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뼈의 환상 (겔 37:1~14, 롬 8:6~11, 요 11:1~45)
2023.03.26. 사순절 다섯째 주일
[죽음의 골짜기에서 본 사건 / 에스겔서 37장 1~14절]
오늘 에스겔서 본문은 강렬한 장면을 하나 보여줍니다. 그것은 죽음의 골짜기에서 생명이 부활하는 과정에 관한 성서의 대표 이미지입니다. 겨우내 죽은 듯한 메마른 대지에 봄의 새싹이 뚫고 솟아나듯이, 희망을 잃은 세계가 어떻게 다시 일어서는지 예언자의 환상을 통해 보여줍니다.
에스겔은 어두운 포로기를 살아간 사람입니다. 자신도 삶이 파괴된 경험을 겪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제사장으로서 촉망받는 젊은이였지만,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내를 잃고, 패망한 나라의 포로가 되어 바빌론으로 끌려갔습니다. 타국에서 고통스러운 생활을 하던 중에 예언자로 부름을 받고 이십여 년간 활동하게 됩니다. 비범한 능력을 갖추었지만, 희망을 잃은 세대에 하늘의 소리를 전하는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몸부림쳐야 했습니다.
현실과 이상 사이의 메울 수 없는 간격 속에서 에스겔은 괴로워합니다. 번민의 시간을 보내면서 옆으로 누워 수백 일을 지내기도 하고(4:4~6), 소똥으로 불을 피워서 만든 포로민의 음식을 먹고(4:9~17, 12:17~20), 자신의 머리털과 수염을 깎아서 일부는 태우고, 일부는 칼로 자르고, 일부는 바람에 날리면서 포로의 고통을 표현합니다(5:1~4). 이런 기이한 행동은 민족의 아픔을 대변하고, 그 안에서 자신이 함께 당한 삶의 괴로움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포로 생활을 5년쯤 하던 어느 날, 에스겔은 장엄한 환상을 보게 됩니다. 그 환상은 죽음의 세계가 걷히는 과정에 관한 것이요, 잃었던 믿음이 다시 솟아나는 방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 환상의 시작은 자기 현실을 직시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의 영이 나를 데리고 나가서 골짜기 한가운데 내려놓으셨다. 그곳에는 뼈들이 가득히 있었다.”
그 골짜기는 낯선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에스겔이 지난 5년간 이미 봐왔던 암담한 현실이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절망했고, 파괴당했고, 괴로워하며 누구보다 현실을 처참하게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그 현실 경험이 자신이 봐야 할 진실 자체는 아니었습니다. 현실은 진실을 담고 있지 못하며, 진실은 깨어난 정신에 비쳐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의 영이 나를 데리고 가셨다.’ 그러자 절망의 시기에는 듣지 못한 하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사람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거대한 제국의 벽 앞에서 마른 뼈들이 살아날 가능성이 없다고 여기며 몸부림친 에스겔이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사람아, 이 죽음의 세계가 다시 일어설 수 있겠느냐?’ 이 물음은 죽음의 골짜기에서 깊디깊은 절망의 몸부림을 친 경험을 한 사람이 마지막 문턱에서 들을 수 있는 하늘의 음성입니다.
그 물음은 특별한 부름으로 시작됩니다. “사람아.” 이 표현은 히브리어로 ‘벤 아담’(בֶּן־ אָדָם֙)입니다. 벤(ben)은 ‘~의 아들’이라는 뜻이고, ‘아담’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아들’ 또는 ‘인자’라고 하는 것이 맞을 텐데, 한글성서 번역자는 간략히 ‘사람아’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벤 아담’이라는 표현은 에스겔의 인생관이 압축된 표현으로서 책 전체에 걸쳐 93번이나 사용됩니다. 예수님도 부활절 이전에 자신을 가리켜 말할 때에는 ‘인자’ 즉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주로 사용했습니다.
신학자들은 이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보고 여러 의견을 제시하는데, 저는 월터 윙크의 의견을 따라 에스겔의 ‘벤 아담’을 “참사람”으로 번역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성서의 인간관이 가진 역동성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장을 보면,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짓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명체가 되게 하셨다.’라고 하는데, 이때 ‘흙’은 히브리어로 ‘아다마’요, 이 ‘아다마’에서 나온 게 ‘아담’ 즉 사람입니다. 따라서, 에스겔을 향한 목소리 ‘사람아’라는 부름에는, 인간 자체로 보면 흙과 같은 보잘것없는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부름을 듣고 일어서는 생명의 가능성을 담고 있다 하겠습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에게 질문을 받았습니다. “사람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그는 겸손히 대답합니다. “주 하나님, 당신이 아십니다.” 에스겔의 이 대답은 우리에게 한 가지 가르침을 줍니다. 위기가 닥칠 때, 사람들은 자신의 지혜를 다해 대처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거기에 정작 중요한 근본적인 집중이 빠진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기보다는 사람의 지혜를 찾아 방황하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에게 집중합니다. “주 하나님, 당신이 아십니다.” 그러자 주님은 그가 해야 할 일을 일러주십니다. “이 뼈들에게 전하여라. 내가 너희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다시 살아나게 하겠다. 내가 너희에게 힘줄이 뻗치게 하고, 살을 입히고, 살갗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다시 살아나게 하겠다. 그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내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이다.”
마른 뼈가 되살아나는데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에스겔이 반복해서 말하고 있는 ‘생기(生氣)’, 히브리어로 ‘루아흐’(רוּחַ)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태초에 인간을 흙에서 빚어낼 때 불어넣은 하늘의 숨결입니다. 하나님의 ‘루아흐’가 죽음의 골짜기를 어루만질 때 마른 뼈들이 되살아나기 시작합니다. 서로 이어지는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힘줄이 뻗고, 살이 차오르며, 살갗이 덮이는 신기한 장면이 펼쳐집니다. 죽어버린 이들이 다시 살아있는 주체로 일어서는 장면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생명의 부활이 간단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힘줄과 살이 채워진 몸을 가졌다 해서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8절을 보면, 아직 ‘그들 속에 생기가 없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에스겔은 생기(生氣)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너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불어와서 이 살해당한 사람들에게 불어서 그들이 살아나게 하여라.” 그랬더니, 생기가 그들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은 엄청난 군대로 일어납니다.
본문은 여기서 ‘골짜기의 마른 뼈’가 무엇이었는지를 밝힙니다. 그들은 살해당한 사람들입니다. 바빌론 제국의 폭력에 희생당한 사람들입니다. 이미 죽어버린 사람들만이 아니라, 살아있어도 죽은 사람들, 그래서 11절 말씀처럼 “우리의 뼈가 말랐고, 우리의 희망도 사라졌으니, 우리는 망했다”라고 탄식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죽임의 문화 속에서 희망을 잃은 이들 속에 하나님의 숨결이 담기자, 그들은 자기 발로 일어나 우뚝 선 엄청난 군대가 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행진하는 생명의 전사로 거듭난 것입니다.
에스겔은 이들에게 두 가지 약속을 전합니다. 내가 무덤을 열고 무덤 속에서 너희를 끌어내겠다(12절). 내가 내 영(ruah)을 너희 속에 두어서 너희가 살 수 있게 하겠다(14절). 종교적 믿음은 ‘약속’ 위에 서 있을 때 강건합니다. 그 약속이 삶을 지켜줍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품고 있는 한 믿음의 사람은 전진할 수 있습니다.
[다시 살아난 나사로 / 요한복음 11장 1~45절]
요한복음 본문에는 또 다른 부활 사건이 있습니다. 그 사건이 일어난 곳은 에스겔서와 같은 민족적 차원의 거대 공간이 아니라, 사랑과 기쁨이 교차하는 일상의 자리입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기적 사건이라기보다는 영적 가르침을 가진 상징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이 앓고 있었다.” 그 사람은 주님께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은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입니다.
누이들은 예수께 사람을 보내 말합니다. “주님, 보십시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이 앓고 있습니다.” 이 간결한 말은 세상을 사는 동안 누구도 고통과 질병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시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앓고 있는 현실입니다.
예수께서는 나사로의 이 상황을 독특한 눈으로 해석합니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병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병이란 무엇일까요? 질병으로 몸부림치는 나사로의 관점에서 보면 그 의미가 더 뚜렷해질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을 앓고 있다고 말합니다. 나사로의 병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앓고 있는 병입니다. 괴로워하는 그가 원하는 것은 병에서 풀려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간단치는 않습니다.
옆에서는 안 되겠다고, 빨리 예수께 모셔 병을 고치려 하였으나, 예수는 죽을병 아니라고 하면서 태연합니다. 대신 빛과 어둠에 관한 대화를 제자들과 나눕니다. 그것은 자신을 돌로 내리치려고 하는 적대감을 가진 사람들을 염두에 둔 대화였는데, 예수가 준 말씀은 이렇습니다. “햇빛이 있는 낮에는 걸려서 넘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밤에 걸어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으므로, 걸려서 넘어진다.” 이는 빛이 없는 어두운 삶에 관한 교훈인데, 앓고 있는 나사로에 관한 말이라기보다는 자신은 건강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어두운 삶을 겨냥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는 사이에 나사로는 죽게 됩니다. 그가 생명의 환희, 절망의 번민마저 멈추게 하는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단지 그가 잠들었으니 깨우려 가야겠다고 말씀합니다. 어떤 제자는 그 말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고, 어떤 제자는 그 말만 믿고 ‘함께 죽으러 가자’ 하면서 과도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가서 보니 나사로는 무덤 속에 있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 소생할 수 있는 기대를 접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를 사랑한 마르다와 마리아는 다소 원망이 섞인 말을 합니다.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21/32절 반복)
그러자, 예수께서는 마르다에게 영적인 물음 하나를 던집니다. 요한복음의 핵심적인 사상을 담은 질문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마르다는 ‘내가 믿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의 현실은 형제의 죽음 앞에 선 슬픔의 자리입니다. 마리아도 울고, 함께한 사람들도 울고, 예수도 눈물을 흘립니다. 비통한 마음으로 무덤으로 간 예수는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한 다음, 하늘을 우러러 기도합니다. “아버지, 내 말을 들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내 말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의 기도는 믿음의 확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현실에 대한 의혹의 기미가 없습니다. 그에게는 죽음도 삶도 모두 아버지의 품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 믿음으로 예수는 큰소리로 외칩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δεῦρο ἔξω) 이 말씀은 마치 이렇게 들립니다. 나사로야, 이제 되었다. 너의 영혼이 괴로워하다가 죽음에 이르렀구나. 하지만, 이제는 그 자리에 있지 말고 ‘생명의 문’으로 나오너라! 그러자 수의에 감긴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옵니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말씀합니다. “그를 풀어주어서 가게 하여라.” 그의 몸을 감은 헝겊만이 아니라, 삶 전체가 죽음에서 풀려났습니다.
나사로가 되살아난 이 이야기는, 고통으로 얼룩진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비극과 희망에 관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빛과 어둠 사이에서, 죽음과 생명 사이에서 벌어지는 고단한 삶의 여정, 거기에서 움터오는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부활이요 생명이신 분에 관한 믿음에서 찾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회복된 생명 / 로마서 8장 6~11절]
우리 삶을 휘감고 있는 죄악의 굴레를 깊이 들여다본 사람은 바울이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율법의 질서에 매여 있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로마서에서 말합니다. 우리 삶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면서도 육신으로는 죄의 법에 매여 있다고 보았습니다. (롬 7:25) 그것이 7장의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삶이란 가망이 없는 것이냐?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모든 고통과 환란 속에서도 우리를 지탱시켜주는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8장의 주제입니다.
위태로운 삶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향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삶의 길을 둘로 구분합니다. “육신에 속한 생각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속한 생각은 생명과 평화입니다.” 육신에 속한 생각은 무엇인가요? 바울은 그것을 가리켜, 하나님이 허락한 세계를 적대감과 불신으로 채우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영적 무지(無知)입니다.
바울이 권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살아있는’ 삶입니다. 죽음의 골짜기에 불어온 생기, 죽은 나사로를 되살린 하늘의 숨결. 만일,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있다면, 우리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이라고 바울은 증언합니다. 율법에 묶인 고단한 삶, 죽음의 골짜기에서 마른 뼈처럼 메마른 삶, 죽음의 옷으로 칭칭 감긴 무덤과 같은 삶에서 살필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순절 다섯째 주일을 지나며 간구하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 ‘지혜와 계시의 영’을 내려주셔서, 우리 ‘마음의 눈’이 밝아지고,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따라 생명과 평화의 세계를 지어가기를 기원합니다. 거룩한 영이 임하면 우리는 삶의 방식을 되돌릴 수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의 몸은 율법의 세계를 지나야 합니다. 하지만,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의 약속으로 삼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사순절이 깊어갑니다. 십자가의 사랑 앞에 다가서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광화문에 예배당을 새로 짓고 새로운 공동체를 꿈꾸고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회복시켜서, 분단과 대결로 얼룩진 이 땅에 생명과 평화의 씨앗을 심어갈 수 있도록 인도해주시기를 빕니다. 얼어붙은 땅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녹이고자 자신을 던진 예언자 문익환의 시를 한 편 읽으며 오늘 말씀을 마칩니다.
문익환 / 고마운 사랑아
고마운 사랑아, 샘솟아 올라라
이 가슴 터지며 넘쳐나 흘러라
새들아 노래를, 노래를 불러라
난 흘러흘러 적시네 메마른 강산을
뜨거운 사랑아, 치솟아 올라라
누더기 인생을 불 질러 버려라
바람아 바람아 불어오너라
난 너울너울 춤추네 이 얼음 녹이며
사랑은 고마와 사랑은 뜨거워
쓰리고 아파라 피 멍든 사랑아
살갗이 찢기어 뼈마디 부서져
이 땅을 물들인, 물들인 사랑아
침묵으로 기도합시다.
[파송사]
죽음의 골짜기에 쓰러진 마른 뼈를 소생시킨 하늘의 숨결, 고단한 삶에 지쳐 죽은 나사로에게 무덤 문을 열고 나오게 한 그리스도의 부름, 이 하늘의 약속이 우리 맘에도 담기기를 바랍니다. 의로운 삶, 평화의 길을 향해 나아가십시오.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을 지켜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