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새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 한병철 | 2023-02-19

by 김희헌 posted Feb 22, 2023 Views 211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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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새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베드로후서 1:16-21 / 마태복음 17:1-9 / 출애굽기 24:12-18)

오늘 아침에 저는 아버님이 운전하시는 차를 타고 여기 왔습니다. 아흔한 살 아버지가 예순한 살 아들을 차에 태우고 인천에서 명동으로 교회 오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무슨 단어가 떠오르세요? ‘?’ ‘걱정된다?’ ‘불안하다?’ 제게 떠오른 단어는 행복하다였습니다.

제 아버님은 향린교회를 60년 이상 다니셨습니다. 물론 중간에 미국에 가서 사셨던 10여 년이 빠집니다만, 귀국하셔서, 그 연세에 인천에 사시면서 다시 향린교회에 출석하고 계십니다. ? 향린은 좋은 교회니까. (이럴 때는 향린교회도 아멘좀 하면 안 됩니까?)

여러분, 그거 아세요? 향린은 참 좋은 교회입니다. 여러분은 참 좋은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어떤 이름을 들으면 가슴이 벅차오르고 눈시울이 붉어지게 하는 그런 이름이 있습니다. 제게는 향린이 그렇습니다. 저에게 향린은 그냥 한 교회의 이름이 아닙니다. 향린은 저를 키웠고, 저를 만들었습니다. 제가 학부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것도, 신학대학원에 진학했던 것도 먼저 사회학을 전공하고 신학을 공부한 안병무 박사님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제가 신대원에 입학하던 해에 안병무 박사님 댁에 세배를 가서 그 말씀을 드렸더니 안 박사님이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시더군요. 마치 이런 말씀을 하시려는 것 같았습니다. 한군, 상투 끝을 잡았구만.”

홍창의 장로님은 제가 어렸을 때 제 주치의셨습니다. 저는 우이동에 살면서도 아프면 꼭 삼선교에 있었던 홍창의 소아과에 가곤 했었지요. 제가 1964년과 1965년 두 번이나 서울시 우량아 선발대회에서 은메달을 땄는데, 그때 홍창의 장로님이 심사위원이셨습니다. 홍장로님의 인격을 생각하면 같은 교회 어린이라고 특혜를 주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저는 향린교회를 다니면서 역사의식을 키웠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안병무 박사님 등이 만드신 <제삼일>이라는 잡지와 <현존>이라는 잡지를 보고 자랐습니다. 1980년에 517일에 전두환 군부가 계엄을 확대하고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그날이 주일이었는데, 저희 중고등부 선생님 몇 분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가택 연금을 당하거나 체포되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 자연스럽게 학생운동을 시작한 것도 그런 영향이었습니다. 제 인생에서 제게 영향을 준 많은 분들을 저는 향린에서 만났습니다.

최영숙 장로님은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중고등부 교사로 우리 학년을 맡으셨습니다. 우리는 주일 오후에 종종 최영숙 선생님이 근무하셨던 한남동 직업훈련원에 가서 놀았습니다. 저는 최영숙 선생님의 순수하고 진실한 사랑을 보면서 많은 걸 배웠지요. 아무튼, 제 인생에서 향린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 이름입니다.

그런데 오늘 교회로 오면서 매우 섭섭한 게 한 가지 있었습니다. 향린교회가 더는 중구 을지로 2164-11에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중앙극장 옆 판넬 골목 안쪽에 있던, 대지가 120평도 채 되지 않지만, 제 인생에서는 물론, 오랜 세월 한국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던 교회 건물이 사라진 게 못내 아쉽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교인이 교회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죠. 비록 정든 교회당은 없어졌지만,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향린교회로서 이 세상 가운데서 주님의 사역을 이루셔야 합니다.

오늘은 눈과 얼음이 녹아 비와 물이 된다는 우수(雨水)입니다. 우수라는 걸 아는지 비가 내렸습니다. 봄이 시작된다는 입춘은 두 주 전에 지났습니다. 봄의 절기인 입춘과 우수가 여전히 추위가 가시지 않은 2월에 들어있다는 게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서양 사람들은 3월 춘분을 봄의 시작으로, 9월 추분을 가을의 시작으로 봅니다. 그래서 달력을 보면 321일에 spring begins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2월에 봄이 시작되고,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8월 초에 입추, 가을이 시작됩니다. 봄은 겨울이 다 끝나야 시작되는 게 아니라 겨울 추위 한복판에서 이미 시작합니다. 새벽도 그렇습니다. 새벽은 밤입니까, 아침입니까? 새벽은 하루 중 가장 캄캄하고 춥습니다. 그러나 그 새벽이 아침의 시작입니다.

겨울이 봄으로 살아나는 이 계절에 우리는 오늘 교회력으로 예수께서 높은 산에 오르셔서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하셨던 사건을 기억하는 ‘transfiguration Sunday, 산상 변모 주일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오는 22‘Ash Wednesday, 재의 수요일부터 40일간의 영적 광야의 여정인 사순절(四旬節)이 시작됩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력에 따라서 세 개의 성경 본문을 읽었습니다. 김희헌 목사님이 얼마 전에 제가 한국에 온다는 소식을 알고서 제게 고향 교회에서 설교하시라고 메시지를 보내오셨습니다. 실은 5년 전에도 안식년으로 4개월이나 한국에 있었고, 그때도 김목사님이 제게 설교해달라고 요청하셨지만, 저는 안식년에 무슨 설교냐며 거절했는데, 이번에 또 요청하셔서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향린에서 설교하려면 이렇게 해주십시오.’라고 장문의 카톡을 보내셨습니다. 그 메시지를 보고 제 입에서 갑자기 경상도 사투리가 튀어나왔습니다. “아이고 더러버서 못 해먹겠네.”

그 메시지의 내용을 이랬습니다. “본문은 Revised Common Lectionary 성서 일과에 나온 세 개의 본문을 모두 사용해서 해주시고, 시간은 30분 이내로 할 것이며, 하루 전까지 원고를 보내줘야 하고, 세 개의 본문 가운데 요절을 한 절 선택해서 알려주고, 부르고 싶은 찬송 두 곡을 화요일까지 보내주고, 설교 후에는 기도하지 말고 침묵 기도로 마치고, 축도 전에는 파송의 말씀을 할 것이며, 주일날 30분 전 예배 준비모임에 참석하십시오.” 그리고 끝에다가 우리는 이렇게 하지만, 혹시 그게 어려우면 하고 싶은 본문을 알려달라고 써놓으셨습니다. 그 말이 더 짜증 났습니다. 당신 이거 힘들겠지? 자신 없으면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좋아.” 자존심을 확 긁어놓는 말처럼 느껴졌습니다. “저 못하겠는데요...” 그렇게 답을 할까 하다가, 그래도 순종하는 마음으로 오늘 이 자리에 섰습니다.

여러분, 성서 일과를 따라 세 개의 본문을 바탕으로 설교하는 일이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 향린교회 목회자들은 그걸 하고 있어요. 여러분은 그냥 와서 편하게 듣는지 몰라도 이 교회 목회자들은 정말 신실하게 예배와 설교를 준비하고, 그걸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아세요?

제가 속한 미국 장로교회의 헌법에는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참되게 선포되고 들려져야 한다.” The Word of God may be truly preached and heard,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게 선포되는 일은 설교자의 책임이죠? 그러면 그 말씀이 참되게 들려지는 일은 바로 여러분 회중의 책임입니다. 설교는 설교자의 일방적 선포가 아니라 듣는 회중이 온전하게 반응함으로써 함께 만들어 가는 상호적인 행위입니다.

세상은 향린교회를 믿음이 없다, 하나님 안 믿는다, 뭐 말 같지도 않은 소리로 비난하지만, 향린교회야말로 온전한 예배, 온전한 말씀 선포를 위해 애쓰는 교회라는 사실에 여러분은 자부심을 가져도 좋습니다.

그래서 저도 김희헌 목사님 지시, 명령, whatever, 권유대로 세 개의 본문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 출애굽기는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 계명을 받는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때 그 산 위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했다는 내용입니다. 마태복음 17장은 제자 셋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신 예수님이 갑자기 광채가 나고 눈부시도록 하얀 모습으로 변하셨던 소위 변화산 사건을 기록하고 있지요. 그리고 베드로후서 1장은 베드로가 고난과 혼란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권면하고 위로하면서 자신이 경험했던 그 변화산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세 명의 제자와 오르셨던 높은 산이 안티레바논산맥 남쪽 끝에 있는 해발 2,814m의 헐몬산이 아닐까 생각하지만, 주님이 실제로 오르신 산은 나사렛의 동남쪽 10km 지점의 저지대 평원에 있는 해발 588m의 타보르 산(Mount Tabor)이라고 보는 게 타당합니다. 지금도 그 산 정상에는 주님의 변모를 기념하는 성당이 서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것은 그 산이 어느 산이냐가 아니라 그 산 위에서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마태복음을 가만히 살펴보면 산 위에서 벌어진 일과 산 아래서 벌어진 일이 반복적으로 일어납니다. 마태복음 5-7장은 산상설교입니다. 예수님의 산 위에 오르셔서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산 위에 머물지 않고 산 아래로 내려오셨지요. 산 아래서 주님을 기다리고 있던 건 병들고, 귀신 들리고, 아파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그들을 만지시고 고쳐주셨습니다. 여러분, 만지면 살아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바로 그 일, 병들고 연약한 사람들을 돌봐주는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게 제자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을 걷는 일이 고난의 길임을 아시는 주님은 제자들을 보내면서 양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 같다고 염려하셨습니다. 그들은 총독과 임금 앞에 끌려갈 것이고, 회당에서 채찍질을 당할 것이고, 극심한 고난을 당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며 지극히 작은 자에게 냉수 한 그릇을 준 것까지도 기억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고 계기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거라고 격려해 주셨지요. 그러면서 세 번에 걸쳐서 당신이 고난을 겪고 죽임을 당하실 것을 예고하십니다. 그 고난의 깊은 골짜기로 내려가기에 앞서 주님은 제자들 가운데 특별히 세 사람을 데리고 다시 높은 산에 오르셨던 겁니다.

여러분, 이 메타포(metaphor)를 이해하시겠어요?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 영광과 고난, 골방과 시장. 이게 우리의 삶이고, 이게 제자들의 길입니다. 우리는 산 위의 영광과 산 아래 현실이 조화를 이루고, 골방의 영성과 시장의 영성이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매주 교회에 올 때마다 산 위에 오르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가 끝나고 세상을 향해 나아갈 때 산 아래로 내려가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산 위의 체험만 강조하면 신비주의가 되고, 산 아래 현실만 주목하면 세속적이 되는 겁니다.

성경에서 사람들이 산에 오르는 까닭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오른 것도, 이세벨을 피해 달아나던 엘리야가 호렙산에 오른 것도 그 때문입니다. 산은 일상의 삶에 지친 이들이 바라보는고 찾아가는 곳입니다. 그래서 시편 121편의 시인은 "내가 눈을 들어 산을 본다. 내 도움이 어디에서 오는가?"라고 노래했지요.

한국 사람들도 이런 정서가 있어서 하나님 만나러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산 기도를 좋아했던 겁니다. 한얼산, 삼각산, 용문산, 흰돌산 기도원. 새해만 되면 산으로 올라가서 하나님의 축복을 기원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나무나 바위에 앉아서 오래도록 기도했지요. 나무뿌리 하나씩 뽑아야 응답을 받는다고 믿고는 나무 많이 흔들고 괴롭혔습니다. 나무가 무슨 죄가 있기에 그랬는지 몰라요. 저도 어려서 산 기도 좀 했는데, 나무뿌리를 뽑지는 못했어도 밤에 나무 붙들고 적잖이 씨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실은 기도가 뜨거워서 그런 게 아니라 밤에 무서워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요한 건 이라는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고, 그 앞에 겸손하게 엎드리는 게 중요한 겁니다. 하나님의 길은 엎드려야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산에 올라야 합니다. 향린교회는 산 기도 같은 거 하지 않지만, 산 기도 안 가는 게 자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향린교회도 산에 올라야 합니다. 삼각산이 아니라, 한얼산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 그분의 다스림 앞에 엎드리는 영혼의 산이 있어야 합니다. 산 위에서 하나님의 신비한 모습을 체험해야 합니다. 산 위의 경험이 없이는 산 아래의 삶을 견뎌낼 수가 없습니다. 산 위의 신비한 경험이 반드시 종교적 엑스터시, 그러니까 어떤 황홀경만을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임재 체험을 어떤 형식으로든 우리 신앙인의 삶 가운데 반드시 경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고단한 현실을 견뎌낼 수 없습니다.

수난의 어두운 골짜기로 들어가시기 전 주님은 높은 산 위에 올라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하셨고, 제자들은 그 비일상적인 자리에서 스승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됩니다.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내쫓으시고, 죽지 못해 살아가는 가련한 사람들 마음에 하늘의 생기를 불어넣으시던 예수님, 스스로 거룩하다, 의롭다자부하던 이들로부터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조롱을 받았던 예수님이 그 산 위에서는 전혀 다른 분처럼 보였습니다. 그동안 잘 안다고 여겼던 예수님에게서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풍겨 나왔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비로소 예수님의 실체를 보았습니다. 그분은 빛이셨고, 하늘이셨습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 그 빛은 태초의 어둠을 가르던 바로 그 빛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더 놀란 건 빛이신 그분, 절대이신 그분이 수난이라는 운명을 향해 나아가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산에서의 경험은 제자들의 예수 체험의 변곡점이 되었습니다. 그때까지 예수님은 놀라운 이적을 베푸는 스승이었습니다. 어쩌면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게 달라졌습니다.

베드로는 오늘 베드로후서의 본문에서 그때 그 사건을 회상합니다. 물론 베드로후서가 과연 베드로가 쓴 것이냐 아니냐 하는 신학적 논의는 일단 제쳐놓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그냥 이 책의 저자를 베드로라고 하겠습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재림에 대해 자기가 가르친 것은 교묘하게 꾸민 이야기가 아니라 그의 위엄을 목격한 자로서 증언이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16,

우리가 여러분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재림을 알려 드린 것은 교묘하게 꾸민 신화를 따라서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의 위엄을 눈으로 본 사람들입니다.”

이 말을 하는 동안 베드로는 지난 시간을 회상하며 깊은 사색에 빠졌을 겁니다. 갈릴리호숫가에서 그분의 부름을 받던 일,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 척박한 갈릴리 사방을 발로 누비며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붙이던 시절이 주마등처럼 떠올랐을 것입니다. 광야에서 경험했던 오병이어의 기적은 언제 돌아보아도 가슴 벅찬 감동이었을 것입니다. 귀신을 꾸짖어 내쫓으셨던 것처럼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잠잠케 하시던 예수님의 모습은 얼마나 장엄했겠습니까? 아주 잠깐이었지만 물 위를 걸어 주님을 향해 나아가던 순간의 기억도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변화산에서의 경험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 황홀한 시간에 제자들은 속세를 잊었습니다. 삶과 죽음을 뛰어넘는 초월 체험이었습니다.

회상이 여기쯤 이르렀을 때 베드로의 마음은 무거워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겟세마네 동산과 대제사장의 집 안뜰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기억하며 가슴이 먹먹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처형, 온 세상을 뒤덮던 어둠, 그리고 그들의 가슴에 깃든 태초의 흑암보다도 더 깊은 어둠모진 게 인생이라 절망에 잠겨 디베랴 호수로 돌아가 그물을 던지던 시간,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와 아침은 먹었느냐며 떡과 생선을 구워주셨을 때의 감격, 그 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온갖 고초를 마다하지 않았던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을 겁니다.

비록 그 삶이 평탄치는 않았지만, 예수와 더불어 살아온 시간은 빛이 어둠을 몰아내는 과정이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만의 경험은 아닙니다. 바울도 똑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4:6,

“‘어둠 속에 빛이 비쳐라하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을 비추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구절은 태초의 창조 사건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흑암과 혼돈 가운데 말씀으로 빛을 있게 하신 하나님께서 여전히 불안과 불확실성과 두려움으로 어두워진 우리 마음을 비춰주신다는 말입니다. 그 빛으로 인해 바울은 박해의 어두운 골짜기를 거닐면서도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늘 제멋대로이고 연약하기만 한 우리이지만 그 빛의 비췸을 받고 나면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어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8-9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지요.

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가 이렇게 대단합니다. 그리스도인도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할 수 있습니다. 답답한 일을 당하고, 박해를 당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고난이 면제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를 믿기에 고난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슴에 이미 빛이 밝혀진 사람은 세상이 어둡다 하여 낙심하지 않습니다. 돈 좀 못 벌면 어떻습니까. 당장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다고 하여 낙심할 까닭이 무엇입니까. 불의와 싸우면서도 스스로 거칠어지지 않습니다. 반대자들조차 우정으로 감싸 안을 수 있는 넉넉함이 있습니다. 모름지기 믿는다면 이 자리에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 때문일까요? 바울은 자랑할 것이 있다면 자기의 약한 것과 십자가 밖에는 없다고 했습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너무 왜소해졌습니다. 저는 이것이 너무 속상합니다. 기독교인이라 하면서도 마음이 좁쌀보다 작고,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사람들을 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들은 보수적인 한국 교회 교인들을 떠올리실 겁니다. 그런데 저는 진보적인 기독교인들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너무 마음이 거칠고, 생각이 좁고, 품이 작습니다.

왜 그럴까요? 한마디로 말해 십자가의 은총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려는 이들에게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죽음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한가로운 산보가 아닙니다. 가시밭길을 걷는 것처럼 힘겨운 길일 수 있습니다. 겁 많고, 비겁하고, 욕심 사납고, 냉소적인 우리 마음이 일대 변화를 경험하지 않는다면 갈 수 없는 길입니다. 그런데 일단 그 길을 걷기 시작하면 예기치 못했던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여전히 불안과 두려움으로 주저주저하는 이들에게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라고 말합니다. 19,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날이 새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여러분은 어둠 속에서 비치는 등불을 대하듯이, 이 예언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말씀입니까? “마음속에서 날이 새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무슨 말입니까? 지금 캄캄한 밤중입니다. 영혼의 밤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도 영혼의 밤을 지나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사업 때문에, 갈수록 깊어지는 부부간의 갈등 때문에, 도무지 손을 쓸 수 없이 악화되기만 하는 자녀들과의 관계 때문에 캄캄한 밤을 보내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나라는 또 어떻습니까? 어떻게 그렇게 순식간에, 불과 몇 개월 만에 나라가 이렇게 나락으로 떨어진단 말입니까?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권이야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요. 그래서 참담하고 안타까워 깊은 밤을 지나는 것 같은 심정입니다.

베드로후서가 기록될 때 그들의 삶이 그랬습니다. 로마의 박해는 갈수록 심해졌고, 오신다는 주님은 오시지 않고, 삶은 갈수록 힘겨워지고, 교회는 큰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에게 베드로가 선언합니다. “날이 새고 샛별이 떠오르기까지, 어둠 속에서 비치는 등불을 대하듯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말씀에 붙들려 살기로 작정하고, 그 말씀에서 떠나지 않을 때 우리는 이 밤을 견딜 수 있고, 그럴 때 밤은 물러가고 새벽이 밝아옵니다.

태초에 빛이 있으라하신 말씀에 따라 세상에 나타났던 그 빛, 호렙산 떨기나무 속에서 나타난 그 빛, 변화산에서 제자들이 보았던 그 빛, 부활절 새벽 빈 무덤에서 새어 나온 그 빛, 바울이 다마스커스 가는 길에서 만났던 그 빛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다르게 보입니다. 지금은 캄캄한 밤이지만, 하나님은 아침을 빚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살면서 경험하는 인생의 쓴맛과 괴로움, 누군가에 대한 미움과 원망조차 그 빛을 가진 사람은 그 어둠을 하나님께 이르는 징검다리로 삼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꼭 붙들고, 모든 것을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인식할 때 우리 삶은 비루함을 넘어 깨끗해질 것입니다.

천지개벽하듯 천둥 번개가 치던 어느 밤에 무서워 잠이 깬 아이가 엄마 방으로 와서 엄마 품에 안기며 이렇게 투덜거렸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뭐 하고 계신 거야.” 그때 엄마가 아이를 꼭 안아주면서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아침을 빚고 계신단다.”

여러분, 지금은 캄캄한 밤입니다. 개인의 삶도, 공동체의 삶도, 이 세상도 한밤중입니다. 우리는 이 어둠 속에서 사순절 순례의 여정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날이 새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주님의 말씀을 붙드십시오. 주님의 빛으로 세상을 보는 습관을 들이십시오. 마침내 우리 마음에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말씀에 유의하십시오. 그 말씀을 삶으로 번역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마십시오. 날이 새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주님과 동행하는 사랑하는 향린교회 교우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