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하늘뜻펴기

삭개오의 회심 | 김희헌 | 2022-10-30

by 김희헌 posted Oct 30, 2022 Views 215 Replies 0
Extra Form
날짜 2022-10-30

삭개오의 회심 (1:1~4, 살후 1:1~4, 11~12, 19:1~10)

2022.10.30. 창조절 아홉째 주일, 교회개혁주일

 

[종교개혁의 정신, 오직 믿음으로!]

오늘은 개신교회의 정신과 전통을 되돌아보는 교회개혁주일입니다. 151710월 말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앞에 교회의 타락을 비판한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붙이면서 비롯된 이 개혁운동은 이내 유럽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친 큰 흐름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온 사회가 거대한 전환을 향해 꿈틀거린 것은 변화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새로운 시대를 열망한 이들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그 시대의 진통 속에서 일어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고, 시대정신을 바꾸어갔습니다.

오백여 년이 흐른 오늘날 그 운동의 의미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역사가들은 대체로 이 프로테스탄트 운동이 중세 유럽 사회의 부패한 교권과 낡은 제도를 개혁했다고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 운동의 여파로 생겨난 교파 분열과 국가 간의 전쟁, 그리고 자본주의와 함께 성장한 교회의 정신과 문화에 대해서는 냉정한 평가가 필요할 것입니다. 특히, 생태계의 위기를 맞은 오늘날에는 좀 더 근원적인 비판도 제기됩니다.

생태문명에 관한 비전을 말해온 신학자 John B. Cobb, Jr.는 오늘날 교회가 두 가지 질병에 걸렸다고 진단합니다. 하나는 우상숭배(idolatry), 다른 하나는 미적지근함(lukewarmness)입니다. 보수적인 교회는 자본주의 체제와 기독교 교리를 우상처럼 신봉하면서, 그 가르침에 충실할수록 시대의 보편 지성과 윤리에 역행하는 종교의 악순환을 거듭합니다. 반면, 진보적인 교회는 새로운 시대를 말하면서도 신앙의 토대를 잃고, 신앙공동체의 궁극적인 헌신이 무엇을 향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미지근함에 빠지곤 합니다.

오늘의 교회는 바로 이 두 가지 정신의 몰락 즉, 신앙의 왜곡과 무기력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왜곡된 종교는 모험적인 신앙을 위험시하고, 무기력한 종교는 신앙의 모험을 조롱합니다. 믿음이 왜곡되면 욕망을 이루기 위한 헛된 약속을 남발하고, 차별과 증오와 억압을 종교의 이름으로 정당화합니다. 믿음이 무기력해지면 정서의 열기 속에서만 관계를 이어갈 뿐 믿음의 꿈을 잃고 맙니다. 오늘의 교회개혁은 이 두 가지 문제를 극복하는 일과 관련 있습니다.

종교개혁의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그 모토가 된 오직 믿음으로라는 말에 담긴 역동적 정신을 되살리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오백 년 전의 교리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인류가 맞은 생태적 파국의 시대에 필요한 영성을 세우는 일입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욕망보다 삶의 진정한 풍요로움을 발견하는 지혜를 길러내고, 대립과 갈등을 넘어서는 화해와 일치의 정신을 높이며, 성서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하는 깨어있는 영혼의 이정표를 다시 세우는 것입니다.

 

[믿음이 필요한 시대 / 하박국서 11~4]

오직 믿음으로라는 종교개혁 정신의 물줄기를 좇아 성경의 맥을 따라 올라가면 하박국서에 이르게 됩니다. 24절에는 현실의 어둠 너머로 나아가려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말씀이 나옵니다. ‘교만한 자를 보아라. 그는 정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시대의 질곡 앞에서 탄식하는 하박국은 하늘의 소리를 듣는데, 그것은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고뇌하는 예언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대답이자, 그 시대를 향해서 하박국이 전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하박국’(Habakkuk)이라는 이름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씨름하다라는 뜻과 품는다라는 뜻입니다. 그가 활동하던 기원전 7세기 말, 유대는 신흥제국 바빌론에 패망하기 전 위태한 상황 속에서 어두운 현실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하박국이 안고 씨름한 문제는 그 시대의 불의와 폭력이었습니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두고 그는 탄식합니다.

살려 달라고 부르짖어도 듣지 않으시고, ‘폭력이다!’ 하고 외쳐도 구해 주지 않으시니, 주님, 언제까지 그러실 겁니까? 어찌하여 악을 그대로 보기만 하십니까? 악인이 의인을 협박하니, 공의는 왜곡되고 말았습니다.” (1:2~4)

예언이 시작되자마자 터져 나온 이 탄식은 하박국 개인만이 아니라, 고통당하는 수많은 사람의 목소리를 담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고통에 대한 하소연이자, 어두운 시대에 길을 찾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의 표현입니다. 하지만 애타게 부르짖어도 하늘의 뜻은 들리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은 신실한 사람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는가?

성경은 이 물음에 대해 단순한 답을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절망의 탄식이 이어집니다. 시편의 시인은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외쳤고 (22:1), 이 외침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입술에서도 터져 나왔습니다. (15:34) 하박국처럼 약탈과 폭력에 물든 시대를 규탄해도, 다툼과 시비 속에서 진리는 왜곡되고, 악이 범람한 현실에 내일의 약속마저 희미해집니다.

하지만, 절망으로 떨어질 수 없는 마지막 믿음의 시간에 들려오는 소리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두운 밤을 지나는 믿음이 스스로 낸 길이자, 절망의 시대와 씨름한 사람에게 주어진 하늘의 선물입니다. 종교가 약속하는 새로운 삶이란 어둠을 직시하고 그것을 끌어안은 사람의 삶에 맺히는 열매와도 같습니다.

 

[믿음의 길, 공동체의 삶 / 데살로니가후서 11~4, 11~12]

이런 하박국의 경험은 바울에게도 이어집니다. 그는 여러 곳에서 믿음의 중요성을 말하는데, 거기에는 하박국의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하였기 때문입니다.” (3:11)

종교개혁의 모토가 된 바울의 이 깨달음은 분열된 세계에서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얻은 값진 교훈이었습니다. 로마제국의 지배 아래에서 사람들은 분열된 현실을 살고 있었습니다. 크게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분열이고, 그다음은 유대인들 사이의 분열이고, 그다음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 사이의 분열이었습니다.

이 겹겹이 쌓인 분열의 장벽 속에서 바울은 고민합니다. 왜 사람들은 분열되어 서로 싸우는가? 바울이 발견한 이유는 율법이었습니다. 각자가 저마다의 율법에 사로잡혀 자신의 영토를 구축하고, 자신의 율법을 따르며 서로 대결합니다. 율법이 지배하는 이 세계는 상대방에 대한 억압과 폭력을 정당한 것으로 여기는 죄악의 세계입니다.

어떻게 이 죄에 묶인 질서를 풀어내고, 평화를 이룰 수 있을까?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가 숨 쉬는 평화의 세계로 나가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바울에게 믿음’(pistis)은 새로운 삶의 방식에 참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고, 노예와 자유인, 남자와 여자의 차별이 없는 세계였습니다. 바울에게는 그러한 소통의 공동체를 짓는 삶이 예수의 길이었습니다.

그 길을 걷는 동안 바울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고린도후서를 보면, 자신의 삶이 위험한 여행과 수고, 밤을 새운 노고와 굶주림으로 채워졌다고 말합니다. 이전의 자랑거리는 모두 사라지고 남은 것은 자신의 약점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고전 11:22~33) 안병무는 바울의 이 고백을 바탕으로 사건의 신학을 전개하는데 (현존72, 19766), 그것은 믿음의 공동체가 만들어가는 사건에 주목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과 사랑에 대해 언급하며, 자신의 그리움을 고백합니다. 박해와 환난 속에서도 인내하고 믿음을 지킨 그 공동체는 바울의 자랑이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크기만큼 현실의 벽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며 믿음의 열매를 맺어갔습니다.

 

[삭개오 이야기 / 누가복음 191~10]

오늘 복음서 본문에는 삭개오라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여리고 지역의 세관장으로 부자였습니다. 그는 로마의 질서 속에서 성공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돈도 가졌고 힘도 가졌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키가 작았습니다. 작은 것은 몸의 키만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부자가 되고 세관장의 자리에 오르는 과정에 마음이 자라기는 어려웠을 듯합니다. 그런데 이 작은 삭개오의 마음에도 열망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를 보고자 한 것입니다. 그 마음이 커지면서 남보다 앞서 달려가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가 삭개오를 보고 그 집에 머물겠다고 한 것입니다. 삭개오는 당황했지만, 어쩌면 그건 예견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지난 삶의 어둠 속에서 공허함을 느낀 그는 예수와의 진실한 만남을 부지불식 간에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예수와 삭개오의 만남, 이 만남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사람들은 그 만남을 부적절하게 여겼습니다. 예수가 죄인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갔다라고 수군거렸습니다. 이들은 자기 시대의 도덕적 기준에 충실한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시대 율법이 가르치는 내용에 합당한 도덕적인 삶을 살아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삶은 그 시대의 질곡을 반복하는 것에 가까웠습니다. 세리들에 대한 분노와 질시, 그것은 변하지 않을 사회조건에 대한 희망 없는 생각의 반복이었고,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부정이요 외면이었습니다. 규율이 된 도덕은 사람들을 그렇게 묶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삭개오는 왜 예수를 자기 집에 모셨을까요? 자기 과시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가진 것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실패하고 만다는 사실은 사람들의 수군거림에서 이미 증명된 것이었습니다. 그럼, 자신의 부족을 채우려는 욕망이었을까요? 그렇다면, 이야기는 잔인한 것이 될 것입니다. 식민지 시대 혼돈의 세계를 거칠게 살아온 그가 삶의 결핍과 갈망을 고작 또 다른 모습의 욕망으로 채우려 했다면 비극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를 자기 집으로, 아니 자기 삶으로 모신 이유는 다른 데 있었습니다. 그것이 이내 입술의 고백으로 드러납니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내가 빼앗은 것은 네 배로 갚겠습니다.” 이 말은 자기 소유의 재분배 계획이라기보다는 존재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거듭난 삶의 모습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생을 돌이키는 구원을 갈망했던 것입니다. 거기에는 혼탁한 세계에서 생존과 성공만을 향해 달려오던 삶이 놓쳐버린 것에 관한 회한이 담겨 있고, 식민질서의 노예로 더는 살 수 없다는 결심이 담겨 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 앞에서 인간선언을 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소유함으로써 구원까지 장악하려는 오만이 아니라, 자신의 어둠을 직시함으로써 솟아나는 구원의 체험입니다. 그 구원은 위를 향한 견고한 도약이라기보다는 아래를 향한 인간의 성장이었습니다.

여기서, 예수가 삭개오의 집에 간 목적이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잃어버린 사람을 되찾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구원은 선한 자들의 잔치라기보다는 잃어버린 죄인의 회개가 몰고 오는 사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신의 어둠 깊은 삶을 응시한 삭개오는 거듭난 삶을 통해서 인간이 걸어야 할 길에 관한 믿음을 보여줍니다. 그의 회개는 예수의 기쁨이 됩니다. 어두운 밤을 지나왔지만, 길을 잃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나온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역사는 소중한 실험이었지만 역사의 한계도 남겼습니다. 개혁을 추구한 인간이 또 다른 제도와 교리 속에서 왜소화되고, 높아진 이상은 굳어진 관념이 되어 인간을 묶어버리기도 했습니다. 권리를 옹호하는 운동으로 점철된 근대 시민 세계는 자기로부터 거듭나야 할 종교적 과제로부터 멀어지면서, 정의에 대한 편협한 주장으로 욕망의 동력을 구성하기도 했습니다. 근대문명이 낳은 절제 없는 소비, 성찰 없는 성장, 존재 없는 진보는 세계를 더 깊은 질곡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삶을 전환하는 삭개오의 회개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오늘날 그것은 생태적 회심입니다.

종교개혁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은 과거 정신으로 회귀하는 것이 아닙니다. 21세기의 교회가 16세기의 신학과 제도를 본받는 것을 사명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신앙공동체의 사명은 신앙공동체답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길은 스스로 갱신하며 모험적인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종교개혁운동의 교훈입니다.

율법으로 굳어진 이 세상에서 비록 고난을 겪을지라도, 오직 믿음만이 교회의 기초가 되도록, 오직 복음만이 믿음의 공동체를 이끌 수 있도록 주님 앞에 정직하고 겸손하게 서야 합니다. 그 믿음을 통해서 이 세상의 율법들을 뛰어넘고, 지친 이 시대에 하나님 나라의 꿈을 다시 불어넣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침묵으로 기도합시다.

 

[파송사]

예언자 하박국은 어두운 시대에 필요한 것은 믿음이라고 외칩니다. 오직 믿음으로! 이 정신을 따라 시대의 질곡을 뛰어넘는 믿음의 모험이 펼쳐졌습니다. 성장과 풍요를 좇아온 삶을 돌이키는 생태적 회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이루어가는 우리가 됩시다


List of Articles
날짜 제목
2023-02-12 종교와 믿음 | 김희헌 | 2023-02-12
2023-02-05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 김희헌 | 2023-02-05
2023-01-29 진정으로 옳은 길 ㅣ 김지목 ㅣ 2023-01-29
2023-01-22 어둠이 걷힐 날이 온다 | 김희헌 | 2023-01-22
2023-01-15 생명의 시대, 주의 사랑으로 구원하소서 | 이영미 | 2023-01-15
2023-01-08 주님의 의를 이루는 발자국 | 김희헌 | 2023-01-08
2023-01-01 작은 믿음 다시 모아 | 김희헌 | 2023-0101
2022-12-25 주님의 열심 | 김희헌 | 2022-12-25
2022-12-18 임마누엘, 꿈의 못자리 | 김희헌 | 2022-12-18
2022-12-11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 김희헌 | 2022-12-11
2022-11-27 깨어있어라! | 김희헌 | 2022-11-27
2022-11-20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거늘 ㅣ 이세우 ㅣ 2022-11-20
2022-11-13 평화의 길은 어디에 | 김희헌 | 2022-11-13
2022-11-06 살아 있는 자들의 하나님 ㅣ 김지목 ㅣ 2022-11-06
2022-10-30 삭개오의 회심 | 김희헌 | 2022-10-30
2022-10-23 소성리에서 던지는 질문 | 강형구 김희헌 | 2022-10-23
2022-10-16 역사의 예수를 찾아서 | 김희헌 | 2022-10-16
2022-10-09 일어나서 가라! | 김희헌 | 2022-10-09
2022-10-02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 김희헌 | 2022-10-02
2022-09-25 자족의 영성 | 김희헌 | 2022-09-25
2022-09-18 모두를 위한 구원 | 김희헌 | 2022-09-18
2022-09-11 지금은 교회가 세상에 무릎을 꿇어야 할 때 ㅣ 정경일 ㅣ 2022-09-11
2022-09-04 돌이킴 ㅣ 김지목 ㅣ 2022-09-04
2022-08-28 삶으로 드리는 제사 | 김희헌 | 2022-08-28
2022-08-21 시내산과 시온산, 그 너머로 | 김희헌 | 2022-08-21
2022-08-14 우리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시는 하나님 ㅣ 신승민 ㅣ 20220-08-14
2022-08-07 믿음의 길 | 김희헌 | 2022-08-07
2022-07-31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ㅣ 김지목 ㅣ 2022-07-31
2022-07-24 평화를 구하는 기도 | 김희헌 | 2022-07-24
2022-07-17 그것은 밥이 없어 겪는 배고픔이 아니다 'ㅣ 김희헌 ㅣ 2022-07-17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12 Next
/ 12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