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가지 다짐 | 김희헌 | 2022-06-12

by 김희헌 posted Jun 12, 2022 Views 222 Replies 0
Extra Form
날짜 2022-06-12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다섯 가지 다짐 (8:1~4, 22~31, 5:1~5, 16:12~15)

2022.06.12. 삼위일체주일

 

오늘은 성령강림 후 첫째 주일, 교회력의 후반부가 시작되는 삼위일체주일입니다. 교회력의 전반부는 대림절부터 성령강림주일까지인데, 이 기간에 교회는 예수의 탄생과 생애, 고난과 죽음, 부활과 성령강림을 묵상합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성령강림절은 대림절이 시작될 때까지 약 반년간 특별한 교회 기념일이 없는 일상의 시간(ordinary time)입니다. 이 기간에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자신을 되돌아보며 삶을 가꾸는 일에 주목합니다.

저에게 삼위일체주일은 조금 특별한 날입니다. 제가 우리 교회와 인연을 맺은 날이기 때문입니다. 5년 전 오늘 저는 담임목사 청빙을 앞두고 교우들과 선보는 자리를 가졌습니다. 청빙 투표가 있는 주일예배에 저는 모험하는 신앙공동체라는 제목의 하늘뜻펴기를 준비하여, 설레는 마음으로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지금보다는 흰머리가 적었고, 배도 덜 나왔는데, 그사이에 조금씩 변해왔으니 첫인상을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 예배의 파송사로 저는 다섯 가지 화두를 던졌습니다. 그것은 저의 다짐이기도 했고, 교우들과 함께 펼쳐가고픈 꿈이기도 했습니다. 그 다섯 가지 다짐은 이렇습니다.

1) 주님을 사랑하라. 온 마음으로 사랑하여 그분만으로 충만하라.

2) 가난한 사람을 기억하고, 삶을 검소하게 가꾸라.

3) 거룩하고 소중한 것에 복종하라. 인내하며 순종하라.

4) 분별력을 갖도록 깨어서 기도하라.

5) 자신을 믿고 진실하라. 하나님을 믿고 모험하라.

저는 이 다섯 가지 화두가 저의 삶과 우리 교회의 목회에서 좌표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되돌아보면 부족한 점이 많지만, 여전히 갈망하고 있는 주제입니다.

어느덧 5년이 흘렀습니다. 담임목사로서 지내온 동안 책임이 무겁고, 때로는 지켜야 할 의무가 버겁기도 했습니다만, 부족한 저를 믿어주시고 격려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사이에 저는 우리 교회 목회만이 아니라, 평화통일운동, 진보적인 신학운동, 에큐메니칼 연대운동, 교단 갱신 운동 등이 커졌고, 향린교회 담임목사이기에 맡겨진 일도 많아졌습니다. 보람과 자랑이지만, 시간에 쫓기는 삶에 아쉽기도 합니다.

이제 저의 임기가 2년 남았습니다. 안식년을 제외하면 앞으로 1년이 중요한 시기일 것입니다. 이 기간에는 예배당 신축과 창립 70주년을 맞을 준비를 하는 큰 과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내년 이맘때면 저의 재신임 투표가 있어서, 지난 활동에 대한 평가도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담임목사의 신임을 묻게 될 것이고, 저 역시도 숙고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중요한 일들을 앞두고, 오늘은 저의 첫 마음을 재확인하고, 또 앞으로 교우들과 함께할 목표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 5년 전 나눈 다섯 가지 화두를 갖고 말씀을 전할까 합니다. 보통 하늘뜻펴기는 성서 말씀을 묵상하는 방식인데, 오늘은 화두 묵상이 되겠습니다.

 

첫 번째 화두는 주님을 사랑하라. 온 마음으로 사랑하여 그분만으로 충만하라.’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만으로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은 신앙인의 중요한 마음가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많은 관계 속에서 살다 보면, 현실의 무게가 짓누르고 생각이 여러 갈래로 찢어지기도 합니다.

하나님에게 집중하기 어려운 것은 우리 시대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근대의 이성적인 인간은 자기 계획을 성취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고, 자신이 커지고 커져서 스스로 무한한 존재처럼 생각하는 습관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 이래로 진정한 깨달음을 얻는 사람들의 비밀은 한 가지입니다. 자신이 실상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위대한 신앙인에게는 이 깨달음이 분명하게 있습니다. 인간의 참된 삶, 본질적인 삶이란 지금 여기서 살아가는 모습 너머에 있다는 깨달음이요, 인간의 마지막 가능성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가능성이 아니라는 깨달음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선 존재라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육체적 삶의 시작과 끝을 넘어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하는 존재임을 아는 것, 그것이 성서의 근본 지혜입니다.

잠언 8장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지혜를 뜻하는 히브리어 여성명사 호크마를 의인화하여 그 고백을 전합니다. 영원 전, 아득한 그 옛날, 땅도 생기기 전에, 나는 이미 세움을 받았다. 아직 깊은 바다가 생기기도 전에, 물이 가득한 샘이 생기기도 전에, 나는 이미 태어났다. 아직 산의 기초가 생기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나는 이미 태어났다. (8:23~25)”

이 말은 기이하게 들리지만, 그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하는 삶에 관한 깨우침에서 지혜가 탄생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무언가에 홀리거나 자신에게 도취해버리는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또한, 그것을 넘어설 가능성, 유혹에 맞서며 삶의 올무에서 벗어나 진실의 경계선을 지켜낼 가능성도 주어졌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을 모시는 공간을 만들어 냅니다. 신앙인은 단순히 자기 시대의 교양인이 아니라, 그 마음에 예언의 꿈과 별의 징조를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품은 사람의 품격입니다.

제가 우리 교회에서 생활하는 동안, 우리 신앙공동체를 지켜온 훌륭한 신앙인들을 보았습니다. 지난 5년간 큰 위로와 힘을 얻은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지켜내는 교우들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주 말하는 향린정신이 무엇일까, 과연 향린다움이란 무엇일까, 때때로 생각해봅니다. 시민사회단체보다 더 일사불란하게 불의에 저항하고 투쟁하는 모습일까? 저는 하나님 앞에서 겸허한 인간의 규모를 가진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공동체의 모습에서 향린다움을 경험합니다. 겸허한 사랑이 오가는 공동체가 가장 위대한 힘을 가진 신앙공동체입니다.

 

두 번째 화두는, ‘가난한 사람을 기억하고, 삶을 검소하게 가꾸라.’입니다. 우리가 사는 문명은 부유한 삶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그것이 경제가 움직이는 법칙이요, 정치의 약속입니다. 사람들은 부유(富有)함을 숭상하고, 부유한 사람을 기억합니다. 거룩한 가난을 기뻐하는 사람들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자기를 비워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것을 목표로 삼은 교회는 존립하기 어렵습니다. 복음이 쉽게 번영신학에 물들어 신앙공동체가 몰락하고, 성공이 모델이 되면서 신앙은 시들기도 합니다.

예수께서는 고별설교를 하시면서, 제자들을 위해 거룩한 성령, ‘진리의 영을 빌었습니다. 당시에도 제자들의 삶은 위험과 도전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요한복음 본문을 보면, 제자들을 위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직도,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지금은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16:12~13)

성령이 임하면 새로운 삶이 지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새로운 삶이란 여러 모습이겠지만, 성령을 체험한 초대교회의 특징은 서로 가진 것을 나누는 삶에 있었습니다. 바울도 선교여행을 하면서 연보(捐補)를 걷어 멀리 있는 형제자매를 도왔습니다. 그것은 자발적인 가난으로 삶을 조율하는 비움의 삶이었습니다. 그 삶은 몸을 입고 사는 사람들의 큰 숙제입니다.

오늘날은 교회가 헌금을 강요하지 않으면 좋은 교회라는 인식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수천수만 명 대형교회가 맘모니즘에 사로잡힌 잘못으로 인한 것이지만, 그런 인식 자체가 자랑거리는 아닐 것입니다. 신앙인은 자신의 물질과 시간을 바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쓰고 남은 것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분수와 형편껏 자기 것을 쪼개어 바쳐야 합니다. 훈련도 없고, 책임의식도 없는 곳은 물질의 가난에 앞서 영적인 궁핍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헌금은 보수 교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교회의 직분을 가진 사람은 자기 소득의 십 분의 일을 바치는 훈련을 하는 것이 좋고, 진보적인 교회의 교인이라면, 북녘의 형제자매를 생각하며 한주에 한 끼 정도는 남북나눔헌금으로 하고, 기후위기 시대를 살아가며 1년에 한 그루 나무를 심을 수 있는 생태헌금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와 함께 기억할 것은 세 번째 화두입니다. ‘거룩하고 소중한 것에 복종하라. 인내하며 순종하라.’ 이것은 소위 포스트모던 시대로 불리는 오늘날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자유와 평등에 관한 저마다의 주장이 성숙한 사회를 위한 밑거름이 되기보다는 이기적인 소비자들의 말 잔치가 되곤 하기 때문입니다. 한 인문학자는 우리가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운지를 묻기보다 무엇을 위한 자유인지를 성찰해야 할 때라고 말합니다. 성숙한 삶을 위해서는 소중한 것에 복종하고 인내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자유가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지 않을 자유가 되거나, 평등의 요구가 자기주장의 이기심으로 작동하면, 공동체는 길을 잃게 됩니다. (김영민, [동무론], 249)

오늘날에는 모든 위계와 권위를 부정하는 것을 정의로운 행동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한 사실 하나를 놓치고 있습니다. ‘위계’(hierarchy) 질서에는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 유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수준이 올라가면 점차 억압적인 것이 되고 마는 지배의 위계가 있는 한편, 그 수준이 올라갈수록 더욱 포용적으로 변화하는 성장의 위계가 있습니다. 개인의 삶이든 사회적 삶이든, 억압적인 지배의 위계는 벗겨내야 할 것이지만, 성장의 위계는 추구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성장해야 할 내적 현실을 무시하고 오로지 외적인 위계의 모습만 보면, 우리는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켄 윌버, [진실 없는 진실의 시대], 167)

성숙한 믿음과 풍요로운 삶을 위해서는 거룩하고 소중한 것에 복종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기독교에서 그 상징은 십자가입니다. 예수를 본받아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기까지 우리는 부단히 나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로마서에서, ‘환난을 자랑한다고 말합니다. 환난마저도 기뻐하는 단계에 이른 그 인격은 태산처럼 든든해 보입니다. 그 인격은 성숙의 과정을 거쳐서 형성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알기로, 환난은 인내력을 낳고, 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5:3~4)

이렇게 환난 속의 인내, 인내로 단련된 인격, 그 인격에서 솟아난 희망은 결코 우리를 실망하게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인내하고 순종하기 위해서는, 네 번째 화두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분별력을 갖도록 깨어서 기도하라.’입니다.

분별력을 갖기 위해서는 삶을 구성하는 네 가지 면을 고려해야 합니다. 자기 내면과 자기 외면, 관계의 내면과 관계의 외면이 그것입니다. 내면을 보지 않고 외면만 관심하면 가식적인 사람이 됩니다. 외면을 고려하지 않고 내면만 생각하면 자기도취에 젖습니다. 자신만 보고 관계를 생각하지 않으면 이기주의에 빠집니다. 관계만 생각하고 자신을 놓치면 가장 큰 것을 잃게 됩니다. 분별력을 갖기 위해서는 네 가지 요소를 모두 고려해야 합니다.

하지만, 네 가지 삶의 요소를 고려한다 하여도 삶이 저절로 깨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깨어나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지성의 훈련과 영성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지적인 사람도, 영적인 사람도 삶의 실존에 깃든 그림자를 모두 씻어내지 못합니다. 인간의 삶에는 의도치 않은 불행이 늘 덮치고, 거기에 깃든 불안과 의심, 고통과 고집,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갈망은 삶에 그림자와 어둠을 끌고 옵니다. 그 사실에 깨어있지 못하면 자신의 그림자에 지배당합니다.

철학자 니체는 그의 책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한 줌의 정의를 자랑하며, 도처에서 죄악을 저지른다. 그리하여 세계는 그들의 불의에 빠져 익사하고 만다. ! 그대들의 입에서 도덕이라는 말은 얼마나 졸렬하게 울려 나오는가! ‘나는 정의다라고 말할 때 그 소리는 항상 나는 복수했다로 들리지 않는가!”

우리가 정의의 이름으로 타인을 향해 도끼를 내리치는 순간, 그것은 사실 자신의 무언가가 전혀 극복되지 않았음이 너무도 분명해지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어두운 삶이 분별력을 갖고 깨어나기 위해서는 말보다는 침묵이 필요합니다. 깨달음이 깊은 삶일수록 말에서 침묵으로 이동합니다. 믿음이 깊어갈 때 배우는 언어는 침묵입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이 가장 명료해지는 길도 침묵입니다. 대표적인 침묵기도가 올 초에 만든 <생태영성 안내서>에 나오는 향심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의 은총에 안겨서 회복되는 기도입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해 볼 주제는, ‘자신을 믿고 진실하라. 하나님을 믿고 모험하라.’입니다. 인간의 덕성 가운데 가장 젊은 덕성은 정직이라고 합니다. 자신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거짓을 말하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진실하지 못하여 남의 시선과 인정에 지배당하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타인의 명령을 따라 살면서도, 자기 분열에 빠져서 스스로 높아져 교만하거나 남을 위협하는 일로 성취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성숙하고 창조적인 삶을 위해서는 자신을 믿고 진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도 거기서 시작됩니다. 안병무 선생의 은사요 주례자였던 장공 김재준 목사는 신앙인의 삶의 좌표를 가리켜 하나님을 믿고 모험하라!’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율법을 뛰어넘어 구원에 이르고자 했던 모든 신앙인의 꿈입니다. 믿음의 모험은 무모한 여행이 아닙니다. 믿음의 모험은 그리스도의 평화가 삶에서 승리를 거두게 하려는 행진입니다.

인생은 깊고 오묘하며, 삶의 의미는 참으로 깊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경제적 부유함이나 정치적인 권력이 삶의 의미를 제공해주지는 않습니다. 삶의 궁극적인 해답은 궁극적인 질문이 추구되는 곳에서 발견될 뿐입니다. 비록 죽음으로 가는 십자가의 길이 때로는 구원의 축제가 되고, 살아남은 자들의 맹세를 정화하는 것도 그 이유입니다.

궁극적인 문제를 탐색하는 믿음의 공간 가운데 하나가 예배입니다. 예배는 단순히 안락하게 되풀이되는 관례적인 예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 속에서 우리는 도달하기 힘든 곳을 향해 오르는 영혼의 비상을 경험하고 나눕니다. 신앙인에게 예배는 중요한 것이니, 예배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삶을 조정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공동체가 새로운 길을 찾고자 할 때도, 필요한 것은 마음 모아 함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오늘 성령강림절을 시작하며 다섯 가지 다짐을 나누었습니다이 믿음의 다짐이 성령강림절을 지나는 동안 우리의 삶을 새롭게 열고, 창립 70주년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 모두의 다짐이 되기를 바랍니다.

침묵으로 기도합시다.

 

[파송사]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온 마음으로 사랑하여, 그분만으로 충만 하십시오.

가난한 이웃을 기억하고 삶을 검소하게 가꾸십시오.

거룩하고 소중한 것에 복종하십시오. 인내하며 순종하십시오.

분별력을 갖도록 깨어 기도하십시오.

자신을 믿고 진실 하십시오. 하느님을 믿고 모험하십시오.

주님께서 항상 함께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