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ㅣ 김지목 ㅣ 2023-03-19

by 김지목 posted Mar 19, 2023 Views 182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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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9 향린주일예배 사순절4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삼상16:1-13  시23:1-6  엡5:8-14  요9:1-41

 

요한복음서와 요한1,2,3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제2성서에서 요한문서로 분류됩니다. 요한의 문서들은 제2성서 중에서도 비교적 뒤늦게 편집되고 완성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활동당시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직접 경험하며 그를 존경하고 뒤따랐을 것입니다. 부활승천하신 이후에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기억하면서 그의 행적과 말씀을 구전으로 전승하고 예수 이야기의 단편들 즉 조각문서들을 회람하며 그리스도교의 태동을 준비했을 것입니다. 이 문서들 중에 우리에게 전해지지는 않았지만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를 연구하면서, 우리가 보고 있는 복음서들에게 결정적인 영향력을 끼친 “Q자료”라고 하는 문서가 있었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확신하고 있습니다. 

 

구전전승과 “Q”자료를 바탕으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교의 기둥을 세워가기 시작했습니다. 제2성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바울 서신들은 예수 이야기들을 종교적 사상으로 승화시킨 증거들입니다. 최초로 남겨진 바울서신은 갈라디아서인데 이것이 주후 60년경 편집된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활동, 그리고 구전전승과 조각문서, 그리고 Q자료, 그리고 주후 1세기 후반기에 바울서신을 필두로 하여 마가복음서, 누가복음서, 마태복음서가 집필되었습니다. 공관복음서를 집대성한 각 공동체들은 자기네 상황적 배경에서 Q자료의 예수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각자의 상이한 ‘삶의 자리(Sitzen im Leben)’의 차이로 인해 공관복음서 세 권은 조금씩 강조하는 바가 다르게,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가장 늦게 주후 100년경 편집된 요한복음서는 앞선 마태,마가,누가 세 복음서와 사뭇 다른 기조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래서 마태,마가,누가의 복음서는 예수의 일대기 흐름이라는 공통된 관점에서 편집되었다고 하여 그 세권을 “공관복음서”라 일컫고, 요한의 복음서는 공관복음서들과 다르게 구성하여 집필하였기에 “제4복음서”라고 칭하여 구분하고 있습니다.  

모든 성서가 각자 살아가는 시대적 배경에서 치열하게 신앙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승천 직후 원시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삶을 생생하게 기억하면서 역동적으로 출현한 시기였습니다. 부활승천한 예수님이 금방이라도 재림할 것같은 믿음으로 그리스도교의 지반을 확보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되자 공동체는 스스로 질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들이 엮여져서 그리스도교의 사상적 기틀이 마련되었습니다. 1세기 후반부에 해당하는 이때는, 그리스도교 기반이 균열되지 않도록 다독여야 했고, 이방지역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면서 확장시켜 나갔습니다. 모든 과정들이 새로운 상황의 도전에 응전하면서 종교와 사상으로서 그리스도교의 체계를 이룬 과정이었습니다. 명실 공히 유대교 사상에 깊이 의존했던 원시그리스도교의 거죽을 벗고 독자적인 사상의 체계를 이루면서 고등그리스도교로 진입하게 됩니다. 

 

2세기를 맞이하면서 그리스도교는 다시한번 도약해야 했습니다. 그 주체는 이후에 요한공동체로 결합한 소수의 급진적인 신진세력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주무대가 이방지역이었다면 이들의 무대는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이방지역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 헬레니즘 사상을 운명적으로 접하고 응전했던 반면, 이 신진세력은 그리스의 철학과 사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예루살렘에 적용하기를 시도한 경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철학과 사상으로 빛나는 상아탑을 높이 세우던 그리스 헬레니즘 철학을, 유대교적 전통의 헤부라이즘 사상으로 재해석하고 그 결과로써 그리스도교의 사상적 도약을 도모한 이들이었습니다. 

 

그 신진세력은 사도 바울과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의 유대교와 유대사상 기반의 그리스도교 주류세력으로부터 탄압을 받았습니다. 급진적인 이들의 사상은 그리스도교 주류 질서를 흔드는 것이었기에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습니다. 이들은 이내 회당에서 축출당하고, 예루살렘과 성전 위치 문제로 갈등하던 지역, 사마리아로 거점을 옮겨서 정비하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진격하는 사상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신진세력들이 이러한 사투과정에서 협력적으로 만난 공동체가 바로 요한공동체였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원시성에 머물러있던 요한공동체는 신진세력의 사상으로 다시 살아나 고등 그리스도교의 주체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또 말씀으로 육화하셔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로 나타나셨다는 이른바 그리스도 선재설은 앞선 공관복음서에서 찾아볼 수 없는 요한의 특수한 사상입니다. 선재사상을 강화하기 위해 요한은 보혜사 개념으로써 공관복음서들보다 성령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 또다른 특징입니다. 이것들은 헬레니즘의 형이상학적 사상과 영지주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또한 요한의 문서에는 예루살렘 성전중심화를 저격하는 일화들이 곧잘 등장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입을 빌어 “선생님, 내가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이십니다. 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라고 언급한 그 대화가 반성전주의의 단초가 됩니다. 

 

성서 연구 초기에 요한복음서는 영지주의 사상이 짙은 반유대교적 문서로 오해했습니다. 그러나 계속된 요한문서 연구에서는 요한의 헤브라이즘적 해석력이 점점 빛나게 되었습니다. 유대적 전통을 기반으로 그리스 사상을 해석하여 새로운 고등사상을 지향했음이 밝혀진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강조하여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형이상학적 철학을 재해석하여 사상을 세련되게 하면서 동시에 유대사상의 예언신앙으로 변혁을 도모하는 성서가 제2성서의 요한문서 입니다. 이것은 요한1,2,3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도 확연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요한복음서의 본문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시각장애인을 고쳐주신 일로 유대 바리새인과 논쟁을 벌이는, 예수 일화의 한 에피소드 입니다. 태어나면서 시각장애를 가진 사람이 어느날 예수님을 만납니다. 제자가 시각장애인을 빗대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하고 묻자 예수님은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라고 답하시고는, 침으로 진흙을 개고 눈에 발라주시며 실로암 연못의 물로 씻으라고 하고 그 자리를 떠납니다. 시각장애인이 그대로 하니 눈이 떠졌습니다. 

 

이 일로 동네가 한바탕 소동이 일었습니다. 시각장애인이 고침을 받았는데 고쳐준 그 이가 누구냐? 한 것이 첫번째 소동이라면, 두번째는 이 사실을 바리새인들이 알게되고나서 일어납니다. 눈을 뜨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을 일으킨 사람이 누구인지, 그가 왜 안식일 규정을 어겼는지 심문하기 시작합니다. 눈뜬이를 불러다가 심문하고, 눈뜬이의 부모를 불러다가 사실을 확인합니다. 바리새인은 두번의 심문에서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사실확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일으킨 예수에게 자신들의 권력을 지켜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다시한번 눈뜬이를 불러서 정해놓은 답을 들고자 했으나 그들은 실패합니다. 눈뜬이가 그를 예언자라고 증언했음에도 그 말을 곧이 듣지 않고 꼼수를 부리고 있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입니다. 

 

눈뜬이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낸 이를 왜 의심하느냐고 항변하자 바리새인은 화를 내고 그를 회당에서 쫓아냅니다. 자신들은 하나님을 만난 모세의 제자인데, 눈을 뜨게 고쳐준 예수는 하나님의 사람도 아닌 그저 ‘사람의 아들’일뿐이라는 명분으로 화를 내고 내쫓은 것입니다. 

 

눈뜬이가 쫓겨났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께서 그에게 나타나서 눈뜬이에게 “그들이 말하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고 묻습니다. 눈뜬이가 그를 알고 있다면 말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예수께서 그 사람이 자신임을 밝히자, 눈뜬이는 절하면서 믿음을 표했습니다. 그에게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나는 심판하러 왔다. 보는 이는 못보게 하고, 보지 못하는 이를 보게 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것을 지켜보던 바리새인이 “우리가 보지 못하는 사람이오?”라고 항변하자, 예수의 마지막 멘트, “보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되려 죄가 없을 것인데, 너희가 보는 사람이라고 말하니 너희에게 죄가 그대로 있다”며 에피소드는 막을 내립니다. 

 

요한공동체는 이와같은 예수전승설화의 모티브 안에 그들의 급진적이고도 진보적인 신학을 역설합니다. 시각장애인을 눈뜨게 해주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세상의 빛, 곧 하나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분이라는 사실, 믿음을 가진 이에게 그 빛을 보여 구원을 얻게 하시고, 바리새인처럼 구조권력에 천착하여 애써 눈뜨기를 거부하는 이들에게 죄가 있음을 설파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유대교와 유대 그리스도교의 지배권력을 지칭합니다. 권력유지를 위해 구질서에 천착하며 진일보하는 역사의 흐름을 보지 못하는 그들을, 눈뜬이를 통해 비판합니다.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지배권력을 향한 요한공동체의 경고입니다. 

 

그들은 모세 율법의 사상을 선점하고 그것이 모든 삶의 문제를 해결한다고, 자신의 해석을 과신하면서 권력을 취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얼마나 오만한 발상입니까? 하나님이 하실 일에 대해서도 모든 견적을 다 보았다는, 자신의 위치를 신의 자리까지 올리는 교만입니다. “태어나자마자 죽음을 맞이한 아이의 죄가 무엇이냐?”는 질문에도 그들은 뻔뻔하게 “임신한 여인이 이교의 성전에서 예배드릴 때 태아 역시 우상숭배에 동참한 것”(아가 대 미드라쉬 1:14)이라며 태아의 죄까지도 규정하는 해석을 내렸습니다. 

 

바리새인의 그같은 오만함을, 오늘날 자연적 재난과 사회적 참사를 당한 피해자와 유족을 향하여 신정론을 운운하면서 “하나님의 심판” “귀신축제 심판” “하나님이 정하신 일이었으니 이젠 잊으라”는 망언의 2차가해가 일부 개신교에서 발견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 몰상식한 오만함으로 ‘다 본다’고 떠들어댈수록 “너희가 보는 사람이라고 말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다”고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요한공동체는 오늘 본문의 전승설화로 구질서 지배체제에 대하여 실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안식일 규정을 어기는 설정으로 유대교 율법주의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행위를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 너희의 그 잘난 해석력으로 해명해보라! 결국 권력유지에만 급급할 뿐, 자기모순에 빠진 종교적 체제가 구원을 말할 수 없다는 일침입니다. 

 

요한은 사랑을 잉태하는 종교를 재구성하고자 했습니다. 성전이니, 율법이니, 안식일이니 하는 규범에 얽매여 세속권력에 이용당하는 종교가 아니라,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선사된 은총에 감격하며 시각장애인과 같은 민중들의 생명을 회복시키는 종교를 꿈꾸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신진사상을 적극 도입하고 구질서의 세력을 혁파하는 급진적인 신학체계를 구성하여 투쟁하였습니다. 

 

시각장애인을 죄인으로 전제하는 무자비한 율법은 민중들에게 너무나도 가혹했습니다. 시각장애인의 부모는 권력자들에게 회당에서 내쫓김 당할 것이 두려워서 아들을 버렸습니다. 바리새인이 부모를 불러 심문할 때 부모는 아들을 온전히 변호해주지 못하고 “그 아이는 다 큰 사람이니 그에게 물어보라”는 대답을 할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무자비함으로 권력을 유지하는 종교체제는 더이상 구원을 운운할 힘을 잃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예수의 사랑이야말로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하나님의 모습을 밝게 비춰준 “세상의 빛”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생명의 물’과 ‘생명의 양식’을 얻은 민중사건에서 종교의 바른자리를 매겼습니다. 이것이 고등종교로 도약한 요한의 그리스도교 사상입니다. 

 

오늘의 에베소서 본문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빛의 자녀로 살면서 빛의 열매를 맺는 삶을 권고합니다. ‘빛’의 의미는 요한의 것과 상통합니다. 공동체를 비추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를 따라 빛의 자녀가 맺을 열매는 “선과 의와 신실함”인데, 이것은 미가서 6장 8절 말씀 그대로 입니다.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오늘날 민중에게 ‘생명의 물’과 ‘생명의 양식’을 제공할 사랑의 과제는 무엇일까? 이같은 고민은 요한공동체의 고등 그리스도교를 계승하는 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선교가 “선과 의와 신실함”을 맺는 빛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시 요한의 에피소드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바리새인의 눈밖에 나서 내쫓김을 당한 눈뜬이의 신세는 당시 회당에서 축출당했던 요한공동체를 잘 묘사해 줍니다. 눈을 뜨게 된 것은 이제 빛을 감지할 수 있게 된, 계시의 담지자가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을 드러내는 빛이 되신 것처럼, 눈뜬이도 이제 세상에 하나님을 드러내는 빛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요한공동체는 지배질서의 거절, 회당축출을 당했던 것입니다. 

 

눈뜬이에게는 이제 더이상 바리새인의 속임수나 겁박이 무용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신 진리의 화신만을 추종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아직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찾아오셔서 마치 남얘기 하듯이 말을 건넵니다. “자기네가 모세의 제자들이라고 하는 바리새인이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는 이를 믿느냐?” 눈뜬이는, 그를 알고 있다면 자기에게 알려달라고 간청합니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지금 너와 대화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다.”

 

여기에 요한신학의 특별한 의미가 담겨있어서 오늘의 요절로 삼았습니다. 이른바 ‘현재적 종말론’ 입니다. 유대사상의 종말론의 기본적으로 미래적입니다. 예언자 심판예언과 환상을 묘사한 유대 묵시문학이 미래지향적이지는 아닐지라도 그 배경이 미래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미래시제 기법은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해낼 수 있는 힘을 발양하기 위함입니다. 절망이 곧 보상되고 현실이 이내 회복되리라는 희망을 전해주기 위해 미래시제를 주요하게 사용한 듯 합니다만, 실현이 지연되는 희망은 희망고문처럼 무용지물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도 유대인은 끝까지 메시야를 기다리며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메시야가 재림하는 날이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질 종말의 때이기 때문입니다. 

 

눈뜬이에게 있어서도 자신의 눈을 뜨게한 예수님은 예언자 중의 예언자 곧 메시야 였습니다. 그런 메시야는 하늘에서 구름타고 내려오시는, 즉 미래적이고 환상적인 분으로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눈앞의 함께 시대를 살아가는 분으로 나타나셨으니, 예수님을 만난 사건은 눈뜬이에게 매우 특별한 의미가 되었을 것입니다. 

 

메시야를 만난 순간은 나의 삶에 있어서 종말의 순간입니다. 더이상 미래의 일이 아니라 오늘 내가 경험한 현재의 사건인 까닭에 ‘현재적 종말론’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 만난 메시야와 함께 사역하면서 미래에 이루어질 완전한 종말을 위하여, 오늘의 삶을 구체적으로 결단한다는 점에서 ‘현재적 종말론’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는 말에서 요한공동체가 지향하던 급진적인 사상이 얼마나 확고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들이 추구한 사상은 ‘현재적 종말’을 경험한 결과라는, 매우 확신에 찬 것이었습니다. 종말을 미래시제에 묶어두려는 습성은 지배자들의 고질적인 수법입니다. ‘지금 여기’로 침노하지 않는 미래는 망상에 불과한 예언일 뿐입니다. 나의 삶의 자리에서 메시야를 만나는 현재적 종말을 꾸준히 경험할 때 우리의 신앙의 힘은 크게 발휘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사순절의 중반을 지나고 있습니다. 현재적 종말이 우리들 각자에게 어떻게 임하게 될른지는 정해진 공식이 따로 없겠습니다만, 가만히 나의 영성을 돌보는 시간을 갖는 것은 나의 현재적 종말을 경험하는 퍽 유효한 신앙훈련입니다. 사순절 매일묵상으로 온라인을 통해 공유하고 있는 “평화와 생명, 두 개의 발자국”을 통해, 생각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길로 삶의 발자국을 옮기는 노력들이 여러분의 현재적 종말에 일조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눈뜬이가 세상의 빛이신 예수를 만나 현재적 종말을 경험한 것처럼, 우리 안에 신앙의 빛을 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사순절에 ‘빛’을 묵상하다가 문득 문익환 목사님의 시 한편이 떠올랐습니다. “부활절 아침에”라는 시입니다.  

……

부활절 아침에 (문익환)

 

빛은 

무덤에서 

새어 나온다

사랑을 잃은 막달라 마리아의

휑뎅그런 가슴 같은

무덤

빛을 기리는 마음뿐이다가

쏟아진 별빛들이 

오순도순

새 아침을 마련하는 

 

빛은 그런 무덤에서

새어 나온다

생명은

무덤에

돋아난다

 

평화시장에서 시들어 가는

아까운 꽃송이들을

사랑하다가 사랑하다가

한줌 재가 된

아-

전태일의 꽃 같은 마음에

풀씨들은 울먹이며

더듬더듬

새봄을 마련하는

 

생명은 

그런 무덤에서 

돋아난다

……

 

전태일 동지를 비롯해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으로 시대를 속량하던 때에 이 시가 나왔습니다. 아픔과 분노가 가득했겠지만 깊은 신앙의 성찰로 역사의 부활을 잘 묘사한 시라고 생각합니다. 문익환 목사님을 추모하는 음반이 나왔을 때 이 시로 만들어진 노래가 있어서 이 시를 잘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빛을 내기 위해서 무덤을 경험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바리새인과 같이 “나는 보는 사람이다” 하지말고, 나의 어두운 곳으로 침잠하여 그곳에서 말씀을 묵상하고 빛을 찾아보는 영성의 시간을, 이 사순절에 경험해 보셨으면 합니다. 16주간 계획되어 있는 수요성서묵상 모임도 참고가 되길 바랍니다.  

 

야훼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강조하신 “중심”은 어떻게 형성이 될까요? 자신의 무덤 속에서 빛을 찾고, 세속적인 지배권력과 맞서 싸우며, 빛의 열매를 맺는 사람이 아닐까요?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시는 사순절 묵상의 계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잠시 침묵합시다. 


 

………

 

 

(파송사)

 

“나는 사람이 판단하는 것처럼 그렇게 판단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겉모습만을 따라 판단하지만, 나 주는 중심을 본다."

 

“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이었으나, 지금은 주님 안에서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사십시오.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와 진실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십시오. 여러분은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끼여들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폭로하십시오.”

 

축복의 기도를 함께 나눕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 주시는 친교가 우리 가운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고후1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