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을 믿습니까? (행 10:34~43, 고전 15:19~26, 요 20:1~18)
2022.04.17. 부활주일, 4.19혁명기념주일, 장애인차별철폐주일
올해 부활주일에는 모두 모일 수 있어서 무척 기쁩니다. 오랫동안 온라인으로 뵙다가 직접 만나 함께 예배드리게 되어 감격스럽습니다. 3년간 이어진 코로나 사태도 거의 끝나는 것 같지요. 내일부터 사회적 거리두기도 끝나고 예전 일상을 거의 회복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신앙공동체의 삶도 다시 피어나기를 기대합니다.
오늘은 부활주일이자 ‘4.19혁명기념주일’이요, ‘장애인차별철폐주일’입니다. 부활의 봄이 꽃처럼 피었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사회적 고통과 몸부림치는 역사의 꿈이 담겨있습니다. 지난 대통령선거 이후, 민주주의의 위기가 시작되고 사회적 갈등이 커지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기에, 봄꽃에 취해 있을 수만은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예수 부활의 의미를 더욱 깊이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오늘 하늘뜻펴기의 제목을 ‘부활을 믿습니까?’라고 정했습니다. 부활주일 아침 경건한 마음으로 예배드리러 온 분들에게 던진 물음치고는 엉뚱한 것 같습니다. 부활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이 자리에 있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물음은 언제나 우리를 일깨우는 도전이 됩니다. 그래서,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 부활을 믿습니까?
저에게 신학적 영향을 크게 주신 노(老) 신학자 한 분은 최근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50년간 신학을 연구하고 가르쳐왔는데, 마지막 남은 물음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왜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는가?’ 이다.” 이 물음은 단지 장소를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겼다는 말이 아닐 것이고, 죽음의 자리로 묵묵히 들어간 예수의 살신성인(殺身成仁)에 대한 찬양도 아니라고 봅니다. 그것은 죽음에서 부활에 이르는 동선(動線), 그 신비로운 여정에 담긴 깊은 의미를 어떻게 증언할 것이냐? 하는 간절한 물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간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지 ‘믿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라고 말해 왔습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믿는다고 해서 없는 부활이 생겨날 리도 없겠지만, 그리스도의 부활을 따라 사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살아있다면 바로 그를 통해서 부활 세상이 열려갈 것이라는 믿음이 담긴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죽음의 무게를 상징하는 십자가, 그것을 지고 하나님의 품에 이르기까지 부활의 언덕을 오르는 삶에는 ‘평화에 대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그 목마름이 ‘왜 예수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는가?’라는 물음에 담겨있다고 하겠습니다. 그 물음은 한 신학자의 마음에 머물지 않고, 오늘 부활주일 아침 우리 마음에도 맺혀있습니다.
[베드로 증언의 핵심 / 사도행전 10장 34~43절]
사도행전 10장의 본문은 베드로가 로마군인 고넬료의 집에서 한 설교의 결론부입니다. 사도행전의 맥락을 보면, 이 이야기는 예수에 관한 믿음이 예루살렘을 넘어 세계 각처로 퍼져나가는 과정에서 생겨난 기록입니다. 이들이 모인 곳은 가이사랴(Caesarea), 헤롯이 로마 황제(Caesar)를 위해 지어 바친 도시입니다. 로마의 식민통치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당시 수도로 삼고 군대를 주둔시킨 살벌한 자리에서, 베드로는 예수를 증언하는 위험한 일을 합니다.
베드로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로마군인 고넬료가 초청했을 때만 하더라도 베드로는 가기 싫었습니다. 이방인과 섞이는 것이 못마땅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도하는 중에 ‘가라’는 하늘의 말씀을 듣고 고넬료의 초대에 응하여 그 집에서 이방인들과 만납니다. 이것 자체가 하나의 사건입니다. 자신의 신념체계에서 가장 굳건한 ‘율법에 관한 믿음’을 해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전한 내용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가 전한 이야기 가운데, 오늘날에는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대목이 믿기지 않는 일처럼 느껴지겠지만, 당시에 베드로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들에게 놀라운 것은 다른 대목이었을 것입니다. 로마 식민지에서 빈번했던 민란으로 인해 한 번에 2만 명이 죽기도 했던 가이사랴에서 ‘나무에 달려 죽은’ 사람의 이야기는 그리 큰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또한, 죽음의 운명을 극복한 영웅들의 신화에 익숙한 헬레니즘 세계의 시민들에게 ‘한 유대 청년의 부활’이란 관심을 끌기 힘든 작은 에피소드에 불과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전하고자 한 이야기의 핵심은 무엇이었을까요?
오늘 사도행전 본문 내용 가운데 당시 사람에게 가장 충격적인 내용은 아마 36절일 것 같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평화를 전하셨다.”라는 내용입니다. 그리스 여신의 이름을 딴 평화 에이레네(Εἰρήνη), 로마 시대에 라틴어로 재번역된 ‘팍스’(Pax)는 월등한 무력으로 진압된 평정 상태로 여겨졌습니다. 그렇기에, 평화가 나무에 매달려 죽은 사람을 통해서 온다는 베드로의 해석은 로마 군인의 식솔들에게 꽤 충격적인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 증언은 고넬료의 집에 모인 사람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도전이 되고, 인류가 살아가는 동안 계속되는 물음일 것입니다. 베드로가 전한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증언, 그것은 평화의 길로 부르는 초대입니다. 그 초대는 예수께서 산상설교에서 하신 말씀을 따른 것입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불릴 것이다!’ 이 말씀에 비추어보면,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은 단지 믿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라는 말이 더 분명해집니다.
[바울이 이해한 부활 / 고린도전서 15장 19~26절]
우리는 고린도전서에서 예수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애쓴 사람을 봅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그가 이해한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세상 죽음의 질서를 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싸운 마지막 대상을 ‘죽음’(θάνατος)이라고 말하며, 예수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인 부활을 가리켜 ‘잠자는 이들의 첫 열매’라고 표현합니다.
바울에게 부활은 믿음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삶의 좌표였습니다. 그는 본문이 시작하자마자 독특한 말을 전합니다. 그것은 고린도 교우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대변합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 세상에만 해당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를 깨닫는 것에 어쩌면 신앙의 운명이 걸려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 세상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에게 부활의 목표가 없다면, 우리는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고 말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부활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저마다 나름대로 부활의 의미를 말합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의 부활을 문자 그대로 믿는 것을 참된 믿음으로 이해하곤 합니다. 문자주의 교리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 단계의 신앙을 가리켜,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하는 젖먹이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고전 3:1, 13:11)
성인이 되어서도 이런 단계에 머물면, 관념적인 교리논쟁에 휘말려 공동체를 갈라놓는 분파주의에 빠집니다. 고린도 교회는 ‘나는 바울파다, 나는 아폴로파다’ 하면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찢어놓았습니다. 한국 장로교회도 그러했습니다. 여전히 많은 교회가 근본주의 신학에 사로잡혀 그리스도의 부활을 교리로 이해합니다. 이성의 빛을 쬐면 시들고 마는 자멸적인 신앙이라 하겠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이성의 판단으로 신앙을 세울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과학의 합리주의 정신 위에 종교를 세우면 아주 세련될 것이라고 여기는 생각인데, 그 실상은 믿음의 깊이에 이르지 못한 자기신념에 불과하다 하겠습니다. 이성을 기둥으로 삼고 종교의 집을 짓는 것은 모래성을 쌓는 것과 같습니다. 이미 이백 년 전에 독일 철학자 칸트는 [이성의 한계 안의 종교](1793)가 얼마나 이율배반적인 것인지를 밝혔습니다. 자기신념으로 종교를 세울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더욱 본질적인 것을 놓치게 됩니다.
바울의 말을 따르자면, 교리적 문자주의 신앙이든 비판적 이성주의 신앙이든, 그 겉모양은 달라도 모두 ‘이 세상에만 해당되는 것’을 추구하는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바울에게 부활 신앙이란 이 세상을 살되 이 세상을 넘어서는 삶, 영원한 생명의 비전 속에서 죽음 너머까지 밀고 가는 삶입니다. 은총의 빛 아래에서 자신을 지어 바치는 삶, 하늘과 땅의 줄탁동시(啐啄同時)를 이루는 삶에 부활 신앙이 자라납니다.
2주 전 읽은 빌립보서 3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빌 3:10~11) 이 말에는 그리스도인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죽음의 자리에 머물지 않고 부활의 흔적을 더듬어 찾는 삶에서 기독교 신앙이 시작됩니다.
[부활절 아침의 두 장면 / 요한복음 20장 1~18절]
요한복음 20장을 보면 부활절 아침에 일어난 두 가지 사건이 나옵니다. 베드로는 죽은 예수가 사라진 빈 무덤을 보았고, 막달라 마리아는 동산지기로 나타난 예수를 만납니다. 요한복음이 기록한 부활절 아침의 두 장면은 각각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 베드로의 경험과 엮어놓은 ‘빈 무덤 설화’는 대표적인 부활절 아침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빈 무덤’은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합니다.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의 관점에서 보면, 빈 무덤 이야기는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간 후 예수가 부활했다고 거짓말을 퍼뜨리는 속임수’로 여겨지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마 27:64) 복음서가 ‘빈 무덤’에 관한 이야기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 그렇게 어리숙한 내용은 아닐 것입니다.
고요한 부활절 아침을 묘사한 첫 장면이 말 없는 빈 무덤이었다는 사실, 거기서 부활의 단서를 찾기 위해서는 먼저 무덤에 짙게 깔린 침묵의 의미를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면, 천사의 모습도 환상이요, 예수조차도 유령일 뿐입니다. 그 침묵의 비밀은 우리 주변에도 있습니다. 누적된 고통에 말을 잃은 사람들, 녹슨 모습으로 침묵하는 세월호, 분단의 무게를 진 고요한 휴전선의 철조망이 우리 사회와 역사의 빈 무덤입니다. 부활의 정신으로 깨어있지 않고서는 들을 수 없는 ‘침묵의 함성’이 거기 가득합니다. 저는 그것이 부활절 아침 첫 번째 장면이 주는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침묵 속에서 역사의 뜻을 볼 수 있도록 깨어있어라!
두 번째 장면은 마리아와 예수의 재회입니다.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나타난 동산지기가 사실은 예수였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이 이야기는 마리아가 과거의 죽음에 집착했을 때에는 예수를 볼 수 없었지만, 귀를 열고 부르는 음성을 들었을 때 비로소 예수를 보게 되었다는 의미심장한 진술입니다. 이 이야기는 보이는 것 너머를 향해야 한다는 부활절의 과제를 던져줍니다.
당황하는 마리아에게 하신 예수의 말씀은 이것이었습니다. Μή μου ἅπτου, “내게 손을 대지 말아라.”(새번역, 요 20:17a) 이 말은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어서 번역이 쉽지 않습니다. 성서번역가는 세 가지로 해석합니다. 1) ‘나를 만지지 말라’ (Touch me not! / 개역성서, KJV), 2) ‘나를 붙잡지 말라’ (Do not hold on to me / 개역개정, 공동번역, NRSV 등 다수), 3) ‘나에게 집착하지 말라’ (Stop cling to me! / NASB, NKJV) 이걸 종합하면, 과거에 매이지 말고 지금 보이는 것 너머로 나아가라, 이런 가르침을 부활절 아침 두 번째 장면이 우리에게 주는 듯합니다.
부활의 그리스도가 마리아를 불렀듯이 오늘 우리도 부르십니다. 삶이 무덤처럼 무거울 때 부활의 꿈은 희미해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동산에서 부활의 씨앗은 늘 자라나고 있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신음했던 긴 탄식의 시간 속에도 성령의 동행과 기도가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깨어있는 한, 새로운 초월을 향해 몸을 던지는 맥박치는 삶이 늘 존재할 것입니다.
다시 열리는 부활의 시간에 교우 여러분의 삶과 우리 신앙공동체의 선교에 그리스도의 얼굴이 솟아오르기를 빕니다.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그리스도의 부활은 평화의 길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대입니다. 무덤처럼 무거운 삶 속에서도 하늘의 은총을 바라보며, 자신을 지어서 바침으로써 그리스도의 부활에 이르는 믿음의 길을 우리 모두 힘차게 걸어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