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한 사랑 | 김희헌 | 2022-07-10

by 김희헌 posted Jul 10, 2022 Views 205 Replies 0
Extra Form
날짜 2022-07-1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진실한 사랑 (7:7~17, 1:1~14, 10:25~37)

2022.07.10 성령강림절 다섯째 주일

 

[세계교회협의회 11차 총회 주제, 그리스도의 사랑]

오는 8월 말부터 9일간 세계교회협의회(WCC) 11차 총회가 독일에서 열립니다. 110여 개 국가의 350여 교단이 함께 생각하게 될 이번 총회 주제는 화해와 일치로 이끄시는 그리스도의 사랑’(Christ’s Love Moves the World to Reconciliation and Unity)입니다. 많은 프로그램 가운데, <한반도 평화통일을 비는 월요기도회>95일 저녁에 공식행사로 열리고, 우리 교회 국악선교단인 <예향>이 참석하여 국악 예배 형식으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교우들의 관심과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오늘 하늘뜻펴기의 제목인 진실한 사랑은 시편 1510절에서 따온 말입니다. “주님의 언약과 계명을 지키는 사람을 진실한 사랑으로 인도하신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진실한 사랑을 하나님의 성품과 그리스도의 삶에서 찾습니다. 그것을 달리 말하면, 진실한 사랑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것은 어폐가 있는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 위대한 사랑을 가르쳐준 이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선 겸손한 신앙인이 경험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가 소유할 수는 없고, 다만 자신을 비워서 그 사랑이 자기 안에 담기기를 바랄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미묘한 표현은 신학적인 반성과 성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예전 기독교회는 교회 자체를 그리스도의 사랑이 구현된 유일한 공간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고 생각했습니다. 교회 자체가 예수였고, 교회의 활동이 하나님의 정의였습니다. 하지만 20세기 중반 세계교회는 그 생각을 바꿉니다. 그것을 대표하는 것이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개념입니다. 이 개념은 선교의 주체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이요,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에 겸손히 참여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오만했던 교회의 자기반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20세기 중후반 민중신학을 비롯한 진보적인 신학이 세계적으로 쏟아져 나왔는데, 그 흐름의 기초에는 하나님의 선교라는 개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런 흐름이 20세기를 지나면서 세계교회 안에 정착했습니다.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교회의 활동은 크게 보면 세 가지, ‘생명, 정의, 평화라는 말로 표현되어왔습니다. 이런 선교방향이 가시화한 때는 약 30년 전인 1990년입니다. 당시 서울에서 열린 세계대회의 주제는 JPIC, 정의·평화·창조세계의 보전(Justice, Peace, Integrity of Creation)이었습니다. 이 대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선교를 구체화하는 ‘JPIC 신학이 정립되었고, 그 흐름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사용해온 표어인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는 제10WCC 총회의 주제입니다. 지금까지 세계의 많은 교회가 이 주제를 믿음의 좌표로 고백하고 있고, 앞으로 당분간 그러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번에 열릴 제11차 총회의 핵심 개념이 그리스도의 사랑이요, 그 사랑에 힘입어 구하는 것은 화해와 일치라는 점입니다. 여기에는 갈등과 대립으로 진통하는 오늘 우리 시대의 갈망이 담겨 있다고 봅니다.

지난 3년간 세계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수억 명이 감염되고 수백만 명이 죽은 이 비극적인 사실을 통해서, 생태적 균형을 잃은 세상에서 인류가 얼마나 취약한지, 균형을 잃은 불평등한 사회가 얼마나 심각하게 분열하게 되는지를 뼈아프게 경험했습니다. 또한, 그런 비극과 죽음을 지나면서, 우리 세계가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느끼며, 정의와 평화를 이룰 수 있는 다른 해법이 필요하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코로나 팬데믹 뿐만 아니라 기후위기와 전쟁의 공포, 공동체의 파괴로 인한 사회적 불평등,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온 세상에 스며들었습니다. 이런 위협과 재앙 앞에서 교회는 신앙의 의미를 다시 묻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 비극적인 현실 속에서 다시 공동의 순례를 할 수 있을지, 공동의 믿음을 나눌 수 있을지, 서로 듣고 서로 격려하며 서로의 사랑을 축하할 수 있을지, 서로에게 힘을 주고 서로를 치유하며 함께 움직일 수 있을지를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화해와 일치의 가능성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익숙한 주제입니다. 성서가 반복해서 전하는 근본 주제입니다. 만일 우리 삶의 분열과 대립에 맞서기 위해 그리스도의 사랑앞에서 선다면, 그것은 우리를 전율하게 만드는 도전적인 주제이기도 합니다.

안내 책자를 보니, 이번 세계교회협의회 11차 총회의 주제에 반영된 인류의 공통경험 네 가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코로나 팬데믹이 남긴 깊은 트라우마요, 둘째는 기후위기 앞에 놓인 문명의 도전이요, 셋째는 심화하는 경제/사회적 불평등이요, 마지막은 디지털 혁명이 초래한 불안한 미래입니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믿음의 가능성이 어떻게 피어날 수 있을지 우리는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세계교회는 기독교의 가장 근원적인 믿음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이 영원한 토대 위에서 다시 시작하는 믿음의 순례에 우리 모두 초대받고 있습니다.

 

[진실의 대결 / 아모스 77~17]

1성서의 본문 아모스서 7장은 예언자의 환상으로 시작합니다. 아모스는 세 개의 환상을 봅니다. 첫째 환상은 메뚜기의 재앙이요, 둘째 환상은 가뭄의 재앙입니다. 아모스는 이런 재앙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나님에게 빕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오늘 본문 7절은 세 번째 환상으로 시작합니다. 그것은 다림줄을 들고 서 있는 신의 모습입니다. ‘다림줄’(ănāḵ, plumb line)은 추를 늘어뜨려서 벽이 반듯하게 서 있는지를 측정하는 도구입니다. 그렇다면, 이 환상은 사람들의 행동과 사회적 관행에 관한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아모스의 시대는 상대적으로 번영과 평화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농부 출신 예언자 아모스의 눈에 비친 신의 환상은 다른 의미를 주었던 것 같습니다. 메뚜기와 가뭄의 재앙은 부자들보다는 가난한 소작인들에게 더 큰 어려움일 것입니다. 아모스는 그 재앙을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세 번째 다림줄 환상을 본 아모스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재앙을 선포합니다.

그러자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모스의 예언을 거짓 선동으로 몰아가는 진실게임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런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왕실 제사장이었던 아마샤입니다. ‘야훼는 힘이다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이 사람은 아모스가 나라를 파괴하는 반란자라고 고소하는 한편, 개인적인 모멸감을 주면서 추방하려고 합니다. 그러자 아모스는 더욱 구체적인 파괴의 예언을 남깁니다. 가족과 재산과 다가올 삶의 운명적 비극을 예고합니다. 본문은 이런 팽팽한 긴장감을 남기고 끝납니다.

이 본문은 예언의 진실에 관해 묻습니다. 번영과 평화를 누리고 있는 사회에 대한 진실이 과연 누구의 입술을 통해 대변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것이 다림줄 환상의 의미일 것입니다. 다림줄을 든 신의 모습을 본 사람은 아모스입니다. 성서는 그가 하나님의 진실한 사랑을 대변한 예언자라고 말합니다. 이방 땅을 떠도는 가난한 농부의 예언을 손들어주는 성서의 민중전통이 여기에 나타납니다.

성서의 예언자는 대체로 그 사회에서 패배를 맛봅니다. 그들의 동력은 그 세계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비전입니다. 그래서 그 사회가 금기시하는 미지의 것을 향해 나아가다가 쓰러집니다. 그리고, 그들이 쓰러진 자리에서 인간 삶의 지평이 넓혀집니다. 미래를 향해 나아가며 쓰러지는 사람들, 이들이 있기에 역사가 어둡지 않습니다. 그들을 기억하며, 오늘의 사람들이 다시 꿈꾸며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비유, 사마리아 사람의 사랑 / 누가복음 1025~37]

누가복음 본문은 또 하나의 희망을 전해줍니다. 율법 교사를 향해 들려준 예수의 이야기 속에 그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를 찾아와 진리를 논하는 사람은 율법 교사였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비슷한 이름으로 율법학자, ‘그라마튜스’(γραμματεύς)가 성서에 자주 나오는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들은 노미코스’(νομικός)라고 불리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모두가 지켜야 할 규범’(norm)을 이야기하지만, 문제는 그들의 표리부동한 삶입니다. 누가복음서 기자는 그들을 좋게 보지 않습니다. 그들이 진리를 논한 까닭은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었기때문이라고 표현합니다. (29)

이 노미코스들은 율법의 가르침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에 영생의 길이 있다는 성서의 답변을 갖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그 경천애인의 삶을 구체적으로 살아갈 실마리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들은 예수께 묻습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이것은 자기중심적인 물음입니다. 자기 이웃이 될 수 있는 사람과 될 수 없는 사람을 가르는 물음입니다.

예수는 이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강도 만난 사람을 대하는 세 사람의 이야기를 비유로 들려줍니다. 두 사람은 그 사회의 존경을 받는 지도층 인사였고, 한 사람은 유대 사람들에게 비난받는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존경받을 만한 사람들은 율법의 가르침을 따르느라 강도 만난 사람을 외면하고 가버렸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정성껏 그를 보살폈다고 말합니다.

그런 다음 예수께서 되묻지요.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아시다시피, 예수의 이 질문은 율법 교사의 자기중심적인 물음을 뒤바꾼 것입니다. ‘누가 내 이웃인가라고 묻지 않고,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주었는가를 묻습니다. 이렇게 질문을 바꾸자, 편을 가르는 사람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자비를 베푼 사람이 앞에 드러납니다.

그는 강도 만난 사람에게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정성껏 돌보는 사람입니다. 가까이 가서, 그 상처에 기름을 붓고 싸맨 다음, 자기 짐승에 태워서 여관으로 가서 돌보아 줍니다. 그리고 여관주인에게 부탁하고 길을 떠나며 추가 비용을 나중에 갚겠다고 약속합니다. 그 약속도 그 사람만큼 진실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난 우리는 그 사마리아 사람을 기억하게 됩니다. 악한 사태를 만나도 선한 불꽃을 끄지 않는 사람, 고통의 날을 지나면서도 다시 해가 뜨고 꽃이 필 것을 믿는 사람, 그 선한 삶의 기억을 다른 이들에게 전해주는 사람, 거기에 예수의 사랑이 흐릅니다.

 

[진실한 사랑을 위해 필요한 믿음과 소망 / 골로새서 11~14]

그 사랑의 기억을 안고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인사합니다. 그 교회에는 에바브라’(Epaphras)라는 신실한 교회의 일꾼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를 가리켜 우리와 함께 종이 된 사람이요, ‘성령 안에서 여러분의 사랑을 우리에게 알려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에바브라가 사랑의 사람으로 기억된 데에는 골로새 교회가 함께 기른 믿음과 소망이 있습니다. (4~5) 바울은 진실한 사랑이란 늘 믿음과 소망과 함께한다고 말합니다. (고전 13:13) 진실한 사랑을 가능케 하는 바울의 장치는 믿음과 소망입니다.

골로새 교회의 사랑을 위해 드리는 바울의 기도는 이렇습니다. “여러분의 소식을 들은 그날부터 우리는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채워 주시기를 빕니다.땅에 발 딛고 사는 우리가 지구의 자전을 느끼지 못하듯이, 정말 거대하게 존재하는 것은 실제로 느끼기 어렵습니다. 믿음이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이라면, 그것은 우리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을 우리 맘에 비추어주시는 은총 없이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서는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진실한 사랑을 위해 바울이 비는 두 번째 기도는 이렇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하게 되어서 기쁨으로 끝까지 참고 견디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빛 속에서 감사를 드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소망의 기도입니다. 소중하고 가치 있는 일에는 시간과 정성이 필요합니다. 그 인내의 시간을 견디게 하는 것이 소망입니다. 어둠이 오고 고통의 시간이 지날 때, 눈물 젖은 눈으로 이 세계를 걷는 사람을 통해 소망이 피어납니다.

 

안병무 선생 탄생백주년을 맞으며 그분의 글을 틈나는 대로 읽습니다. 그는 교회를 절대화하지 않습니다. 부족한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앙공동체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 참 깊습니다. 그가 교회에 바라는 것은 예수의 얼굴을 제대로 그리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안 선생님의 설교 몇 편이 <안병무아키브, http://www.simwon.org>에 육성으로 올라 있습니다. 마지막 설교는 그분이 돌아가신 19961월 첫 주일 우리 교회에서 하신 것으로, 제목은 산 위에서 만난 새로운 한 분입니다. 병색 짙은 목소리로 20분가량 들려준 그 말씀에는 흰 사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인생 여정을 빗대서 하신 말씀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산에 가면 흰 사슴이 있다는 말에 온 산을 다 헤맸지만, 그 흔적만 봤을 뿐 사슴을 보지는 못하고 내려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슴을 찾지 못한 시름을 안고 있을 때, 하얀 달이 마을을 비추는 것을 보고 깨닫습니다. 바로 거기에 흰 사슴이 있다는 것을.

그 설교의 마지막은 교우들을 향한 고백이자 당부입니다. 그것을 나누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에 힘입어 살아갈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자 합니다.

어쩌다 내 일생에 주어진 중심 테마가 예수만이라는 것이 되었나 하고 생각하니,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상황에 있든지, 사상적인 혼란이 왔을 때도, 어떤 현실적인 어려운 일이 있어도, 나는 예수만을 찾으리라! 그만 붙잡고 가리라! 요거 하나가 내 일생의 재산입니다. 여러분도 예수를 따르려면, 본격적으로 그를 붙잡고 그 산으로 올라가십시오. 그러면 새로운 세계를 볼 것입니다.”

잠시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그리스도의 사랑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코로나 사태가 초래한 죽음과 비극, 불투명한 미래로 인한 불안과 고독, 기후위기를 맞은 인류의 삶은 다시 공동의 순례를 위한 믿음과 희망을 요구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인도해주시기를 빌며, 화해와 일치를 향한 세계교회의 기도와 순례를 우리가 이어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