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의를 이루는 발자국 (사 42:1~9, 행 10:34~43, 마 3:13~17)
2023.01.08. 주현절 첫째 주일
[갈라진 세계, 걸어야 할 믿음의 발걸음]
새해 둘째 주일, 오늘부터 주현절의 시작입니다. 주현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축하하는 절기입니다. 이 기간의 마음가짐은 예배 때 부른 ‘신앙고백송’(217장)의 내용대로,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나타나기를, 주님의 나라가 우리 삶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비는 것입니다. 주현절의 이 고백은 올해 우리 교회에 더욱 간절합니다. 예배당 신축작업을 마무리하고, 광화문에서 펼쳐질 새로운 사역에 기대를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광화문에서 맞게 될 향린 70주년의 삶은 어떠할까요? 우리가 기다리는 장래는 과연 밝을까요? 마음가짐이 중요하겠습니다만, 현실은 녹록지 않습니다. 먼저, 지구 시민이 겪고 있는 기후위기의 상황에서, 어쩌면 10년 후 우리가 맞을 80주년이 무사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전망이 높습니다. 새 정부 출범 이후 악화한 한반도의 상황은 더 어둡습니다. 이제 남과 북은 공공연히 서로를 적(敵)으로 규정하고, 북은 남을 향한 전술핵 사용 가능성을 열어두었고, 남은 선제타격과 확전을 말하면서 마치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태도를 보입니다.
예전에는 미래가 희망적일 것으로 기대했지만, 지금은 많은 이들이 불안과 두려움으로 미래를 예측합니다. 우리 사는 세계가 찢기고 갈라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반동적인 포퓰리즘과 극우주의 팬덤 정치가 확산하고,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유럽연합에서 탈퇴한 영국의 브렉시트나 미국의 트럼프 현상이 보여주듯,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 몰두하는 국가주의가 성행하며, 세계화의 끝물에서 민주주의 열차는 거의 탈선할 지경에 이른 것은 아닌가 하는 위기감이 높습니다.
이런 현상을 분석하기 위해 몇 년 전 서구의 진보사상가들이 함께 펴낸 책 제목이 <거대한 후퇴>(The Great Regression, 2017)입니다. 그 책은 서구의 현실을 가리켜 “불신과 공포, 분노와 적개심에 사로잡힌 시대”라고 진단합니다. 민주주의 체제에 필요한 정당한 절차는 무시되고, 신중한 행동이나 정치적인 인내심에 대해 알레르기 증상을 보이는 선동 정치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왜 이런 세계가 확대되고 있냐는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우리가 모르지 않습니다.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구조화된 사회적 불평등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기존의 정치 체제에 대한 불신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세계화가 진행되면 세계시민주의의 이상이 커질 것으로 기대했지만, 삼십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결과적으로 사회적 불평등이 구조화되어 공정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세계화 과정에서 주변부로 밀려난 사람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권력을 쥔 기존의 자유주의 세력은 민중들의 삶을 줄곧 외면했고, 명목뿐인 좌파 정당은 약자들의 실질적 이해관계를 대변하지 못한 것으로 경험되었습니다. 변혁을 설파하는 진보주의 엘리트들마저도 문화 권력에 도취하여, 주변부로 내몰린 사람들의 분노에 담긴 ‘타당한 지점’을 살려내지 못하고, 오히려 그 비참한 삶을 평가절하하곤 합니다. (낸시 프레이저, “진보 신자유주의 대 반동 포퓰리즘,” 거대한 후퇴)
이렇게 갈라진 세계에서는, 사람들이 합리적인 대화를 존중하거나 도덕적인 명령을 경청하기보다는, 마치 기존의 질서를 경멸하는 듯한 허무주의적 반란을 감행합니다. 그 결과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를 이념적 적대의식으로 표출하려는 경향이 확대됩니다. 그 근저에는 미래에 자신의 존재가 삭제될지 모른다는 사람들의 불안감이 있습니다. 불평등에 쫓기고 불안감에 시달리는 일이 일상이 된 삶에는, 그 생각과 행동 사이에 줄어들지 않는 틈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두려움과 희망만이 아니라, 분노와 허영, 그리고 복수심이 도사립니다. (판카지 미슈라, “경멸시대의 정치학: 계몽주의가 남긴 어두운 유산,” 204)
그러다 보니, 어쩌면 세계가 진퇴양난의 늪에 빠진 듯합니다. 약자와 소수자의 인권을 비롯한 제반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는 더욱 중요한 과제가 되었지만, 이 갈라진 세계에서는 더욱 풀 길이 없는 어려운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성의 요람’이라고 일컬어지는 대학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납니다.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의 수업’이라고 할 만큼 토론과 논쟁이 사라졌다 합니다. 예를 들어, 여성학을 가르치는 한 교수는 다음과 같은 고충을 말합니다. “사회에서는 ‘이대남과 이대녀’의 젠더 갈등 프레임을 만들었고, 국가는 정책적으로 양성평등 프레임을, 보수우파들은 동성애 찬반 프레임을 너무 강화해놓았기 때문에, 수업에서 논쟁의 방법론을 잃어버렸다”라는 것입니다. (“이대남·이대녀 프레임 갇힌 페미니즘, 그 결과는 침묵의 수업,” 「교수신문, 2023.01.02)
최근 남북관계를 의도적으로 악화해가는 윤석열 정부는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를 이념적 적대의식으로 표출하는 현실을 반영합니다. 북한에 대한 인식도 조사를 보면, 북을 ‘동족’으로 보는 인식은 현저히 낮아지고, ‘적대감’은 높아졌습니다. 연세대 정외과 황태희 교수가 발표한 자료를 보니, 북한을 ‘형제’로 보는 인식은 2005년 30%에서 2020년 14%로 15년간 절반 이하로 감소하고, 북한을 ‘적’으로 보는 인식은 8%에서 19%로 두 배 이상 증가했습니다. 통일을 ‘빨리해야 한다’는 비율은 17%에서 9%로 감소하고, ‘굳이 통일할 필요가 없다’라는 비율은 8%에서 20%로 증가했습니다.
세대별로 보면, 북에 대한 긍정적 인식은 40~50대에서 가장 높고 (긍정 43%, 중립 26%, 부정 31%), 부정적 인식은 60대 이상보다 20~30대가 더 높습니다. (긍정 32%, 중립 22%, 부정 46%). (황태희, “북한과 통일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조사”)
이런 현실은 분단국가를 살아가는 신앙공동체에 고민거리를 던집니다. 상황이 변해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오던 문제가 인기를 잃어가고 있으니 이제는 버리고,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을 더 끌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나을까요? 이제는 어쩌면, 근본적인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혁명가나 비판자보다는 성실하게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삶의 수행자가 절실하다고 하겠습니다.
지난해 세계교회협의회 11차 총회는 앞으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품어야 할 주제를, ‘그리스도의 사랑이 세계를 화해와 일치로 인도하신다’라고 밝혔는데, 이 기도를 안고 살아갈 우리의 삶은 어떠해야 할까요? 그리스도의 사랑을 담을 믿음의 발걸음은 과연 무엇일까요?
[모든 의를 위한 믿음의 연대 / 마태복음 3장 13~17절]
주현절 첫째 주일의 복음서 본문은 예수의 세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기독교에서 ‘세례’는 새로운 탄생을 상징하는 원형적인 행위입니다. 복음서 기록 가운데 확실한 역사적 사건으로 간주하는 것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관한 것이요, 다른 하나는 세례 요한과 만남에 관한 것입니다. 네 복음서 모두 예수의 공생애 시작에 관한 이야기로 세례를 받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와 달리 마태복음은 이 이야기에서 요한과 예수의 대화를 싣고 있습니다. 세례를 받기 위해 자신을 찾아온 예수에게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내게 오셨습니까?” 이에 대해 예수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지금은 그렇게 하도록 하십시오. 이렇게 하여, 우리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옳습니다.”
마치 암호 같은 대화입니다. 이 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와 요한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보다 먼저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성서는 요한을 가리켜, 예수의 앞길을 닦은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달리 보면, 그는 예수의 스승과 같은 역할을 한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두 사람 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당시의 권력체계를 비판하고, 그 사회를 회복시키는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요한은 세례를 매개로 한 회개운동을 하였고, 예수는 민중들과 함께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였습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요한의 회개운동을 전제한 것으로서, 억압당하는 생명을 살리는 운동이었습니다.
요한과 예수의 대화를 기록한 마태복음은 그것을 ‘믿음의 연대’에 관한 내용으로 채웁니다. 예수는 그것을 가리켜 ‘우리가 모든 의를 이루는’ 일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모든 의’(all righteousness)란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의미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예수의 이 제안에 요한도 동의합니다. 결국, 두 사람 사이에 오해가 풀리고, 예수에게 세례가 베풀어집니다. 이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오고, 하늘에서는 축복의 소리가 울렸습니다.
마태복음에서 발견한 믿음의 발걸음은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한 믿음의 연대입니다. 그것이 거듭남의 자리에서 필요한 것이요, 하늘이 축복하는 일이었습니다.
[모두의 구원을 위하여 / 사도행전 10장 34~43절]
사도행전에는 로마군인 고넬료와 그 집안이 구원받은 이야기가 길게 나오는데 (10:1~11:18), 이 이야기는 사도행전의 전체 구성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예수의 복음이 편협하지 않고,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완성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복음이 처음에는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서 예수의 제자들에게만 들려지다가, 예루살렘을 넘어 사마리아로 퍼지고, 제자들을 박해한 바리새인 사울을 전향시킨 다음, 마침내 그들을 억압한 로마 군인과 그의 온 가족까지 구원한 것으로 그 확장이 완성됩니다.
오늘 본문은 고넬료의 집에서 베드로가 설교한 내용입니다. 그것은 설교라기보다는 자기 고백처럼 보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깨달은 것은 이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가리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가 어느 민족에 속하여 있든지, 다 받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처음 고넬료의 초대를 받았을 때, 그는 만남을 거부했습니다. 로마 군인에게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옳지 않고, 그를 접촉하는 것조차 율법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마침내 깨달은 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을 깨닫게 된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안만을 구원시킨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부터 구원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보내신 말씀’으로 이해하고, 그의 사역은 마귀에게 억눌린 사람들을 고치시는 것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은 그의 죽음과 부활의 증인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편협한 생각에 갇혀서 이방인들을 배제하고 배척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도와 환상 중에 하늘의 가르침을 받고 깨닫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원은 모두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고넬료의 집에서 감격스럽게 고백합니다.
베드로의 이 모습은 예수 운동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예수 운동은 어떤 교리를 전파하는 운동이라기보다는, 사회적으로는 계속 확대되어가는 보편적 인권운동이요, 사상적으로는 점차 넓혀지는 관용의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운동을 2천 년간 이어온 동력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예수의 제자들도 지역적 배타주의를 보이고, 음식 규정에 매여서 이방인의 문화를 배척하고, 적으로 간주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구원이 허락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점차 그 편협한 벽을 허물고 생각을 확장했으며, 마침내는 적까지도 품는 운동에 이릅니다. 그것이 예수 운동이 걸어온 평화의 발자국입니다.
사도행전 본문이 전하는 믿음의 발걸음은 ‘모두의 구원을 향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배제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사람들 가운데에서 나누어질 때, 성령이 선물로 부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의를 위해 부름받은 사람 / 이사야서 42장 1~9절]
이사야서에는 4개의 특이한 노래가 나오는데, 흔히 ‘종의 노래’로 불립니다 (42:1-9, 49:1-6, 50:4-11, 52:13-53:12). 오늘 본문 42장에는 그 첫 번째 노래가 나옵니다. 시작은 이렇습니다. “나의 종을 보아라.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사람이다. 내가 택한 사람, 내가 마음으로 기뻐하는 사람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가 뭇 민족에게 공의를 베풀 것이다.”
이 하나님의 종이 의(miš·pāṭ)를 세우는 방식은 평화롭습니다.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진리로 공의를 베풉니다. 그러면서도 쇠약해지거나 낙담하지 않으며, 꾸준히 하나님의 공의를 세워갑니다.
세상을 창조해가시는 하나님은 바로 이런 사람을 당신의 종으로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의 목적은 주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6절). 하나님의 의(義)는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입니다. 그것은,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고, 감옥에 갇힌 사람을 이끌어내며, 어두운 영창에 갇힌 이를 풀어주는’ 구체적인 해방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이 일을 위해서 부름을 받습니다.
이 해방의 사건은 오늘날에는 갈라진 세계에 다시 믿음을 심는 일로 부름을 받습니다. 파괴의 시대에 생명을 심고, 불의의 시대에 하나님의 의를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그 발걸음이 생명의 발자국, 평화의 발자국을 남깁니다. 기후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믿음의 녹색 발걸음, 전쟁과 대립을 이겨내는 평화의 발걸음이 필요하고, 70주년을 맞으며 그것이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을 받은 이들의 걸음입니다.
오늘 우리는 올 한 해 교회를 섬길 직분자를 세웁니다. 이분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주님의 의를 이루는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의 발걸음을 통해 아름다운 발자국을 남기는 복된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침묵으로 기도합시다.
[파송사]
주님의 부르심을 생각하십시오. 삶의 불안과 두려움을 내려놓고 생명의 길을 찾으십시오. 갈라진 세계를 의심과 대립으로 살아가지 않고, 주님의 의를 구하십시오. 지구를 살리는 녹색 발자국을, 분단의 상처로 얼룩진 땅에 평화의 발자국을 남기십시오. 한 해의 삶이 주의 평화로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