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평화 | 김희헌 | 2022-05-22

by 김희헌 posted May 22, 2022 Views 186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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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평화 (16:9~15, 21:10, 22~22:5, 14:23~29)

2022.05.225 / 부활절 6

 

[동맹과 평화 / 요한복음 1423~29]

평화가 그리운 시절입니다. 미국 바이든 대통령이 한국에 와서 어제 정상회담을 했습니다. 정부는 이번 정상회담이 한미관계를 포괄적 전략 동맹으로 자리매김하여 동아시아와 글로벌 평화 번영에 기여하는 중심축으로 삼는 목표가 있다고 했다지요. 하지만, 이런 구시대적 동맹 관계가 평화를 줄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윤석열 정부가 미국의 모든 소원을 다 들어줄 것이라는 예상에 시절의 한계와 우울감을 느끼게 됩니다.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지난 금요일에는 종교시민사회 평화선언이 발표되었습니다. 신냉전 질서를 강화하는 편향된 동맹정책과 무력대결을 멈추고, 평화체제 정착을 위한 신뢰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두 정상에게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북한과 중국을 압박하고, 한미 연합훈련을 확대하는 등 갈등의 정치를 강화하겠다는 결론을 내고 말았습니다.

참된 평화가 간절한 오늘, 우리가 읽은 복음서 본문은 예수의 <고별설교>입니다. 마태복음의 산상설교처럼 요한복음의 종합적인 가르침은 13장부터 다섯 장에 걸쳐 나오는 <고별설교>에 담겨 있습니다. 요지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평화를 얻으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있는 14장은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답변으로 구성됩니다. 첫 번째 질문은 도마가 하였고, 두 번째는 빌립이, 세 번째 질문은 가룟 유다와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제자의 질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세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인데, 그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는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려고 하지 않으시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이 질문을 받은 예수는 먼저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이유를 듭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답변은 아마도 요한복음의 배경이 되는 사회적 갈등과 대립상황을 반영한 듯합니다. 요한복음을 읽어보면, 여러 곳에서 예수와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유대 바리새인들에게 위협을 당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9:22, 16:2, 20:19)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요 세상의 빛인 예수라 해도, 그 빛이 통과되지 않는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각기 다른 세계를 살며 서로 소통하지 못하는 현상은 시대를 불문하고 생겨납니다. 이해관계를 같이한 동맹 관계는 똘똘 뭉치지만, 그렇지 않은 관계는 적대시하며 공격할 기회를 찾는 것이 정치의 생리인 것 같습니다. 종교는 어떻습니까? 정치화된 종교는 적대감에 기초한 갈등의 정치를 펼칩니다. 갈등의 틈바구니에서 자기를 드러내려는 것이지요.

그러나 성서는 다른 길을 일러줍니다. 오늘 본문은 성령께서 길을 알려줄 것이요, 그 길은 평화라고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

여기서 말하는 예수의 평화는 무엇일까요? ‘정치와는 동떨어진 종교만의 평화를 의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수의 평화는 단지 개인의 내면에 신비롭게 자리 잡은 영적 평온함이 아니요, 적개심을 버린 정신승리나 수난을 감내하는 자기 포기만도 아닙니다. 예수의 평화에는 다른 차원이 있다고 봅니다.

얼마 전 소천하신 마지막 1세대 민중신학자였던 김용복 선생님은 평화를 추구하는 운동을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정치적 메시아니즘이요, 다른 하나는 메시아적 정치입니다. 정치적 메시아니즘은 민중의 열망을 왜곡하고 두려움을 양산해서 만드는 거짓 평화입니다. 예수의 평화는 그것과는 다릅니다. 예수의 평화는 메시아적 정치를 통해서 열린다고 하겠는데, 현실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듭니다. 평화를 약속하는 수많은 운동이 정치적 메시아니즘으로 미끄러져 버립니다. 정치만이 아니라 종교도 그렇습니다.

메시아적 정치가 힘든 이유는 단지 적대감으로 갈라진 세계의 분열 때문만은 아닙니다. 분열된 세계에 자리 잡은 동맹 관계에서는 참된 평화가 생길 수 없습니다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개인이든 사회든 그 생각과 삶이 자라지 않으면 열 수 없는 평화의 세계가 있다는 점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평화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까지자라나야 맛보는 평화입니다.

자신의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 다르다고 한 예수의 가르침은 단순히 차이의 종교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타인의 평화는 거짓이요, 자신의 평화는 참이라고 간주하는 자아도취, 시쳇말로 자뻑의 종교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쳤을 리 없습니다. 자기에게 몰두하는 정신은 결국 자신마저 기만하는 함정에 빠집니다. 예수의 평화는 씨앗을 키워 하늘에 가닿는 겨자씨와 같이 자라나야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라나지 않으면 맛볼 수 없는 평화입니다.

 

[정체성의 정치, 그 너머로]

진보적인 기독교를 추구하는 동료들과 함께 고민하는 주제가 있습니다. ‘진보적 신앙공동체는 어떻게 지어지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공동체는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 여성과 남성, 장애인과 비장애인, 정치적 견해의 차이까지 포함한 여러 집단이 한 공동체 안에 존재합니다. 그래서 다양한 집단이 공존하는 방안을 찾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단지 합리적 동거에 머물지 않고, ‘창조적 공동체로서 기능할 수 있는 방안에 관한 것입니다.

대부분 진보적인 집단은 소수자의 목소리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공동체를 운영합니다. 그것은 좋은 가치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상적인 커뮤니케이션이란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늘 오해와 갈등이 생겨납니다. 질서와 권위로 규율하는 보수집단보다는 진보적인 공동체가 더 큰 홍역을 앓게 됩니다. 그래서 진정한 민주주의가 어떻게 가능한지에 관한 고민도 깊어지는 것입니다.

얼마 전 지방선거를 앞두고 시행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니 맥이 풀렸습니다. 민주당 지지율이 30% 밑으로 떨어졌다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해도, ‘국민의 힘지지율이 45%에 이른 반면, 진보를 표방한 정당은 모두 합해도 5% 정도에 불과하다는 발표에 절망스러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왜 진보세력은 갈가리 찢겨 있을까요? 그런 현상에 대한 분석 가운데, 최근 정체성의 정치에 관한 재평가가 있습니다. 정체성의 정치란 동일한 억압을 경험한 사람들이 뭉쳐서 같은 정체성에 기반하여 정치적 연합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체성 정치는 특히 소수자들에게 효과적인 투쟁 방식입니다. 기성 정치 체제가 대변해주지 않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공유하고 연대하여 억압에 맞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정체성 정치는 과거에는 인종차별 철폐 투쟁이나 여성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다원적 가치를 중시하는 오늘날에는 다른 정체성을 가진 집단 간의 연대를 저해하고, 보편적 해방을 추구할 동력을 형성하지 못하는 역기능을 가집니다. 정체성의 정치에서는 나의 고통은 오직 나만 알 수 있다는 도그마가 강해서, 공동체보다는 개인적인 자아가 중시되고, 억압적 구조에 대한 집단적 투쟁이 모색되기보다는 개인적인 인정 투쟁의 차원으로 환원되고 있다는 비판입니다. (아사드 하이더, 오인된 정체성: 계급, 인종, 대중운동, 정체성 정치 비판) 진보적 흐름을 묶어내는 연대의 비전 없이는 앞으로의 세계가 그리 밝지 않을 것이라 하겠습니다.

정체성의 정치 그 너머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고민하는 중에, 한동안 잊고 있던 책을 뽑아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철학계의 구루’(guru)로 추앙받기도 하고, 종교계의 이단으로 비난받기도 하는 Ken Wilber가 쓴 <통합비전>이라는 책입니다. 그는 종교든, 정치든, 사상이든 통합적인 비전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인간의 발달단계를 구분하는데, 처음에는 본능적/자기중심적 자아에서 시작하지만, 그 다음에는 합리적/성취적 자아로 자라나고, 그다음에는 민감한/다원주의적 자아로 확장되며, 그것이 끝이 아니라 최종적으로는 포괄적/통합적 자아로 발전한다고 봅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이런 발전단계를 거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성숙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자신이 어떤 수준에 있는지를 가늠해보고, 더 나아갈 길이 어디 있는지를 그려보도록 알려줍니다. 목표는 통합적 자아에 있습니다.

윌버는 통합적 자아에 이르기 전의 모든 단계를 1층 수준의 삶이라고 말합니다. 아무리 민감한 다원주의적 자아라 할지라도 통합적 비전을 갖지 못하면 2층 수준의 삶을 살지 못한다고 봅니다. 이것은 서로 다른 정체성에서 빚어지는 차이에 대한 다원주의적 이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포괄해내는 직관적 지혜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종교적 영성도 합리적 영성을 넘어 다원적 영성으로, 다원적 영성을 넘어 통합적 영성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새로운 공동체의 창조는 통합적인 지혜가 이끌 때 활발해질 것이라고 봅니다.

 

[공동체 구성을 가능케 하는 지점 / 사도행전 169~15]

오늘 사도행전 본문은 유럽 최초의 기독교 개종자라 할 루디아라는 여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 회의 후에 본격화된 선교여행에서 바울은 서쪽으로 갔습니다. 그는 성령의 안내를 따라, 아시아에 머물지 않고 마케도니아로 건너갑니다.

당시 그리스는 두 개의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북부는 마케도니아 지역이었고, 남부는 아가야(Achaia) 지역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인 빌립보는 마케도니아의 중심이었습니다.

당시 사회구조에 관한 연구에 의하면, 빌립보는 약 15,000명으로 구성된 큰 도시로서 다양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집단은 째 그룹은 3% 정도 되는 지배 엘리트였고, 둘째 그룹은 25% 정도 되는 자영농과 연금생활을 하는 공무원과 퇴역군인이요, 셋째 그룹은 45%를 구성하는 상인과 기술노동자와 서비스 종사자요, 마지막으로는 가난한 빈민으로 27% 되었습니다. 여기에 잡히지 않은 노예도 약 3천 명 정도 있었는데, 이들은 빈민층을 제외한 가정에 편입되어 있었다 합니다. (Peter Oakes, Philippians: From People to Letter,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1)

이런 사회구조를 가진 도시에서 기독교는 어디에서 출발했을까요? 루디아는 세 번째 그룹에 속한 사람입니다. 성서는 이 자랑할만한 여성에 대해서 두 가지로 묘사합니다. 하나는 자색 옷감 장수라는 것입니다. 당시에 보라색 옷은 엘리트층만 입을 수 있었기에, 루디아는 부유층을 상대로 장사하는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두 번째 묘사는 그녀가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가의 기도하는 곳으로 갔다가 바울을 만나게 됩니다.

안식일에 기도하는 곳에서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낯선 만남을 갖습니다. 그것은 정체성의 정치를 뛰어넘는 운명적 만남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가리켜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 표현하지요. 저는 이 유럽선교의 시발점이 된 운명적 만남을 설명해줄 표현을 본문에서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다 발견한 대목이 루디아가 바울에게 한 말이었습니다. “나를 주님의 신도로 여기시면, 우리 집에 오셔서 묵으십시오.” 이 말에는 새롭게 지어질 공동체의 토대가 가치가 담겨 있습니다. 나를 주님의 신도로 여기시면, 만일 내가 주님에게 신실한 사람이라고 여기신다면, 함께 먹고 마십시다.

바울은 루디아의 이 초대에 흔쾌히 응했습니다. 그 만남으로 인해 그들은 큰 평화를 맛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삶은 계속되었고, 고통으로 얼룩진 세계를 스쳐 간 이들의 평화는 일시적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이어지는 본문을 보면, 바울이 오해를 받아 소송에 휘말리고, 결국 감옥에 갇히는 고초를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감옥을 뒤흔드는 지진 사건으로 인해 결국 간수와 그 가족들까지 세례를 받는 일이 생겼으니, 이들의 삶이 요동쳤지만, 그 소용돌이 속에도 평화는 관통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한 철학자는 평화를 가리켜, 세세한 삶에 대한 조밀한 관심도 아니요, 비극적 현실에 대한 마비나 초탈도 아니라, 삶의 한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무한성의 파악이라고 말합니다. 현실의 비극을 생생하게 경험하지만, 거기서 여러 한계를 초월하는 호소를 듣게 된다면 평화를 얻을 것이라 말합니다. (알프레드 N. 화이트헤드, [관념의 모험], 434~38)

삶은 계속되고, 어떤 모양이든 삶은 누구에게나 소중합니다. 거기서 예수의 평화는 삶을 통합적으로 이끄는 힘이요, 첩첩산중처럼 겹친 어려움 속에서도 들려오는 예수의 진군 명령이라 하겠습니다. 이 예수의 평화를 안고 나아갈 때, 죽음의 그림자가 삶을 먹어치우지 못하고, 어둠의 그림자가 공동체를 덮치지 못할 것입니다.

힘겨운 삶의 과제를 지닌 교우 여러분의 삶에 예수의 평화가 임하기를 빕니다. 평화의 사명을 안고 있는 우리 공동체에 예수의 진군 명령이 다시 울리기를 빕니다. 한미동맹 너머를 향해 가야 할 이 땅의 민중운동에 통합적인 영성이 자라나기를 기원합니다.

잠시 침묵으로 기도합시다.

 

[파송사]

고통의 시간에 삶이 요동칠 때, 어둠 덮인 세계에 빛이 보이지 않을 때, 예수의 평화를 품으십시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이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근심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말아라.’ 예수의 평화를 간직하고, 삶 속으로 역사 속으로 다시 행진하는 우리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