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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자족의 영성 | 김희헌 | 2022-09-25

by 김희헌 posted Sep 25, 2022 Views 197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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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2-09-25

자족의 영성 (32:1~3a, 6~15, 디전 6:6~19, 16:19~31)

2022.09.25. 창조절 네 번째 주일

 

[한국기독교장로회 107회 총회 주요 논의내용]

지난주에는 교단 총회에 다녀왔습니다. 총회는 28개 노회, 1,650여 교회를 대표하는 목사와 장로가 동수로 구성되어 약 육백여 명이 모이는데요. 그 내용은, 새로운 임원을 구성하고, 지난 한 해의 활동에 대한 보고와 앞으로의 한 해 동안 진행할 사업을 결정하는 회의입니다. 3일 동안 지난 활동에 대해서 20여 개의 위원회 보고가 차례로 있었고, 앞으로의 사업은 백여 개의 안건으로 다루어졌습니다.

관심을 끈 주요 의제는 세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교단의 재정 안정성을 위해 서대문에 있는 총회 교육원 장소를 개발하기로 한 결정이고, 다른 둘은 성 평등과 기후위기에 관한 대처방안에 관한 논의였습니다. 전반적으로 보면 결과가 좀 아쉽습니다.

언론에도 나왔지만, ‘성 평등과 관련된 사안은 동성애 반대를 표방한 일부 지역의 집단적인 주장으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성 평등이라는 용어 자체에 시비를 걸면서, ‘성 평등은 동성애를 옹호하는 용어이기 때문에, ‘양성평등이라는 말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입니다. 결국, 용어사용방식을 두고 투표까지 진행해서 1표 차이로 성 평등이라는 용어를 계속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사회적 상식에 미치지 못하는 사태가 생겨난 것입니다.

더욱 격렬한 논쟁은 동성애 반대를 집단으로 표명한 두 노회의 헌의 안건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목포노회는 동성애와 동성혼이 교단의 신앙고백서에 부합되는지 헌법 질의를 했고, 경남노회는 더 나아가 동성애와 동성혼이 교단의 신앙고백에 위배된다는 입장표명을 요구했습니다. 1972년에 만들어진 교단 신앙고백서는 총 7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인간과 죄에 관한 문제를 다룬 32절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사람은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 그리고 일남일녀를 결합시켜 공동체를 이루어 생을 즐겁고 풍부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의 축복이다. 인간이 이성의 상대자와 사랑의 사귐을 위하여 가지는 성은 생의 의미와 창조의 기적을 발휘하는 귀중한 특징이다. 그러므로 성을 오용하거나 남용하여 불행을 초래하지 말고, 그리스도 신앙으로 그 질서를 지켜야 한다.”

여러분은 이 내용과 동성애 반대 주장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위 내용을 동성애 반대를 주장하는 논거로 사용하는 교회에 대해서 총회는 딜레마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대부분 교단이 이미 동성애 반대입장을 공식 표명한 상황에서, 보수적인 분위기에 더욱 강하게 압박을 받는 경남지역 교회의 곤혹스러운 현실에 목회적으로 공감되는 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신학적 진보성을 유지해온 우리 교단이 그런 일방적인 주장에 동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문제는, 동성애를 찬성하면 이단으로 낙인이 찍히고, 목사직에서 제명당하는 일까지 벌어지는 교계 상황에서, 공개적으로 나서서 자기주장을 펼치는 것이 위험시되는 분위기라는 점입니다. 이 점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저는, 향린교회의 상식에 기초하여 발언했습니다. 교단이 동성애 문제에 대해서 합의된 결론에 이르기 전까지 우리가 잠정적으로 취할 수 있는 태도는 세 가지라고 말했습니다.

첫째,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에 만들어진 교단의 신앙고백서동성애에 관한 규정을 담고 있지 않으며, 문제가 된 32절은 이성 간의 신실한 사랑의 관계에 관한 내용일 뿐이다. 따라서, 신앙고백서의 내용을 동성애 반대를 위한 논거로 삼을 수는 없다는 점.

둘째, 김재준 목사가 위원장이 되어 만든 신앙고백서는 전반적으로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내용이 담긴 문서로서, 소수자를 억압하고 혐오하는 방식으로 해석할 수 없으며, 앞으로도 신앙고백서를 근거로 동성애 반대 주장을 해서는 안 된다는 점.

셋째, 기장 교단의 창립 정신은 세계교회와 협력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을 표방하고 있다. 세계교회가 수십 년의 논쟁을 거치며 동성애를 포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교단이 섣부르게 동성애 반대를 표방하면, 앞으로 세계교회와 함께 에큐메니칼 운동을 해나갈 수 없다는 점.

결국, 두 노회에서 제출한 안건은 기각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성 소수자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지난 4년 동안 존속한 연구위원회를 폐지하는 답답한 결정도 내렸습니다. 일단 교단의 연구 활동이 중단되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기후위기에 관한 문제에서도 제동이 걸렸습니다. ‘기후정의 위원회를 상임위원회로 신설하자는 안이 부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탄소 중립에 관한 교단의 로드맵은 채택되어서, 앞으로 교단의 생태공동체운동본부를 중심으로 이 일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로드맵에 따르면, 2030년까지 현재 대비 탄소 배출을 50%로 줄이고, 2040년까지 100% 줄여서 탄소중립에 이른다는 계획입니다. 여기에는 각 교회의 예배당과 교육관, 부속시설과 운송수단에서 화석연료로 인해 배출되는 직/간접적인 탄소 배출량이 모두 포함됩니다. 우리 교회 역시 이 운동에 참여하되, 더 빠른 시기에 달성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함께 노력했으면 합니다.

어제는 시청 일대에서 기후정의행동으로 3만여 명이 모여서 대회와 행진을 했지요. 우리 교회도 삼십여 명의 교우들이 참여했습니다. 발언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우리 사회가 이제는 사회적 불평등과 기후위기 문제를 함께 풀어야 한다는 인식에 이르는 것 같습니다. 그간의 경제성장 논리에 기반한 소비 자본주의 문명이 한계에 이르렀기에, ‘기후의 변화보다 우리 삶이 먼저 변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지요. 이런 사회 상황에서 기독교 신앙도 새로운 모습으로 발맞추어야 하겠습니다.

 

[경건, 믿음의 선한 싸움 / 디모데전서 66~19]

오늘은 자족의 영성이라는 주제로 함께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자족(自足)’이란 스스로 넉넉함을 느끼는 상태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욕망(desire)에 이끌리기보다는 최소한의 필요(need)를 충족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마음입니다.

자족의 영성은 성서의 기본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는 말합니다.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6:26)

바울도 고백합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습니다.” (4:12)

성서가 말하는 자족의 영성은 현실을 벗어나 혼자만의 세계에 갇힌 유아독존의 관념이 아닙니다. 주어진 현실을 무조건 받아들이기만 하는 굴종의 윤리도 아닙니다. ‘자족의 영성은 현실의 고통과 비극을 생생하게 경험하면서도, 그 질곡을 넘어설 수 있는 내면적인 깊이와 힘을 가진 영성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진실로 자본주의 체제의 질곡을 넘어서려면, 정의로운 행동만큼이나 필요한 것이 자족의 영성입니다. 거기에서 정의와 평화를 이룰 수 있는 참된 힘과 깊이 있는 지혜가 우러나올 것입니다.

오늘날보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부족했던 시절에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족의 영성을 권했습니다. ‘자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경건은 큰 이득을 줍니다’. (딤전 6:6) 바울은 자족할 줄 아는 사람의 경건을 가리켜 믿음의 선한 싸움이라고 말합니다. 그 싸움은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 그리고 인내와 온유를 좇는 것입니다.

인류는 부를 쌓고 자본을 늘려가는 방식으로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폭력과 파괴의 악순환을 벗어나는 길을 찾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그 모든 악의 뿌리가 돈을 사랑하는 것에 있다고 합니다. (딤전 6:10) 인류는 그 유혹에 사로잡혀서, 노예제도라는 인간 폭력의 완성판을 만들기도 하였고, 자본주의라는 인간 욕망의 완성판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세계 체제로서 승리를 거둔 오늘의 결과는 극단적인 사회적 불평등과 기후위기입니다.

세계 경제를 주도하는 글로벌리스트들은 여전히 장밋빛 미래를 약속합니다. 4차산업혁명의 기술혁신, 인공지능과 결합한 트랜스 휴머니즘에 관한 이데올로기를 유포합니다. 하지만, 그런 흐름은 돈을 사랑하는 모든 악의 뿌리에 가깝다고 하겠습니다. 자본의 축적이 사회적 상식과 질서가 되어버린 우리 세계의 운명에 대해서, 우리는 경제적인 해석보다는 영적인 해석이 더욱 필요한 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물질적인 필요의 자족과 함께 영적인 실존의 자족을 가질 것을 말합니다.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세상에 가지고 오지 않았으므로, 아무것도 가지고 떠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입니다.” (6:7~8) 이런 자족의 영성에서 솟아나는 밑바닥 힘을 가질 수 있다면, 파국을 향해 달려가는 흐름과는 다른 길을 찾게 될 것이고, 불평등한 현실 속에서 마음이 녹아내리지 않고 정의로운 세계를 향한 꿈을 밀고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 재해석 / 누가복음 1619~31]

누가복음 본문에서 예수님은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독특한 비유를 듭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로 알려진 이 이야기는 일차적으로는 부자에 대한 경고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고운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사는 어떤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상처투성이 몸에 빵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는 거지가 있었는데, 개들까지 그의 상처를 핥는 비참한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죽자 서로 처지가 바뀌었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평화를 누리고, 부자는 지옥의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부자는 탄식하며 나사로의 손끝에 물을 찍어서 자기 혀를 축여달라고까지 사정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거절하지요.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가 부자로 사는 동안 모든 호사를 다 누렸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의 도덕적 행위가 잘못되어서라기보다는, 부자로 산 그의 존재 방식 자체가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이야기에서 부자는 자기 형제들만은 이런 고통을 받지 않도록 가서 미리 경고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아브라함은 그것마저도 거절합니다. 그들이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으니, 누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동안 민중신학은 이 이야기를 가난한 사람에 대한 존재론적인 긍정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기후위기 시대를 사는 오늘의 상황에서 재해석하면, 이야기는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올 것입니다. 소비 문명이 빚어낸 파국적인 결과를 볼 때, 인류의 부유한 삶을 지탱하는 지구 생태계는 결국 지옥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제는 거의 자명해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옥에 이른 부자의 탄식도, 여전히 그 삶을 사는 부자의 형제들이 예언의 말을 듣지 않는 것도 그저 비유 속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지구별을 사는 인류의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어떻게 이 난관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요?

 

[미래의 씨앗 / 예레미야서 321~3a, 6~15]

예레미야의 이야기는 나라의 패망을 앞둔 시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예루살렘은 바빌로니아 군대에 포위되어 있었고, 민족의 운명은 풍전등화의 지경이 되었습니다. 위선적인 지도자들은 여전히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뜻이 민족의 파국과 포로 생활에 있다고 말하며 패망을 받아들이라고 냉정하게 말합니다. 그의 시대는 하늘의 예언이 역사의 희망 위에 서지 못하고 비탄과 눈물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험난한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런 파국적인 상황에서 난데없이 예레미야가 땅을 사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숙부의 밭을 사고 증인들 앞에서 그 매매계약서를 봉인하여 잘 보관하라고 명령합니다. 나라가 멸망하면 어차피 토지 소유도 무용지물이 될 터인데, 본문이 그것을 모르는 부질없는 행위를 말하는 것은 아닐 듯합니다.

이 이야기는 미래의 씨앗을 심는 상징적인 내용입니다. 그것은 믿음의 방식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믿음이 모세의 율법이나 다윗의 영광을 통해서 가능했다면, 예레미야는 폐허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믿음의 방식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32장은 그것을 가리켜, ‘한결같은 마음과 삶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 속에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족의 영성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진리가 희미해진 불신의 시대, 사회적 불평등과 기후위기의 위험 속에서 불안정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을 품고 살아갈 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다시 바울의 믿음을 떠올립니다. “자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 경건은 큰 이득을 줍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십시오. 영생을 얻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그대를 부르셨고, 또 그대는 많은 증인 앞에서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딤전 6:6, 11~12)

잠시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자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 경건은 큰 유익을 줍니다. 하나님의 뜻에 이르도록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해 나아갑시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부르셨습니다. 기후위기 시대에 필요한 자족의 영성으로 삶을 가꾸고, 우리가 사는 세계에 평화의 씨앗을 심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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