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사 35:1~10, 야 5:7~10, 마 11:2~11)
2022.12.11. 대림절 셋째 주일, 인권주일
[두 개의 물음 / 마태복음 11장 2~11절]
대림절 셋째 주일 복음서 본문은 세례요한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두 개의 질문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먼저, 감옥에 갇힌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서 묻습니다. “오실 그분이 당신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예수께서는 이 질문에 대답한 후, 주변에 모인 군중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오늘은 이 두 질문을 중심으로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복음서에서 세례요한은 옛 시대를 넘어 새 시대를 열어간 사람으로 상징됩니다. 그는 지난 삶을 회개하고 새 삶을 살도록 세례를 베풀었고, 자신도 소유를 갖지 않고 광야에서 절제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꿈꾼 것은 믿음에 기초한 새로운 삶이었습니다. 무엇이 그에게는 옛 시대이고, 무엇이 새 시대였을까요? 그리고, 이 두 시대 사이에 있는 요한의 고민은 무엇이었을까요?
요한이 다가올 메시아의 나라를 위해 회개하라고 외친 것은, 그 마음속에 꿈틀거리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꿈꾼 새로운 나라는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진 나라였습니다. 마태복음 3장은 세례요한의 활동에 대해 그리고 있습니다. 거기서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그분은 손에 키를 드시고 타작마당의 곡식을 깨끗이 가려,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요한은 나사렛 예수가 그 일을 할 수 있는 메시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러 요단강에 왔을 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선생님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어떻게 선생님이 나에게 세례를 받으러 왔습니까?” (마 3:14) 요한은 자신이 바라던 세계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열릴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11장에 나온 그의 물음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이 물음은 마치 자기 믿음을 잃고 하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우리는 요한이 처한 상황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11장의 요한은 로마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헤롯왕을 비판했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의 질문은 그가 겪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생겨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 그는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자괴감이 일어났을까요? 그는 메시아가 오시면,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는 정의’를 베풀 것으로 믿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역사의 알곡은 감옥에 갇히고, 쭉정이들이 권세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맘에 회의(懷疑)가 일어났던 것일까요? 더 나아가, 어쩌면 자신이 불에 타고 있는 쭉정이는 아닐까 하고 의심했을 수도 있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실존적인 고난 속에서 간절히 묻고 있습니다. 오실 그분이 정녕 당신이십니까?
요한의 이 질문은 단지 현실에 대한 원망에서 비롯되지는 않았다고 봅니다. 예언자로 살아온 자기 신세에 대한 한탄도 아닐 것입니다. 다만, 거기에는 갈망이 교차하는 고뇌가 어려있습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며 광야에서 외친 꿈은 헛되지 않았을 텐데. 아,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서, 무엇을 바라며 이 삶을 견디고 있는가? 요한은 믿음의 길을 걷고 또 걷다가, 감옥에 갇힌 육신이 더 걷기 어렵게 되었을 때, 고뇌에 잠겨 외칩니다.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이 질문은 단지 요한만의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골짜기마다 담겨 있는 갈망의 외침일 것입니다. 새 시대를 꿈꾸는 자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동트는 역사의 새벽은 좀처럼 오지 않을 때, 인간에 대한 믿음이 희미해지고 분노와 적개심에 사로잡힌 ‘거대한 후퇴’의 세계가 넓혀져 갈 때, 자본의 질서는 계속해서 보수주의를 내면화해가고 저항마저도 체제 내의 습관처럼 변해 갈 때, 절망에 잠긴 사람들이 구원을 바라며 묻는 물음은 무엇일까요?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이 질문은 오늘의 교회에서도 대림절의 기다림 속에도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다리는 ‘그분’은 누구인가요? 인간 껍데기를 뒤집어쓴 전능한 신인가요, 연약한 아기로 위장된 영웅인가요, 민중들을 절대 실망하지 않게 하는 혁명가인가요, 기득권에 물든 인생까지 감동을 선사하는 우주적 센티멘털리스트인가요?
요한이 기다리던 ‘그분’은 그런 존재가 아닐 것입니다. 복음서 본문을 보면, 요한의 질문을 갖고 온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알려라.” 그것은 이제까지 예수께서 하신 일을 일컫는 것으로서, 마태복음은 그 활동을 9장에서 압축적으로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것은 고통에 놓인 사람들이 모두 치유되는 사건이었습니다. 1) 눈먼 사람이 보고 (마 9:27-31 / 사 29:18, 35:5), 2)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마 9:2-8 / 사 35:6), 3)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말을 하게 되며 (마 9:32-34 / 사 35:5), 4)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고 (마 9:18-26 / 사 26:19), 5) 가난한 사람들이 위로의 복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마 9:36 / 사 29:19, 61:1-2)
그 모든 일은 이사야의 예언을 이룬 것이었습니다. 요한의 질문을 안고 온 그의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주신 답변은, 이미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서 열리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어둠 깊은 역사를 보며 탄식하는 요한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은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을 듣고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너의 절망이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인지를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말씀을 마치고 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마무리를 짓습니다.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은 사람은 복이 있다”. 이사야의 예언을 이룬 메시아의 일을 보고, 도리어 걸려 넘어지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이 말씀은 요한과 그의 제자들에게 하신 것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분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들은 메시아를 기다린다 하면서, 실상은 다른 것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무엇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욕망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찾은 거룩한 길 / 이사야서 35장 1~10절]
그래서, 본문의 이야기는 장면을 바꾸어서 대화를 이어갑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대화를 마친 예수님은 거기 있던 무리에게 묻습니다. 그들은 ‘오클로스’(ὄχλος), 예수를 따르던 가난한 민중들입니다. 예수는 그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광야는 세례요한의 활동공간이었기에, 이 질문을 달리 말하면, ‘너희는 세례요한에게서 무엇을 기대했느냐?’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여기서 세 가지의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냐, 예언자냐? 예수의 말씀처럼, 세례요한은 분명, 흔들리는 갈대도,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언자, 광야에 새길을 내는 예언자였습니다.
오늘 제2성서의 본문 이사야서 35장의 예언처럼, 세례요한은 황무지에서 꽃을 피우고, 사막에서 샘을 내는 예언자 중의 예언자였습니다. 낡은 삶에서 돌이켜 회개한 사람들이 걷게 될 길, 하늘의 속량을 얻은 사람들이 다니게 될 ‘거룩한 길’을 몸소 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비록 감옥에 갇혀 짙은 그리움에 잠겨 있지만, 그의 삶은 이미 예언을 풀어낸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단순한 삶을 살면서, 머리 둘 곳조차 없던 그리스도의 가난을 보여주었고, 그리스도가 당한 십자가처럼, 그 역시 감옥에서 끝내 풀려나지 못하고, 헤롯의 잔칫날 구경거리가 되어 죽임당했습니다. 그는 로마 식민지 시대의 비운과 고통, 의인들이 조롱당하고 죽임당하던 악독한 시대의 무게를 온몸에 받았습니다. 하지만, 절망의 자리에서도 하늘의 약속을 묻고 또 물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라고 말합니다.
번영하는 유럽 사회가 자유주의에 편승하여 국가 폭력과 교묘히 결합해 갈 때, 그 시대의 타락상과 비열함을 비판하며 20세기 기독교 신학을 새롭게 연 사람으로 알려진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세례요한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제자도’를 보여주는 원형이라고 말합니다.
진정한 제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그는 자신이 기다리는 존재가 그리스도이신지, 아니면 다른 것인지를 분별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모셔야 할 자리에 헛된 기대와 이상으로 채우도록 충동하는 세상의 도전을 직시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정체성을 예수를 본받고 따르는 것에서 찾은 사람, 하늘을 향해 난 거룩한 길을 걷는 것에서 인생의 보람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흔들리는 갈대와 같지도 않고, 화려한 옷과 왕궁을 추구하지 않으면서, 하늘을 담은 예언을 살아내는 사람입니다.
마태복음은 여러 곳에서 그 삶에 대해서 말한 바 있습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마 7:21)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것이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5:9~11)
대림절을 맞으면서 우리는 묻습니다. ‘오실 그분이 정말 당신입니까?’ 이 물음에 대해, 성서는 우리에게 반문합니다. ‘너희는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느냐?’ 이 질문은 다르게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너희가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 오늘 무엇을 보고 무엇을 꿈꾸느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냐, 아니면 하늘의 꿈을 살아내는 예언자냐?
[대림절의 믿음, 기다림과 인내 / 야고보서 5장 7~10절]
갈릴리 민중에게 요한의 삶을 본보기로 가르쳐주신 예수께서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아무리 작은이라도 요한보다 더 크다.” 이 말씀은 세례요한을 깎아내리는 말이 아니라, 요한과 같이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격려하는 말일 것입니다.
오늘 서신서 본문인 야고보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대림절의 믿음을 말해줍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한 예언자들을 고난과 인내의 본보기로 삼으십시오.” (약 5:10) 대림절의 믿음으로 야고보서 본문이 가르치는 것은 ‘기다림과 인내’입니다.
야고보서 5장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참고 견디십시오. 보십시오, 농부는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땅에 내리기까지 오래 참으며, 땅의 귀한 소출을 기다립니다. 여러분도 참으십시오. 마음을 굳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오실 때가 가깝습니다.” (약 5:7~8)
모순과 아이러니로 가득 찬 우리 삶은 늘 기다림 속에 있습니다. 하지만, 인생의 여정은 합리적으로 매끄럽게 움직이지 않기에, 그 기다림은 절망과 고통으로 물들기 쉽습니다. 젊은 영혼은 꿈을 향해 뒤척이다 기성질서에 물들고, 처음 품은 예언의 숨결은 점차 능숙한 관습으로 변해갑니다. 삶은 늘 복잡한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소중한 것으로 믿었던 새로운 가치들은 어느새 사소한 것으로 변하고, 또다시 변치 않는 영원한 것을 갈망하는 마음은 소용돌이에 빠져 번민합니다.
바울이 말한 삶의 3대 요소인 믿음과 소망과 사랑도 늘 도전입니다. 사랑은 헌신적일수록 위험해지고, 소망은 커질수록 기대 못지않게 두려움을 동반하며, 새로운 길을 찾는 믿음은 그 신비로운 떨림 속에 고통을 심어갑니다. 그렇게 위태로운 인생을 살아가면서도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우리의 삶은 어떤 물음을 안고 있는 것일까요?
성서는 대림절의 믿음이 비를 기다리는 농부처럼, 주님이 오실 때까지 마음을 굳게 하여 참고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외부 세계의 변화를 기다리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과정을 참고 기다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바깥세상을 밝히는 것과 자기 내면세계를 밝히는 일이 분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하고 묻는 갈망의 시대에 예수께서 ‘너희는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느냐?’라고 물음을 던지는 이유일 것입니다. 이 두 물음은 삶의 여러 문제를 풀어가면서 생명을 살아내야 할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늘 있어야 할 물음입니다. 마태복음이 던진 이 두 질문이 대림절 셋째 주일을 지나는 우리 안에서 깊어지기를 바랍니다.
잠시 침묵으로 기도합시다.
[파송사]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대림 절기에 우리는 묻습니다. “오실 그분이 당신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되묻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이 두 물음은 광야와 같은 삶을 사는 모든 이들에게 필요한 물음입니다. 비를 기다리는 농부처럼,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우리 모두의 마음에 예언의 말씀이 촛불처럼 밝아오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