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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광야의 길, 사막의 강 | 김희헌 | 2022-04-03

by 김희헌 posted Apr 03, 2022 Views 282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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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2-04-03

광야의 길, 사막의 강 (43:16~21, 3:4b~14, 12:1~8)

2022.04.03. 사순절 (5)

 

석 달 만에 대면 예배를 재개할 수 있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코로나 사태의 정점을 거의 지나가면서, 이제는 지역 풍토병(endemic) 수준으로 관리하는 단계에 이르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옵니다. 여전히 위험요소가 남아 있어서 예배참여자를 60세 이하로 제한했습니다만, 머잖아 자유롭게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계절의 변화도 뚜렷합니다. 날씨가 풀리고 꽃망울이 터지면서 여기저기서 봄이 피어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삶은 아직 봄의 기쁨을 느끼기 힘든 것 같습니다. 최근 장애인 이동권에 관련한 논란은 차별과 혐오의 단층선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대통령 선거 이후 중요하게 된 사회적 통합의 문제는 따뜻한 봄기운과는 멀게 느껴집니다.

역사를 길게 보면, 진실에 대한 왜곡이나 차별과 혐오는 결국 극복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오늘 74주년을 맞은 4.3항쟁입니다. 수만 명의 양민을 학살하고도 이념적으로 정당화된 긴 어둠의 시대도 있었지만, 이제는 역사의 진실을 말해주는 사건으로 이해됩니다. 물론, 4.3항쟁의 과제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평화와 통일을 향한 꾸준한 발걸음으로 그 뜻을 이루어가야겠습니다.

고통과 억압의 시대를 지나면서도 시편의 시인은 사랑과 진실이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춘다라고 노래합니다. (85:10) 교우 여러분은 지난 겨울을 어떻게 보내셨는지요? 저에게 지난 몇 달은 마치 어두운 밤을 지나는 것만 같았습니다. 어긋남과 좌절로 신음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혼자만 겪는 문제가 아니라 대부분이 겪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어려움을 만납니다. 출생에서 노년에 이르는 동안, 사랑과 기쁨 못지않게 상실과 고통을 경험하고, 사회적 불의나 잔인한 사건을 통해 죽음의 파괴적 힘과 마주치곤 합니다. 그래서, 인생이 마치 사막과 같은 삶을 살다가 잠시 오아시스에서 생수를 마시고, 또 광야의 길을 걸어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욕망과 이상 사이에서 갈등하기도 하고, 명분과 믿음 사이를 오가며 갈라진 마음을 꿰매고 비틀거리며 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순절 기간이 더욱 간절하게 느껴집니다. 사순절은 분산된 관심을 거두고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시간입니다. 이 신앙의 절기에 우리는 어두운 밤을 침묵과 인내 속에서 보내며, 믿음의 꽃을 피우는 삶을 그려보게 됩니다.

 

[유월절을 앞두고 생긴 사건 / 요한복음 121~8]

오늘 복음서 본문 요한복음 12장은 의미심장한 말로 시작합니다.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가셨다. 그곳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 가운데에 살리신 나사로가 사는 곳이다.”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요한복음은 유월절을 세 번이나 언급하며 강조합니다. 유월절은 노예살이에서 해방된 원초적인 구원의 경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요한복음은 그 경험을 세 가지 사건으로 묘사합니다. 2장에서는 장사꾼의 소굴이 된 성전을 다시 하나님의 집으로 회복하는 사건이 나오고, 6장에서는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인 이야기를 통해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은총의 사건을 기억하게 하며, 12장부터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오늘 본문은 세 번째 유월절에 관한 이야기의 시작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께서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의 집을 방문한 일로 시작됩니다. 나사로는 죽었다가 예수의 부름을 받고 다시 살아난 사람입니다. 한편으로 그는 예수가 가진 생명력을 상징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살아나자 예수를 죽이려는 음모가 시작되었으니 (11:53), 나사로의 소생은 역설적으로 예수의 죽음을 예고합니다.

이런 미묘한 상황에서, 요한복음은 나사로의 집에서 벌어진 한 사건을 소개합니다. 그의 동생으로 알려진 마리아가 무려 노동자의 1년 치 임금에 해당하는 비싼 향유를 예수의 발에 모두 쏟아붓고 자신의 머리칼로 닦는 특이한 행동을 한 것입니다. 과도하게 보이는 마리아의 행위는 현대인의 눈으로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요한복음은 이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비슷한 이야기를 다룬 누가복음은 여인의 도덕성을 언급하며 예수의 특징을 소개합니다. (7:36~39) 요한복음은 그런 윤리적인 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대신,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사용했어야 한다는 불평을 다룬 마가복음의 이야기(14:3~8)를 각색하여, 사건을 깊은 곳으로 끌고 갑니다.

요한복음에서 그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은 가룟 유다입니다. 유다는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왜 낭비하냐고 그럴듯한 명분으로 마리아를 비난합니다. 본문은 그가 실제로는 가난한 사람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돈 자루에 욕심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렇지만, 그 설명이 단순히 유다를 비난하기 위한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주목할 것은 예수의 말씀입니다. “그대로 두어라. 그는 나의 장사 날에 쓰려고 간직한 것을 쓴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이 발언은 그 의미를 쉽게 알기 힘든 일종의 아포리아(aporia)입니다. 만일 그 의미를 가난한 사람에 대한 돌봄보다 자기 죽음이 더 중요하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편협한 해석이 됩니다. 또한, ‘늘 있는 일상적인 일보다는 특별한 죽음의 사태에 주목하라는 뜻으로 본다면 빗나간 해석이 됩니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요한복음이 마리아의 행위와 유다의 주장을 대비시키면서, 동시에 하나의 이야기로 묶어 놓은 의도를 생각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분명히, 마리아는 헌신적인 믿음을 보여주고, 유다는 가식적인 믿음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는 방식에 관한 암시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가르침이 마리아에 대한 칭찬유다에 대한 비난에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만일, 뒤이어질 예수의 죽음이 제자 유다의 배신까지 품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 이야기를 예수의 죽음 앞에 세워진 인간의 두 모습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 안에도 이 두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 사건에 비추어 자신을 돌아보는 신앙인의 성찰이 오늘 빌립보서 본문에 잘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어떻게 세워지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도약하는 지점 / 빌립보서 34b~14]

빌립보서 3장 본문은 바울의 자전적인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그는 자신의 자랑거리를 열거합니다. 신분으로나 학식으로나 종교적 열성으로나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당시 사회에서 내세울 만한 조건을 두루 갖추었습니다. 하지만, 자기 신념대로 살다가 삶의 파국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깊은 고민을 통해 예수를 향한 길을 걸었습니다. 사회적인 평판을 얻는 삶이 아니라, 예수를 향한 삶을 살면서 마침내 예수가 가진 믿음에 이르고자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이 참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고백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얻는 것입니다. 예전에 이로웠던 것을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고자 한다고 말합니다. 삶의 목표가 분명해진 것입니다. 그가 각성한 지점,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진 정체성을 10절과 11절에서 표현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바울의 이 고백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향해 심각한 물음이 되어 돌아옵니다. 예수를 위해 사회적 명성을 버릴 수 있는가?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해 경제적 부유함을 포기할 수 있는가? 정치적인 열망에 앞서 예수의 명령에 복종할 수 있는가? 이런 거대한 물음 앞에 설 때,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됩니다. 이 믿음의 도전을 진지하게 안고 살아갈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한 걸음씩 도약하게 됩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가는 여정 가운데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것은 완성된 지점에 이른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름을 따라 끊임없이 달려가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현실과 희망 사잇길의 믿음 / 이사야서 4316~21]

성서에서 믿음의 도약이 크게 이루어진 시기가 있습니다. 포로기입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땅과 집, 가족과 재산, 심지어 하나님까지 잃고 몸부림칩니다. 큰 상실을 경험하고 깊은 어둠을 사는 사람들에게 시대의 말씀을 전한 예언자가 제2이사야입니다.

그는 오늘 본문에서, 희망을 잃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먼저, 성서의 공동체가 가진 기억과 정체성의 원점이라 할 수 있는 출애굽 사건, “바다 가운데 길을 내고, 거센 물결 위에 통로를 낸하나님의 사건에 대한 기억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억의 소환만으로는 현실의 어둠을 몰아낼 수 없었습니다. 그의 예언이 현실의 고통을 외면한 신기루가 되지 않으려면, 어둠 깊은 포로기의 현실이 고려돼야 했습니다. 거기에 제2이사야의 고민이 있습니다.

현실의 어둠은 깊고, 모든 것을 잃은 상황은 외면할 수 없는 조건입니다. 그 옛날 이집트 군대가 홍해를 건너다 멸망했던 것과 같은 일들이 이제는 자신들에게 벌어진 것만 같습니다. 그 삶은 마치 꺼져가는 등잔 심지같이위태로운 상황입니다. 여기서 이사야는 희망의 상징을 던집니다. 그것은 새 일을 펼칠 하나님의 섭리를 상징하는 광야의 길, 사막의 강입니다.

광야의 길, 사막의 강, 이 상징은 어둠 깊은 현실에 비춰보면 공허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현실과 희망의 간격이 가장 멀어진 포로기에 매우 정화된 신앙이 탄생합니다. 믿음의 길을 걷는 사람들의 마음에 영원한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 솟아오른 것입니다.

 

[어둠 속의 믿음, 영성의 구조]

영적인 삶에는 경이로움이 찾아오기도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소명의식이 흔들립니다. 그렇다고 믿음의 길에서 손쉬운 해결책은 없습니다. 삶의 관심은 다양하고, 복잡한 관계 속에서 진리의 길은 모호합니다. 그러다 보니, 저마다 진리를 파편적으로 획득하여 자기만족에 이르는 정신승리가 습관이 되기도 합니다.

요즘과 같은 인터넷의 세계에서, 삶의 모호성은 손쉬운 정보로 대체됩니다. 영적 묵상과 성찰의 토양이 되는 인생의 깊이나 진실의 무게 등은 자리할 공간이 많지 않습니다. 정서를 만족하게 하는 즉자적인 정보에 민감한 시대입니다. 종교도 그렇게 간편한 답을 얻는 데 익숙해지면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역설적이지만, 자기 마음을 굳게 지키려면, 진실이 잡히지 않는 모호함의 공간을 확보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럽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난 16세기, 가톨릭 수도원 안에서 개혁을 펼친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요한’(1542~91)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신비주의 영성가입니다. 그는 자신의 영적 체험을 어둔 밤이라는 글로 기록했습니다. 기도로 진행한 영적인 여정에서 체험한 것들이기 때문에, 근대의 합리주의적 지성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어둠의 길을 단지 고통의 길이 아니라, ‘없는() 이라고 합니다. 어둠 속 없는 길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영적 여정에서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어두운 밤을 지나는 것 같은 경험을 합니다. 요한은 보고 들은 정보를 통해 얻은 감각적 경험이 혼란에 빠진 것을 첫 번째 어두운 밤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깊은 어둠의 경험, 이성의 분석과 판단이 완전히 빛을 잃고 내면이 깊은 암흑에 잠긴 두 번째 밤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마저도 어둠에 잠긴 밤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 신앙의 밤은 어둠뿐만 아니라 빛을 불러오는 밤이라고 말합니다. 암흑 깊은 이 두 번째 밤에, 신앙은 어둠을 경험하게 하는 원인이지만, 동시에 어둠 속에 있는 영혼에게 빛을 가져다주는 길이 되기도 합니다. (십자가의 요한, 가르멜의 산길, 109-115)

우리는 살아가면서 가까운 사람을 잃기도 하고, 예기치 못한 위기와 혼란을 겪으며, ‘어두운 밤과 같은 현실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잠정적 혼란은 영적 여정의 한 차원이라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초대에 깨어나기까지 더 깊이 걸어가야 할 여정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광야에도 길이 있고, 사막 같은 삶에도 강이 흐릅니다. 그것을 찾고 마시며, 힘을 내어 그리스도의 사람으롯 깊이 있는 삶을 살아갑시다.

 

사순절이 깊어갑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믿음도 깊어집니다. 믿음이 깊을수록 빛의 힘도 커질 것입니다. 겨울 가고 봄이 오듯이, 수난절이 부활절로 이어지듯이, 우리의 삶도 무르익어가기를 기원합니다.

침묵으로 기도합시다.

 

[파송사]

어두운 밤을 지나던 포로민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내가 새 일을 하려고 한다. 이 일이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겠다.”

사순절을 지나며, 광야의 길, 사막의 강을 발견하는 믿음의 지혜가 우리 안에 솟아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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