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믿음 | 김희헌 | 2023-02-12

by 김희헌 posted Feb 12, 2023 Views 181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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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믿음 (30:15-20, 고전 3:1-9, 5:21-37)

2023.02.12. 주현절 여섯째 주일/신학교육주일

 

[삶에 관한 틸리히의 교훈, 신율(神律)]

지난 주일 임보라 목사님 장례 절차가 많은 분의 애도 속에 잘 진행되었습니다. 장례를 마치고 나면 돌아가신 분이 남긴 삶의 유산을 더 깊이 생각하는 시간이 시작되는데, 이번에는 잘 마무리되었다는 느낌보다는 해야 할 과제가 더 크게 남은 듯합니다. 특히 한국교회가 격렬하게 반대하는 성 소수자 문제에 대해서 우리 교회가 감당해야 할 책임이 더 무거워졌습니다. 낡은 교리와 관습의 편견을 떨치고, 하나님의 자비를 대담하게 증언할 수 있는 지혜를 얻기 위해 힘써야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동료 목회자의 죽음을 지켜보며 마음이 매우 무겁습니다. 진보적 신앙 운동이 겪는 어려움에는, 보수 기독교의 장벽이 두꺼워서 당하는 억울한 일만이 아니라,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 가치를 붙들기 위해 스스로 밀고 나가는 과정에서 겪는 고달픔 또한 큽니다. 현실의 한계에서 오는 한편의 압박과 미래를 향한 또 한편의 갈망이 소용돌이치는 곳에서 리듬 있게 행진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신앙공동체가 함께 손을 맞잡고 현실의 벽을 타고 오르기 위해서는 행위의 성실함 못지않게, 우리 믿음의 토대를 깊이 뚫어보는 종교적 성찰이 필요합니다.

죽음이란 거대한 상실감을 몰고 오는 파괴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삶을 근본적으로 성찰하는 기회를 줍니다. 죽음 앞에서 제기되는 물음은 대부분 종교적입니다. 일상을 살면서 놓치고 있던 궁극적인 관심사를 맨 앞으로 끄집어내어 대면하게 합니다.

종교철학에서는, 종교적 세계관을 구성하는 두 가지 관심사가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세계를 깊이 이해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삶을 의미 있게 사는 길에 관한 것입니다. 따라서, 대부분 종교는 자신의 우주론과 생사관을 갖고 있습니다. 불교는 그것을 매우 정교한 이론으로 발전시켰고,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위대한 삶이 주는 상징에서 그 가르침을 찾아왔습니다. 종교가 몰락하는 이유는, 한편으로는 낡은 세계관에 갇혀 사상의 지체를 거듭하기 때문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억압적 편견에 물들어서 조화로운 삶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교단이 정한 신학교육주일이기도 하니, 한 신학자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볼까 합니다. 독일 출신 신학자 Paul Tillich라는 분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루터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아서 이른 나이에 목사고시에 합격하고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25살부터 대학에서 가르치면서 훗날 철학적 신학을 대표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원래 그는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철학과 교수로서 종교 사회주의를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나치가 등장하면서 비유대인 가운데 최초로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미국으로 망명을 떠났습니다.

그와 함께 파시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이야기는 <지식인들의 망명>이라는 책에 나오는데, 그 책을 번역한 김창희 장로님의 선물로 받아 읽고, 틸리히에 관한 비신학 분야의 평가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책은 마지막 결론에서, 틸리히가 망명 지식인 가운데 사상의 대변혁을 일군 전형이자 가장 따뜻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고 기록합니다. (H. 스튜어트 휴즈, <지식인들의 망명: 사회사상의 대항해>, 329)

그가 쓴 많은 책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세 권으로 구성된 <조직신학, Systematic Theology>이라는 책입니다. 유학 중에 이 책으로 한 학기 세미나를 하면서 많은 신학적 난제를 풀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지금도 저에게 영향을 주는 주제는 인간의 이성이 종교를 대하는 방식에 관한 것입니다. 그는 그것을 세 가지로 말합니다. 자율(自律, autonomy), 타율(他律, heteronomy), 신율(神律, theonomy)입니다.

조금 난해하지만, 그의 설명을 들어보겠습니다.

자율이란 이성적 존재가 자기 안에서 발견한 이성의 법을 스스로 따르는 것이다. 진정한 자율은 개성의 기질이나 자의적인 의지가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합리적 구조에 순종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자율적 이성은 타율에 맞서 끊임없이 투쟁해 왔고, 자신을 타율적 억압으로부터 해방하려 했다. 타율은 밖으로부터 주어진 권위와 힘을 가지고 자율적 이성의 기능을 제한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타율의 권위와 근거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깊이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자율과 타율의 긴장과 갈등은 불가피하고 불행한 결과를 초래한다. 이 갈등은 신율 안에서 화해하고 통일된다. 하지만, 신율이란 모세의 십계명처럼 위에서 내려온 신성한 법이 아니다. 참된 신율이란 자율적 이성이 그 자신의 이성의 깊이와 통전한 상태,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초월한 이성의 법이다.” (P. Tillich, Systematic Theology, vol. 3, 84-5)

틸리히는 격변하는 유럽 사회의 파고를 겪은 사람이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자유로운 낭만주의 정신과 마르크스주의가 지닌 진보적 낙관주의를 흡수했고, 군목(軍牧)으로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동안에는 참혹한 현실과 이 그 세계의 마성(魔性)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나치의 광기를 지지하는 종교를 보면서, 새로운 세계를 향한 인간의 길을 모색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자율과 타율을 화해시킨 신율의 세계를 추구하는 삶의 배경이었을 것입니다. 그의 사상은 오늘 우리에게도 좋은 길잡이가 됩니다.

현대 사회는 인간의 자율성을 존중하며, 미성숙 상태에서 깨어난 계몽된 이성을 옹호해 왔습니다. 여기서 자율이란 자기 충동에 따른 제멋대로의 사고가 아니라, 합리적인 생각을 따르는 것이 옳다고 느끼는 마음입니다. 강압적인 타율적 권위가 비합리적으로 위협할 때 자율적 이성은 저항합니다. 타율이 신성한 모습의 종교적 권위이거나, 억압적인 정치 권력이거나, 관습의 암묵적인 강요로 나타날 때 자율적 이성은 항거합니다.

틸리히의 통찰은 타율에 관한 해석에 있습니다. 그는 타율이 단지 외부에서 오는 낯선 것이 아니라, ‘이성의 깊이에서 우러나온다고 봤습니다. 인간의 정신은 합리적 효율성에 만족하지 않고 더 깊이 있는 이상을 추구합니다. 인간의 이성은 평면적인 합리성, 계산적 효율주의, 형식적 상대주의, 규칙적 법칙성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성은 숭고한 것, 무한한 것,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것을 묻고 추구합니다. 틸리히는 그것이 이성의 깊이에서 우러나온다고 보았습니다.

문제는 타율이 이성을 억압하고 파괴하는 형태로 세상에 나타난다는 데 있습니다. 그 모습은 여러 가지입니다. 때로는 왕권신수설로, 성경무오설로, 정치적 전제주의로, 유물론적 법칙주의로, 종교적 율법주의로 등장합니다. 이런 모습의 타율은 자율과 충돌하고, 인간의 삶을 찢고 병들게 합니다. 이런 타율은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것으로 가장한 사이비 타율입니다. 바울의 설명을 인용하자면, ‘율법이 본래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이지만, 죄가 그것을 통하여 우리를 속이고 죽인다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7:11~13)

틸리히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자신의 신적 근거를 알고 있는 자율, 신율에 있다고 말합니다. 이 신율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실존의 깊이요, 자기 존재의 근거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을 가리켜, ‘존재의 근거’(the ground of being), 만물을 존재하게 하는 능력이라고 상징적으로 표현합니다. 예를 들자면,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모세의 신발을 벗게 한 야훼는 저 우주 공간 어디에 계신 존재가 아니라, 모든 존재의 근거이자 중심이요, 인간이 새롭게 태어나는 모든 과정에서 진선미와 거룩함을 추구하게 하는 신의 암호라고 하겠습니다. (김경재, <틸리히 신학 되새김>, 55~61)

이것을 깨달을 때, 이성의 자율과 타율은 갈등을 멈추고, 자유와 해방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 체험에서는 그것을 거듭남이라 말하고, ‘성령 충만의 상태라고 표현합니다. 이런 경험을 할 때, 인간은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를 누리지만, 하나님의 법에 충실한 종이 되어 세상을 섬기는 역설의 진리가 살아납니다.

하지만 이 신율의 삶은 그냥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보수와 진보가 싸우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보수의 모습을 띠는 타율적 종교는 성서의 문자와 교리 자체를 신성한 것으로 보면서 성서무오설을 주장하고, 복음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인간을 억압합니다. 진보를 표방하는 자율적 종교는 성서의 영감을 문서비평으로 해체하고,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을 지상의 복지사회로 평면화시킵니다.

틸리히는 그것을 가리켜 종교의 두 가지 오류라고 말합니다. 타율적 종교가 벌이는 오류를 가리켜서 마성화’(demonization)라고 표현하고, 자율적 종교의 오류를 가리켜 불경화’(profanization)라고 표현합니다. 보수 종교가 상대적 교리를 절대적 진리로 숭배하는 마성화에 사로잡힌다면, 진보 종교는 궁극적인 관심을 이 세상의 상대적인 것 가운데 하나로 간주하는 불경화에 시달립니다. 이 둘은 미숙한 정신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극단화한 모습입니다. 생동하는 정신은 이 두 가지 오류에 빠지지 않으려고 분투합니다.

틸리히가 제공한 이런 신학적 안목으로 성서를 보면, 문자주의의 망상에 빠지거나 인문주의의 회의로 흐르지 않고, 그 가르침을 볼 수 있는 길이 놓입니다.

 

[성서가 가리키는 믿음]

오늘 고린도전서 본문 3장에서 바울은 갈등을 겪고 있는 고린도 교회를 향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러분은 아직도 육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시기와 싸움이 있으니, 여러분은 육에 속한 사람이고, 인간의 방식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까?고린도 교회는 서로 지혜를 드러냈지만, 열성을 다할수록 파벌 다툼이 격화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믿음이 젖먹는 수준, 단단한 음식을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바울파다, 나는 아폴로파다 하고 싸운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신의 지식에 가두는 불경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고린도서의 제한된 설명만으로는 왜 그들이 자신들을 바울파요 아폴로파라고 이름 붙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렇게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사도행전 18장을 보면, 아폴로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그는 당시 지식의 본고장이었던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서 말을 잘하고 성경에 능통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을 회당에서 열심히 말하고 정확히 가르쳤다고 묘사합니다. 이런 아폴로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자율적 종교심을 강조하는 그룹이었다고 간주해보죠. 또 다른 한편의 사람들은 바울의 권위에 힘입어 자신의 주장을 펼칩니다. 이들은 타율적 종교심을 강조하는 그룹이라고 해두죠. 이들이 서로 갈등을 빚었습니다.

바울이 보기에 두 그룹 모두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존재하게 하는 분에게 집중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심는 사람이나 물 주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요,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고전 3:6~7)

나무를 심는 사람도 필요하고, 물을 주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자라나게 하는 분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것은 사고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자신을 절대화하는 마성화의 늪에 빠지지도 말고, 복음의 가르침을 파벌의 논리로 사용하는 불경화의 늪에 빠지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대신, 모두를 자라게 하신 분에 집중하면, 나무를 심는 사람과 그 나무에 물을 주는 사람이 서로 하나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모두 하나님의 밭과 집(oikodome)에서 함께 일하는 동역자(synergoi)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율적인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신명기 30장 본문은 모세의 고별설교마지막 부분에 해당합니다. 모세는 앞에서 스무 장 넘게 율법(신명기 법전)의 여러 항목을 설명하고, 마지막에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오늘 생명과 번영, 죽음과 파멸을 당신들 앞에 내놓았습니다. 당신들이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면, 당신들이 잘 되고 번성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순종하지 않고, 빗나가서 다른 신들에게 절을 하고 섬기면, 당신들은 반드시 망하고 맙니다.” (30:15-18)

신명기서는 복종과 보상이라는 구도를 갖고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라는 타율적 명령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신명기서가 고대에 주군과 신하가 계약을 맺는 종주권 계약의 형식으로 써졌기 때문에 보이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자칫하면, 그 형식의 이질감 때문에 실제적인 가르침을 지나칠 수 있습니다. 무엇에 주목해야 할까 생각하다가, 과도하다시피 반복되고 있는 당신들이라는 표현을 눈여겨보게 되었습니다. 신명기 30장은 20절밖에 되지 않지만, 거기에는 당신들이라는 표현이 66번이나 나옵니다.

모세가 강조하는 것은 당신들’, 바로 라는 존재입니다. 너라는 존재가 무엇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깊이 들여다보라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존재의 근거를 하나님에게 뿌리를 내린 신율적 삶을 살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입니다. “생명을 택하십시오. 주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따르십시오. 그러면 살 것입니다.” (19-20)

 

마태복음 5장 본문(21~37)에서 예수는 당신의 가르침을 옛 율법과 대비하여 제시합니다. 살인과 간음, 이혼과 맹세에 관한 네 가지의 옛 율법을 먼저 제시하고, 자신의 가르침을 더욱 래디칼하게 바꾸어 설명합니다. 마태복음의 예수는 타율적 율법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 그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라고 말합니다(5:17). 율법을 타율적으로 지키는 바리새인의 자세보다는, 율법의 정신을 살려서 하나님의 뜻에 가닿도록 자신을 밀고 갈 것을 말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2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옛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살인하지 말아라. 누구든지 살인하는 사람은 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타율적 종교는 이 계명 앞에서 살인만 저지르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는 그 계명의 신율적 가능성을 더 밀고 갑니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화내는 것, 형제를 얼간이나 바보라고 비난하는 것, 이웃과 불화한 상태에서 제물을 드리는 것마저도 씻어내야 할 삶이라고 가르칩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신율적인 믿음의 자세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성숙한다는 말은 타율과 자율을 넘어, 신율에 이르는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바울은 그 삶을 가리켜, ‘여러분이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건물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믿음의 행진은 계속되겠지요. 그 여정이 생명의 근원이요 존재의 근거가 되시는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과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잠시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저 옛날 광야의 길을 사십 년간 유랑하던 사람들에게 들려준 모세의 말을 기억합니다. “생명을 택하십시오. 주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따르십시오. 그러면 살 것입니다.” 이 숭고한 신율의 북소리가 우리 모두의 삶에서 계속 울리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