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걷힐 날이 온다 (사 9:1-4, 고전 1:10-18, 마 4:12-23)
2023.01.22. 주현절 셋째 주일, 설 주일
[그레샴의 법칙이 주는 교훈]
우리 민족의 명절인 설입니다. 저마다 명절을 맞는 마음이 다르겠지만, 겨울 추위를 지나는 중에 맞는 설 명절에 가족들과 행복한 시간과 쉼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제가 대한(大寒)이어서인지 마지막 추위가 매섭습니다. 하지만 봄이 오는 것도 자연의 이치이지요. 힘들어도 넉넉한 마음으로 살아갔으면 합니다.
지난 수요일에는 사회적 추위가 몰아닥쳤지요. 경찰과 국정원이 민주노총을 비롯한 전국 10여 곳을 압수 수색했습니다. 국정원이 직접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내세워 전면 진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습니다. 민주노총에는 간부 한 명을 수색하기 위해 경찰을 700명이나 동원했습니다. 이번 압수수색의 풍경은 이례적인 것이었습니다. 마치 경찰이 시위하듯 사다리차와 에어 매트를 동원하였고, 그간 신분을 노출하지 않던 국정원 대공 수사관 수십 명이 국정원 로고가 선명한 유니폼을 입고 참여한 것입니다.
왜 이런 공안정국을 대대적으로 만들고 있는지 그 이유를 추정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정권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사회적 시선을 돌리려는 의도겠지요. 사회적 단층선을 더 크게 만들어서 국민을 분열시키고, 지지세력을 확보하려는 악독한 모습입니다. 이런 태도는 줄지어 일어난 외교 참사와 사대주의적 굴욕 정책을 호도하고, 사회적 참사와 경제위기에 대한 무책임을 사회적 편 가르기와 노동탄압으로 무마하고, 한반도의 긴장을 격화하는 전쟁 논리로 국가안보의 무능을 가려보려는 것이겠지요. 정부는 국민의 요청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힘으로 겁박하며 퇴행적인 정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참담한 느낌이 드는 것은 저만이 아닐 것입니다.
영국의 경제학자 Thomas Gresham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Bad money drives out good money. 직역하자면, ‘나쁜 돈이 좋은 돈을 몰아낸다’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액면이 10만 원으로 같은 가치를 가진 두 개의 동전이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는 순금으로 만든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합금으로 만든 것입니다. 액면 가치는 같지만, 실제 가치는 서로 다릅니다. 이때 똑같은 물건을 살 수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어떤 동전을 먼저 사용하려 할까요? 사람들은 순금 동전을 간직하고, 합금 동전을 사용할 것입니다. 그래서 점차 시중에 유통되는 것은 가치가 낮은 합금 동전이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이 현상을 가리켜 ‘그레샴의 법칙’이라고 하는데, 한글로는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한다’라고 표현하지요.
이 그레샴의 법칙은 경제에서만이 아니라 인간이 사는 대부분 영역에서 나타납니다. 이기적인 사람이 자기 것을 챙기는데 영리하고, 편협한 세력이 자기 힘과 몸뚱이를 불리는데 민첩하여 성공적입니다. 오늘 한국 정치 현실에서 이 암담함을 보고 있습니다. 도덕성이라는 개인적 자질과 민주주의라는 사회적 자질을 갖추지 못한 자들로 구성된 검찰 권력이 우리 사회를 시궁창으로 몰고 가는 느낌입니다.
기독교도 예외는 아닙니다. 교회의 역사에 크게 보면 두 개의 신학이 유통되어왔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정신이라는 같은 액면 가치를 표방하면서, 한편으로는 제국주의적인 ‘영광의 신학’이, 다른 한편으로는 가난한 이들의 해방을 향한 ‘고난의 신학’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알다시피 교회에는 ‘영광의 신학’이 주로 퍼졌습니다. 그 힘의 신학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빛 가운데를 걸어가도록 인도하기보다는 어두움 속에 빠뜨려 왔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권력과 자본이 주도권을 쥐는 현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악한 힘의 득세보다는, 선한 권력과 사랑의 자산이 고갈되는 것이지요. 바리새적 독선이 법과 정의라는 이름으로 세계를 분열시키고 관계를 파괴할 때,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자비로운 정신은 환멸을 느끼며 사라지는 길을 선택하곤 합니다. 폐쇄적 정신이 정의의 이름으로 활보할 때 진실의 목소리는 묻히고 맙니다.
우리가 경험한 거짓의 수명은 생각보다 깁니다. 그것은 단지 거짓이 필요한 사람들의 힘이 강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적의 사멸이 곧 진실의 귀환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은 대부분 모호함 속에 있고, 거기서 완벽한 식별이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올바른 길을 보장해주는 절대 지침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진리를 향해 함께 더듬으며 나아가야 할 인류의 과제는 늘 위태롭습니다.
미래가 불투명한 세상을 보면서, 가끔 신학적 질문을 던지곤 합니다. 하나님의 미래는 분명하게 정해져 있을까? 하나님의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까? 이런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대한 대답 역시 확실치 않겠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항상 선(善)하지만, 하나님의 현실은 우리 못지않게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예정설’을 주장한 깔뱅에게는 미안하지만, 신(神)이라 할지라도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향해 가는 길 역시 예정되어 있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경험하듯이, 살아있는 삶이란 진선미의 절대 의미가 박제처럼 보관된 곳이 아닙니다. 성(聖)과 속(俗)에 관여하는 생(生)과 사(死)는 깊이 얽혀있어서, 서로 어우러지면서 혼돈과 생성의 춤을 추는 곳이 우리 세계입니다. 우리 세계는 퇴보할 수도 고양될 수도 있습니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는 진리의 빛으로 어둠을 걷어내려는 꿈이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주현절의 믿음입니다.
[어둠 속 빛을 구한 예언 / 이사야서 9장 1~4절]
제1성서 이사야서는 위기의 시대를 살아간 예언자의 고뇌와 꿈을 담고 있습니다. 분단국가의 대결이 외세의 동맹으로 확대되는 암울한 시대에 이사야는 절망의 현실을 경험했습니다. 본문이 시작되기 직전 이사야는 꿈을 잃어가는 시대의 절망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산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죽음 세력에게 교훈을 얻으려는 자는 결코 동트는 것을 못 볼 것이다. 그들은 괴로움과 굶주림으로 이 땅을 헤맬 것이다. 굶주리고 분노한 나머지 위를 쳐다보며 왕과 신들을 저주하고 또 땅을 내려다보겠지만, 보이는 것은 다만 고통과 흑암, 무서운 절망뿐일 것이니, 그들은 짙은 흑암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
이 말은 현실의 어둠과 절망에 대한 탄식이지만, 예언의 꿈은 여기에 갇히지 않습니다. 이사야서가 예언서의 첫머리에 오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예언에 담긴 비전 때문이라 하겠는데, 그것이 오늘 1절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어둠이 걷힐 날이 온다.”(ki lo muap) 이사야는 자신의 꿈을 풀어서 이렇게 이어서 말합니다. 비록 옛적에는 스불론과 납달리의 땅이 멸시를 받게 버려졌지만, 주님께서는 이방인이 사는 갈릴리까지 모든 지역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어둠 속에서 헤매던 백성,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친다. (2절)
남 유다에서 예언활동을 한 이사야는 북이스라엘 지역에 있는 고난의 땅 스불론과 납달리를 위해 기도하고, 그 옛날 미디안 세력에게 억눌린 이스라엘을 사사(使司) 기드온이 구해냈듯이, 앗시리아의 위성국가로 전락할 위기에 놓인 나라를 정의로운 다윗의 후손이 등장하여 새롭게 세울 것을 기대했습니다. 이사야의 바람대로 아하스(Ahaz)라는 무능한 왕정이 끝나고 개혁 군주가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히스기야와 요시야와 같은 왕입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역사의 시련은 깊어지고 결국 유다는 멸망하고 맙니다.
여기서 우리는 묻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둠이 걷힐 날이 온다’라고 본 이사야의 꿈은 헛된 것이었는가? 예언자가 염원하는 꿈은 역사의 어둠을 측량하지 못하는 순진한 기대에 불과한 것인가! 이런 질문은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가 늘 자기 한계에 갇혀 있고, 일시적으로 성공한 해방운동 역시 굴절되고 좌초되는 것을 운명처럼 반복하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가 예언의 꿈을 잃지 않고 여전히 ‘어둠이 걷힐 날’을 기대하며 행진을 하는 이유는 하늘의 뜻을 찾으며 참된 길을 찾는 사람들이 계속 등장하기 때문이겠지요. 우리도 그 길을 예수 운동에서 찾으며 살아갑니다.
[예언을 이루는 두 가지 차원 / 마태복음 4장 12~23절]
오늘 마태복음 본문은 ‘광야시험’을 마친 예수의 공생애가 시작되는 내용입니다. 마태는 예수의 활동이 지닌 의미를 다각적으로 전합니다. 그 시작은 이렇습니다.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돌아가셨다.” 여기서 요한이 ‘잡혔다’라는 말은 단지 그가 권력자들에게 체포되어서 활동을 중단하게 되었다는 의미만은 아닙니다.
마태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잡혔다’(paradidōmi, παραδίδωμι)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데, 그것은 수동적인 체포가 아니라 자신을 의도적으로 내어주는 능동적인 의미도 지닙니다. (17:22, 20:18, 26:2) 그래서 마태는, 자기를 내어준 요한의 뒤를 이어서 그 빈 자리를 대신 채운 예수의 행위를 가리켜서, 먼 옛날 이사야가 꿈꾼 예언을 이룬 것으로 설명합니다. (사 9:1~2, 마 4:15~16)
예수가 외친 첫 번째 말씀은 요한이 광야에서 외쳤던 말씀(마 3:2)과 같습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이 말씀은 새로운 시대를 갈망하는 사람들을 향한 초대입니다. 마태는 이 말씀을 전한 다음 이어서 제자를 부르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예수께서 ‘나를 따라오너라.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삼겠다’라고 부르자, 4명의 어부는 즉시 자기의 소유를 버리고 따라나섭니다. 이것은 예언의 꿈이 현실에서 이뤄지는 지점을 잘 보여줍니다. 역사의 어둠이 걷히기 위해서는 ‘하늘의 부름’ 못지않게, 그 호출에 응답하여 일어서는 사람들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것은 전쟁과 폭력, 파괴와 대립의 세상에서 예언이 현실화되는데 필요한 두 가지 차원을 의미합니다. 먼저 하늘의 부름이라는 객관적인(외부적인) 사실입니다. 어쩌면 그것을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하는 것은 어폐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부르심은 누구에게나 자명한 사실이라기보다는 믿음의 마음에 들려오는 신비한 목소리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그 믿음의 세계를 가리켜서, ‘보여서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어서 볼 수 있는 세계’라고 말합니다. (히 11:1/3) 하나님의 부르심은 광활한 마음에 주어지는 하늘의 선물이요, 그 선물은 준비된 심령으로 다가오는 외적 사실입니다.
여기서 예언을 이루는 또 하나의 차원이 뚜렷해집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는 내적 상태로서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이 세계가 어둡고 혼탁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총에서 멀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마음입니다. 그 믿음의 마음은 눈에 보이는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지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그 신실함은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습니다. 환난이나 곤고(困苦)나 핍박이나 굶주림이나 헐벗음이나 위험이나 칼로도 믿음의 사람이 하나님의 은총에 잇대어 사는 삶을 끊지 못합니다.
마태는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첫 장면을 두 이야기로 구성했습니다. 한편에 예수의 부름이 있다면, 다른 한편에는 제자들의 응답이 있습니다. 이 두 차원이 어우러질 때, 세상에 어둠이 걷히고 빛이 임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눈으로 보면, 제자들이 선택한 부름 받은 삶은 어리석은 선택처럼 보입니다. 여기에 믿음의 사람이 겪는 시련의 의미가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시련을 겪게 됩니다. 그것은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겪게 되는 시련입니다.
[바울의 십자가 신학 / 고린도전서 1장 10~18절]
고린도 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는 믿음의 공동체가 경험하는 어려움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 어려움은 자신들의 세속적 한계에서 생겨난 것이기도 하고, 그 한계를 넘으려는 믿음 자체가 만든 것이기도 합니다.
바울이 전해 들은 고린도 교회의 상황은 분열과 분쟁 상태였습니다. 네 개의 파벌로 나뉘어 알력 다툼을 벌인 것이었습니다. 이런 분열은 일차적으로 교인의 구성이 다양해서 생겨난 것입니다. 어떤 이는 가난했고 어떤 이는 부유했습니다(11:17~34). 어떤 이는 유대인으로서 할례를 받았고 어떤 이는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이었습니다(7:17~19). 어떤 이는 자유인이었고 어떤 이는 종의 신분이었습니다(7:21~24). 서로 일상적인 유대감을 갖기 어려운 사회적 구성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함께 믿음의 공동체를 꾸려가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대견한 일이요, 믿기 힘든 삶의 실험입니다.
그런데 그 공동체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분쟁이 격화되어 당파의식으로 갈라진 것입니다. 그들은 세속적인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공동체를 세웠지만, 믿음의 노력 속에 분쟁이 생겨나며 다시 세속적인 한계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겉으로는 ‘바울파다 베드로파다, 아폴로다 그리스도파다’ 했지만, 실제로는 자기 지식과 자기 신념과 자기 언변을 절대시하는 교만에 빠진 것입니다.
바울은 이 공동체를 위해 하나의 해법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십자가의 신학’입니다. 17절을 보면, 복음이란 ‘말의 지혜’(eloquent wisdom)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헛된 것이 될 뿐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어쩌면 인류는 이 배움을 얻기 위해 고단하게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십자가의 말씀은 삶을 돌이켜 회개하도록 이끕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삶은 자신을 돌이키기보다 자기 힘을 획득하는 데 관심합니다. 십자가를 진 사람들을 보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봐라!’하며 조롱합니다. (막 15:30) 그런 삶이 범람하면, 선한 노력은 실종되고 관계는 파괴됩니다. 그것은 세상을 ‘힘과 공포의 세계’로 몰아가는 자멸의 삶입니다. 인류는 그런 삶을 살아오며 파괴와 대결의 문화에 젖었고, 결국 지구적 차원의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와 교회는 새 삶의 방식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먼저, 눈에 보이는 세계의 난폭한 질서 뒤편에 평화를 일구는 사랑이 움직이고 있음을 보는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부들부들 떠는 사람을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었구나!’ 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심령이 가난해져서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예수의 가르침도 거기에 있지 않겠습니까?
십자가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은혜, 성령의 친교가 우리의 삶을 회복시켜주실 것입니다. 설 명절에 가족들과 이 사랑과 은혜와 친교를 복되게 나누시기를 바랍니다.
[파송사]
어둠 깊은 시절을 지날 때, 저 옛날부터 들려오는 예언의 북소리를 들으십시오. 어둠이 걷힐 날이 온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칠 것이다! 이 하늘의 북소리를 들으며, 삶을 돌이키고 공동체를 세우며 인생을 밀고 나간 사람들이 여기 있습니다. 그 삶에 하늘의 위로와 은총이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