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이 만드는 기적 (행 2:1~21, 롬 8:14~17, 요 14:8~17)
2022.06.05 / 성령강림주일, 환경주일, 6월항쟁기념주일
오기출 (푸른아시아 상임이사)
2022년 6월 5일 오늘 향린교회의 환경주일을 맞아 김희헌 담임목사님과 교우 여러분께서 부족한 저를 하늘뜻펴기에 불러 주셔서 정말 영광입니다. 저는 <푸른아시아> 상임이사 오기출입니다. 1998년부터 지난 24년간 몽골, 미얀마 등 지구촌의 기후위기가 심각하게 일어난 현장에서 활동해 온 기후운동가입니다. 저와 함께 <푸른아시아> 동료들은 몽골에서 주민들과 여의도 3개 크기의 면적에 약 100만 그루의 나무를 심었고, 미얀마에서 여의도 1개 면적에 약 20만 그루의 나무를 심었습니다.
오늘은 제가 24년간 경험한 숲이 만들어 가는 기적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이런 질문을 함께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기후위기에 우리 집은 안전할까요? 그리고 우리 이웃은 안전할까요?
24년 동안 제가 경험한 기후위기 현장은 시작단계, 중간단계, 심각한 단계로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웃 나라가 기후위기 심각한 상태라면 우리나라는 안전할까요? 이웃의 나라가 기후위기로 땅이 파괴되고 식량문제가 발생하고 전쟁에 시달리고 있는데 구경만 해도 될까요? 우리 지구는 하늘이 하나이고 그 하나의 하늘을 생명체들이 나누면서 살고 있습니다. 기후위기는 그 하늘을 인간이 만든 온실가스로 오염시키면서 발생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웃 나라에서 기후위기가 시작하면 그 하늘을 나누고 있는 우리나라도 심각한 단계로 간다는 것이 우리 경험입니다. 올해 우리나라가 심각한 가뭄과 연속적으로 발생하는 대규모 산불로 고통받는 이유기도 합니다. 이웃 나라의 기후위기는 우리 집을 위기로 몰고 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구촌이 맞이하고 있는 기후위기의 심각단계를 대비해야 합니다.
기후위기의 심각단계를 대비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는 이미 심각한 기후위기의 상황에 처한 몽골로 가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몽골은 먼 곳이 아니라 우리 이웃 나라입니다. 비행기로도 2시간이나 3시간이면 갈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발생한 황사는 이틀 안에 한국으로 오는 가까운 나라입니다.
그런데 지구촌에서 가장 온도가 높게 오른 나라가 바로 몽골입니다. 몽골은 지난 백년 간 지구촌의 온도가 평균 섭씨 1도가 오르는 동안 2배 이상인 2.25도가 올랐습니다. 몽골 땅 60%는 지난 1만 년 동안 여름에도 땅이 얼어있는 영구 동토층이었습니다. 땅속의 얼음이 조금씩 녹으면서 그 물로 풀이 자라고 얼음 녹은 물이 흘러서 강과 호수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몽골은 초원의 나라 유목의 나라가 되었고, 유목민들은 가축을 키울 수 있었고 그 가축의 고기와 젖으로 지난 1만 년을 살아왔습니다. 문제는 21세기 기후위기로 온도가 올라가면서 땅속의 얼음이 녹기 시작했고, 영구동토층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2010년 몽골 정부는 몽골에서 1166개의 호수가 사라지고, 887개의 강이 사라져 버렸다고 발표합니다. 우리 대한민국보다 16배가 큰 몽골 국토의 80%도 풀과 나무가 사라지면서 빠르게 모래땅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가축의 먹이인 풀과 물이 사라지자, 2002년 1천만 마리의 가축이 굶어 죽고, 2010년에도 1천만 마리의 가축이 굶어 죽었습니다. 2002년에는 유목민 2만 가구 10만 명이 모든 재산을 잃었고, 2010년에도 10만 명이 재산을 잃었습니다. 저는 2015년 몽골의 여름, 조사를 하면서 푸르게 자라야 할 풀들이 누렇게 죽어 있는 그 초원에서 얼마나 굶었는지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가축들이 걷지도 못하고, 눈빛이 풀려 엎드려 있는 모습들을 보고 눈물이 났습니다.
이렇게 가축들이 한 번에 대규모로 굶어 죽으면서 모든 재산을 잃은 유목민들을 우리는 기후난민이라고 부릅니다. 기후난민이 발생한 마을들의 학교를 찾아가 보면 도서관에 책도 한 권이 없었습니다. 먼지만 날리고 설렁했습니다. 땅이 파괴되고 사람들의 삶도 파괴되었기 때문입니다. 유목민들은 조상 대대로 지난 1만 년 동안 가축을 키우면서 살아왔는데 왜 자신의 대에서 가축들이 모두 죽고 자신은 세상을 정처 없이 방황해야 하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현재 몽골 인구 320만 명 중 20%인 60만 명이 모든 재산을 잃고 기후난민이 되었고 살기 위해 몽골 수도 울란바타르에 무작정 와 있습니다. 전쟁난민은 전쟁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후난민은 자신의 터전이 파괴되어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몽골의 한 마을에 작은 기적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몽골 수도는 울란바타르입니다. 울란바타르에서 서쪽으로 200km 떨어져 있는 바양노르라는 지역이 그곳입니다. 원래 인구가 2천 명 정도였습니다. ‘바양’은 ‘많다’라는 뜻이고 ‘노르’는 ‘호수’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호수가 많았던 곳이었는데 여기가 기후위기의 직격탄을 맞아 물과 풀이 사라지고 가축들이 죽자 마을 사람 중 700명이 고향을 버리고 도시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유엔은 2014년 지구촌의 저 먼 변방에 있는 바양노르 마을 사람들이 만든 사례에 유엔환경노벨상인 ‘유엔생명의토지상’을 주고, 이 모델을 아시아 아프리카 나라들에게 따라 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그랬을까요?
유엔은 당시 10년 이상 기후위기 현장에 나무도 심고 풀을 심었지만 처절하게 실패합니다. 그래서 2014년 이런 제안을 합니다. “지금의 기후위기가 지난 1만 년의 역사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그래서 기후위기 해결을 한 사례가 아직 없다. 혹시 귀하의 나라에 기후 문제를 해결한 사례가 있다면 찾아 달라”고 했고 약 80개 나라들이 각자 사례들을 추천합니다.
몽골 정부와 몽골 UNDP는 <푸른아시아>와 바양노르 주민들이 만든 사례를 추천했는데 이 몽골의 사례에 대해 유엔 심사위원 전원이 만장일치로 유엔생명의토지상 최고상을 줍니다. 그리고 제가 시상식에서 만난 세계은행 아프리카 대표는 몽골 주민들이 만든 이 모델이 아프리카에도 적용가능하다고 했습니다.
물과 풀이 사라지고 가축이 죽고, 마을 사람들이 떠난 바양노르에서 무슨 일이 그동안 일어났을까요?
바양노르 주민 키지크씨가 유엔에 쓴 편지입니다. 자신도 2002년 가축이 죽자 무작정 울란바타르로 떠났는데 살기가 너무 힘들어 2010년 고향에 왔는데 고향이 모래땅에서 숲으로 바뀌어 놀랬다고 합니다. 그래서 궁금해서 <푸른아시아>에서 농업과 조림 기술을 배우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지금 행복하다고 합니다. 현재 바양노르 주민 40가구 200여 명이 2007년부터 시작해서 36만 평의 모래땅을 숲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숲에서 4만 그루의 비타민 나무라는 돈이 되는 과일나무를 심고 열매를 팔아 자립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현재 몽골에는 이런 바양노르 같은 모델이 9개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여의도 면적 3배 정도를 생태복원 했고 기후난민이 되었던 주민 200가구 1천 명 정도가 여기서 먹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렇게 되지는 않았습니다. <푸른아시아>가 22년 전인 2천 년 처음 몽골에 갔을 때 3년간 나무만 3만 그루 심었습니다. 그런데 100% 모두 죽었습니다. 그래서 주민들에게 임금과 월급도 주어 보았습니다. 그것도 실패했습니다. 왜냐? <푸른아시아>가 계속 그곳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나와야 합니다. 그러면 월급을 받지 못하는 주민들은 다시 과거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들이 만든 숲은 모두 겨울철 난방용 땔감으로 바뀝니다. 그러면 다시 사막화는 시작됩니다.
이렇게 하면서 지난 20년 동안 기후위기 현장에서 배운 교훈이 바로 이겁니다. “기후위기가 일어난 곳에서 익숙한 것을 버려라.” 즉 나무나 풀이라는 우리에게 익숙한 것을 심으면 100% 실패합니다. 월급도 실패합니다. 이유는 이런 기후위기를 인류가 지난 1만 년의 역사에서 처음 겪었고 그래서 해결 사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도 안 해 본 시도를 했습니다. 그것이 ‘나무심기’가 아니라 ‘사람심기’였습니다. 주민이 스스로 먹고사는 자립모델입니다, 바양노르 주민들과 <푸른아시아>는 함께 10년 이상 사람심기, 주민자립모델을 만들면서 이런 단계들도 만들어졌습니다. 1단계는 주민 참여, 2단계는 주민 결정 그리고 3단계 주민의 소유, 책무성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단계를 먼저 알아서 적용한 것이 아닙니다.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입니다.
바양노르에서 주민들의 참여는 처음부터 잘 된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 기후난민 20가구와 함께 나무를 심고 농사를 짓고 과일나무를 키우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주민들이 일을 안 합니다. 왜 일을 안 하느냐고 하면 “자신들은 알고 있다. 이렇게 해외에서 지원할 경우 나중에 힘 있는 국회의원이나 부자들이 다 가져가더라”. 그래서 “자신들이 열심히 일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런 이들이 바뀐 것은 작은 경험을 하면서 부텁니다. 이분들을 모아 놓고 제가 약속을 했습니다. “여러분이 결정을 한 대로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결정을 안 하면 국회의원은 감자 한 톨도 가져가지 못할 것입니다.”
함께 시작한 지 1년 뒤인 2008년 그 척박한 모래땅에 주민들이 감자를 심었습니다. 얼마나 이분들이 일을 안 했는지 감자 1.5톤을 심었는데 생산된 것도 1.5톤이었습니다.
여기서부터 이야기가 다시 시작됩니다. 저는 당시 주민 20가구가 생산한 1.5톤의 감자를 어떻게 나눌 것인지를 회의하자고 했고 주민들은 오랜 회의 끝에 내년에 쓸 씨감자 30%, 자신들 가족 수대로 60%, 장애인 노인들에 기부를 10%를 하겠다고 스스로 결정했습니다.
그렇게 하고 저는 하루 뒤에 다시 바양노르를 방문했습니다. 감자 한 톨도 허투루 하지 않고 이들은 감자를 양동이에 나누어 놓았습니다. 이때 주민들에게 물었습니다. “여러분의 결정대로 되었는가요? 힘 있는 자들이 한 톨이라도 가져갔는가요?” 그러자 이들은 그 질문들에 답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이들은 자신들이 결정하면 된다는 것을 스스로 경험한 후 180도 바뀌었습니다.
2008년 이후에는 주민들이 참여하고 모든 의사결정도 주민들이 했습니다. 주민들이 회의를 해서 새로운 주민들을 참여시키고 협동조합도 만들었습니다.
바양노르 주민들은 마을 1/10을 녹화시켰고 과일나무를 심어 돈을 벌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마을 전체는 한국으로 오는 황사 발원지인데, 마을 1/10에 나무를 심었는데 마을 전체 황사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주민이 참여하고 의사결정을 하면서 경제적인 자립을 추구해온 이 사례에 대해 2014년 유엔은 생명의토지상을 주고 기후피해를 입고 있는 아프리카 아시아 국가들에게 권고를 했습니다.
처음 바양노르에서 시작할 때 2007년 마을에 ‘마을을 살려 지구를 지킨다!’는 슬로건을 플래카드로 만들어 걸어 놓았습니다. 당시에는 아무도 그 슬로건을 믿지 않았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2015년 중앙아시아 5개국, 중국, 몽골 모두 7개국 정부와 유엔 대표가 참여하는 ‘중앙아시아 사막화방지 전략회의’가 몽골에서 열렸습니다. 이들은 하필 <푸른아시아>의 조림지를 찾아왔고 하루 종일 관찰하고 설명을 듣고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등 정부와 유엔 대표들: 우리들은 나무를 심은 모델은 있는데 빈곤 문제를 함께 해결한 사례가 없다. 그러니 필요한 지원을 할 것이니 우리나라에도 이 모델을 도입해 달라.”
작은 변방의 마을에서 만든 모델에 대해 중앙아시아가 협력과 연대를 제안했습니다. 나무가 만든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변방에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는 작은 마을의 사례가 이렇게 지구촌으로 퍼져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순간이었습니다.
“마을을 살려 지구를 살린다”. 그래서 이런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아시아 차원에서 10억 그루 나무 심기를 하면 어떨까 합니다. 이름해서 ‘테라시아 프로젝트’입니다. 테라는 땅이고 아시아 즉 기후위기로 땅이 파괴되고 있는 아시아 나라들의 땅을 살리는 제안입니다.
그런데 10억 그루 나무 심기가 어려워 보이나요? 그것은 의외로 쉽습니다. 아시아 인구 3%만이 참여해서 1인 세 그루 나무를 심으면 1년 만에 달성이 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두 1년에 3그루를 책임지고 7년만 심으면 달성이 됩니다.
10억 그루 나무를 심으면 1. 우리나라 면적의 20%에 해당하는 2만 평방 킬로미터가 완전히 생태 복원됩니다. 2. 우리 경험에 따르면 그 10배인 20만 평방 킬로미터, 남북한을 합친 넓이의 황사 발원지가 사라집니다. 3. 100만 명의 기후 난민들이 자립을 합니다. 4. 온실가스는 3억 6천만 톤 흡수합니다. 우리나라가 1년 동안 발생시킨 온실가스가 7억 2천만 톤이니 절반에 해당합니다. 실로 어마어마한 효과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나무를 심다 보면 기후위기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우리 집도 안전해집니다. 우리 이웃을 지킬 수 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들, 특히 향린교회 교우 여러분들은 지난 70년대 80년대 나라의 민주주의가 유린되고 군홧발에 짓밟힌 위기의 시대에 가장 앞장서서 연대와 협력을 통해 위기를 극복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지금 지구생명을 멸종으로 몰고 가는 기후위기의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기후위기로 지구 생명이 멸종하면 인간만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인간도 사라집니다.
이 기후위기를 앞두고 그리스도인들의 연대와 협력이 절실할 때입니다. 하늘 뜻을 펼치는 향린교회 교우 여러분들이 과거에 그랬듯이 지금도 의롭게 나서 주시길 간절하게 부탁드립니다.
김희헌 목사
[소통과 회복의 영 / 사도행전 2장 1~21절]
환경주일을 맞아 <푸른아시아>의 지난 사역을 소개해주신 오기출 이사님의 증언에 감사드립니다. 기후위기 시대에 필요한 중요한 사역이고, 성령강림절에 함께 생각해 볼 오늘의 오순절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일에 우리 교회도 참여하기를 바라며 선교부와 생태선교팀에서 ‘나무심기사업’을 제안해주셨습니다. 앞으로 차근차근 진행해가면서, 작은 사건들을 만들어가기를 기대합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바벨탑을 쌓고 분열한 인류의 역사를 되돌이키는 회복의 사건이었습니다. 욕망 위에 세워진 바벨탑의 문명과는 다른 길을 걷고자 하는 새로운 공동체가 등장해서 가능한 이 사건의 시작은 언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성령이 갈라진 불의 혀처럼 나타나더니 사람들 위에 내렸고, 그때 사람들은 거룩한 영에 휩싸여 하늘의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각자 자기 지방의 ‘말’로 듣게 됩니다.
이 신비한 사건에 관한 기록에서 반복되고 있는 단어는 두 개의 헬라어입니다. 하나는 하늘에서 내려와서 사람들의 입에 담긴 ‘글로사’(γλῶσσα)이고, 다른 하나는 각 지방의 말로 다르게 들려온 언어 ‘디알렉토’(διάλεκτος)입니다. ‘글롯사’는 3절과 4절에서 ‘혀와 방언’으로 번역되었고, ‘디알렉토’는 6절과 8절에서 ‘지방의 말’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하늘에서 글롯사가 내려와 각 사람에게 임하자 사람들이 글롯사로 말하게 되었는데, 그것을 들은 사람들은 각자의 언어 ‘디알렉토’로 듣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신비한 소통사건입니다.
그런데, 성서 이야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람들이 실제로 놀란 지점은 이상한 방언 ‘글롯사’가 아니라, ‘디알렉토’로 듣게 된 데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하늘의 ‘글롯사’가 몸에 체화되어서, 삶의 소통을 이루는 언어인 ‘디알렉토’로 변하였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 시대의 교회에 중요한 가르침을 줍니다. 성령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사건들이 오히려 불통을 일으키는 이유를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성령 체험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각자가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버린 모습에 관한 것입니다.
보수적인 교회는 하늘의 글롯사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기만의 방언을 할 뿐 디알렉토의 소통이 없습니다. 진보적인 교회는 자기 문화의 디알렉토를 말할 뿐 하늘의 글롯사를 구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거룩한 영의 언어조차 장벽에 갇혀 공회전을 반복합니다.
그러나 오순절 사건은 예언자 요엘의 꿈이 이루어지는 사건이었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그것은 남녀노소 모두가 예언과 환상과 꿈을 말하고 보게 되는 사건입니다. 거룩한 영에 힘입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믿음의 세계를 새롭게 그려낸 것입니다. 이 성령의 사건은 2천 년 전 특정한 지역에서 한 번 벌어진 사태가 아니라, 마치 역사의 ‘화산맥’처럼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옵니다.
한국사회도 하늘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처럼 성령이 이끈 사건을 경험했습니다.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시대의 꿈을 품고 일어나 억압과 불통의 장막을 벗겨내기도 했습니다. 35년 전 6월 항쟁이나 5년 전 촛불혁명은 마치 하늘의 ‘글롯사’(불의 혀)가 내려와 온 거리에 ‘디알렉토’로 출렁이는 사건과도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열기가 싸늘하게 식고, 우리 세계는 길을 잃은 듯이 다시 옛 질서의 어둠에 잠겨 탄식하고 있습니다. 기후위기 시대 녹색의 꿈은 희미한 채, 부동산의 환상과 자본의 욕망이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 시대는 이렇게 몰락했을까? 그것이 사무치는 고민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잊어버린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성령, 진리의 영 / 요한복음 14장 8~17절]
요한복음에는 예수와 제자들의 대화가 나옵니다. 제자 빌립이 스승에게 묻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좋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합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말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어라.’
예수는 이 믿음으로 광야의 고독을 견디며, 현실의 폭풍을 뚫고 모험하는 삶을 살아갔습니다. 세상의 모함과 제자의 배신 속에서도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그 안에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반면, 제자들은 두려워했습니다. 그 이후의 공동체도 길과 진리를 찾아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요한복음의 공동체가 오늘 본문에서 빌립의 목소리를 통해 묻는 내용입니다.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주십시오.’
이 말은 각자의 ‘디알렉토’만 있을 뿐, 하늘의 바람을 몰고 오는 ‘글롯사’를 잃어버린 시대의 고민을 담고 있습니다. 바벨탑의 디알렉토만 있을 뿐 진리의 영 글롯사가 사라진 삶의 고민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고민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시대를 가리켜 진리가 힘을 상실한 ‘탈진리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저마다 믿고 싶은 대로 믿는 시대입니다. 한 철학자는 이 시대의 정신을 주도해온 사상가들이 주장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메시지를 한 구절로 요약하면 ‘진리는 없다’라고 표현합니다. (켄 윌버, 진실 없는 진실의 시대, 48) 그것은 진리가 탐구되거나 추구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장악하는 명분 정도로 사용되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관용의 정신은 점차 희미해지고, 고삐 풀린 자기주장만이 진리의 자리를 차지하고 말았습니다.
윤석열의 시대를 보면서 어떤 느낌이 드시는지요? 극단적인 자기주장이 손쉽게 정의를 획득해가는 취약한 시대의 징후를 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그 속에서 다시 그리워진 빌립의 목소리를 듣고자 오늘 성서를 읽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주십시오!”
우리가 함께 읽은 17절을 보면, 빌립의 요청에 대해 예수께서 약속한 것은 성령입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므로, 그를 맞아들일 수가 없다.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안다. 그것은, 그가 너희와 함께 계시고, 또 너희 안에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너희 안에 ‘진리의 영’이 계시면, 시대가 어둡다 하여도 살 길을 찾을 것이다! 이런 말씀이겠지요.
[두려움을 넘어 광야의 모험을! / 로마서 8장 14~17절]
이 진리의 영을 안고 살아간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하늘의 글롯사를 마음에 담고 삶의 폭풍우를 지나간 사도 바울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밝힌 고백을 보면 그의 삶이 잘 드러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여행하는 동안에 강물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 사람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하였습니다. 수고와 고역에 시달리고, 여러 밤을 지새우고, 주리고, 목마르고, 굶고, 추위에 떨고, 헐벗었습니다. 그 밖의 것은 제쳐놓고서라도, 모든 교회를 위한 염려가 날마다 내 마음을 누르고 있습니다. (고후 11:26~28)
무엇이 이토록 바울의 삶을 간절하게 이끌었을까요? 오늘 본문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이 고백하는 것은 제자 빌립에게 주신 예수의 말씀과 같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또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녀로 삼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영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으려고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신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아갈 것입니다.” (롬 8:15/17)
바울은 여기서 당신의 자녀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두려움과 종살이의 삶을 벗어던지게 하는 진리의 영이요,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만이 아니라 고난까지 달게 받도록 이끄는 성령입니다. 이 바울의 고백이 성령강림절을 열어가는 우리의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환경주일을 맞아 많은 한국의 형제자매 교회가 탄소중립을 우리 시대의 새로운 소명으로 고백하는 예배를 드립니다. 또한, 6월항쟁을 기념하며, 역사를 소생시키는 진리의 영이 다시 우리를 이끌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어둠 깊은 시대에도 낙심하지 않고, 생명의 길을 향해 나아가는 믿음의 행진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기원합니다.
침묵으로 기도합시다.
[파송사]
호수와 강이 메말라 간 몽골초원에 나무를 심고 생명의 숲을 이룬 기적의 사건을 기억합니다. 기후위기 시대에 생명의 숲을 이루어가는 부활의 공동체가 될 것을 다짐합니다. 생태문명의 오순절 사건을 간구하며,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정의와 평화의 길로 이끌어주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