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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 김희헌 | 2022-10-02

by 김희헌 posted Oct 02, 2022 Views 196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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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2-10-02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1:1~6, 딤후 1:1~14, 17:5~10)

2022.10.02. 창조절 다섯 번째 주일, 세계성찬주일

 

[세계성찬주일, 일치와 협력을 위한 운동의 상징]

오늘은 <세계성찬주일>로 세계의 모든 기독교회가 주님 안에서 한 형제자매임을 고백하는 주일입니다. 이 전통은 1940년 미국교회협의회가 제안하며 시작되었는데, 완전히 정착하게 된 계기는 1982년 페루의 수도 리마(Lima)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WCC) ‘신앙과 직제위원회’(Faith and Order) 총회에서 교회일치운동을 위한 토대가 될 획기적인 문서를 채택하고, 10월 첫째 주일을 <세계성찬주일>로 지키기로 한 결정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향린공동체에 속한 4개 교회는 해마다 이날 공동예배를 드려왔습니다. 그 배경에는 1982년에 만들어진 <리마문서>일치를 향한 정신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재작년부터 올해까지 코로나로 인해 3년째 함께 모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긴 코로나 사태로 우리는 은연중 새로운 문화에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감염 위험 때문에 마스크를 쓴 채 서로 거리를 두고, 함께 모이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에서 각자가 개별적으로 고립되어 지내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도 장려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런 뉴노멀의 생활양식에 스며든 각자도생의 분위기에서 <세계성찬주일>를 제정한 역사를 살펴보며, 오늘 신앙공동체의 삶을 되돌아보는 것이 필요할 듯합니다.

성서의 가르침대로라면 기독교의 기본정신은 사랑에 있지만, 실제 역사에서 기독교는 다른 종교보다 폭력적이고 호전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특히 근대 자본주의 세계를 석권한 유럽의 기독교는 제국주의인 모습으로 세계를 강탈하며 분열의 길을 걸었고, 그 결과 19세기 말에는 각 교회의 선교확장이 교파경쟁으로 과열되었습니다. 이런 모습에 대한 자성(自省)이 일어나면서, 세계교회는 공동의 선교협력을 모색하게 되었는데, 그 결실이 그간 중구난방으로 활동하던 160개 선교단체가 1910년 스코틀랜드에 함께 모여 진행한 에딘버러 대회입니다. 이 대회는 협력과 일치를 지향하는 에큐메니칼 정신을 재정립한 교회연합운동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이 에딘버러대회의 정신을 따라 1921년 뉴욕에서 국제선교협의회(IMC, 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가 발족하고, 10년 주기로 몇 차례 모이면서, 1953년 독일 빌링엔에서 열린 대회에서는 지금도 에큐메니칼 선교정신을 주도하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신학이 확립됩니다. 이 흐름이 현재 세계교회협의회(WCC)의 한 기둥인 선교협력’(CWME)의 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와는 다른 교회 연합과 일치운동이 세계교회에 두 가지 흐름으로 있었습니다. 그것은 1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경험한 후 각성의 시간을 가진 교회가, 한편으로는 정의와 평화를 위해 힘쓰지 못했던 과오를 반성하면서 1925년 스톡홀름에서 만든 삶과 일’(Life and Work)이라는 기구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에딘버러 대회 이후 교회일치운동을 진행하면서 1927년 스위스 로잔에서 발족한 신앙과 직제’(Faith and Order)라는 기구입니다. 이 두 기구가 합쳐져서 1948년 오늘의 세계교회협의회(WCC)가 탄생합니다.

그러니까, 세계교회는 20세기 초의 분열과 갈등, 침략과 전쟁의 고통을 경험하면서 자성하는 마음으로 에큐메니칼 운동을 시작하였고, 교회의 협력과 일치를 모색해 온 것입니다. 그 가운데 특히 1927년 로잔에서 시작된 신앙과 직제위원회는 50여 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서로 다른 교리와 신학을 함께 토론하면서, 마침내 그 연구협력의 결과를 1982년 <리마문서>로 만들어 내었습니다. 이 문서의 공식 명칭은 <세례, 성만찬, 사역>(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 일명 ‘BEM문서로 불리는데, 그 가르침을 따라 만들어진 리마 예식서는 세계교회 성찬 예식의 표준이 되었고, 우리 교단과 우리 교회 역시 이 예식서를 기준으로 성찬식을 진행합니다.

리마문서와 그것에 기초한 세계성찬주일의 제정은 세계교회의 분열을 치유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본래 천 년간 하나였던 기독교가 11세기에 동방 정교회와 서방 가톨릭교회로 분열하고, 16세기에 서방교회에서 다시 분열하여 등장한 개신교회의 입장에서는, 교회개혁의 상징이 된 루터의 ‘95개 반박문이 중요할 수 있겠지만, 분열의 역사를 되돌이킨 <리마문서>의 가치는 그에 못지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16세기의 개신교 운동은 교회갱신을 의도했지만, 결과적으로 분열을 초래한 반면, 40년 전에 제정된 <리마문서>는 교회의 일치 속에서 갱신을 이끌어낸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실제 교회의 흐름이 문서하나로 뒤바뀔 수는 없겠지만, 다시 시간이 흘러 화해와 일치라는 주제를 내세운 세계교회협의회 11차 총회의 정신에 비추어 볼 때, ‘세계성찬주일제정 의미는 더욱 중요하게 다가옵니다. 이번 주일에는 그 일치와 협력의 정신을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탄식, 믿음을 잃은 시대의 위기 / 예레미야 애가 11~6]

오늘날 우리 세계는 코로나 사태와 기후위기로 인해 거대한 전환이 요청되는 시대를 지나면서도 지난 대결과 갈등의 흐름을 끊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은 지난주 우크라이나 지역 4개의 자치주가 독립을 선포하고, 러시아 연방에 편입하는 절차를 거치면서 더욱 첨예한 형국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5년 만에 대규모 한미일 연합전쟁연습이 진행되었고, 이에 대해 북은 미사일을 연이어 발사하면서 전쟁의 시계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 핵추진 항공모함이 동반된 지난주의 연합전쟁연습에서는, 주한미특수전사령부(SOCKOR)티크 나이프’(Teak Knife)로 알려진 북한 최고 수뇌부를 겨냥한 참수작전을 공개적으로 진행하면서, 한반도를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정전 상태의 위태로운 상황을 고려하면 이러한 불장난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 줄 알 수 있을 텐데, 우리 정부는 마치 당연한 일을 한다는 식의 대결 정치로 일관하고 있으며, 정치는 산적한 국가적 현안을 외면한 채 말꼬리 잡기 식의 한가한 가십(gossip) 정치만 이어가고 있습니다. 폐허가 된 도시의 참상을 보며 탄식한 예레미야의 애가가 앞당겨 들리는 듯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통곡의 노래를 부릅니다. “, 슬프다. 예전에는 사람들로 그렇게 붐비더니, 이제는 이 도성이 어찌 이리 적막한가! 예전에는 뭇 나라 가운데 으뜸이더니, 이제는 종의 신세가 되었구나.

이 슬픔의 노래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에 빠져들어 간 세계에서 울리는 통곡입니다. 살육과 파괴로 뭇 생명의 무덤처럼 변해버린 도시에서, 평화의 시계를 되돌리기에는 이미 늦어버렸고, 과거에 누린 일상과 사랑은 그리운 기억으로만 남았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지난날에 대한 회한뿐입니다.

성서가 이 <애가>를 전한 것은, 과거에 대한 후회를 반복하거나 현실에 대한 자조와 비판을 하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 통곡의 노래는 위기의 시대를 지나는 모든 이들에게 각성을 촉구하면서, 평화를 향한 원초적 갈망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 원형적 믿음을 좌표로 가졌으면서도, 모세와 여호수아 그 해방의 전통을 이어받았으면서도, 호세아와 아모스 그 예언의 사랑과 정의로 시대를 깨운 역사를 살아왔으면서도, 그 모든 세월이 지나간 현실에서 단지 생존의 가치에 몰입하여 꿈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애가>는 비탄의 노래를 정직하게 들려주면서 묻습니다. 무엇이 생명을 낳을 수 있는 거짓 없는 믿음이 될 수 있느냐고.

 

[겨자씨만 한 믿음 / 누가복음 175~10]

누가복음 본문에서 제자들이 예수께 요청합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분열의 시대를 회개와 용서 없이 지나온 그들이 구한 믿음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예수께서 대답합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뽕나무 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기어라하면, 그대로 될 것이다.” 예수의 이 말씀은, 만일 너희 믿음이 참되면, 그것이 거짓 없는 믿음이라면, 그 믿음이 합당한 일을 해낼 것이라는 말입니다.

믿음을 잃은 시대에 유통되는 믿음, 사랑 없는 세계에 흘러다니는 사랑, 그 덧없는 환상의 시대를 끝내고 도약하는데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께서 이어서 주신 말씀은 종에 관한 비유입니다. 밭을 갈고 양을 치는 수고를 하면서도 주어질 보상을 바라기보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생각하라는 말씀인데, 이는 권리 주장에 익숙한 우리 시대의 문화에는 이질적인 교훈입니다. 오늘의 노동 감각에 비추어보면, 이 주장은 심각한 인권문제를 가졌다고 비판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이 말씀은 제자로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섬김의 도리 속에서 제자의 길을 발견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권리와 의무의 형식논리로 지어진 세계에서는 터무니없는 요청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묻습니다. 그것은 네가 정말로 예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이 물음에 답을 갖지 못하면, 예수의 말씀도 부질없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진실한 믿음이 겨자씨만큼이라도 있으면, 그 옛날 시편의 노래가 우리 마음에 막힘없이 흐를 것입니다. 조금전 함께 읽은 시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네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라. 주님께서 이루어주실 것이다.” (37:5) 이 고백은 주님의 길을 구하는 마음이 자신을 엎드려 쏟아낸 말씀입니다.

지난 몇 달간 저는 안병무 선생님의 글을 읽어왔습니다. 2주 후에 있을 <안병무 탄생 백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발표할 논문을 준비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삶을 움직인 화두가 무엇이었을까를 찾다가 이른 것은 역사의 예수였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 그가 구한 것은 역사를 뚫고 살아오는 예수였다는 말입니다. 그런 눈으로 안병무의 글을 읽으면서 제 마음에 박힌 그의 고백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미래이지 인간의 유토피아가 아니다!”

이 말에는 욕망과 허무로 얼룩진 세계를 견디는 믿음의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제시한 새 삶의 가능성에 향한 신앙인의 원초적 포부가 담겨 있습니다. 안병무는 치밀한 학자로서 믿음의 세계사회학적 지식의 세계와 이어져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신앙인으로서 안병무는 그 두 세계 사이에 지식의 나룻배로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가 역사의 예수를 추적한 이유였고, 역사로 되살아나는 부활의 가능성에 자기 믿음의 거처를 둔 이유였습니다.

신앙인에게 부활은 인간으로서 꿈꾸는 마지막 가능성입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가능성이 아니요, 생명의 약속, 인간의 본질적인 삶이란 지금 여기서 살아가는 세계의 모습 너머에 있다는 깨달음과 이어져 있습니다.

 

[거짓 없는 믿음 / 디모데후서 11~14]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제자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만, 실제 저자는 바울이 아니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왜냐하면, 그 글의 배경이 격랑의 세계를 살았던 바울의 시대가 아니라, 예수운동이 제도로 정착해 간 과도기의 모습을 띠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마음이 교회 건물에 담기고, 생생한 믿음이 활자화된 신조로 굳어지며, 성도의 교제가 직제와 직분으로 구분되기도 합니다. 그것은 현실의 무게요 역사의 비극이며, 피하기 힘든 자연의 이치에 가깝습니다. 화산이 터지고 용암이 흘러간 자리에는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구럼비 언덕이 생겨납니다. 불의 시대가 지나면 옹달샘의 시대가 옵니다. 디모데서는 옹달샘 시대를 맞은 사람들에게 주어진 말씀 같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이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을 따라살아왔다고 고백하면서, 디모데에게도 그 생명의 약속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약속이 이어지는 통로는 거짓 없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의 유산을 가진 디모데에게 바울이 권면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으니, 그대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복음을 위해 고난을 함께 겪으십시오.” (1:7~8)

이것은 이 세상의 노동과 보상의 셈법으로 따진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향해 소명을 가진 사람에게 이해 가능한 말씀입니다. 그 소명은 우리의 행실에 따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은혜를 따라주어집니다. 그리고 그 삶에는 그 시대가 부여한 수고와 고난이 있지만, 그것이 부끄럽지 않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이 시대를 사는 신앙인에게는 두 가지 과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안에 있는 사랑과 믿음에 담긴 건전한 말씀을 본보기로 삼는 것이요 (13), 다른 하나는 자기 안에 있는 성령에 힘입어서 맡겨진 선한 것을 지켜내는 것입니다 (14).

오늘 우리는 불의 시대에 태어난 민중신학의 유산을 갖고 있지만, 우리 시대는 그 시대의 무기였던 칼과 돌만으로는 지나갈 수 없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새로운 위기와 새로운 과제 앞에서, 새로운 성찰과 새로운 모험이 요구됩니다. ‘생명의 약속을 따라살기 위해서는 새로운 수고, 새로운 고난을 부끄럽지 않게 맞아야 합니다. 그것을 위한 단서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민중신학의 전성기가 지나가던 1994, 병세가 깊어져서 인생 졸업을 2년 앞둔 73살의 안병무가 한 강연에서 들려준 이야기를 전하고 싶습니다. 좀 길지만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나의 일생 소원은 미련할 정도로 역사상에 우리처럼 살아 있던 예수를 아는 일이었다. 학문적으로는 역사의 예수 추구라 해서 그에 관한 모든 문헌을 내 손이 미치는 대로 탐독했다. [하지만] 10년 공부 나무아미타불로 돌아온 나는 얼마 동안 나 자신 어떤 신념도 없이 저들의 학설에 편승하고 서구 신학의 영역에서 헤엄치며 그것을 팔아 밥을 먹고 떨떠름한 생활을 계속했다. 한마디로 나는 예수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신학을 해 온 것이다. [그러던 중, 전태일 사건을 만나고, 이한열, 박종철 사건을 만났다] 나는 이 민중사건이 가을 숲에 타오르는 불처럼 얼마나 강렬하게 확산되는 지를 보았으며, 눈은 안 가려졌으나 눈을 뜨지 못한, 근대화라는 이름 밑에 색맹이 되어 있던 사람들의 일부가 눈을 뜨는 기적을 일으키는 것을 알았다. 나도 그중의 하나다.

민중신학은 이 시대를 정치적 탄압의 시대로 파악했기 때문에 정치적 행태와 긴장 관계에 있었고, 모든 것을 그 눈으로 보고 성격화했다. [그런데] 90년대 들어 달라지는 세상을 보았다. 국경 없는 시대, 다원화 시대, 첨단화 시대, ()의 시대, 경쟁 시대, 해체 시대... 이상에서 오는 총괄적인 것은 민중의 소외였다. 우리는 위기를 맞았다. 우리 사고의 혁신과 전환이 없이는 살아남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 길은 무엇인가?

나는 여기서 두 가지를 제안한다. 하나는 ()의 역할이다. 상이란 상식(常識), 상습(常習)의 상으로 언제나 반복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인의예지신을 말하는 것으로, 그것이 언제나 변함없이 순환할 때 세상은 본래의 길을 갈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게 가야 할 길을 예외 없이, 속이지 않고, 쉬지 않고, 돌아가는 사람을 상도지인(常道之人)이라고 한다.

다음은 상은 말이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말의 지평을 넘어선 현실과 관련이 있다. 기독교는 말의 종교다. 그 종교는 오늘의 종말 현상에 책임이 있다. 말은 말을 낳는다. 지금 수많은 교회에서 쏟아지는 말을 생각해 보라. 소음 외에 남는 게 무엇인가? 서구 기독교는 말 못 하는 것은 모두 정복의 대상으로 삼았다. 기독교는 신도 말의 영역에 끌어들였다. 그러기 위해서 신과 자연을 분리시켰다. 그러나 말의 영역은 너무나도 좁다. 신은 말없는 세계, 즉 말의 지평 저쪽에 있다. 그런 면에서 민중도 말의 영역에 비끌어 매여 있지 않다.” (안병무, “민중신학의 새 지평,” 신학평론5, 강남대학교, 19971)

 

안병무의 마지막 가르침에 해당할 수도 있을 이 이야기가 우리 삶을 계획하는데 실마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와 함께한 신앙의 선배들이 가졌던 거짓 없는 믿음이 우리에게도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침묵으로 기도합시다.

 

[파송사]

제자들이 예수께 구합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대답합니다.

너희는 명령을 받은 대로 일하고,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이라고 하여라.”

우리의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합시다.

주님께서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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