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중보기도 ㅣ 김지목 ㅣ 2022-05-29

by 김지목 posted May 29, 2022 Views 226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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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2-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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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9 향린주일 부활절7

 

예수의 중보기도

16:16-34, 22:12-14,16-17,20-21, 17:20-26

 

2성서의 사도행전은, 이 성서명()이 뜻하는 대로, 사도들이 행한 복음 선교사역 이야기집입니다. 초대교회, 당대 상황에서 그리스도교라고 하는 종교체계를 정립한 선구자들의 전기적 활동을 기록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성서를 통해 그리스도교 교회가 어떻게 생성되었는지, 그리고 교회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즉 사도행전을 통해 우리는, 교회 존재의 본질이 무엇이며, 교회가 말해야 하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이 성서, 사도행전의 주요 인물은 바울과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유다지역의 교회를 대표하는 사도입니다. 예수께서는 유다 전통 안에 몸담고 그 신앙을 매개로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유다인에 의해 처형당하였지만 사회문화적으로 예수는 유다인이셨고, 율법주의로 왜곡된 야훼신앙의 갱신을 외쳤던 예언자셨습니다. 이같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 유다의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적통이 베드로에게 이어졌다고 믿으며 유다 문화권의 고유한 신앙을 반석으로 삼아 교회를 세웠습니다.

한편 바울은 이방지역의 교회를 대표하는 사도입니다. 이방이라는 말은 유다 외의 모든 지역을 뜻하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을 넘어 소아시아와 북부 아프리카, 유럽 남부까지 확장된 지역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로마의 제국적 질서 안에서 무역로가 통용되고, 곳곳마다 디아스포라라고 하는 유다인의 회당/집성촌이 있었고, 신성한 가르침을 기대하던 사람들, 소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리스도교는 이방지역 선교에 적극적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방지역은 유다지역과 문화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다적 전통의 헤브라임 신앙보다는 헬레니즘적 철학에 더 노출되었습니다. 유다의 그리스도교가 야훼신앙의 정통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면, 이방지역의 교회는 영지주의라고 하는 당대 거대담론의 도전에 맞서야 했습니다.

 

사도행전은 이와같은 유다교회와 이방교회의 배경에서 생겨난 두 사도들의 선교활동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교 선교는 신앙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구심적 선교와, 복음의 사상을 확장하는 원심적 선교를 공히 충족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신앙의 뿌리와 기반을 지켜내는 일도 중요하고, 그리스도교 사상을 널리 전파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교회의 선교 과제입니다. 신앙의 깊은 생명수를 길어올리는 영성생활을 소홀히 하면서 예언자적 외침을 강화할 수 없습니다. 고난당하는 이웃의 아픔을 함께 느끼지 못하면서 교회에게 맡겨진 그리스도의 제사장적 직무를 우리는 온전히 수행할 수 없습니다. 우리 공동체가 표방하는 사회적 영성을 위해서 교회를 몸으로 세우는 헌신이 꼭 필요합니다. 둘 중에 하나만 하는 선교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은 비교적 이방선교의 바울의 행적을 더 많이 이야기하고 있기는 하지만, 저자는 유다교회와 이방교회를 공평하게 존중하고 있다고 봐야합니다. 18세기 말까지 사도행전은 초대교회가 기록한 최초의 역사서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나 서구의 비평학이 눈을 뜨게 되면서 사도행전 저자의 관심이 역사적 사실의 보도보다 설화적인 가르침에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규명하였습니다. 또한 이 성서는 주후 50년경부터 130년경 사이에 여러 번의 편집 과정을 거쳐서 완성된 것이라고 성서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아마도 저작 초기에는 그리스도교의 기원과 정체성을 밝히는 목적으로 이것을 기록했다면, 어떤 때는 유다교회(베드로)와 이방교회(바울) 간의 갈등을 화해시키기 위하여 이 행전을 편집하였고, 또 어떤 시기에는 두 교회가 유대교와 분리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로마 국가권력에 의한 정치적 혐의를 해소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편집이 가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사도행전은 두 주인공 베드로와 바울의 선교활동을 전해들은 누가복음의 저자 누가가 주저자로 저술한 것입니다. 조금 과감히 말하자면, 누가가 쓴 베드로와 바울의 선교무용담집()이 바로 사도행전입니다. 우리네 민담이나 옛날이야기처럼 과장이 허용된 무용담을 사도들의 행전으로 엮으면서 그 속에 사상과 교훈을 담아내었습니다. 이야기를 엮으면서 누가는, 사실을 기록하기보다 당시 이 설화를 듣게 될 경건한 독자들을 대상으로, 그들이 교화하기를 기대하였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렇게 읽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선교활동의 주인공은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입니다. 이들은 얼마 전 베드로와 심하게 다투었고 줄곧 함께해온 바나바와도 갈라섰습니다. 바울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식사를 나누지 못하는 베드로를 꾸짖었다는 것을 연상하면, 역시 유다교회와 이방교회 간의 갈등이 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위시로 한 이들, 이방선교사들은 무역로를 따라 그리스어가 통용되는 소아시아 도시들을 여행하며 선교하기로 하고,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마케도니아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항구도시 드로아를 떠나 사모드라게와 네압볼리를 거쳐 빌립보에서 루디아를 만났습니다. 소위 말하는 바울의 2차 선교여행의 도상입니다.

바울과 실라 일행이 로마의 대표적인 식민도시 빌립보에서 매를 맞고 옥에 갇히는 설화가 이어집니다. 이야기는 귀신들려 점치는 여자를 만난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녀는 점치는 일로 자기의 주인에게 돈을 벌어다 주는 사람이었는데, 바울 일행을 향하여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들이다. 여러분에게 구원의 길을 전하고 있다.”고 외쳤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구원의 길을 전해줄 사도들. 언뜻 들으면 그녀의 이런 말은 호의적인 외침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그런 표현은 이 설화를 듣는 사람들을 의식해서 각색한 것입니다. 사실 그녀의 외침은, 로마의 식민지에서 금지된 종교 선전을 하고 있다며 바울 일행을 고발하는 행위였습니다. 바울 일행은 그녀의 고발에 피하지 않고, 예수의 이름으로, 그녀 안에 있는 귀신을 내쫓았습니다. 이 행위는 이번 설화에서 갈등의 기폭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녀는 더 이상 점칠 수 없는 자가 되었고, 그녀의 주인은 막심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로마 본국의 힘을 등에 업고 식민도시에서 재판 권한을 가진 치안관들에게, 바울 일행이 부당한 풍속을 선전하고 있다고 고발하여, 바울 일행은 매를 맞고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감옥에서 한 밤중에 바울 일행은 찬양을 불렀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지진이 나서 감옥 터전이 흔들렸고, 감옥문이 모두 열리고, 단단하게 엮인 수갑과 차꼬가 풀렸습니다. 누가 봐도 감옥을 탈출해야 할 상황인데도 그들은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감옥에서 문이 열리고 차꼬가 풀리는 줄거리는 당시 문학적으로 유행하던 스토리입니다.(유리피데스의 희곡 Bakchen, "디오니소스를 추종한 여사제들“) 기적과 환상의 이야기를 삽입함으로써 복음의 진리가 인간적인 지식을 초월하는 것임을, 문학적 기법으로 의도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일이 일어났는데, 뒤늦게 간수가 등장합니다. 바울 일행이 다 도망간 줄 알고 자결하려고 칼을 들었을 때, 바울이 우리가 그대로 여기에 있으니 몸을 해치지 말라.”며 간수를 말립니다. 간수는 두려워하고 떨면서 두 분 사도님,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묻습니다. 이러한 간수의 말 또한, 지금 이 설화를 듣는 사람들을 의식해서 각색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실제를 가정한다면 원하는 게 뭐요?”라고 묻지 않았을까 합니다. 여하튼 설화에서 간수의 물음에 바울은 이 설화의 절정에 해당하는 메시지로 화답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시오. 그리하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간수는 바울 일행은 자기 집으로 초대하고 가족들은 모두 세례를 받은 것으로 그날의 이야기를 마감합니다.

 

주 예수를 믿는 복음이란, 유다인의 정치적 모략과 로마의 권력에 부당하게 희생된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부활했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간교한 율법주의의 종교권력과 포악한 제국주의 정치권력의 악함이, 예수의 죽음으로 드러났다는 의미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심판하실 것이라는 민중의 간절한 확신에 동참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일, 곧 그리스도인이 되고 세례를 받는 것은, 예수의 죽음으로 드러난 죄인들, 그들이 만든 체제에서 벗어나 하나님나라의 새 백성으로 살겠다는 결단이 전제된 것입니다.

바울 일행이 귀신들린 여자에게서 귀신을 축출한 일은, 그녀의 주인들이 갈취하는 돈벌이 체제를 부정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복음과 교회에 맡겨진 사명은 악한 지배체제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현대 에큐메니칼 선교의 큰 축을 담당하고 있는 세계교회협의회(WCC)7,8년 마다 한 번씩 총회를 개최합니다. 세계의 350여개의 개신교단과 정교회(동방, 오리엔트)가 연합한 에큐메니칼 선교체 WCC, 2013년에 부산에서 10차 총회를 열었는데, 코로나 시국을 넘기면서 올해 독일에서 11차 총회를 예정하고 있습니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WCC는 세계의 근현대사를 지내면서, 그리스도교의 선교 과제는 이 땅에 하나님의 평화(샬롬)를 이루는 일, 비인간화된 세상에서 인권회복을 되찾는 일이라 믿으며, “생명 정의 평화로 선교 과제를 정리했습니다. 특별히 정의 평화 창조세계의 보전(JPIC)”이라는 선교대회를 1992년 서울에서 개최하면서 생태정의의 운을 띄웠고, 2006년 제9차 총회(브라질 포르트 알레그레)에서는 전 지구적으로 횡행하면서 약소국을 착취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거절을, 신앙의 이름으로 공표하기도 했습니다. 악한 지배체제에 대한 거절! 지배권력과 결탁하고 돈벌이를 가능케 했던 귀신을 내쫓는 일! 이것이 우리 신앙의 신념이어야 합니다.

 

바울 일행의 무용담에서 빠뜨릴 수 없는 장면은 사도들이 매 맞고 옥에 갇히는 시련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한 것처럼 복음을 위하여, 생명 정의 평화의 그리스도교 선교사상을 위하여 사도들도/우리들도 수난의 길을 피할 수 없습니다. 악한 지배체제를 거절하는 것이 사도들의 행전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리스도교의 선교 과제라면, 사도들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교회가 감내해야 할 숙명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의 요한복음서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고난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요한복음서 17장의 내용은 예수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제자들과의 고별담론과 예수께서 체포당하시는 일 사이에 위치한 것입니다. 잡히시기 전날 밤에 십자가 수난이 닥칠 절박한 시점이지만 요한복음서의 이 기도는 다른 복음서들에 비해 담담하게 기술되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와 같은 수난의 고통이나 또는 이별의 슬픔 같은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순종을 강조하는 요한의 특유한 신학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에게는 고난에 순종할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 땅에 화육하신 분이고, 그 영광의 길을 가기 위하여 고난당하시고, 마침내 부활과 승천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신 분입니다.

또한 요한에게는 고난에 순종할 수 있는 힘과 비결도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세상을 위하여 독생자를 주신 사랑이 그 사랑의 원천입니다. 독생자는 하나님 자신이 화육하여 사랑의 화신이 되어주셨다는 말입니다.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자발적 화육에서 우리가 말하는 사랑의 근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의 결과로 하나님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사랑의 결실로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나가 된 그 사랑의 존재를 그리스도, 독생자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무한한 질적 격차를 허물어 하나가 되게 하는 그 힘과 비결이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그리스도와 제자들을 하나 되게 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마침내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제자들과 교회와 세상이 하나가 되는 하나님나라의 비전을, 요한은 소망하며 그려내고 있습니다. 하나되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하는 사랑의 비결이 있기에, 요한은 고난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 일행이 매 맞고 옥에 갇히는 수난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악한 체제를 변혁하는 복음을 전파한 까닭은 그 사랑에 있습니다. 사랑에 기인한 선교활동의 결과로 간수와 그 가족들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간수의 가족들이 받았던 세례예식도 사랑의 의례였습니다. 사랑이 확장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과정이기에 고난도 순종할 수 있다는 요한의 신학을 한 번 더 되새겨봅니다.

 

오늘의 요한계시록 본문에는 신앙인의 수난이 보다 더 극명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로마로부터 핍박받아 순교의 목전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해진 희망의 서신입니다. (14) “생명 나무에 이르는 권리를 차지하려고, 그리고 성문으로 해서 도성에 들어가려고, 자기 겉옷을 깨끗이 빠는 사람은 복이 있다.” 생명나무의 권리가 보장된 곳, 그 하나님나라의 도성에 당당한 자격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깨끗한 예복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 예복에 해당하는 것이 겉옷입니다. 이것을 깨끗이 세탁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순교자의 피입니다. “예수의 보혈로 그대는 씻기어 있는가?” 하는 찬송의 노랫말이 여기 계시록 말씀과 이어져 있습니다. 피로써 하얗게 씻는다는 말이 우리네 문화권에서는 다소 생경합니다만, 희생제사를 통해 죄사함을 받는다고 여겼던 유다 문화의 정서로 이해할 수 있는 구절입니다.

 

요한복음서에서 사도 요한이 확신한 사랑의 확장, 곧 고난도 감내할 수 있는 힘, 하나가 되게 하는 힘, 영광의 길에 이르게 하는 힘에 대해 우리는 보다 진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순교의 피로 겉옷을 깨끗이 빠는 신앙인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러합니다. 추상적이고 퇴색되기 쉬운 그 사랑의 의미를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수련해나가는 것, 이것이 우리 신앙의 본질이며, 늘 우리의 첫째 되는 과제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공동체를 통해서 꾸준히 그 사랑을 수련하는 중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선교사명을 꺼내어 놓는 순간부터 우리는 그 사랑 안에 있습니다. 공동체를 위하여 헌신하는 일은 때때로 버겁습니다. 인내의 한계를 넘어 숨이 막히는 지경도 경험합니다. 견디기 힘들어서 기도할 수밖에 없는 그때, 저는 그때가 사랑의 때라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거리에서 드리는 우리의 기도회는 사랑의 행함입니다. 아파하는 이웃과 함께 아파할 수 있는 용기는 사랑의 힘이라고 믿습니다.

사랑을 수련하고 확장해 나가는 것, 끊임없이 자문하고 성찰해야 할 우리 신앙의/선교의 과제입니다. 이것을 위해 많은 것을 내어놓고 공동체를 섬기고 있습니다. 이 또한 사랑입니다. 우리 사랑들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기복적인 번영을 기대하는 립서비스(lip service)’가 아닙니다. 사랑과 고난과 순종으로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의 사랑과 고난과 순종이 빛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내년 창립 70주년을 바라보면서 기념사업 준비위원회는, 올해 69주년 기념사업으로 향린토론회를 개최했습니다. 지난 515일에 1차 토론회를 가졌고 오늘 두 번째 토론회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공동체를 돌아보면서, 자성하며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기를 희망하고, 조심스럽게 공동체의 지혜를 찾는 모습에 감사합니다. 공동체를 향한 그 사랑이 참 고맙습니다. 토론회로 모은 우리의 사랑들이 더 큰 사랑으로 확장해나가서, 제안과 논의를 넘어 실질적인 변화의 결실을 맺게 되기를 바랍니다. 토론회를 시작으로 다양하게 펼쳐질 70주년 기념사업들도 사랑의 잔치가 되기를 또한 바랍니다.

사랑과 고난과 순종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위하여 중보기도 하신 것과 같이, 사랑과 고난과 순종으로 광화문 시대를 열어갈 우리 공동체를 위해서도 늘 기도해 주심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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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길에서 고난을 겪는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기도해주십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도,

내가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게 하여 주시고,

창세전부터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내게 주신 내 영광을,

그들도 보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사랑을 수련하고 사랑을 확장해나갈 우리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해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흠뻑 젖는,

우리 향린 공동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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