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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중력을 거슬러 rev. ㅣ 박희규 ㅣ2023-03-05

by 김지목 posted Mar 07, 2023 Views 211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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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3-03-05

 

중력을 거슬러 rev.

마태복음 17:1-8

 

몇 주 전 김희헌 목사님께 하늘뜻펴기를 부탁 받고 오늘 성서일과에서 마태복음 17장 말씀인 것을 확인하자마자 덥석 이 말씀으로 해보겠다고 말씀드렸었습니다. 변화산 말씀은 제가 5년 전 한국에 돌아와 처음으로 설교를 해야 했을 때의 본문 말씀이기에 고민을 덜 해도 되겠다는 얕은 계산이 담긴 결정이었습니다. 그런데 2주전 한병철 목사님께서 같은 말씀 구절로 설교를 하시는 것을 보고 혼비백산 했더랬습니다. 차분히 앉아서 말씀을 대하면서 한 번 더 정신을 차립니다. 예전 말씀은 마가복음 말씀이었고 올해에 주어진 말씀은 마태복음이네요. 여기서 또 한 번 저의 얕게 부린 꾀가 우르르 무너집니다. 그런데요, 저를 무너뜨린 것은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다시 한 번 우려먹으려고 했던 설교의 제목은 “중력을 거슬러“였습니다. (Slide 2) 이 제목은 선과 악의 대립이 눈에 보이는게 다가 아니라는 표현한 뮤지컬 Wicked에서 주인공 마녀 Alphaba가 사회의 부정의에 대항하기 위해 자신의 양심과 직감을 따라 중력을 거슬러 하늘로 올라가면서 부르던 Defying Gravity에서 영감을 얻어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지었던 제목이었습니다. (Slide3) Alphaba가 하늘로 올라가는 장면과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시는 이 그림의 장면 비슷하거든요. 그 제목을 다시 쓰자고 결심하고 말씀을 펴고 읽다 보니 다시 한 번 제 얕은 생각이 강타를 당합니다. 눈을 씻고 여러번 다시 읽어도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말씀이 없는 겁니다. 예수님이 끝까지 땅을 딛고 서계시지 않았다고 볼 이유가 성경에 딱히 없는 겁니다. (Slide 4) 아니나 다를까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변화에 대한 그림들을 찾아보니 예수님이 땅을 딛고 서계십니다. 이 그림은 15세기 그리스의 아이콘인데요, 예수님도, 모세도, 엘리야도 산에 발을 디디고 있습니다. (Slide 5) 15세기에 그려진 이 그림에서는 구름에 뒤덮였다는 말씀을 응용해 모세와 엘리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예수님은 땅을 밟고 계시네요. (Slide 6) 매우 현실적으로 그려진 19세기 말의 다음 그림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나 변화산의 그림을 찾다 보면 예수님의 발이 점점 땅에서 멀어집니다. (Slide 7) 지오바니 모로니의 그림을 보시면 땅 대신 구름을 밟고 계시고요, (Slide 8) 17세기에 르우벤이 그린 그림에서도 예수님이 구름을 밟고 계십니다. (Slide 9) 제게 영감을 주었던 그림은 르네상스의 대가 라파엘이 그린 그림인데, 아마 변화산 사건을 그린 가장 유한 그림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결정적으로 공중부양하고 계신 예수님에 대한 자신감을 실어준 것은 바로 이 모자이크입니다. (Slide 10) 이스라엘의 갈릴리 지방에 가면 예수님이 변화하셨다고 하는 바로 그 산에 그 사건을 기념하는 교회가 세워져 있는데, 이 교회 천장의 모자이크에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고 계십니다. 기록여부에 상관없이 신앙인들의 상상 속에서 예수님은 이 변화산에서 중력을 거스리시고 하늘로 조금씩, 조금씩 올라가셔서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이 빛과 같이 희게 변하셨습니다. 그래서 전 원래 드리고 싶었던 하늘뜻펴기의 제목을 유지합니다. 오늘 하늘뜻펴기의 제목은 “중력을 거슬러 개정판”입니다. (Slide 11)

 

그래서 오늘은 중력을 거스르는 변화에 대해서 저와 함께 생각해보아요.  

“보이지 않지만 늘 우리를 지구의 중심을 향하여 당기고 있는 중력을 거슬러 하늘에 오르신 예수님의 변화가 과연 우리의 변화가 될 수 있을까”라는 어려운 질문을 던져 봅니다.

 

저번 주에 우리가 만난 말씀도 중력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 위에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 같이 내린 후 하늘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라는 말씀이 들립니다. 그 후,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십일간 금식을 하시고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두 번 째 시험에서 중력이 등장합니다. 악마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데리고 가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천사들이 예수님을 손으로 떠받쳐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할 것이라는 것이지요. 아마 이는 경기를 이긴 축구팀이 감독을 들춰 없고 헹가래를 쳐주는 모습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너의 진실하고 용기 있는 행동을 인정해 주는 타인의 사랑이 너를 아래로 당기는 힘을 넘어 너를 지탱해 주지 않겠느냐” 즉 “중력을 거스를 수 있는 힘은 너의 인기에 달려 있지 않겠냐, 즉 타인의 인정에 달려 있지 않겠냐”고 악마가 제안합니다.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악마의 시험을 뿌리치십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냐는 악마의 꼬심은 어찌보면 중력보다 더 강하게 우리를 끌고 있는 인력이지 않을까요? 예수님이 이 시험을 뿌리치시는 모습이 마태복음 곳곳에 숨겨 있습니다. 예수님의 덕후들이 있었지요. “선생님, 나는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라며 따라오는 율법학자에게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며 굳이 따라오는 사람을 쳐내시지요. 세리와 죄인이랑 같이 식사를 하시고 나서 그 당시 좀 폼 고 살고 있던 이들의 악플에 시달리셨던 일도 성경은 기록합니다.  

런 식으로 우리를 잡아당기고 있는, 보이지 않는 힘들은 참 많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께서 그 힘을 거스르고 계신 장면들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과정은 중력처럼 잡아당기는 힘을 거스르는 작업이었습니다. 마태는 9장에서 자신을 부르시던 장면을 회상합니다. 그 때 세리인 마태는 세관에 앉아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맡은 역할을 하고 있는 이에게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너라”고 하셨고 마태는 벌떡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극히 단순하게 표현되어 있는 이 장면은 사실은 상상을 초월하는 장면이지 싶습니다. 가난이 팽배하고 아무도 정당하게 부자가 되지 못하던 사회에서, 마태는 돈 벌 기회를 찾은 상태였고, 남들의 시선을 버텨내기만 하면 로마 제국의 공무원으로서의 지위를 가지고 쏠쏠하게 돈을 벌고 있던 그가 어떻게 어렵게 얻은 안정된 직장을 때려치고 “나를 따라오너라”라는 말씀 한 마디에 벌떡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는지 통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카리스마에 의한 것이었는지, 긴 설득에 의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자신의 삶에 회의를 느낀 마태에게 돌파구가 주어진 것이었는지 모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자신들의 삶을 얽어 매고 있던 여러 잡아당기는 힘들을 과감하게 거슬러야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거스르는 중력이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느껴졌을지를 생각해 볼 때, 가장 극명하게 이를 보여 주는 것이 가족들의 반응이 아니었을까요? 아무리 나이가 먹고,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아무리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더라고, 가족들이 “넌 왜 그런다냐?” 하고 한 마디 하면 어딘가가 가슴 아프게 아리지요. 나의 가장 가까운 이들이 나를 바라보는 눈. 그 강한 중력, 그렇게 강하게 당기는 힘을 예수님은 어떻게 대하셨을까요? 예수의 가족들이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서, 그를 붙잡으러 나선 것 같습니다.  12장에 보면 예수를 찾아 나선 가족들이 드디어 그를 찾아냅니다.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바깥에서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자매들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당기는 모든 중력을 거슬러 향해 가고 계신 곳은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이지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풍습을 만들어 냅니다만 정작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은 그 풍습들을 거스르는 행위가 될 때도 있었지요. 왜 예수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밀밭을 지나가며 밀 이삭을 잘랐는가? 왜 예수라는 자는 안식일에 병든 자들을 고치는가? 왜 예수의 제자들은 빵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는가? 예수님을 향해 쏟아졌던 이런 질문들은 모두 당연히 이렇게 해야 한다는 사람들의 법이 하나님의 법으로 둔갑하여 우리의 판단들을 잡아당기고 있었기에 나오는 질문들이었지요. 그럴 때 마다 예수님의 눈은 하나님의 마음에 집중합니다. 사람을 사랑하셨던, 사람을 보호하셨던 하나님의 의도에 근거를 두고 행동하시는 예수님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사방으로 잡아당기는 힘들을 거스리지 못한 장면도 마태복음은 담고 있습니다. 15장에는 이렇게 하나님의 의도에 초점을 두고 사시던 예수님께서 정말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사람의 법을 따라 말씀하시는 순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로와 시돈 지역의 어느 집에서 식사를 하실 때 악한 귀신 들린 딸을 가진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께 딸을 고쳐 달라고 애원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그 당시 유대인들이 만들어 놓았던 사람의 법을 너무나도 유대인스럽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유대인인 자녀들을 먼저 살려야 하기에 이방인인 너는 개와 같다는 모욕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이 때 이 여인은 자신이 가지고 온 목표에 집중합니다. 사랑하는 딸을 위한 일념으로 이 여인은 이 모욕감에 자신을 불태우지 않고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를 얻어먹습니다.” 힘있는 자의 폭언을 듣고도 그를 구슬리는 이 여인의 지혜를 보통 대단하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 대단함이 희소성의 가치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기 앉아 계시는 어머님들, 자녀를 위해, 식구들을 위해 나를 깎는 모욕 들어가면서 힘있는 자를 설득하는 것, 우리 너무 흔하게 경험하는 것 아닙니까? 이 순간 보기 드문 희소성을 보여주신 것은 예수님이십니다. 당연히 무시할 수 있는 이방인, 당연히 무시할 수 있는 여인의 말을 들으면서 예수님은 그 안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하시고 그 발견을 통해 변하십니다. “그제서야”라고 기록한 말씀 속에서 저는 뒤통수를 한데 얻어 맞은 듯한 느낌을 받으신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마음에 집중했더라면 알아보았어야 하는 것을 이 여인의 말을 통해 깨달은 예수님은 사람의 법칙을 넘어 하나님의 법칙으로 돌아 서십니다. 이 사건 후 예수님 사역의 방향이 바뀝니다. 즉 예수님의 사역은 수난과 부활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그 성격이 변합니다. 사람의 법칙에서 소외되어 있던 이방인을 개라고 표현하셨던 예수님이 이 이후로는 소외된 자를 위해 수난을 받고 부활하셔서 온 세상에 나가서 이방인에게 즉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십니다. 한 순간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지 못하고 계셨던 주님이 이 여인을 통해 다시 하나님의 마음에 집중할 수 있게 되는 것, 자신이 개라고 불렀던 이의 자식을 향한 사랑 속에서 하나님의 법을 재발견하고 태도를 바꾸시는 예수님의 겸손한 모습 속에서 저는 대단함을 발견합니다.

 

사역의 방향을 신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을 준비시키십니다.

이렇게 너희를 끌어당기는 힘들은 조심해라. 바리새파와 헤롯의 누룩을 조심해라. 그들이 당연히 해야 한다고 하는 것들을 조심해라. 하나님의 뜻을 가장한 사람의 법들, 권위를 가장한 사람의 법들을 조심해라. 표징을 보여주지 않으면 당신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이라 할 수 있다는 거요? 라고 합리를 가장하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들을 조심하라. 그러시면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물으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의 대답에 또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대답하니 예수님이 참 기뻐하십니다. 그 앎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왔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자기를 이해하는 것 같아 보이는 제자들에게 수난과 부활을 예고해 주십니다. 그 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싹 잡아당기면서 항의합니다. 베드로의 항의는 아마 “저희를 두고 어떻게 감히 선생님께서 그런 계획을 세우실 수 있느냐는” 너무도 관계적이고 합리적인 항의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제자의 항의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에서 가장 강하게 뿌리치셔야 했던 중력의 힘이었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

 

대화가 있은 후 엿새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십니다.

 

인생의 반을 남의 나라에서 살다가 귀국하고 5년이 지났습니다. 그 동안 구입한 물건도 많고 사는 곳에 이것저것 시공할 일도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물건을 파시는 분들도 그렇고 무언가 시공을 해주시는 분들이 모두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요즘은 다들 이 걸 쓰세요.” 다들 쓰면 꼭 저도 그것을 써야 한다는 것처럼 말입니다. 반면 제가 원하는 것,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비판들이 많으십니다. 이건 너무 높은데, 이건 너무 색이 진한데, 이건 어떠네 하면서 말이지요. 대중이 하지 않는 것을 하면 모난 돌이 되어 계속 정을 맞는 것 같습니다. 어느 순간 마음이 약해져서 결국 그 분들이 권해주는 선택을 하고 나면 나 자신의 일부를 베어낸 양 그 선택이 계속 눈에 거슬립니다. 왜 남들과 비슷해지라고 그렇게 열심히들 권할까요? 한국에서 자란지라, 이런 부분은 제 세포 속 어디엔가 매우 낯익지만, 다른 나라에서 인생의 반이라는 기간을 살면서 대중의 일부로 끼어들지 못하고 늘 이방인 취급만 받던 저로서는 한편 매우 낯설기도 합니다.

 

사실 이렇게 남과 같아지고 싶은 욕구는 제게 너무도 애틋하고 강하게 와 닿는 욕구이기도 합니다. 이국에서 한국인 혹은 한국인 같이 생긴 사람만 만나도 다가가서 말 걸고 싶은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길가다 한국 사람인 것 같은 분을 만나면 난생 처음 본 분이라도 눈인사 비슷한 것이라도 하고 지나가며 나와 비슷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묘한 안도감을 얻곤 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하루는 서울역에 갔는데 기차가 하나 도착했는지 수많은 사람들이 저쪽 방향에서 제가 있는 쪽을 밀려 오더군요. 미국에서 돌아온지 얼마 안 되었던 그때, 저는 그만 반가움과 배반감에 푹 묻히고 말았습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이 다 한국인이기에 모두가 낯익은 사람들 같이 느껴져 저는 그들의 눈을 계속 쳐다보고 뭔가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들은 저를 안중에도 두지 않고 몰려와 제 옆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들과 나의 닮음에 압도되어 그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 마음 속으로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를 외쳤지만 그들은 그 마음을 눈꼽만치도 알아주지 않고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 후에 이런 황당한 생각을 하고 있는 저 자신을 우수꽝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른 유학생들이 그와 비슷한 경험들을 나눠 주더군요.

 

이렇게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향한 욕구는 자아가 형성되는데 필요한 중요한 발달 과정이기도 합니다. 자기 심리학을 창시한 Heinz Kohut이라는 심리학자는 우리가 나와 같은 이와 연결되기를 갈망하는 이 욕구를 쌍둥이 자기대상이라는 용어로 설 합니다. 내가 나다와 지는 데는 나의 모습을 나와 닮은 이의 눈 속에서 확인하고 나와 닮은 이를 나의 일부로 여기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은 사람들이 누구나 겪고 있는 것이지요. 서울역에서 저는 나와 닮았다고 생각했던 이들을 보며 그들을 나의 일부처럼 여겼는데 그들은 전혀 나와 자신들이 상관없다는 것을 제게 명하게 알려주고 지나가셨습니다. 미국에 살면서는 그저 얼굴빛과 언어가 같다는 것만으로도 충족되곤 하던 쌍동이 자기대상은 거의 모두가 비슷해 보이는 한국 사회에서는 다른 방법으로 찾아가야 하는 것 같습니다.

 

쌍둥이 자기대상은 어느 대학 커뮤너티에 뜬 우스개소리에 너무도 예리하게 잘 나와 있더랬습니다. 우리 조상님이 흰옷만 입었던 이유라는 제목으로 뜬 게시판에 다음의 그림들이 떠 있었습니다. (Slide 12-20) 그리고 결론은 “그때는 흰옷이 유행이라서”였습니다. (Slide 21)

 

이렇게 강력하게 우리사회에 작용하고 있는 쌍둥이 자기대상은 사람의 법칙이 되어 우리를 힘차게 잡아당깁니다. 제가 느끼기에는 우리 사회에서 이 법칙은 다른 곳들보다 상당히 강하게 작용하며 우리를 잡아당기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 법칙에 끌려 보면서 적잖게 애절한 아픔을 느낍니다. 왜 이렇게 절실하게 나의 모습을 다른 이들과 비슷한데서 찾아내려 하는 걸까요? 나를 찾아내는 것은 다각도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의 일부라고 여겨왔던 사람들을 우러러 보면서, 또 나의 일부라고 여겼던 사람들로부터 나를 구분해내면서, 그 두 과정의 긴장관계 속에서 우리는 성숙해 나가는 것인데 어찌하여 부수적인 욕구인 쌍동이 자기대상이 이렇게 큰 역할을 하게 되었을까요? 저는 여기서 가슴아리게 사랑이 부족한 사회에서 사랑을 찾아나가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봅니다.

 

미국에 살 때, 한국의 교육제도에 적응하지 못해 미국 학교를 경험하게 하기 위해 저희 동네에 온 4학년 남자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학교에 간 첫날 쉬는 시간에 운동장에서 놀다가 넘어졌다고 해요. 그랬더니, 아이들이 너나할 것 없이 자기 주변에 몰려 오길래, 이 아이들이 자기를 둘러싸고 넘어졌다고 놀릴 줄 알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기를 둘러싼 애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걱정스런 눈으로 “are you ok? are you ok? 를 반복하며 자신을 도우려고 하더라고, 그래서 너무 놀랐다고 이 아이가 제게 말해 주더군요. 그러나 오히려 제가 놀란 지점은 넘어졌으니 놀림을 받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던 그 아이의 경험이었습니다. 넘어진 것이 놀릴 일인가요? 아프니 위로해 주어야 할 일이 아닌가요? 그 아이가 속했던 집단의 아이들의 마음이 얼마나 여유가 없길래 넘어진 놈 보다 안 넘어진 놈이 더 났다고 상대를 한 번 무시해야만 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던 걸까요? 모든 이가 비슷해져 가는 사회에서 너와 나의 구분은 내가 너보다 좀 더 났다는, 내가 너를 밟았을 때 내가 너의 위에 있기에 내가 더 났다는 사람의 법칙이 우리를 잡아당깁니다. 그 법칙으로 우리 사회 안에 아픔이 가득한 듯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이라고 질책을 받았을 때, 베드로의 마음 속에 남보다 나은 예수님을 그려 보지 않았을까요? 남보다 나은 예수님이 왜 수난을 받아야 하냐고 말이지요. 변화산 상에 함께 있었던 요한과 야고보의 눈에 비친 예수님 또한 남보다 나은 예수님이셨죠. 엘리야보다 나은 예수님, 모세보다 나은 예수님. 모든 이보다 은 영광의 예수님. 급기야는 그들은 예수님께 요구합니다. “선생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 쪽에 하나는 선생님의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 이들은 인간의 법칙 속에서 더 나은 사람이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갈 거라는 생각합니다. 같은 착각을 하고 있는 동료들은 그들이 하는 소리를 듣고 분개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로는 이런 말씀을 듣습니다. “너희가 아는 대로, 이방 사람들을 다스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백성들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백성들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10:35-45) 사람의 법칙을 넘어서 하나님의 법칙을 보라는 말씀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법칙에 따라 섬기고 세도부리는 권세에 맞서는 변화를 위해 도전한다는 것은 힘들다 못해 좌절스럽습니다. 강원도 지역은 서울의 에너지난을 해결하기 위해 한국전력공사가 여러 사업을 벌이고 있는 곳입니다. 그들이 제시한 핵발전소와 양수발전소 건설은 자신들도 알고 있는 돌이킬 수 없는 문제점과 불합리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게다가 한국전력공사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연구해 낸 훨씬 합리적이고 친환경적인 대책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자본을 투자한 자들이 논리를 고수하기 위해 진행을 추진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홍천에서 양수발전소 건설 반대 운동을 2013년부터 진행해 오신 박성율 목사님과 대화를 하며, 저는 그분이 이 싸움의 과정 속에서 교회를 잃고, 건강을 잃어가면서도 계속 투쟁하시는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이 문제는 들여다 보면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에너지 안보문제가 얼기설기 엮여 있어서 홍천 구청 앞에서 금요일마다 하고 계신 농성은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며칠 전 드디어 피경원 장로님께서 저를 향린 텔레그램방에 넣어 주셔서 일주일간 향린교인들이 올리신 여러 투쟁의 현장의 모습을 보면서 여러 계란이 여러 바위를 향해 날라 다니고 있구나 싶었습니다.

 

윤리학자 Harvey Cox는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을 받는 사건을 예수님이 자신의 리더십의 비전을 정립하고 있는 과정으로 봅니다. 악마에게 절을 하라는 세번째 시험에 대한 콕스의 해석은 가슴을 후려팝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 같은 변화를 향한 노력 속에, 사실 결과는 정해진 것 아니냐는, 내가 아무리 몸부림을 쳐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포기하고 싶은 마음의 시험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심으로 앞으로 나아가길 포기할 때 악마에게 전권을 내어 준다는 해석입니다. 투쟁에 지치고, 돌파구가 보이지 않을 때, 나만이 아니라 수많은 다른 이들이 같은 마음을 가지고 노력해왔는데도, 아니면 나보다 훨씬 실력있는 이들도 이 일을 해봤는데도 달라지는 것이 없어 보일 때, 그래서 선한 길을 포기하고 돌아서고 싶을 때, 리더십을 사탄에게 내어주는 유혹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 유혹을 예수님은 이렇게 뿌리치십니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Slide 22) 홍천에서 환경운동을 하고 있는 분들은 그러더라고요, 끊임없이 정책을 만드는 이들을 설득하는 작업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같이 마음을 모으는 주민들의 공동체를 계속 유지해서 그들의 목소리를 살려내는 것이 목표라고. 그리고 그 목소리는 매주 금요일 4시반에 하는 집회를 지난 주 541차를 찍으며 지난 9년간 매주 홍천 군청 앞에서 울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리더십은 아닌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이들이 여전히 쥐고 이습니다. (Slide 23)

 

변화가 어려운 것은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이 구조의 문제를 아주 가까운 곳으로 가져와서 생각해 볼까요? 저와 비슷한 상황 경험해 보셨습니까? 대학을 졸업해도, 유학을 해도, 박사 학위를 받아도, 목사가 되어도, 교수가 되어도 친정집에 돌아가면 곧 다시 친정집을 떠나기 전 고등학생때의 제 모습으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나를 대하는 모든 이들이 나를 그 당시의 모습으로 대하기에 집 밖에서의 나의 성숙과 변화와 상관없이 그 때 그 모습으로 쏙 빨려 들어 갑니다. 점잖고 싶은데 어느 순간 사춘기때처럼 짜증내고, 다 버렸다고 생각했던 습관이 갑자기 튀어나옵니다. 공동체가 우리를 빨아들이는 힘, 즉 잡아당기는 힘은 사실 매우 강력한 힘입니다. 이를 가족체계이론이라는 심리학이 설명합니다. 사람들의 법칙으로 형성된 공동체는 건강하던 건강하지 않던 그 나름의 균형을 이루어, 그 균형이 깨질 만한 일이 일어나면 공동체 전체가 불안해집니다. 내가 좋은 성장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식구들은 반기겠지만, 그 변화를 받아들이고 함께 변화해야 하는 공동체는 극히 불안해집니다. 왜냐하면 그 동안 저 없이 살아가며 형성해 놓은 그 나름의 리듬과 균형이 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공동체의 감정체계는 변화를 저항하는 역학을 형성하고 변화한 사람을 다시 원위치로 돌려 놓을 만한 상황을 계속 조장하게 되지요. 1960년대 후반 가족관계를 치유하는 사람들이 이 현상을 발견한 후 상담심리학의 지평이 흔들렸습니다. 더 이상 병리를 한 사람 안에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거든요. 한 사람이 변하지 못하는 것은 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가 당기는 중력 때문이니까요. 이러한 심리적 현상이 사람의 법칙에 내재하고 있으니 우리가 변화를 위해 거슬러야 하는 중력은 참 거스르기 어렵기만 합니다. 변화라는 것이 이런 잡아당김을 거슬러야 변화다와지니 변화란 큰 도전이기 마련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공동체의 잡아당김을 발견한 이들은 이 잡아당김에서 벗어나는 이들도 발견하여 그들의 비법을 캐어 볼 수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이 공동체의 중력을 거스릴 수 있었을까요? 성격이 강한 사람들이었을까요? 자신감이 충만한 사람들? 반항적인 사람들이었을까요? 그들의 공통점을 모아 이 현상을 발견한 심리학자들은 그들이 자신을 공동체로부터 구분해 낼 수 있는 이들이었다고 합니다. 영어로는 이 성질을 Self-differentiation이라고 합니다. 자신을 구분해 낸다고 하는 것은 공동체로부터 나를 잘라낸다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한 발을 딛고, 즉,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공동체와 거리를 둘 줄 아는 것입니다. 그 거리를 두고 나면 공동체가 왜 그렇게 돌아가고 있는지 어떤 변화로 인해 어떤 불안함이 생겼는지, 그로 인해 각 구성원이 어떻게 행동을 하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어, 자신이 해온 역할을 성찰하고 자신이 새롭게 할 수 있는 역할을 찾아내서 자신을 중력처럼 끌어들이는 공동체의 역학으로부터 구분해 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자신을 구분해 내는 힘을 어디서 얻으셨을까요? 예수님은 중력을 거스르는 힘을 어디서 얻으셨을까?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강하게 저지하셨던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그토록 강하게 반응을 하셨던 것은 그 동안 거슬러 오신 사람의 법칙들 중에 베드로의 잡아당김에 예수님께서 가장 강하게 동요되셨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가장 믿고 신뢰하는 제자의 잡아당김은 예수님께서도 신뢰하고 따라가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 당김을 뿌리치는 것은 “사탄”이라는 말의 강한 억양에서 들리듯 예수님께도 아픈 뿌리침이 아니었을까요? 그만큼 사랑하는 이의 애원과 설득은 예수님께도 힘든 것이지 않았을까요? 이제 예수님은 그 베드로를 데리고 와 그가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변화와 엘리야와 모세와 함께 대화하시는 모습을 목격하게 합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베드로와 제자들과 함께 듣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셨을 때 하늘로부터 들려왔던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소리를 닮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의 설득으로 흔들렸던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목적의식을 회복하셔야 했고, 세상의 수많은 잡아당김을 거스르기 위해서는 확실하게 자기구분을 해내셔야 했습니다. 바로 그러했던 순간 엘리야와 모세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재정리하고 제자들을 바라 볼 때 들려온 하나님의 목소리는 예수님의 자기 구분을 확실하게 교통정리 해주십니다. 예수님을 잡아당기는 사람들의 눈 속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눈동자 속에서, 하나님의 목소리 속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인합니다. 자신이 앞으로 해야 할 하나님의 일, 바로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예고했다가 베드로의 면박을 맞았던 수난과 부활의 일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사랑의 일임을 확인합니다. 내가 누구인지가 확실해 지신 예수님은 중력을 거슬러 하늘에 오를 수 있는 분이 되십니다.

 

사랑하는 향린교우 여러분, 어떤 변화를 꿈꾸십니까? 사람의 사랑을 갈망하는 사회가 우리를 갈팡질팡 당길 때, 하나님의 법칙을 담은, 하나님의 사랑을 담은 변화를 꿈꾸십시오. 그런 변화는 어렵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으십시오. “너는 내 사랑하는 딸이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목소리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시고 나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중력을 거슬러 rev.ppt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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