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시대, 주의 사랑으로 구원하소서!
(창 50:15-21; 요 13:31-35; 엡 4:3-4; 시 31:15-16)
이영미 목사 (한신대학교 구약학 교수)
[대전환의 시대: 죽임에서 생명 살림으로]
오늘은 주현절 둘째 주일이면서 우리 교단이 제정한 여신도회 주일입니다. 복된 주일에 향린 교우들과 하늘뜻펴기를 펼칠 수 있도록 초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보통 교회력에 따른 세 본문 설교를 하지만, 오늘은 여신도회가 제시한 네 개의 성서 본문을 기초로 ‘사랑으로 세상을 구원할 그리스도인의 소명’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제107회 총회 주제 본문이기도 한데, 이번 총회 주제해설집의 성구 전체 해설을 작성한 필자로서, 그때 받았던 은혜를 다시금 떠올리는 기회이기도 하여서 더욱 감사했습니다.
지금의 시대를 ‘전환’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많은 사람은 대전환을 4차산업혁명으로 본격화된 문명의 대전환을 이야기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관점의 대전환을 체감하였습니다. 첫째로 시선의 초점 변화입니다. 지금까지 제 사고가 한 곳에 꽂혀 그것이 중심이고 대의이고 옳은 것이라고 믿고 달려왔다면, 이제는 내가 보는 게 전부가 아니고, 보지 못하고 놓치는 블라인드 사이드는 언제나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다음으로 시선의 관점 변화입니다. 내 관점이 아니라 약자 혹은 희생자의 관점에서 보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의 예로 최근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 “너는 내 인생의 로또야”에 대한 의미의 초점입니다. 로또는 ‘그냥 굴러 들어온 행운’의 대명사라는 의미 초점에만 관심을 기울여 그 뜻은 ‘너는 나에게 굴러온 복이야’를 뜻한다고만 생각했었지, 내 인생에서 로또는 한 번도 맞지 않았다는 경험 때문에 너하고 나하고는 안 맞는다는 또 다른 의미의 범주로 읽힐 수 있음을 왜 생각하지 못했는지 의아했습니다. 두 번째의 예로는 미투 운동으로 시작된 성폭력에 대한 논의의 확산 속에서 피해자의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의 중요성을 알게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일상이 일상이 아니라 범죄로 재인식되는 관점의 전환은 가해자의 입장이 아니라 피해자의 입장에서 바라보아야 비로소 그것이 왜 범죄인지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창세기 본문을 예로 삼아보자면 창세기 50장에 등장하는 요셉을 여러분은 이집트의 고급 관리이면서 파라오의 반지를 끼고 있을 정도의 친왕세력, 식량을 관장하는 실세를 지닌 권력자로 바라보나요? 아니면 자기들의 친어머니를 배후에 둔 다른 열 명의 손 윗 형제들 틈새에서 어머니 없이 눈칫밥 먹으며 살아온 야곱의 11번째 아들, 꿈꾸는 자로 불리며 시기 질투의 대상이 되고, 왕족 결혼 전 여성들만 입었다던 채색옷(삼하 13:18)을 입었던 자로 묘사되면서 왕따 당했던 외로운 피해자 소년으로 바라보나요? 요셉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본문을 읽느냐에 따라 용서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악에서 선을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창세기 50:15-21)]
자연스럽게 오늘의 첫 본문으로 들어가 봅니다. 성서는 지금처럼 읽혀진 문헌이 아니라 낭독되었던 구술 문학의 성격이 강하다는 걸 이해하면 본문의 반복되는 단어의 중요성을 알게 됩니다. 창세기 50장에서도 반복되는 단어들이 핵심 메시지를 드러내 줍니다.
창세기 50:15 요셉의 형제들은 아버지를 여의고 나서, 요셉이 자기들을 미워하여, 그들에게서 당한 온갖 억울함을 앙갚음하면 어찌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16 요셉에게 전갈을 보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남기신 유언이 있습니다. 17 아우님에게 전하라고 하시면서 ‘너의 형들이 너에게 몹쓸 일을 저질렀지만, 이제 이 아버지는 네가 형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여 주기를 바란다’ 하셨습니다. 그러니 아우님은, 우리 아버지께서 섬기신 그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요셉은 이 말을 전해 듣고서 울었다.
18 곧 이어서 요셉의 형들이 직접 와서, 요셉 앞에 엎드려서 말하였다. “우리는 아우님의 종입니다.” 19 요셉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기라도 하겠습니까? 20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선하게 바꾸셔서, 오늘과 같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21 그러니 형님들은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형님들을 모시고, 형님들의 자식들을 돌보겠습니다.” 이렇게 요셉은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다.
본문에서 요셉의 형제들에게는 ‘용서’라는 말이, 그에 대응하는 요셉의 말에서는 “두려워하지 마십시오”라는 말이 두 번씩 반복되고 있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의 자비를 얻으려고 죽은 아버지의 유언까지 들먹이며 모든 감정적인 수단을 다 동원합니다. 이들이 말하는 용서는 강자가 약자에게 시혜처럼 베푸는 용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표면적인 말로는 용서이지만 심판의 한 유형입니다. 이들에게 요셉은 권력자이며 자신들을 응징할 수도 있고, 용서할 수도 있는 강자입니다.
그러나 요셉을 꿈꾸는 자, 독특한 특성을 가진 자로서 자신의 공동체 안에서 따돌림당하고, 심지어 집단 폭력에 의해 죽음의 위기까지 처했다가 이집트 노예로 팔려 갔던 피해경험자이고, 꿈 때문에 고통당했지만 꿈 때문에 구원의 소명을 감당할 기회를 얻었던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본다면 용서의 의미는 달라집니다. 그 방식도 심판이 아닌 공감과 화해입니다. 랍비 조너선 색스(Jonathan Sacks)는 “요셉 이야기는 그가 형제들과 역할 바꾸기(우리 자신이 우리가 경멸하거나 가엽게 여기거나, 단순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되어보는 것)를 통해서 형제들이 갈등을 해소하고 화해하는 것이 무엇인지, 서로 용서할 공간을 만드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배우게 해 준다.”라고 설명합니다. (랍비 조너선 색스, 『하나님 이름으로 혐오하지 말라: 21세기를 위한 창세기』, 219-43)
우리가 악을 자행하지 않을 방법을 배우는 것은 피해자/희생자의 관점에서 사건을 경험할 때입니다. 인간은 세상을 형제들과 타인들, 친족과 비친족, 친구와 이방인, 내가 속한 ‘우리’와 내가 속하지 않은 ‘그들’과 타자로 나누고, ‘우리’를 사랑하고 ‘타자’(그들)을 사랑하지 않거나, 그들보다 우리를 더 사랑합니다. 이때 우리는 인간에게 사랑은 필요하지만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사랑이 오히려 긴장 관계를 초래하여 폭력으로 치닫기 때문입니다. 그 폭력은 희생자를 낳고, 복수의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요셉은 자신이 노예로 팔려온 낯선 땅에서 겪었던 것을 형들도 겪도록(18절) 역할 바꾸기를 통해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있습니다. 그는 형제들에게 타자됨의 교육, 즉 가해자로서가 아니라 희생자로서 다른 편에 속한다는 것이 어떤 억울함이었는지를 이해할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복수가 아닙니다. 타인의 고통을 공감함으로써 우리는 변할 수 있으며, 회개하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요셉 이야기는 창세기 4장의 가인과 아벨의 형제 살인으로 시작되어 형제간의 경쟁과 갈등(에서와 야곱, 이스마엘과 야곱, 요셉과 형제들)으로 이어져 갈등의 고리를 끊고, 형제간의 화해의 절정을 보여주며 창세기를 마무리합니다.
우리는 강자의 입장에서 시혜처럼 내미는 용서가 아니라 약자의 입장에서 진정한 화해의 몸짓을 할 때 그 안에서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경험하게 됨을 본문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지금까지 권력의 중심에서, 강자의 시각으로, 가해자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봤다면 그 시선의 중심축을 이동시켜서 약자와 피해자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전환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혼란스럽고 낯선 과정이 있을지라도 아픈 이들의 상처를 보게 되고 느리지만,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경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할 바꾸기, 혹은 입장 바꾸기가 생각처럼 그렇게 쉬운 건 아닙니다. 저희 아버님이 저와 별로 대화가 없는 분인데, 어느 날 같이 차를 타고 가시다가 대뜸 “이 목사는 가끔 다른 사람들과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좋겠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저는 즉각적으로 “전 늘 상대의 입장이 되면 어떨까를 생각하려고 노력하는데요?”라고 답변을 했습니다. 이 대화가 제 뇌리에 남아서 곱씹게 되었는데 결국 저는 내 신념은 그대로 가지고 상대방의 처지에서 어떻게 할까를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내 입장에서 상대의 상황을 생각해보는 것이지 상대방의 신념(입장)을 가지고 상대의 상황을 생각한 것이 아니었구나! 하고 깨달았던 적이 있습니다. 서로의 입장이 되어보고 그 입장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 인간끼리도 서로의 입장이 되는 것이 쉽지 않은데 요한복음의 저자는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사랑하신 것같이(카소스, καθὼς) 서로 사랑하라고 합니다.
[서로 사랑하라 (요 13:31-35)]
오늘의 복음서 본문인 요한복음 13장은 예수님의 고별담화(Farewell Discourses) 중의 한 본문입니다.
요한복음 13:31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는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다. 32 [하나님께서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께서도 몸소 인자를 영광되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렇게[영광되게] 하실 것이다. 33 어린 자녀들아, 아직 잠시 동안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 그러나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다. 내가 일찍이 유대 사람들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하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나는 너희에게도 말하여 둔다. 34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33절, 작은 자들(“어린 자녀들아”)을 향한 새 계명을 기점으로 전반부에서는 예수 자신과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광을 5번 반복하고, 하반부에서는 사랑을 4번 반복합니다. 34-35절의 새 계명(엔톨렌 카이넨, Ἐντολὴν καινὴν)의 계약(엔톨레, ἐντολή)은 요한의 독특한 어구로 요한1서에 열네 번(2: 3, 4, 7[3번], 8; 3:22, 23[2번], 24; 4:21; 5:2, 3[2번]), 요한2서에 네 번(1:4, 5, 6[2번]) 나옵니다. 특별히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아가파테 알렐루스 카소스 에가페사 히마스, ἀγαπᾶτε ἀλλήλους καθὼς ἠγάπησα ὑμᾶς)는 새 계명에 언급된 사랑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네 번 모두 아가페입니다. 그 때문에 이 계명은 아가페 계명이라고 불립니다.
아가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이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주는 사랑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요1 4:8)이 이 땅에 직접 오셔서 우리에게 아낌없이 베풀어주신 사랑을 통해 스스로는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에게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의 본보기가 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를 사랑하신 것 같이(카소스, καθὼς) 서로를 사랑할 때, 비로소 참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들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사랑이지, 같기 때문에 같은 사람들을 위한 사랑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특별합니다. 그리스도의 입장이 되어 사랑하는 것이며 저는 이 사랑을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조금 전에 입장바꾸기 말씀을 드렸는데 내 신념을 그대로 가지고 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 보면 끝까지 이해가 안 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그 입장이 이해가 안 되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가 하신 것 같이(카소스, καθὼς) 품고 사랑하십시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랑 방식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 저의 시선을 끈 것은, 이러한 카소스 “사랑”의 실천이 작은 자들(테크니아, Τεκνία, 34절)로 불리웠던 청중을 제자(마세타이, μαθηταί, 35절)로 정체성을 변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는 종들(둘루스, δούλους)에서 친구들(필루스, φίλους)로 정체성이 바뀝니다. 아가페 사랑의 실천은 우리의 정체성을 그리스도인으로 변화시키는 요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καθὼς), 서로 사랑하십시오.
[한 몸, 한 영으로 일치하는 교회공동체 (엡 4:3-4)]
그리스도의 아가페 사랑을 실천하다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의 레이다에 걸리지 않는 사람이 없이 모두 그리고 서로 사랑하는 신앙공동체인 교회(ἐκκλησία, 에클레시아)가 됩니다. 오늘의 서신서 본문은 교회에게 이전의 삶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으로의 패턴의 변화를 개인이 아닌 공동체에 요청합니다(5:8).
에베소서에서 교회는 9번(1:22, 3;10, 21, 5:23, 24, 25, 27, 29, 32) 나오고, 교회를 상징하는 몸(σῶμα, 소마)이 10번(1:23, 2:16, 4:4, 12, 16(2회), 5:23, 28, 30) 나옵니다. 그리고 2장 11절부터 22절은 교회에 관한 다양한 이미지(하나님의 가족, 2:19, 새 성전 2:21)를 쏟아내며, 교회는 갈라졌던 이방인과 유대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결합하며 이루어졌음을 회고합니다(2:14). 에베소서 본문에서도 반복어가 핵심메시지를 드러내는 데, 4:3-4는 ‘하나’라는 단어를 4번이나 반복하면서 그 뜻을 강조합니다.
에베소서 4:3 성령이 여러분을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 주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 4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그 부르심의 목표인 소망도 하나였습니다.
여기서는 성령이 교회를 평화로 묶는 띠라고 말하고, 골로새서 3:14은 사랑이 모든 것을 온전하게 묶어주는 끈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몸”은 에베소서 앞 절(2:14)에서처럼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된 교회의 일치를 말하지만, 더 넓게는 창세기 3:24가 말한 것처럼 인간 사이의 합일을 의미합니다. 신앙공동체의 하나 됨은 앞서 말한 그리스도인의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으로 가능합니다. 하나 된 교회는 소망도 하나인데 그 소망은 시편의 말씀에서 잘 대변되고 있습니다.
[사랑으로 구원하소서 (시 31:15-16)]
시편 31편은 탄원시입니다. 탄원시는 고난의 상황에서 삐져나오는 고통의 언어를 담고 있는데, 고통의 소리는 고통을 완화시키고, 상처를 치유하고, 눈물을 마르도록 해 줄 자 앞에 한 사람의 내적 고통을 드러내 보여주며, 고통을 없애줄 수 있는 자 앞에 고통을 가지고 나오는 수단이 됩니다. 즉 정의를 향한 정치적 종교적 부르짖음인 탄원은 삶의 노래이며, 하나님과 공동체 모두를 불러내어 상처와 고통을 공감하고 이에 응답하도록 촉구하는 시발점 역할을 합니다. 탄원시는 피해자의 관점에서 외치는 구원요청의 호소입니다.
시편 31편의 기도자는 자신의 미래는 자신이 아닌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고백하면서 구원을 요청합니다.(15절) 그 방식은 주님께 “주의 얼굴”을 자신에게 비출 것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는 “[주께서]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기원하는 제사장의 축복(민 6:26)이 떠오릅니다. 히브리성서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께서 등을 돌리시거나, 외면한다는 표현으로 묘사되곤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지 않을 때, 하나님이 나에게 관심이 없을 때, 나의 삶에 위기와 고난이 찾아온다는 고대인들의 사고입니다. 그리고 최근에 본 영화 아바타의 대사, “I See You”를 생각나는 데, 상대가 앞에 있더라도 그를 마음으로 보지 않는 것은 보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의 아픔을 볼 수 있는 눈은 사랑입니다. 고통의 시대 우리는 시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상대를 볼 수 있는 사랑의 눈.
이어지는 16절 하반절에서 시편 기자가 요청하는 구원의 방식은 원수를 향한 심판이 아니라 주의[당신의] 사랑하심(베하스데카, בְחַסְדֶּֽךָ)입니다. 생명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고, 평화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쟁을 벌였으며, 사랑의 하나님 이름으로 혐오하고, 자비의 하나님 이름으로 잔혹 행위를 저지르며 이를 구원을 위한 심판이라고 정당화한 그리스도교의 역사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구원을 노래할 새로운 언어가 필요합니다. 심판을 통한 구원은 타자의 대상화시켜 ‘우리’를 ‘적(타자)’과 구별하며, 우리를 위한 타자의 희생을 요구합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대상화/타자화됨으로써 차별당하고 희생당한 대표적인 주체가 여성과 자연, 그리고 사회·문화적 소수자입니다. 생명의 시대, 지금까지 차별로 고통당하는 약자들의 아픔과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들을 향한 구원은 심판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헤세드, חֶ֖סֶד)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아가페, ἀγάπη)을 통해서 성취되는 구원입니다. 우리가 강자나 가해자의 시각이 아니라 약자나 피해자의 시각에서 바라볼 때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작은 생명들의 아픔과 기쁨이 보이고 그들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게 됩니다.
[맺음말: 심판이 아니라 헤세드 사랑으로]
생물학적으로 여성이어서가 아니라 많은 여성이 가정이나 사회에서 주변인으로 시야에 포착되지 않은 채 무시당하고, 설사 보여지더라도 차별 당했던 경험을 했던 이유로 타인을 대상화하여 정죄하고 심판하기보다 약자의 입장에서 공감하고 이해하기 쉬운 탓에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그리스도 사랑을 실천할 재원이 됩니다. 그리고 생명을 낳고 기르고 살림을 통해 생명을 돌보는 일상 경험이 사랑으로 세상을 구원할 그리스도인이 될 재원을 충만하게 채웁니다. 나라 잃은 슬픔을 탄식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위로를 이렇게 전합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새것을 창조하셨으니, 그것은 곧 여자가 남자를 안는 것이다.”(렘 31:22) 언뜻 이해는 되지 않는 듯해도 ‘여자가 남자를 안는 것이다’를 ‘죽임과 심판을 통한 구원이 생명존중과 사랑을 통한 구원을 안을 것이다’로 바꿔 읽어본다면 새로운 구원의 언어로 창조와 구원이 하나임을 깨닫게 됩니다.
대전환의 시대 교회는 교회공동체와 세상을 위한 애도와 치유가 이루어지는 사랑의 공간으로 전환될 것을 요청받고 있습니다. 교회가 위로와 회복의 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세상을 타자화시켜 구원의 대상으로 삼는 강자의 교만한 입장이 아니라, 희생자와 약자, 소수자와의 역할 바꾸기를 통해 지금까지 여러 형태로 “해를 가했던” 죄책을 고백하고 죄의 순환고리를 끊는 진정한 회개(창 50장)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 내에서도 주변인으로 취급 받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기장 여신도회의 생명존중과 생명살림의 중심가치가 앞으로도 계속 실천되고 확장되기를 기원합니다. 성령이시여, 예수 그리스도의 한결같은 사랑으로 세상을 이웃을 바라보고, 그 사랑으로 세상을 구원하게 힘주소서. 잠시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한결같은 사랑으로 품어주신 것 같이 서로 사랑하십시오. 우리를 평화의 띠로 하나되게 하시는 성령 안에서 소외된 자, 따돌림당하는 자, 아파하는 자를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바라보고 품는 교회공동체가 되도록 서로를 격려합시다. 이제 세상에 나가 주의 사랑으로 새 창조의 세상을 일구는 구원의 주체자로 살아가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