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위한 구원 (렘 8:18~9:1, 딤전 2:1~7, 눅 16:1~13)
2022.09.18. 창조절 세 번째 주일, 기후정의주일
[세계교회협의회 제11차 총회 스케치와 과제]
교우들의 관심과 기도에 힘입어 세계교회협의회(WCC) 총회에 잘 다녀왔습니다. 이번 11차 총회에는 150개국 352개 교단을 대표하는 4천여 명의 총대와 참가자들이 모였습니다. 9년 전 부산에서 10차 총회를 가졌을 때 주제는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였습니다. 이번 주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세계를 화해와 일치로 이끄신다!”입니다.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경험을 가진 교회 공동체의 이야기는 마치 인간 경험의 거대한 바다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세계교회에 속한 모두가 ‘화해와 일치’라는 큰 화두를 안게 되었습니다. 9일간의 여정을 모두 담을 수는 없지만, 그 분위기를 함께 느껴보시기를 바라며 만든 관련 동영상을 잠시 시청하겠습니다.
(동영상 시청)
이번 WCC 총회에 특별히 우리 교회 국악선교단 예향이 참석하여, 월요기도회와 평화음악회를 진행하게 된 것은 뜻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월요평화기도회는 기장 교단의 평화공동체운동본부가 2014년 사순절부터 매주 월요일마다 드려온 것으로서, 이번 269차 기도회는 세계교회 대표들과 함께했던 것에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아름다운 가톨릭교회에서 예향의 음악과 함께 드려진 이번 월요기도회는, 세계교회협의회 총대들이 마지막 의사결정 과정에서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해 함께 힘쓰겠다는 의사록(minute)을 채택하는 일에 일조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이번 총회에 참석하면서 두 가지 관심사를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기후위기’에 대처하는 ‘생태 정의’(ecological justice) 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세계평화 문제에 대처하는 교회의 입장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기후위기 문제는 현재의 문명과 질서 속에서 개발과 발전을 계속해가는 ‘지속 가능성’(sustainability)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소비문명 체제를 전반적으로 돌이켜서 ‘생태 문명’을 향해 갈 수 있는 비전을 확립하는 일입니다. 이 주제가 중요하기에 여러 활동과 행사가 있었고, 총회 사전대회와 본 대회에서 활발한 토론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질적인 ‘로드맵’이 나오지 못한 것은 아쉽기만 합니다. 교회가 이 사안에 대해서 문제의식은 공유하지만, 아직 공동목표를 구체적인 방안으로 마련하는 단계에 이르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물론 생태문명에 관한 비전은 누가 정해서 제시해주는 것이 아니라, 각 신앙공동체가 각자의 자리에서 만들어가야 할 일입니다. 우리 교회도 <미래선교 연구위원회> ‘생태선교팀’을 통해서 ‘탄소 중립’을 비롯한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교회가 이번 주일을 ‘기후정의주일’로 정하여 함께 기도하고, 시민사회와 함께 오는 토요일 ‘기후정의행동’에 참여하기로 한 것은 의미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한국교회가 지구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책임 있게 대처하고, 목표를 바로 세울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다른 하나는 평화문제입니다. 세계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최근 유럽의 갈등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 등 오래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각국의 관점이 대립하는 이 문제에 관해 세계교회는 두 개의 성명서를 채택하였습니다. (「War in Ukraine, Peace and Justice in the European Region」, 「Seeking Justice and Peace for All in the Middle East」) 이 성명서는 모두가 만족할만한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한 점을 인정하면서도, 이스라엘 정부에 분리장벽 철거와 시리아에 대한 제재 철회를 요구하고, 우크라이나 전쟁에 반대하는 원칙적인 입장만이 아니라, 군사적 대결을 넘어 유럽 사회에서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는 이민자 규제, 인종주의와 외국인 혐오범죄 등에 언급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대처해가자는 결의를 담았습니다.
영상에서 보셨다시피, 한반도 평화문제에 대해 세계교회의 공동행동을 다짐하는 ‘의사록’을 채택했는데, 저에게 새롭게 다가온 한 가지 도전은, 국가역량이 커진 한국사회가 이제는 도움을 요청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세계평화에 대해서 져야 할 책임이 크다는 점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인공지능(AI)과 결합한 살상 무기개발에 관한 것입니다. ‘킬러 로봇’으로 불리는 AI-무기를 개발하는 일에 앞장선 7개국 가운데 한국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책자(「Killer Robots: A Campaign Guide for Churches」)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이 책자는 인공지능 무기개발이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실전에 배치되고 있는 국가 사례로 미국과 한국을 들고 있습니다. 하나는 무인 상태로 석 달간 바다를 떠다니며 잠수함을 탐지하는 미국의 전투함선(warship)이요, 다른 하나는 한반도 DMZ에 설치된 무인 기관총과 무인 유탄발사기입니다. 세계교회는 이 ‘킬러 로봇’ 문제를 2013년부터 대처해오고 있는데, 저는 이제야 알게 된 점에 대해 당사국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웠고, 앞으로 이 문제를 군축 평화의 관점에서 대처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독일 출장은 WCC 총회와 이어진 <한반도 평화포럼, EFK>에 참석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덤으로 얻게 된 두 가지 경험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칼스루에 총회 기간에, 안병무 선생님이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다닐 때 사귄 친구분의 따님으로, 현재 독일에서 목회하는 Nicola Friedrich 목사님을 만난 일입니다. 지금은 60대 중반이 된 이분이 유아세례를 받을 때 안 선생님이 대부(godfather)를 맡아주셨다고 합니다. 나중에 안 선생님이 독일 방문하셨을 때 사다 주신 한복을 입고 찍은 사진도 보여주시고, 19살 때 한국에 초대해서 도시산업선교회 경험을 하도록 해주신 것이 자기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습니다. 그분에 관한 영상은 10월 셋째 주일에 우리 교회에서 있을 <안병무 탄생백주년 기념강연회>에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모든 회의를 마치고 라이프치히에 가서 보낸 이틀간의 경험입니다. 옛 동독 지역에 속한 이 도시에는 도심 광장을 사이에 두고 세워진 약 구백 년의 역사를 가진 두 개의 유명한 교회가 있습니다. 하나는 바흐가 27년간 성가대장으로 활동한 토마스교회이고, 다른 하나는 1989년 독일통일 운동을 촉발한 월요기도회가 열린 니콜라이교회입니다. 지난 주일, 저는 토마스교회를 담임하는 브리타 타디켄 목사님의 초대를 받고 아침 예배에 참석하여 그 교회 소년합창단이 함께하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서양 교회음악의 진수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오후에는 니콜라이교회에 오랫동안 앉아 있었습니다. 교회의 역사에 관한 강연을 듣고 책을 읽으면서, 동서독 통일 당시 교회의 역할에 대해 배우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떠나기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이 교회가 독일에서 했던 역할을 앞으로 우리 교회가 한국에서 감당할 수 있기를 바라는 꿈이 있습니다. 역사가 휘몰아칠 때, 교회가 소중한 일을 할 수 있는데, 종교의 유무와 차이를 넘어 함께 한반도 통일을 위해 기도하는 자리에 우리 교회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니콜라이교회에서 기도운동을 상징하는 배지를 몇 개 가져왔습니다. ‘칼을 쳐서 보습으로’라는 미가서의 말씀을 담은 이 배지를 원하시는 분은 저에게 오십시오. 대신, 이걸 가져가시는 분이나, 저에게 이 배지를 받는 분들은 앞으로 우리 교회 통일기도운동을 운명처럼 여기고 감당하여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이번 총회를 통해 세계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화해와 일치’를 이루는 과제를 안게 되었습니다. ‘화해와 일치’는 분열된 세계에 꼭 필요한 제목이지만, 구체적인 현장에서 실행하려면 매우 큰 숙제이기도 합니다. 통 큰 생각과 거족적인 행동,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고유한 삶의 방식에 관한 연습이 필요합니다.
총회 기간 성경공부 시간의 조별토의 중에 얻은 경험을 마지막으로 소개하며 WCC 총회에서 느낀 점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미국에서 참여한 분 가운데, 우리 교단과도 협력 관계에 있는 제자 교단(Disciples Church)에 속한 분의 이야기입니다. 이 교단은 그동안 소수자 문제에 관한 많은 논쟁을 해왔다고 합니다. LGBTQ 이슈나 BIPOC (Black, Indigenous, and People of Color) 문제에 개방적인 이 교단이 많은 논쟁을 거치면서도 분열하지 않고 진보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 불문율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성찬식을 통해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복하는 자세라는 것입니다. 논쟁이 아무리 격화되더라도 함께 성찬에 참여하며, 그 시간에 자기 생각을 내려놓는다는 것이지요. 배울만한 일입니다.
[성서 말씀 / 누가복음 16장 1~13절, 디모데전서 2장 1~7절]
오늘 복음서의 말씀을 잠시 생각해보겠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상한 예화를 들고 있습니다.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로 알려진 이 이야기는 도덕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해하기 힘든 내용입니다. 이 비유의 의미를 잡기 위해서는 그 청중이 제자들이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앞장 15장에 나오는 세 개의 비유는 모두 소외된 사람들에 관한 윤리적인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잃은 양 한 마리의 비유>, <잃어버린 동전에 관한 비유>, <잃었던 아들에 관한 비유>로 구성된 15장 이야기의 청중은 모두 그 사회의 잃어버린 사람들 즉 ‘세리와 죄인들’이었습니다. 반면, 오늘 본문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이야기는 도덕적인 가르침보다는 영적인 믿음에 관한 가르침으로서, 논리적인 이해보다는 직관적인 파악을 요구합니다.
비유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떤 부자가 자기 재산을 낭비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은 청지기를 불러서 해고통지를 합니다. 일자리를 잃고 비참해질 앞날을 걱정한 청지기는 한 가지 꾀를 냅니다. 그것은 장부를 조작하여, 빚진 사람의 환심을 사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는 마치 자기 재산인 것처럼 기름 백 말을 빚진 사람에게는 오십 말을 감면해주고, 밀 백 섬은 팔십 섬으로 바꿔주면서, 훗날 보응을 받으려는 간교한 계획을 실행합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안 주인은 그 부도덕한 조작 행위를 가리켜 ‘슬기롭게 대처했다’라고 말하면서 칭찬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비유가 단순 도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됩니다.
이 이야기를 도덕에 관한 가르침으로 들은 바리새인은 옆에서 듣고 있다가 예수를 비웃었습니다. (16:14) 그것은 그들이 율법을 기준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도덕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에 관한 기준을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가 제자들에게 말하고자 한 것은 율법이 아닌 믿음에 관한 것입니다.
젊은 시절 안병무는 야성」(5집, 52년 7월)이라는 잡지에서 이 비유를 언급합니다. 이 비유의 목적은, 선(善)이 구부러지고 더럽혀진 현실에서 믿음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이야기로 이해합니다.
여기에는 냉정한 현실 인식이 담겨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악(惡)이 단지 악으로만 구성되지 않고, 그 안에 반드시 선의 요소를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악은 매혹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악이 발흥하는 세상에서 단순 도덕은 대체로 무능합니다.
예수는 비유에서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라고 말하고, 그 일을 실행한 청지기를 칭찬합니다. 예수의 이 말씀은 ‘선한 결과를 위해서는 과정도 선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믿기 힘든 독설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이 비유의 최종 가르침은 아닙니다. 이 비유에서 청지기는 ‘세상의 자녀’를 상징하고, 그들의 거래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어내는 일에 슬기롭습니다. 청지기는 자기 목적을 이루어내는데 충실합니다. 청지기의 이 충실함이 본문이 전하고자 하는 최종 가르침의 단서가 됩니다.
비유의 진정한 가르침은 마지막 절에 나옵니다.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이 말은 ‘빛의 자녀’로 살아가야 할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선악이 뒤엉킨 현실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을 던집니다. 이 과제는 제자들만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에게 해당합니다.
이 주제를 디모데전서 본문과 이어서 좀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디모데서는 교회가 제도적인 틀을 갖추어갈 즈음 기록되었습니다. 이 편지는 복음에 충실한 삶에 대해 말합니다. 그것은 ‘깨끗한 마음과 선한 양심, 거짓 없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에 기초한다고 말합니다. (1:4)
오늘 본문은 그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을 ‘모든 사람을 위해 드리는 기도’에서 찾습니다. 그 기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분’에 관한 믿음에 기초합니다. 이 믿음이 이번 WCC 11차 총회의 주제에 담겨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힘입어 화해와 일치’를 이루는 삶입니다.
우리는 모두 ‘화해와 일치’를 위해 일하라는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이 부름을 이끄는 신학이 본문 4절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신다.” 이 신학은 세상의 도덕률에 기초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의 구원을 위해 바쳐진 그리스도의 사랑, 그 사랑을 깊이 신뢰하는 마음에 하늘의 평화가 깃들고, 그 평화로운 마음이 이루어가는 ‘화해와 일치’의 삶에는 하늘의 미소가 담길 것입니다. 그 구원과 축복의 길로 우리 모두 나아가기를 기원합니다.
침묵으로 기도합시다.
[파송사]
그리스도의 사랑은 온 세상을 화해와 일치로 이끕니다. 이 믿음을 따라 평화를 회복합시다. 모든 이들을 위해 열린 하나님의 구원을 믿고,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합시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신뢰하며, 그분과 함께 화해와 일치를 이루는 삶을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