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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ㅣ 김지목 ㅣ 2022-07-31

by 김지목 posted Aug 02, 2022 Views 182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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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2-07-31

20220731 향린주일 성령강림절8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11:1-11, 49:1-12, 3:1-11, 12:13-21

 

예언자 호세아가 활동했던 지역은 팔레스타인의 북쪽 에브라임이라고도 불리는 북이스라엘입니다. 시기적으로는 주전 8세기입니다. 이 시기의 초기, 여로보암 2세 때 북이스라엘은 꽤 번영을 누립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은 이내 북쪽의 신흥 강국 앗시리아에 의해 패망하게 됩니다. 9세기 중엽부터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무섭게 발흥한 앗시리아는 유프라테스를 건너 북앗시리아의 여러 왕국들(아르밧, 하맛)을 평정하고, 서쪽 팔레스타인으로 넘어와 남하하여 북이스라엘을(B.C. 721), 이집트(B.C. 663), 남유다왕국을(B.C. 587) 함락시키며 제국으로 등극하였습니다. 전리품과 노예, 그리고 조공이 집중됨으로써 하나의 제국이 융성하던, 폭력과 파멸의 국제정세가 호세아 예언의 큰 배경이 됩니다. 패망한 북이스라엘 내부 정치는 반란과 왕위찬탈로 혼돈에 휩싸였습니다. 친이집트니 친앗시리아니 하는 파당 간의 살육으로 얼룩지고 외세의 충직한 봉신이 되려고 안간힘을 다하였습니다.

불의한 권력에 눈이 멀어버린 북이스라엘을 향하여 호세아는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합니다. “, 에브라임아, 너는 지금 바람을 피우고 있다. 이스라엘은 몸을 더럽히고 있다.”(5:3)며 개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린 아이였을 때, 내가 사랑하여 이집트에서 불러내었고, 가나안땅에서 곡식과 햇포도주와 기름을 주었으나 그것도 모르고 금과 은으로 바알을 만들었다.”(11:1, 2:10), 이스라엘의 배은망덕을 한탄합니다. 하나님의 의(체데카)로 말미암은 공생과 평화를 저버리고, 강대국의 힘의 논리에 젖어서 탐욕에 눈이 멀어버린, 시대에 대한 비판입니다.

바알은 땅의 신입니다. 바알은 땅을 기름지게 하는 신인데, 탐욕스러운 권력자에게 퍽 매력적인 신입니다. 자기의 탐욕을 풍요롭게 해줄 수 있는 신이기 때문입니다. 앗시리아가 북이스라엘에 숭배를 강요한 신은 제국의 힘을 정당화하는 바알이었습니다. 예언자는 바알숭배 속에 감춰진 탐욕과 폭력을 직시하고 비판합니다. 앗시리아의 바알신을 숭배하면서 탐욕과 폭력을 정당화시키는 제국의 질서를 거절한 것입니다. 바알에 대비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창조주입니다. 창조주는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는 신, 그리고 모든 피조물에 대하여 책임을 가진 신입니다. 정의의 질서와 공평한 사랑과 흔들림 없는 신실함을 인간에게 가르치는 신입니다. 창조주는 권력자의 탐욕을 채울 수 없는 신입니다. 인간중심주의를 반성케 하고 정의와 사랑과 신실함으로 인간을 변화시키는 신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창조주 야훼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과 신실함으로 말미암아 이집트 노예의 삶에서 해방되었고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자기의 포도나무 아래에서 일상의 삶을 기뻐하며 노래할 수 있는 평화를 얻었습니다. 예언자가 북이스라엘을 향하여 바람을 피운다고 한 것은 이스라엘이 자신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과 신실함을 져버리고, 이제 자기 탐욕을 살찌우는 바알을 숭배하는 자가 되었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앗시리아의 저 거대한 폭력적 질서에 편승하여 자기도 탐욕을 한번 채볼까 변절해버린 배은망덕함을 자각시키는 외침이었습니다.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바람피우는 변절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감추지 않습니다. “에브라임아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유다야,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너희 사랑은 아침 안개 같구나, 덧없이 사라지는 이슬 같구나. 그래서 나는 예언자들을 시켜 너희를 찍어 쓰러뜨리고 내 입에서 나오는 말로 너희를 죽이리라.”(6:4-5)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이스라엘의 파멸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관계의 회복이 그 목적이기에 하나님의 심판은 사랑의 다른 면입니다. “바람을 피우며 변절한이스라엘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인내심, 그것은 사랑의 기다림입니다. 기다림이 힘겹지만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을 결코 포기할 수 없다는 하나님의 절절한 열정(파토스)이 하나님의 본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이 돌이켜 다시 하나님과 재결합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하나님의 열정(파토스), 오늘 우리 예언서의 핵심입니다.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너를 버리려고 하여도, 나의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구나! 너를 불쌍히 여기는 애정이 나의 속에서 불길처럼 강하게 치솟아 오르는구나. 아무리 화가 나도, 화나는 대로 할 수 없구나. 나는 너희를 위협하러 온 것이 아니다.”(11:8-9)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귀의하고 이러한 하나님의 열정에 우리도 동화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정(파토스)을 나도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하여 보여주셨던 하나님의 파토스(열정)에 나도 전율하며 그 열정으로 오늘 하루의 삶을 사는 것,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뜨거운 심정에 깊이 젖어드는 훈련이야말로 놓쳐서는 안 될 신앙의 과제입니다.

하나님의 열정(파토스) 그 심정으로 들어가면 돌이킴곧 회개의 과정을 겪게 됩니다. 탐욕에서 정의와 사랑과 신실함으로 돌이키는 것, 바알숭배의 이데올로기에서 창조주를 향한 진실한 신앙으로 돌이키는 것, 땅의 신 바알을 조작해서 자기 탐욕을 채우려는 유혹에서 매 순간 돌이키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을 지키며 다스리는 것인데, 단지 자신을 객관화하여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정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내 존재 전부를 내어맡기며, “하나님만 믿고 모험하는”(장공) 데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정(파토스) 안에서 전율하며 돌이킴의 힘으로 살아가는 이에게 변혁의 힘이 있음을, 오늘의 호세아서 말씀을 통해 성찰합니다. 다시 정의와 사랑과 신실함으로 돌이켜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회복할 때, 앗시리아 제국이 불어오는 폭력과 파멸의 시대가 전복될 수 있다는 것이 예언자의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차원에서 변혁적 주체는 하나님의 열정에서 나오는 것임을 되새깁니다.

 

오늘의 골로새서도 돌이킴의 결과인 이전과 다른 새로운 삶에 대해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합니다. 골로새서 기자는 옷을 벗고 입는다는 동사로 존재의 변화를 묘사했습니다. 하늘의 은총에 덧입혀 구원을 얻은 백성이 된다는 히브리 정서를 엿볼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구원받은 백성을 상징적으로 순교자의 피로 세탁한 흰 세마포를 입었다고 묘사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문화적 상징이 오늘날 우리의 예배문화에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배 때 성의(聖衣)와 영대(스톨)를 착용하는 것을 단지 우리의 죄를 감춘다는 의미에 머물거나 사제의 거룩한 권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늘의 진리로 새 사람이 되고 이전과 다른 새로운 삶을 결단한다는 의례로써 착용하고,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서 자의식을 갖도록 돕는 상징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새 사람을 입는다는 히브리의 상징 은유와 비교해볼 수 있는 동북아시아의 상징적 묘사로, 진리를 깨우칠 때 존재 안에서 빛이 점점 밝아지는 것이 연상됩니다. 안에서부터 점점 밝아져서 깨달음의 존재로 변화한다는 동북아시아의 묘사와, 세마포를 덧입음으로써 구원받은 백성으로 변모한다는 히브리적 묘사가, 종교문화적으로 그 표현이 서로 다르지만, 영성적인 차원에서는 같은 것을 지시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새 사람을 입으라는 골로새서의 표현은, 신성한 외피로 존재의 죄성을 단순히 덮어서 눈가림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은총에 힘입어 진리로 밝게 빛나는 존재로 거듭나는 것을 뜻한다고 하겠습니다.

옛 사람을 벗는다는 말은 탐욕의 질서에서 ()’ 하는 것을 뜻합니다. 골로새서에서 옛 사람땅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는 자로 표현되었습니다. “음행과 더러움과 정욕과 악한 욕망과 탐욕이며, 이것들을 죽이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을 것”(3:5-6)이라고 말합니다. 골로새서의 저자인 바울, 그가 처했던 당시 상황을 떠올려서 유추해본다면, 벗어야 할 옛 사람의 표상은 이방선교를 훼방하는 유대그리스도인들의 율법주의와도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11절에, “거기에는 그리스인과 유대인도, 할례 받은 자와 할례받지 않은 자도, 야만인도 스구디아인도, 종도 자유인도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라고 결론을 지은 것을 보더라도 골로새서의 옛 사람은 율법주의에 찌들어 자기 권력을 지키려는 일련의 사상들을 겨냥한 것 같습니다. 율법의 의미를 조작하여 할례를 받은 자를 구원받은 백성의 자격으로 강조함으로써 유대인들 스스로를 종교지도체계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시도들에 대하여, 바울은 그런 사상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리는 거짓말, 벗어버려야 할 옛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율법주의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율법의 법정신을 무시하고 율법을 조작한 결과물입니다.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것 대신 체제유지를 위해 기계적으로 신앙을 주입하는 편의주의입니다. 자기의 도식에 타자를 끼워 맞추려는 사악한 권력주의입니다.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으므로 합리화하려는 거짓말투성이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율법주의자들과 같은 옛 사람은 탐욕에 길들여진 우상숭배자라고도 말합니다. 자신의 지배체제로 공동체를 재편하려는 음모를 궤책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한 행실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로 옛 사람을 벗는 것입니다.

반면 새 사람을 입는 것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하여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것”(3:10)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으려고 하루하루 새로 태어나려는 노력입니다. ‘옛 사람율법주의자는 율법을 조작하여 자기 탐욕을 채우는, 땅의 신바알을 좇는 자라면, ‘새 사람은 정의와 사랑으로 신실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닮으려고 하루하루 하나님의 열정(파토스)에 전율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새 사람은 자신 안에 깃든 그리스도의 사랑의 빛에 손을 모아 집중하며 그 빛을 더욱 밝히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사람입니다.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에 있습니다. 끊이지 않도록 탈향(脫向)’에 의식을 멈추지 않아야 합니다. 의식하기를 그치면 이내 율법주의로 고착이 되고 말 것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도 있는 것 같습니다. 고난당하는 이들의 현장을 부지런히 찾아나서야 하는 까닭도 이와 연관지을 수 있습니다. 고난과 아픔이 있는 현장은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고통받는 백성과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곳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현장에서 새어나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또 응답하는 우리의 고백은 그 자체로 순수한 기도이며 우리를 새로워지게 합니다. 끊임없이 고난의 현장을 찾는 것은 새 사람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뜨거운 8월이지만 그보다 더 열정적인 하나님의 파토스가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새 사람을 입기 위하여 의식하기를 그치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한 훈련인 것 같습니다. 의식하기를 지속할 때 그곳에서 의미가 생성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관상기도가 우리 신앙에서 유의미한 것도 이 때문이지 않을까 합니다. 일상에 쫓겨 사는 날이 참 많습니다. 차분히 의식을 지속할 수 있는 기도의 시간을 다짐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파토스(열정) 안에서 돌이키는 삶을 살고,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삶을 결단하는 것은 원심적으로 하나님나라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앗시리아 제국과 바알숭배가 심판을 받고 창조주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과 신실함이 온 세상에 실현되게 하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돌이켜서 끊임없이 새로워지도록 애쓰는 것은, 구심적으로는, 내 안에 존재하는 탐욕을 지워내는 마음수련입니다. 바알숭배는 앗시리아의 제국적 탐욕을 채우는 수단이었고 율법주의라는 권력 이데올로기 또한 탐욕의 결과였습니다. 골로새서는 우상을 숭배하게 하는 탐욕을 죽여야 새 사람을 입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오늘 누가복음서에서 예수께서도 탐욕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께 와서 하소연을 합니다. 부모의 유산을 독식하려는 형제에게 한 마디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그런 판결을 내릴 재판관이 아니라며 거절하십니다. 당시에 권위를 인정받는 랍비는 재판관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크고 작은 재판을 관장하는 랍비는 그만큼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고 그 권위에 힘입어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예수께 유산 분배의 공정한 판결을 부탁한 것은 그만큼 예수의 권위가 인정받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어떤 사람이 그런 판결을 요청한 것은 예수를 향한 존경의 표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 존경과 권위를 취하지 않고 재판에 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가르쳐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너희는 조심하여, 온갖 탐욕을 멀리하여라. 재산이 차고 넘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12:15)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그런 흔한 가르침보다 권위를 인정받고 더 큰 존경을 받을 수 있도록 유산분배의 판결을 내려주는 것이 더 이롭지 않았을까 생각되지만, 예수께서는 한 가지 비유를 들면서까지 그 가르침에 무게추를 얹었습니다.

탐욕이 가시화된 재물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탐욕스럽게 재물을 취한 경우입니다. 예수께서는 재물에 눈을 멀게 하는 탐욕을 버리고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부자가 되라고 가르칩니다. “재물과 탐욕”, 그리고 생명과 하나님이 대비를 이룹니다. 시간적인 관점에서 재물과 탐욕은 현생에 머물러 있지만, ‘생명과 하나님은 영원합니다. ‘재물과 탐욕은 육적인 차원에 천착하지만, ‘생명과 하나님은 영적인 차원을 지향합니다. 영원하고 영적인 차원을 선택하라는 것, ‘탐욕으로 인생을 허비하지 말고 생명의 본래 목적에 충실한 삶을 살라는 교훈입니다. 탐욕은 소중한 인생을 수단으로 삼고 재물을 남깁니다. 세상에 그렇게 재물을 남기고 떠나버리는 것만큼 무용한 것이 없는데 소중한 생명을 허비하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은 것이라고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생명 자체를 목적으로 삼고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자가 지혜로운 사람이며 또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사람입니다.

비유에 등장한 어리석은 부자와 같이, 재물을 목적으로 생명을 수단으로 삼는 어리석은 관점으로는, 재산분배 판결을 요청했던 그의 문제가 온전히 해결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한지혜를 얻는다면 재산분배의 문제도 스스로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지혜를 얻도록 예수는 탐욕을 멀리하라”(12:15)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재산분배에 관하여 판결을 기피하신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판결을 내려주신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4개의 성서본문은 탐욕에서 돌이켜 생명을 추구하는 새 사람이 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교훈은 오늘날 생태정의 실현으로 창조세계를 회복하는 선교에 꼭 필요한 가르침입니다. 개발의 논리는 재물의 논리입니다. 인류의 그 어리석음이 피조세계를 파괴해온 것을 당장 시급하게 돌이켜야 할 때입니다. 지구별의 온생명이 사라진다면 인류의 발전과 지식의 축적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돌이킴으로써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한지혜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돌이킴으로써 하루하루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경험을 서로 나누고,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기는 우리 공동체 되기를 기도합니다.

 

잠시 침묵합시다.

 

.......................................

 

(파송사)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열정을

우리 신앙의 가슴에 심읍시다.

하나님의 파토스에 의식하기를 끊이지 않게 하여

하나님의 그 사랑과 열정의 싹을 틔우고

새 사람되어 공동체 선교로 함께 합시다.

돌이킴으로써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세상의 탐욕을 이기는

하나님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아름다운 향린공동체 되기를,

주 성령의 역사와 은총을 간절히 빌며

 

함께 공동축도를 나눕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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