명(召命)이란 부름을 받음에 관한 의식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런 의식은 오늘날에는 불필요한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역사의 부름이라는 시대적 소명의식은 이제는 낡은 유물처럼 느껴지고,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종교적 소명 역시 탈종교적인 문화 속에서 멀게만 느껴집니다.

이런 분위기는 신성함과 세속성이 이분화되고, 소명이 직업화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성직자나 수도자의 삶으로 종교화된 소명은 그것이 거룩해지는 만큼 세속적인 삶으로부터 유리된 종교의 형식 기호처럼 작동합니다. 세속적인 직업(vocation)으로 전환된 소명은 저마다의 욕망을 실현하는 알리바이처럼 태연하게 기능하면서 본래의 의미를 잃곤 합니다. 오늘의 세계에서 소명을 얘기하는 것은 이미 진지한 의미를 잃어버린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사회적 존재인 한, 그 삶에 늘 소명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인간은 자신만을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면 오히려 참된 자기를 잃어버리는 특이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의 목적이 되고 타인이 나를 위한 수단이 될 때, 그 인생은 비참해집니다. 인간은 결코 자기가 자신의 모든 목적이 될 수 없는 독특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모두 더 나은 자신을 갈구하고, 더 충만한 삶을 추구합니다. 삶이 힘들어도 멈추지 않는 물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거기서 소명이 태어납니다. 이 소명은 가장 깊고 진정한 자신의 갈망이자, 자기 안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목소리입니다. 소명은 그렇게 개인의 각성과 세상의 갈망이 어우러지는 곳에서 태어납니다. 인간은 누구나 크든 작든 소명을 품고 있으며, 모든 소명에는 자기를 둘러싼 세계에 관한 감각이 담겨 있습니다.

새해 첫 달이 지나가며 교회 활동이 본격화되고 있습니다. 이번 주일에는 교회학교 교사 모임이, 다음 주에는 부서장 워크숍이, 그다음 주부터는 신임집사 교육이 이어집니다. 이번 달은 소명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는 기간이 될 것입니다. 오늘 성서 본문의 공통주제는 소명입니다. 먼저 성서의 대표적 소명 기사인 이사야서 6장의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비로소 들려온 목소리 / 이사야서 61~8]

이 이야기는 이사야가 거룩한 체험을 하고, 예언자로서 소명을 갖게 된 경험을 소개합니다. 소명에 관한 대표적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간혹 특별한 체험을 하곤 합니다. 평온하게 이어지던 익숙한 삶이 갑자기 낯설어지고, 오래 꾼 꿈들이 의미를 잃은 것처럼 느껴질 때입니다. 더욱 참된 자신을 찾고자 하는 때입니다. 그때 우리는 유한한 삶 속에 무한한 무엇이 다가와 말을 걸고, 일상의 틈바구니에서 성스러운 무엇인가 터져 나오는 것 같은 경험을 합니다.

그것이 의미 있는 체험이라면 각성과 갈망이 동반됩니다. 한편으로는 자기 삶의 한계를 느끼는 각성이 일어나고, 다른 한편 새 삶을 향한 갈망이 솟아납니다. 아무렇지 않던 삶이 덧없는 것처럼 느껴지다가, 거룩한 갈망이 어두운 마음에 빛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을 체험하면서 멍하니 황홀경에 빠져 머물지 않고, 삶을 각성하며 고백합니다. ‘이제 내가 화를 입고 망하게 되었구나. 내 입술이 더러울 뿐만 아니라, 입술이 더러운 사람들 틈에 끼여 살고 있구나.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이렇게 자신의 어두움을 보고 삶을 재발견할 때, 치유가 시작됩니다. 하늘 제단에 타는 숯불로 악한 입술과 죄 된 삶이 씻겨지는 체험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씻겨진 그 마음에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리고, 하나님의 탄식을 느낍니다. 이사야는 다음과 같은 목소리를 듣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하나님의 이 탄식을 듣고, 이사야가 대답합니다. “내가 가겠습니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의 이 소명 기사는 종교적 체험에 관한 전형적인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찾는 것개인의 소명을 식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이사야의 종교 체험은 두 가지 특징을 갖는데, 그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그것은 자기 삶의 재발견이요, 또한 소명의 분별입니다.

이사야의 이 체험은 신비한 체험입니다. 그것은 세계를 더욱 깊이 이해하게 하는 신비요, 소명이 솟아나게 하는 신비입니다. 가공된 신비는 밝혀지면 사라지지만, 이 거룩한 신비는 밝혀질수록 더욱 또렷해집니다. 그릇된 욕망으로부터 참된 필요를 구분하고, 관습적인 목소리에서 양심의 부름을 구별해냅니다. 이 소명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거룩한 빛이 비친 마음에서 발견되는 참된 자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된 자신을 발견할 때 비로소 들려오는 하나님의 목소리, 그것을 들은 이사야는 인간의 가장 정의로운 정신이라고 할 예언의 역사를 펼쳐갑니다.

 

[소명을 낳는 깨달음 / 누가복음 51~11]

소명에 관한 또 다른 이야기를 복음서 본문에서 봅니다. 누가복음 5장에 나오는 이야기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갈릴리 바다에서 벌어진 기적 사건으로 읽느냐, 아니면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는 소명의 이야기로 읽느냐에 따라 그 가르침은 전연 달라집니다.

이야기 배경은 이렇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갈릴리 호수로 찾아왔습니다. 이들은 삶의 고통과 좌절을 안고 있는 갈릴리 민중(오클로스)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셨을까요? 누가는 그 가르침을 갈릴리 어부들의 삶 속에서 찾아냅니다.

갈릴리 바닷가에는 나중에 예수의 제자가 될 어부들이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보시오! 그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베드로는 미심쩍었겠지만, 그의 말을 따라 했습니다. 그러자,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가 많이 잡혔고, 고기를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사태가 무얼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만일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어떻게 거기에 고기가 많은 줄 아셨습니까, 참 용합니다.’ 하고 말했다면 이 사태를 이해하기 쉬울 텐데, 베드로는 엉뚱한 고백을 합니다. ‘주님, 나에게서 떠나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그런데, 예수마저도 낯선 말씀을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어부들은 배를 뭍에 댄 뒤에 모두 버리고 예수를 따릅니다.

이 이야기를 기적 사건으로 보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엄청난 고기를 잡게 된 베드로가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한 것도 그러려니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것이라는 말에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른 것도 현명한 선택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만일 베드로가 더 큰 기적을 바라고 예수를 따랐다면, 그는 잘못 판단했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소명에 관한 읽으면, 베드로의 깨달음이 무엇인지, 그가 걷게 될 새 삶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든 큰 깨달음이 그날 아침 베드로에게 있었는데, 그것은 자기 삶에 관한 각성입니다. 베드로는 밤새도록 고기를 잡고자 노력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물 가득 잡고 보니, 그것이 자신이 탄 배를 가라앉게 만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거기에서 큰 깨달음을 얻습니다.

베드로가 주목한 것은, ‘배를 가득 채운 엄청나게 많은 고기가 아니라, ‘고기를 가득 채웠더니 배가 가라앉기 시작한 현상입니다. 그런 점에서, 9절을 오역하지 않으려면 헬라어 원문에는 없는 엄청나게 많은이라는 말을 빼고 읽어야 합니다. 그들이 놀랐던 것은 많은 고기가 아니라, 자신들이 해온 고기잡이’(the catch of the fish) 방식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추구한 목표의 달성이 도리어 자기 존재 기반을 침몰시키고 있다는 사실에 관한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옛 삶을 버리고 새 소명을 얻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는 예수의 부름에 응답한 베드로는 예수 공동체의 반석과 그루터기가 되었습니다.

누가는 베드로의 이야기를 통해서 소명을 낳은 참된 깨달음이 무엇인지를 들려줍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이들이 거치게 되는 삶의 전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소명을 품고 한 걸음 / 고린도전서 151~11]

고린도전서 15장 본문은 바울의 부활체험과 거기에서 생긴 소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여기 표현된 바울의 소명은 작은 자로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먼저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을 열거합니다. 그의 증언을 따르면, 부활의 그리스도는 먼저 베드로에게 나타났고, 그다음에는 열두 제자들에게, 그리고 오백 명이 넘는 형제자매들과 동생 야고보 및 다른 사도들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자신과 같은 가장 작은 사도에게도 나타났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사도로 불릴 자격도 없는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런 겸손은 그리스도를 증언하려는 그의 끈질긴 소명을 드러냅니다.

다른 편지에서 바울은 매우 논쟁적인 사람으로 등장하는데, 이 편지에서는 자신의 소명을 가장 낮은 자리에 위치시킵니다. 그것은 고린도라는 지역이 지닌 특성을 반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고린도는 로마가 해방 노예들을 정책적으로 이주시켜 만든 도시였습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신분과 명예를 유달리 예민하게 생각했고, 경쟁자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무슨 짓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좋지 못한 평판을 들었습니다. 문화적 치장을 했지만, 신분과 안전에 목말랐던 그들은 늘 정신적 공허감에 시달렸습니다. (리차드 호슬리, <고린도전서>, 36)

바울은 이 경쟁적인 도시에 1년 반을 머물면서 공동체를 건설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떠난 후에 화려한 언변을 가진 알렉산드리아 출신 아폴로의 등장으로 공동체는 분열과 갈등을 겪게 됩니다. 바울은 여러 번 편지를 써 보냈는데, 우리가 읽은 편지는 그것을 묶은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자신의 작음을 이야기합니다. 삶을 깊이 성찰한 지혜가 여기 담겨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섭리와 사건 속에서 자신은 작은 존재요, 작아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자신을 크게 여기며 공동체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가장 작은 자가 되어 공동체를 풍요롭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 것입니다. ‘가장 작은 자인 자신을 찾아오신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가장 작은 사도로서의 소명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여기에는 혼탁한 세계의 모호함을 이겨내는 고요한 용기와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12천 킬로미터가 넘는 세 차례의 선교여행도 이런 소명을 품고 옮긴 한 걸음 한 걸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소명이라는 주제로 세 본문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소명이 사라진 곳에서 다시 시작할 지점은 자기 자신입니다. 구원의 길을 갈망하는 이사야의 마음에 들려온 하나님의 목소리, 가라앉고 있는 삶의 위기를 깨달은 베드로에게 들려온 예수의 목소리는 깨달은 마음에 비로소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부활한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해 스스로 작은 자가 되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간 믿음의 사람들처럼, 올 한 해 우리의 삶과 섬김이 복되기를 바랍니다.

잠시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내가 누구를 보낼까?’ 하나님의 탄식을 듣고, ‘나를 보내소서하고 대답한 이사야의 고백이 우리 삶에서 지어지기를 바랍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시는 예수의 목소리를 듣기까지 지난 삶의 위기를 깊이 돌아본 베드로의 깨달음이 우리 안에서 발견되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소명을 품고 낮은 자 되어 발검을 옮긴 바울의 여정이 우리 삶에서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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