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광야시험 | 김희헌 | 2023-02-26

by 김희헌 posted Feb 26, 2023 Views 213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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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3-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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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광야시험 (2:15~17, 3:1~7, 5:12~19, 4:1~11)

2023.02.26. 사순절 첫째 주일 / 3·1절 기념주일

 

[사순절, 두 개의 발걸음]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순절은 부활절 전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며 우리 삶을 성찰하는 시간입니다. 성서에서 사순(四旬)을 의미하는 사십 일은 자기를 비워내고 거듭나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자신을 비우는 것은 자기 실종이 아니라 자기 발견이요, 삶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삶을 찾는 것입니다.

자기를 비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유영모 선생님은 욕망으로 얼룩진 마음을 더러운마음이라 하고, 더러움을 가리켜, ‘덜 없다라고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없어지지 않고 없는 상태, 그래서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라는 탐진치’(貪嗔癡)의 삼독(三毒)에 젖은 삶을 가리켜 덜 비워진 더러운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자기를 비우고 깨끗한 마음을 갖는 것은 참 어려운 필생의 과제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자기를 비운 마음은, 세상을 초탈한 절대 공()의 마음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워진 마음이라고 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얼룩진 마음을 씻고 당신의 거룩한 영을 채워주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예수의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사순절은 예수의 길을 따라 두 개의 발걸음을 걷고자 합니다. 하나는 녹색 발걸음이요, 다른 하나는 평화의 발걸음입니다. 우리 교회가 속한 기장 교단에 생태공동체운동본부와 평화공동체운동본부가 있는데, 두 운동본부가 제안하여 기후위기 시대에 합당한 녹색 발걸음과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아 평화의 발걸음을 걷기로 하였습니다. 우리도 이 발걸음을 옮기며, 자기를 비우고 사순절의 의미를 배우고자 합니다.

 

[실낙원, 인간의 보편경험 / 창세기 215~17, 31~7]

오늘 창세기 본문은 실낙원 이야기의 시작입니다. 이 이야기는 인간의 자유와 유혹에 관한 성서 신화로서, 문자 그대로의 진실이라기보다는 삶의 의미에 관한 통찰을 줍니다. 역사의 사건으로 보면 신화는 허구이지만, 현실의 경험에 대비하여 보면 늘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카렌 암스트롱, 신화의 역사, 14~15)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사람(adam)을 빚어 만드시고 그가 에덴동산에서 행복하게 살게 하셨습니다. 그 삶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동산 중앙에 있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어선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먹는 날에는 죽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은 경고합니다. 그런데, 뱀이 나타나 하와를 유혹합니다. “절대로 죽지 않는다.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금지된 열매를 따 먹으면, 호모 사피엔스에서 호모 데우스로 업그레이드된다니 매력적인 유혹입니다. 결국, 아담과 하와는 뱀의 말을 따라 열매를 먹게 됩니다. 먹고도 죽지 않았으니 뱀의 말이 옳았습니다. 그렇다고 호모 데우스가 된 것도 아니니 뱀이 거짓말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상상력을 불러오는 이 이야기는 여러 해석이 가능합니다만, 그 가운데 종교적 교훈이 되는 것을 고르면 이렇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고도 죽지 않았다는 점에서,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육체적 생사의 문제라기보다는 영적인 의미가 있다 하겠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인간의 죽음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파괴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아담)의 관계가 파괴되자, 아담과 하와의 관계가 벌어지고, 그다음에는 점차 격화하는 대결 관계로 인류 전체가 빠져들었다는 것이 창세기에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을 지으시고 보기 좋았다라고 하나님의 목소리는 뱀의 유혹에 빠진 세계에서는 사라지고 맙니다. 이 실낙원의 경험은 현실에서 반복됩니다.

 

[광야에서 맞은 시험 / 마태복음 41~11]

복음서 본문에 나오는 예수의 광야시험 이야기는 인간이 겪는 통과의례와 같은 것으로서 그 내용은 창세기에 나온 뱀의 유혹 사건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그 방향이 다릅니다. 첫 번째 인간 아담은 뱀의 유혹에 굴복하였지만, 예수는 이겨냅니다. 공관복음서 모두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신앙공동체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예수의 광야시험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거쳐야만 하는 과제였다면, 그 시험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해당하는 문제가 됩니다.

예수가 악마에게 당한 시험은 세 가지입니다. 돌로 빵을 만들라는 것,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는 것, 모든 것을 줄 테니 나에게 절하라는 것. 이것은 피하기 힘든 것으로서 모든 광야와 같은 삶에 일어나는 유혹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이 광야시험이 일어난 시간에 관한 마태의 기술입니다. 마태는 이 시험이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서이루어진 것으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아들을 광야로 이끌어서 시험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아가기 위한 시험(test)입니다. 예수가 겪은 시험은 유혹에 빠진 흐리멍덩한 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이 인도한 깨어있는 시간에 일어납니다. 만일 거룩한 영이 없다면, 그 삶에 광야는 있어도 시험은 없을 것이고, 악마의 유혹은 있어도 그것을 통과해야 할 인간의 과제는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가 맞은 첫 번째 유혹은 돌로 빵을 만드는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인류가 살아오는 동안 계속 겪은 시험입니다. 인류는 돌로 빵을 만드는 기적을 좇아 왔고, 돌까지 빵으로 만들어 풍요를 누리는 기술 문명을 구축해 왔습니다. ‘풍요는 인류의 최고 가치였습니다.

종교도 이 풍요를 축복하였고, 종교의 능력과 권위도 이런 풍요를 만드는 일에 매달렸습니다. 풍요를 누리지 못한 사람들은 능력 없는 사람이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으로 취급되었습니다. 그 결과 욕망 앞에 납작 엎드린 종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구절에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하였다.” 이것은 그가 밥을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신의 아들이기 때문에 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40일간을 굶었다 할지라도, 광야의 시간에 추구할 것은 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본 것입니다.

광야시험을 마치고 산상설교에서 주신 가르침도 같습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들을 입히시지 않겠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이 모든 것은 모두 이방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6:30~33)

두 번째 유혹은 성전 꼭대기로 데리고 올라가 거기서 뛰어내리는 기적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 보여줄 최고의 스펙터클이 될 것입니다. 이 유혹은 단 한 번에 끝나지 않습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고 유혹하는 목소리는 이후에도 계속해서 들립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보고 말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거기서 내려와 보아라.”(27:40)

악마의 세 번째 유혹은 자신에게 절을 하여 모든 것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는 궁극적 지배력에 관한 이 유혹 역시 매우 강렬합니다. 인류는 이 유혹에 시달려 왔습니다.

이 유혹이 광야에서 주어졌다는 것이 의미심장합니다. 광야는 고통이 직접적인 현실이 된 곳이면서도, 어른거리는 죽음에 맞서 생명을 갈구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광야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공간입니다. 인류는 배고픔과 고독으로 가득 찬 광야를 지워버리기 위해 도시 문명을 건설해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광야를 벗어난 것이 아니라, 모든 곳을 광야로 만든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전에는 그 광야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광야에서 유혹하는 악마는 예수를 부추깁니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충분히 이 일을 할 수 있지 않냐고 말합니다. 그것은 존중의 말이 아니라, 존재를 위태롭게 만드는 유혹입니다. 예수는 이 유혹을 벗어납니다. 사십 일간 자신을 비운 예수는 그 비워낸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담습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은 아니다.”(8:3)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라.”(6:16), “주 너의 하나님만을 섬겨라.”(6:13)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채운 예수는 해방의 길을 열고, 모두를 그 길로 초대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에는 두 가지 이해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가 신이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을 닮아 진정한 자기를 찾는 것입니다. 유발 하라리는 호모 사피엔스인 인간을 불사의 존재 호모 데우스가 되는 미래를 그립니다. 그것은 선악과를 따먹는 기술자본의 잔치를 대변합니다. 그는 생명공학과 인공지능의 발전에 따른 현대자본의 신화를 써가며, 포스트 휴먼 프로젝트의 구루(guru)가 되었습니다.

예수의 광야시험 이야기는 이와는 다른 길을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 진정한 자기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어떤 길을 걸어야 할 것인지 인류는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유혹에 맞선 공동체의 실험 / 로마서 512~19]

로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합니다. 이전의 인류가 죄와 죽음의 질서에서 살아왔다면, 예수로 인해 새로운 생명 사건이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빚어내는 새로운 세계가 당신들의 삶에서 이미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 세계가 비록 죄와 죽음의 질서로 얼룩져있다 할지라도,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 빚어내는 생명의 세계라고 말합니다. 그 세계를 사는 길은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도록 자기를 비우고 하늘의 말씀을 담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준 길입니다.

광야와 같은 삶에서 예수의 길을 걷기는 어렵습니다. 위험이 있는 곳에서는 안전한 삶에 대한 유혹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 나라를 가리켜, ‘이미’(already)아직’(not yet) 사이에 있는 세계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삶에 관한 신학적 긴장을 표현합니다. 우리 신앙의 자리도 그 이미아직사이에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을 받았습니다. (8:15) 그러나 아직 우리 몸의 속량을 위하여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8:23) 우리는 이미 예수의 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1:7) 그러나 평화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해 주실 때까지 믿음의 길을 아직 더 걸어야 합니다. (살전 5:16~23)

 

사순절을 시작하며 교회는 예수의 광야시험을 묵상해 왔습니다. 예수를 본받아 거듭나는 삶의 과제가 우리 앞에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길이 예수에게 있음을 고백하고 그를 주님으로 모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삶은 여전히 위태로운 광야의 길입니다. 삶을 사는 사람은 누구도 이 길을 피할 수 없습니다. 누가 대신해 줄 수도 없습니다. 자기만의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생명의 길을 걷는 두 개의 발걸음, 녹색 발걸음과 평화 발걸음을 걸으며 예수를 닮아가는 삶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침묵으로 기도합시다.

 

[파송사]

사순절을 시작합니다. 우리를 비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은총의 시간을 살아갑시다. 예수는 광야시험을 거치며, 하나님의 말씀을 담았습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이 생명의 말씀이 사순절을 지나는 우리의 마음에 담기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