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자리 | 김희헌 | 2022-05-08

by 김희헌 posted May 09, 2022 Views 212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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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2-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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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자리 (9:36~43, 7:9~17, 10:22~30)

2022.05.08. 부활절 4, 어버이주일

 

오월의 둘째 주일 <어버이주일>을 맞아 모든 가정에 평화를 빌며, 향린 공동체를 위해 젊음을 바쳐 헌신해오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2년 전 교회 이전을 결정한 후 예배당이 없는 불안정한 상황에서 코로나 사태까지 겹치다 보니, 그 과정에서 기력을 잃은 분들이 계셨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신축공사를 시작하는 시점에 여러 마음이 교차합니다. 1년 후 예배당이 완공될 때까지 건강을 잘 지켜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예배당을 짓는 일 못지않게 다가오는 시대를 대비한 무형의 교회를 준비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 현실은 만만치 않습니다. 지난주 몇 분의 교우들과 식사하며 당부의 말씀을 듣고 나서, 더욱 힘을 내어야 할 때임을 느끼지만, 또한 우리의 길이 어떻게 열릴지 고민과 기도도 깊어갑니다. 다가오는 시대에는 진보의 깃발만으로 헤쳐갈 수 없을 텐데, 어떻게 내적 역량을 키워갈 수 있을까 하는 모색이 절실해집니다.

이런 현실은 비단 우리 교회만 맞고 있는 상황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즉자적인 현실에서 조금 벗어나서, 거시적인 시각으로 종교의 자리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며, 우리 신앙공동체의 여건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찾아보고 싶습니다.

어쩌면 종교의 운명 자체가 비판적 이성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근대사회에서는 그리 밝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신을 분석한 프로이트는 종교를 가리켜 인류의 강박적 노이로제’(obsessional neurosis)라고 했고, 사회를 분석한 마르크스는 민중의 아편이요 억압받는 피조물의 한숨이라고 표현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생명 자체가 가진 경험을 깊이 들여다본 사람들은 인간 삶에서 종교란 떼려야 뗄 수 없는 영역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 같습니다. 인류학자 M. 엘리아데는 인간의 경험에는 신성한 것’(the sacred)에 대한 동경이 있다 하였고, 철학자 R. 오토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신비(mysterium)와 떨림(trimendum)으로 이루어진 거룩함’(the Holy)에 관한 경험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인간의 경험이 매우 방대하고 입체적이라고 말하며, 그 어딘가에 종교의 자리가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그 지점에서, 신학자 P. 틸리히는 종교의 자리가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에 있다 하고, 인도의 철학자 S. 아우로빈도는 인간 영혼 안에서 진리를 약동하게 하는 시도에 종교가 깃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이들의 주장을 따르면, 종교란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 세계를 넘어서려는 곳에, 또는 우리의 경험 가운데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복음서 가운데 종교적 상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책이 요한복음입니다. 이 책에 나오는 내용으로 이야기를 이어가 보겠습니다.

 

[성서 이야기 / 요한복음 1022~30]

요한복음 10장 오늘 본문은 성전에서 나눈 유대인들과 예수의 대화입니다. 이 대화는 당신이 메시아인가?’ 하는 유대인들의 물음으로 시작됩니다. 하지만, 이 물음은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 던져진 것이라기보다는 꼬투리를 잡기 위한 단서로 보입니다. 유대인들의 물음에 대해 예수의 답변이 이어지지만, 효과적인 대화가 이루어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뒤이어진 이야기를 보면, 답변을 들은 유대인들은 예수를 돌로 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은 이 이야기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저자의 의도를 찾으려면, 이야기의 배경을 성전 봉헌절’(ἐνκαίνια) , 오늘날 하누카’(Hanukkah)로 알려진 특별한 절기에 위치시키고 있는 점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 절기는 요한복음이 기록되기 약 250년 전에 일어난 마카비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것으로서, 외세에 의해 더럽혀진 성전을 되찾아 하나님께 봉헌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등불을 켜고 축하하는 기간입니다. 저마다 불을 밝히고 있는 계절을 배경으로 하여 오늘 본문이 시작합니다.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시작부터 예수를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고, 그 빛의 상징을 반복하며 예수를 증언합니다. (1:4, 8:12, 9:5, 12:46) 그렇다면, 오늘 이야기는 등불을 켜서 성전을 봉헌하는 계절에 일어난 아이러니한 상황, 참 빛으로 오신 분에 관한 현실의 오해와 대결에 관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요한복음은 이 이야기를 던지며 묻고 있는 것이지요. 저마다 밝힌 등불의 빛은 과연 어떤 빛이냐고!

오늘 본문에서, ‘유대인들로 불리는 사람은 현실에서 담론을 주도하는 사람입니다. 요한복음의 등장인물로 볼 때, 그들은 예수의 진실에서 멀어진 사람을 상징합니다. 그들이 예수를 향해 묻습니다. 당신은 메시아인가, 아닌가? 이 물음은 진실한 대답을 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해명을 하더라도 문제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예수가 메시아라고 대답하면 죽이려고 달려들 것이고, 메시아가 아니라고 말하면 조롱하거나 처벌하려고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이런 일그러진 현실을 설정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메시아라는 증언은 현실에서는 입증되기 어렵습니다. 어두운 맘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보이지 않는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진실의 영역은 현실에서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인간의 에고는 자신을 더욱 강고히 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현실이란 대체로 모호하고, 진실이 드러나기까지 그 모호함을 견디는 것, 어쩌면 그 지점에 종교가 자리하는지도 모릅니다.

 

[삶의 실상을 대하는 세 자리 : 현실, 사실, 진실]

함석헌 선생이 회갑 즈음에 인간혁명이라는 책을 썼는데, 거기 보면 들사람 얼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거기서 한 가지 화두를 던집니다. ‘누가 한 수 더 위냐는 것입니다. 그것을 말하기 위해,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의 실상을 세 측면으로 표현합니다. 현실(現實), 사실(事實), 진실(眞實)입니다. 우리가 어떤 측면에 착안하여 세계를 살아가느냐에 따라 그 삶의 수위가 달라진다고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현실(situation)에 집착하느냐, 사실(reality)에 기반하느냐, 진실(truth)을 추구하느냐?

이런 구분으로 오늘 요한복음 본문을 다시 살펴보면, 그 내용을 세 단계로 구분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첫 석 절은 갈등하는 현실을 묘사하고, 다음 석 절은 갈등하는 이유가 되는 사실을 말하며, 마지막 석 절은 사실을 넘어서는 진실을 전한다고 하겠습니다.

22~24절은 성전 봉헌절에 벌어진 갈등의 현실을 그립니다. 유대인들이 예수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마음을 졸이게 하려는가? 당신이 그리스도면 그렇다고 분명히 말해주시오.’

이어진 예수의 대답은 갈등이 벌어지는 사실에 대한 것입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당신들은 믿지 않았소.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을 당신들은 믿지 않지만, 내 양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소.’

마지막 석 절은 요한복음이 전하는 진실의 선언입니다. 하나님과 하나 되는 삶에 임하는 영원한 생명, 그것을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진실이란 사실보다 크고, 진실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연합하는 삶으로의 도약이 필요하다는 가르침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성전에서 이루어진 이 대화는 파국으로 끝나고 맙니다. 대화를 마친 후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합니다. 진실은 현실 속에 모두 담기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종교가 꿈꾸는 진실]

현실에서 종교가 일그러지는 이유는 대체로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종교를 우상처럼 받드는 성전 중심주의요, 다른 하나는 성전을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하는 종교 활용론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둘러싸고 벌어진 이 두 사태는 서로 먼 듯하지만, 실상은 매우 가깝습니다. 둘 다 종교의 진실을 잃은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종교의 진실을 하나님과 연합하는 삶에서 찾습니다. 현실의 풍파도, 사실 세계의 비극도 넘어서게 하는 진실이 있다면, 그것은 본문 28절과 30절에 나오는 예수의 말씀에 담겨있을 것입니다. “나는 그들에게 영생을 준다.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하늘의 평화를 향한 성서의 꿈이 일렁이는 말씀입니다.

참된 종교는 우리가 사는 현실의 한계와 위기를 압니다. 부족하고 연약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실존을 깨닫고 고백합니다. ‘주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하지만, 그렇게 고백한다 하여, 실제 세계가 모두 행복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변화하는 우주에는 전진하는 만큼 과거의 상실이 있고, 삶에는 늘 잃어버린 것에 관한 비극이 있습니다.

종교는 그렇게 덧없어 보이는 세계 속에서도 대담한 꿈을 놓치지 않습니다. 종교는 현실을 부정하는 마술이 아닙니다. 참된 종교는 자기 안의 유토피아를 세우기보다는 현실의 무게를 지고 갑니다. 초탈했다고 교만하기보다는 혼란과 불안의 세계를 정직하게 봅니다. 하지만 거기 멈추지 않고, 믿음의 꿈을 안고 나아갑니다. 성서는 그것을 샬롬, 평화의 비전, 하나님과 연합하는 삶에 담긴 진실이라고 증언합니다.

 

[민중 선교의 길에서]

올해 안병무 선생의 탄생 백 주년을 맞으며, 진보적인 신학운동을 이어가고자 하는 흐름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연초에 제가 한국민중신학회 회장직을 맡게 되었는데, 진보적인 신앙을 위한 신학적 샘물을 길어 올리는 일에 관한 고민이 깊어졌습니다. 얼마 전부터 안병무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하는 이십여 개의 진보적인 단체와 함께 10월에 학술대회를 계획하고 있지만, 한국교회가 맞은 전반적인 위기를 헤쳐가는 일에는 부족함을 느낍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오늘 우리의 상황은 민중신학이 전성기를 보내던 시대와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민중교회운동이 활발하던 때, 저는 제도교회의 교리적 신앙을 거의 잃은 껍데기 신학생으로 지냈습니다. 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교회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고, 구로공단에 자리 잡은 신명교회에 주로 다녔습니다. 교회는 작아도 활력이 있었고, 교인들은 공동체에 대한 자긍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경험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사회가 빠르게 변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민중운동의 피난처가 되었던 교회는 노동조합운동이 활성화되면서 그 기능이 현저하게 약해졌고,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듯이, 신앙공동체 역시 환대의 공간만이 아니라 환멸의 공간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 속에서 민중교회 운동을 하는 선배들과 함께 점차 크게 느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존재의 힘을 갖지 못한 정의는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사회운동에 전념하던 민중교회의 시대가 지나자, 진보적인 신앙공동체 운동의 방점도 옮겨간 것 같습니다. 수행종교의 중요성에 강조라고 할까요. 진지한 물음을 가진 사람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 관한 관심보다는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에 관한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것은 종교공동체의 기준점이 시민운동단체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과정이었다고도 하겠습니다. 종교운동은 단지 외적 활동의 실천적 결과물로만 평가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커졌던 것입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점차 진보적인 기독교 운동을 위한 구상도 깊어졌습니다. 신앙공동체는 사회적 영성과 함께 개인적 영성의 조화를 이루어야 하고, 실천적 영성은 내면적 영성 위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민중신학의 가르침대로, 교회가 민중의 한을 푸는 사제이자 예언의 꿈을 담은 못자리가 되기 위해서는 돌봄과 변혁의 기능이 함께 살아 있도록 해야 한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그것은 함께 사는 세상에 대한 열린 태도와 함께, 사명을 위한 부름에 순복하는 마음이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치유와 위로의 세계를 여는 종교]

오늘 우리 시대는 과거에 비해 많은 것이 풍요롭지만, 또한 모든 것이 위태롭게 느껴집니다. 이 시대에 종교는 과연 무엇일까요? 모든 인간활동과 마찬가지로 종교 역시 긍정적인 것이 될 수도 있고, 부정적인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한 철학자의 말대로, 종교가 필연적 선()’이라는 생각은 위험한 망상이요, 어쩌면 인간의 야만성이 깃들 수 있는 마지막 피난처가 종교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위험을 벗어나려면, 현실의 집착을 떨쳐내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보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아니 사실 자체를 넘어 진실을 붙들려는 달음질을 이어가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성령이 이끄는 삶의 방식일 것입니다.

불교가 현실의 삼독(三毒)인 탐진치(貪瞋痴)를 씻어내고, 진실의 깨달음을 위한 삼학(三學)을 말하듯이, 기독교는 십자가의 길일지라도 소망을 안고 걸으며(/), 사랑이 삶을 이끌도록 내어주며(/), 고통 속에서도 은총의 세계를 놓치지 않는 믿음(/)의 삶을 일러줍니다. 예언자 미가는 그것을 가리켜, ‘정의롭게 행동하며, 부드럽게 사랑하고, 겸손하게 걷는 삶이라고 보았던 것 같습니다. (6:8)

이렇게 종교의 자리를 다시 그려보니, 지난 삶에 부족함이 많습니다. 그리스도의 자비를 구할 뿐입니다. 욥바의 다비다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운 베드로처럼, 우리 공동체 안에 치유의 손길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고통의 눈물을 모두 씻어주실 것을 그려본 요한의 바람처럼, 우리 공동체 안에 위로의 손길이 있기를 바랍니다.

잠시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평화의 꿈을 잃지 맙시다. 현실이 버겁더라도,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자비에 힘입어 믿음의 진실을 살아갑시다. 정의롭게 행동하며, 부드럽게 사랑하고,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도록, 주님께서 보살펴주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