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교회가 세상에 무릎을 꿇어야 할 때 ㅣ 정경일 ㅣ 2022-09-11

by 김지목 posted Sep 13, 2022 Views 214 Replies 0
Extra Form
날짜 2022-09-11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지금은 교회가 세상에 무릎을 꿇어야 할 때

(예레미야 4:11-12; 22-28, 디모데전서 1:12-17, 누가복음 15:1-10)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입니다. _누가복음서 15:10

 

 

향린교회 하늘 뜻 펴기를 요청받고, 교회와 세상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김희헌 목사님이 향린 성서일과 본문을 보내 주셨습니다. 저는 정해진 본문에서 출발하기보다는, 오늘의 구체적 문제에서 출발해, 그 문제의 해법을 성서의 메시지에 비추어 성찰하는 방법에 익숙해서, 처음엔 좀 난감했습니다. 그래서 성서본문을 바꿀까 하다가, 제게 익숙하지 않은 길을 가 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세 성서본문을 읽으며 그 뜻을 묵상했는데, 흥미롭게도, 그 본문들이 교회와 세상에 대해 제가 하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조명해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조명은 전복적이었습니다. 세 성서본문이 말하는 부정적 현상들이 세상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의 문제로 이해된 것입니다. 성서의 조명 아래 드러난 것은 경건한 교회타락한 세상의 대조가 아니라 타락한 교회경건한 세상의 대조였습니다.

 

예레미야는 내가 바라보니, 온 땅이 혼돈하고 공허합니다. 하늘에도 빛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라며, 자기 시대에 대해 절망하고 한탄합니다. 이때 그는 창세기 12절의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라는 말씀을 상기했을 것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의 혼돈과 공허와 어둠은 하느님이 만드신 게 아니었습니다. 빛과 어둠을 나누신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어지럽히며, 다시 혼돈과 공허와 어둠의 카오스를 불러들인 이들은 인간이었습니다.

 

교회는 스스로를 세상의 빛이라고 하는데, 과연 세상은 오늘의 교회를 빛으로 여길까요? 고통과 재난과 위기의 깊은 어둠 속에서, 세상은 교회를 등불 삼아 길을 찾고 있을까요? 이런 물음은 우리에게 자괴감을 줍니다. 답이 무엇인지 쉽게 예상할 수 있어서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세상의 빛이 아니라 세상의 어둠이라는 인식이 세상 사람만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상식처럼, 통념처럼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여러분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십시오.”(누가복음서 11:35)라고 하셨는데, 마치 오늘의 교회에 주시는 말씀 같습니다.

 

디모데전서에서 바울은 자신이 전에는 훼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다고 고백합니다. 심지어, 자신을 죄인의 우두머리였다고 고발합니다. 여기서 과거의 바울은 교회를 박해하는 세상을 대표합니다. 그런데, 바울의 겸손하고 가혹하기조차 한 자기고백과 자기고발을 묵상하면서, 불편하지만 피할 수 없는 물음들이 일어났습니다. 세상이 교회를 박해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세상을 박해하는 것이 아닐까요? 교회야말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훼방하고 세상을 박해하며 폭행하는 죄인의 우두머리인 것은 아닐까요?

 

지난봄,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애쓰는 시민들이 국회 앞에서 단식농성을 할 때, 그 바로 옆에서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맞불 기도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큰 목소리로 찬송하고, 무릎 꿇고 기도하던 그리스도인을 보며 제가 느낀 것은 부끄러움이었습니다. 하루는 농성장을 지키기 위해 철야를 했는데, 어려서 철야기도를 했던 기억 때문인지, ‘경건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혐오가 아닌 사랑!”을 외치는 시민과, 사랑의 이름으로 혐오를 말하는 그리스도인 중에, 누가 경건한 사람일까요?

 

누가복음서 이야기를 묵상하면서도 관점의 전복을 경험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잃은 양을 세상이라고 생각하고, 교회는 세상을 찾아 구원하는 목자쯤 되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의 구원받아야 할 잃은 양은 세상이 아니라 교회인 것 같습니다. 물질에 끌려, 권력에 끌려, 하느님을 떠나 이리저리로 헤매다, 결국 길 잃은 양이 되어버린 게 교회의 모습이니까요. 오늘의 교회는 세상보다 더 세상적입니다.

 

1990년대 초에 교회의 박해를 받은 변선환 선생님은, 마치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했던 것처럼 그래도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이현주 목사님이, 당신 같으면 교회 안에도 구원이 있다.”라고 말했을 거라고 하셨다죠. 사태가 더 악화된 오늘날엔 교회 안에는 구원이 없다.”고 탄식하며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급증합니다. 그들 중 일부는 진보적 교회를 찾아가기도 하지만, 더 많은 이들은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는 가나안 신자가 됩니다. 그럴수록 교회 안의 성찰적 신앙의 목소리는 약해지고 맹목적 신앙의 목소리만 커지면서 교회가 더 망가지는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여기까지는 너무 우울한 이야기지만,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세 성서본문에는 희망의 메시지도 들어 있습니다. 절망하는 예레미야에게 하느님은 내가 온 땅을 황폐하게는 하여도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않겠다.”고 하십니다. 당신의 뜻을 저버리고 죄의 길을 선택한 인간의 잘못은 물어 심판하시지만, 인간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복음의 훼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죄인의 괴수였던 자신에게 하느님이 자비와 은혜를 베푸셨음을 감사히, 겸손히 고백합니다. 예수께서도 우리가 잃은 양 한 마리, 잃은 한 드라크마를 찾을 때 기뻐하듯이, 하느님도 회개하는 죄인하나를 기뻐하신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죄인을 사랑하신다는 말씀을, 우리가 계속 죄인으로 살아도 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죄인으로 낙인찍히고 배제당한 이들을 차별 없이 사랑하셨지만, 늘 그들에게 다시는 죄를 짓지 마십시오.”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깨우쳐 주신 것은, 하느님은 죄인을 사랑하시지만, 죄인이 회개할 때, 회개하는 죄인이 될 때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고백삶의 회개로 이어져야 합니다.

 

이렇게 성서를 묵상하면서, ‘회개란 무엇일까?’ 생각하는데, 요즘 제가 참여하고 있는 독서토론 모임에서 함께 읽고 있는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중 한 에피소드가 떠올랐습니다. 디뉴 마을의 사랑받는 미리엘 주교와 미움받는 혁명가 G의 처음이자 마지막 대화입니다.

 

미리엘 주교는 살아있는 성자였습니다. 병자를 위해 자신의 거처를 내어주고, 자신은 가난하게 살면서 가난한 자를 돌보고, 불행하고 비참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그런 그가 불편해하는 사람이 딱 한 명 있었습니다. 프랑스혁명 때 국민의회 의원이었던 혁명가 G입니다. 마을 사람은 그의 집을 망나니의 집이라 부르며 혐오했습니다. 이는 혁명 후, 루이 16세 처형 결정을 내린 국민의회 의원을 국왕 살해자로 비난했던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실 G는 왕의 처형에 반대했지만, 사람들은 그가 국민의회 의원이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미워했습니다.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미리엘 주교에게도 G에 대한더 정확히는 프랑스혁명에 대한반감이 있었습니다. 젊은 시절 판사의 아들로 부와 향락을 누리고 있던 미리엘은 프랑스혁명으로 모든 걸 잃고 이탈리아로 도망갔다가 그곳에서 아내마저 병으로 잃었습니다. 그 충격 때문이었는지, 체념 때문이었는지, 미리엘은 세상의 길을 버리고 사제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미리엘 주교는 외로운 영혼G를 방문하는 것이 그의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G가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갑니다. 하지만 늙은 혁명가가 악수를 위해 내미는 손을 잡지 않음으로써 그의 반감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죽어가고 있는 노혁명가와 논쟁에 가까운 대화를 합니다.

 

미리엘 주교는 프랑스혁명의 분노가 끼어든 파괴를 비판합니다. 이에 대해 G권리의 분노가 진보의 한 요소이며, 비록 불완전했다고 할지라도 프랑스혁명은 인류의 존엄함을 선포하는 축성식이었다고 반박합니다. 미리엘은 비판의 날을 더 세웁니다. 그는 국민의회가 루이 16세와 앙뚜아네트 왕비를 공개 처형한 것과, 10살 소년이었을 뿐인 루이 17세를 죽게 한 혁명의 잔인함을 규탄합니다. G는 루이 17세를 위한 주교의 눈물을 긍정하면서도, “우리의 눈물을 루이 17세 이전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주교님께서 저와 함께 백성들의 어린 것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시면, 저 또한 당신과 함께 국왕들의 자식들을 위해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미리엘은 항변하듯 말합니다. “저는 모든 이들을 위하여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자 G가 목소리를 높여 말합니다. “대등하게! 그리고 저울이 한쪽으로 기울어야 한다면, 백성들 쪽으로 기울어야 합니다. 그들이 더 오래전부터 고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G는 자신은 루이 16세의 처형에 반대했지만 폭군의 종말에는 찬성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프랑스혁명이 냉혹했다고 하는 주교에게 군주제가 얼마나 가혹했는지를 상기시켜 줍니다.

 

저는 왕비 마리-앙뚜아네뜨를 측은히 여깁니다. 그러나 저는 또한, 루이 대왕 치세기였던 1685년에, 상체를 허리까지 벌거벗긴 채, 자기의 젖먹이 아이와 약간의 거리를 두고 말뚝에 묶여 있던, 그 가엾은 위그노파 여인도 측은히 여깁니다. 그녀의 젖가슴은 고이는 젖으로, 심장은 극도의 괴로움으로 부풀고 있었습니다. 어린것은 굶주려 창백해진 얼굴로 어미의 젖가슴을 바라보며 죽어갔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그러나 아이의 유모이며 생모인 그 여인에게, 망나니가 태연히 말하였습니다. ‘개종해!’ 아기의 죽음과 양심의 죽음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한 어미에게 가해진 그 탄탈로스의 형벌에 대해 무슨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선생, 유념해 두시오, 프랑스 대혁명에게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드러낸 노여움은 미래에 의해 사면받을 것입니다. 또한 그 결과는 더 나은 세상입니다.”

 

G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일까요? 미리엘은 탄식하듯 말합니다. “진보는 신을 믿어야 합니다. 선은 불경한 하인을 거느릴 수 없습니다. 무신론자는 인류의 못된 지도자입니다.” 그러자 G는 침묵과 함께 잠시 몸을 떨다가 하늘을 바라봅니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고여 흘러내립니다. 그리고 독백처럼 말합니다. “! 그대! ! 이상이여! 오직 그대만이 존재하도다!”

 

다시 침묵이 흐른 후 G가 말합니다. “무한이 있습니다. 그것은 저기에 있습니다. 만약 무한에게 자아가 없다면, 그 자아가 무한의 한계일 것입니다. 그럴 경우 그것은 무한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있습니다. 따라서 무한에게는 자아 하나가 있습니다. 무한에게 있는 그 자아, 그것이 신입니다.” 마치 신비가처럼 그가 생각하는 신, 그의 이상인 신, 무한한 그 무엇을 말한 G,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이야기합니다.

 

주교님, 저는 사색과 탐구와 명상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제 나이 육십이 되었을 때 조국이 저를 불렀고, 조국의 일에 참견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저는 그 명령에 따랐습니다. [...] 저는 압제에 신음하는 사람들을 구출하였고, 고통에 시달리는 이들을 위로하였습니다. [... ] 저는 항상 인류가 광명을 향하여 전진하는 것을 지지하였으나, 때로는 무자비한 진보에 저항하기도 하였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저의 적들을, 즉 당신네 사제들을 보호하기도 하였습니다. [...] 저는 저의 힘이 허락하는 한 의무를 수행하였고, 저의 능력 한도 내에서 선을 행하였습니다. 그다음 저는 쫓기고, 몰리고, 추격당하고, 박해받고, 음해당하고, 조롱당하고, 모욕당하고, 저주받고, 추방당하였습니다. 이미 여러 해 전부터, 저의 머리 백발이 되었건만, 저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네들에게 저를 멸시할 권한이 있다고 믿으며, 무지하고 가엾은 군중이 저의 얼굴을 저주받은 얼굴로 여김을 분명히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 누구도 증오하지 않는지라, 증오에서 비롯된 저의 고립을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자기 삶을 요약하듯, 유언을 남기듯 이야기를 마치고, G가 미리엘 주교에게 묻습니다. “이제 제 나이 여든여섯이며, 곧 죽을 것입니다. [주교님은] 저에게 무엇을 청하러 오셨습니까?” 그 순간, 노혁명가에게, 어쩌면 주교 자신에게도 충격적이었을 사건이 일어납니다. 미리엘 주교가 당신이 내려주실 축복을!”이라고 말하고는, G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것입니다. 그리고 주교가 머리를 들었을 때, 혁명가가 엄숙한 모습으로 숨을 거둔 것을 보았습니다.

 

최소한 그즈음의 미리엘 주교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처럼 보입니다. 아마도 주교는 그가 죄인이라 판단한 G가 죽기 전에 회개한다면 용서하고 축복해 줄 목적으로 그의 집을 찾아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집에서 일어난 일은 두 사람의 위치가 뒤바뀌는 것이었습니다. 미리엘이 무릎을 꿇고 G의 축복을 청했습니다. 마치 세속적 혁명가 G가 사제가 되고 경건한 주교 미리엘이 죄인이 된 것 같았습니다. 미리엘이 G에게 축복을 요청한 것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회개한 것으로 봐도 좋을 것입니다. 레 미제라블에서 미리엘 주교의 삶과 신앙을 다루는 부분의 제목은 의인’(A Just Man)입니다. 어쩌면 미리엘이 의인이 된 순간은, 그가 죄인이라 여기며 불편해하고 부정했던 G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일 것입니다.

 

G를 만나기 전에도 미리엘 주교는 교회의 양심과 선이 완전히 파괴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미리엘은 그 자신의 말처럼 모든 이를 위해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숭고한 눈물입니다. 하지만 구체적 역사 현실에서는, 모든 이를 위해 운다는 것은 그 누구를 위해서도 울지 않는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모두를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G가 미리엘에게 일깨워 준 것은, 인간인 한 모두가 고통받지만, 사회적 조건에 따라 어떤 이들은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이 고통받고, 그래서 그들을 우선적으로 더 많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미리엘은 그날 G와 있었던 일에 대해 침묵했습니다. 다만 이때부터 가난한 자들과 레 미제라블’, 비참한 자들에 대한 그의 사랑이 더욱 깊어졌습니다. 위고는 G를 만난 후 미리엘의 내면에서 일어난 변화를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주교의 정신 앞을 지나간 그의 정신과 주교의 양심 위에 반영된 그의 위대한 양심이 주교가 완전의 경지에 접근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는 아무도 말할 수 없으리라.” 아마도 G와의 만남과 대화는 미리엘의 교회적, 개인적, 자선적 영성을 사회적 영성으로 변화시킨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의 창을 통해 세상을 보던 그가, 세상 속에서 세상을 보고, 또한 세상 속에서 교회를 보게 된 시점 변화의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드디어, 우리가 잘 아는 장 발장이 미리엘 주교의 집 출입문을 두드리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장 발장은 굶주리는 조카들을 위해 빵을 훔친, 불의한 구조 속에서 연민 때문에 범죄자가 된 넓은 의미의 희생자였지만, 이제는 연민 때문에도, 생존 때문에도 아닌, 오직 분노와 복수심 때문에 범죄하려 했던 부서진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기피하고, 의심하고, 배제하던 그가 미리엘의 문을 두드렸을 때, 미리엘은 아무런 편견도 조건도 없이 그를 자신의 형제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는 교회의 성자미리엘과 세상의 성자’ G가 함께 만든 민중의 자기초월사건의 시작이었습니다.

 

미리엘이 교회를 상징하고 G세상을 상징한다면, 레 미제라블의 이 이야기는 우리를 더 의기소침하게 만듭니다. 오늘의 교회에게 미리엘 주교의 경건한 삶은 불가능성에 더 가까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기도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기를 초월해 고통받는 이들과 하나 되는 세상의 성자들 앞에, 그리스도인보다 더 경건한 시민들 앞에 무릎을 꿇고 축복을 청하는 겸손과 용기를 얻기 위해, 하느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겠지요. 무신론자로 불렸던 G도 그가 무한의 자아라 부르던 신을 명상했고, 미리엘 주교도 늦은 밤 오솔길을 걸으며 명상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자비롭고 정의로운 삶은 명상과 기도에서 시작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예레미야서와 디모데전서와 누가복음서와 레 미제라블이 공통적으로 일깨워 주는 것은, 역설적으로, 교회의 절망이 아니라 교회의 희망입니다. 지금의 교회가 혼돈과 공허와 어둠의 집단 같고, 죄인의 우두머리 같고, 잃은 양 같다고 하더라도, 회개하기만 하면, 생각과 삶의 방식을 전환하고 변화하기만 하면, 교회는 하느님과 세상을 다시 기쁘게 할 거라는 희망입니다. 그 희망이 거센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려 불안할 때, 세상을 지배하거나 가르치려 하지 않고, 하느님 앞에 경건히 무릎 꿇고 기도하며 이웃 앞에 겸손히 무릎 꿇고 연대하는 향린을 보며 안심하게 됩니다. 향린교회가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계속 교회와 세상의 희망이 되어 주시리라 믿고 바라고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