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되게 하신 그리스도 (렘 23:1-6, 엡 2:11-22, 막 6:30-34,53-56)
2018.07.22. 성령강림절 아홉째주일
[길을 잃었을 때]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50도가 넘는 불볕더위가 발생한 나라도 있다고 하지요.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많으신데, 교우 여러분들께서도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보통 목회자가 교회에 부임하고 나서 3년가량은 허니문 기간이라고 하는데, 저는 지난 1년간이 마치 긴 터널을 통과한 기간처럼 느껴집니다. 터널을 벗어났다면 탁 트인 세계에서 맘이 후련해야 할 텐데 그러지 못합니다. 공동체의 긴 고통을 경험하고 난 후에 생긴 후유증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 교회만이 아니라 많은 교회들이 길을 잃은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을 오랫동안 받아왔습니다. 조계사에서도 설조 스님이라는 분이 종단개혁을 요구하며 삼십일이 넘도록 단식을 하고 계시다고 하는데, 교회만이 아니라 절도 앓고 있나 봅니다. 하지만 위태로운 자기 공동체를 껴안고 희망을 살려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가슴 뛰는 일입니다. 그런 분들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희망입니다.
소설가 공지영 씨가 유럽의 수도원들을 기행한 후에 낸 책에서 이런 위로의 말을 전하더군요. “나는 어렴풋하게 알 것 같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의미 따위에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의미를 잃어버릴 이유가 없을 테니까.”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1, 237)
우리가 길을 잃었다고 느끼는 것도 실제로는 ‘길을 찾아 헤매고’ 있기 때문이라면, 안심이 되긴 합니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참으로 길을 찾기를 원한다면, 과거를 혼란스럽게 했던 것들이 우리를 다시 지배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은 더 단순해지는 것입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공동체라면, 더 친절해지고, 더 따뜻해지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본문을 묵상하며 괴로웠습니다. ‘목자 잃은 양’처럼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 옛날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 사회와 교회의 이야기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서 본문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한 사람의 이야기를 먼저 들려드리겠습니다. 그는 기원전 6세기 남왕국 유다의 마지막 왕이었던 시드기야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유다의 마지막 개혁적 왕이었던 요시야의 막내아들로서 많은 사랑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원래 이름은 맛다니야(Mattaniah)였는데, 그 이름의 뜻은 ‘야훼의 선물’입니다. 하지만 나라가 망해가는 비운의 시대를 살면서 역사에 부끄러운 이름을 남기고 됩니다.
그가 스물한 살 때 바벨론제국이 유다를 침공하여 수도 예루살렘을 정복하게 됩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당시 유다의 왕 여호야긴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가고, 대신 맛다니야를 왕으로 세웁니다. 바벨론 왕은 맛다니야의 이름을 바벨론식으로 바꾸었는데, 새 이름은 시드기야/체데키야(Zedekiah), ‘정의의 야훼’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은 두 개의 히브리어로 된 합성어로서, ‘체데크’(tsedeq)와 ‘야훼’라는 단어를 합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름이 바벨론 왕의 명령을 따라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왕하 24:17), 거기에는 모욕과 수치가 얽혀있다고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이름의 뜻이 표면적으로는 ‘정의의 야훼’이지만, 그 의미는 ‘바벨론의 정의를 너희들의 신 야훼처럼 받들라’는 바벨론 제국의 왕의 모욕적 명령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 이름을 사용한 시드기야에게는 수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튼 시드기야는 풍전등화의 상태에 놓인 나라를 11년 간 다스리게 됩니다. 전임 왕들의 실정으로 인해 이미 나라는 몰락할 대로 몰락하였기 때문에,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나라를 염려하는 애국지사들이 있다 할지라도 국론이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함께 힘을 모아 자주독립의 길을 걷기 어려웠습니다. 이웃나라들이 연합전선을 펼치자고 제안을 할 때에도 이해관계가 서로 달랐기 때문에 선뜻 응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머뭇거리는 가운데 시간이 흘렀고 마침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지경에 몰리게 됩니다. 그것은 국내의 친이집트 세력들에게 등을 떠밀려 바벨론에게 봉기를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전장에 내몰려 죽임을 당하고, 나라는 완전히 바벨론에게 넘어가게 되면서, 왕 대신에 총독이 다스리게 됩니다. 시드기야는 자신이 보는 앞에서 자식들이 죽임을 당하고, 그는 눈이 뽑힌 채 쇠사슬에 묶여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예언자 예레미야의 신탁은 이런 비극적인 역사를 배경으로 전개됩니다.
[의로운 가지는 어디에서 돋는가? / 예레미야 23장 1-6절]
오늘 예레미야서 본문은 유다 왕실의 네 왕들을 저주하는 이야기(22장)의 결론입니다. 예레미야는 ‘양 떼를 돌보지 않은 악한 목자들’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합니다. 여기서 ‘목자들’은 나라를 패망으로 몰고 간 유다의 왕들을 의미한다 할 수도 있고, 비운으로 기울어지는 상황에서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누리는데 골몰하는 귀족들과 종교지도자들을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나라를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이해관계에 빠진 그들은, ‘자기 마음속에서 나온 환상’을 말하기 위해 헛된 말로 사람들을 속이면서 (렘23:16), 결국 양 떼를 죽이고 흩어버립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는 한편, 남은 양을 모으고 그 양들을 돌봐줄 참된 목자를 세울 것이라는 약속을 전합니다. (3-4절)
이 약속은 현실적인 계획이라기보다는 사실 믿음이나 희망사항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이 약속에는 흥미로운 점이 담겨 있습니다. 먼저, 회복의 사명을 갖고 등장할 목자는 ‘외부에서 오는’ 존재가 아니라 민족 내부에서 솟아나는 ‘의로운’(tsaddiq) 존재입니다. 마치 썩은 고목에서 돋아나는 새 가지처럼, 파멸과 고통의 그루터기에서 솟아나서 마침내 세상에 공평과 정의를 실현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6절을 보면,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야훼의 정의’(Yahweh tsedeq)라고 부를 것이라고 합니다. 이 이름은 바벨론 왕에 의해서 붙여진 모욕적인 이름 ‘시드기야’(체데크 야훼)를 거꾸로 한 것으로서, 민족의 회복을 상징합니다. 그 이름은 ‘나의 정의를 너희의 신처럼 받들라’는 ‘제국의 지배논리’를 뒤집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지배의 논리는 시대를 초월하여 지속됩니다. 자신의 이해관계가 마치 정의인 냥, 그것을 우상처럼 떠받드는 자들의 소행은 예레미야 시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권력과 돈을 소유한 사람들의 끝없는 탐욕, 그 탐욕이 실현되도록 작동되는 질서를 정의라고 부르는 사회에는, ‘자신의 정의를 신’으로 부르는 수많은 시드기야들이 군림합니다.
그들이 목자가 되어 지배하는 곳은 파멸의 세계입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목자 잃은 양처럼 흩어져 죽임을 당합니다. 제국의 입맛대로 편성된 세계에서는 끊임없이 전쟁이 발생하며, 자기 땅을 잃고 떠도는 난민들이 양산됩니다. 재벌 중심의 경제 질서에서 노동자들은 더욱 큰 탐욕의 희생물이 되어 해고당하고 투옥되며 심지어 죽음으로 내몰리게 됩니다.
이런 세계에서도 ‘의로운 새 가지가 과연 돋아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바로 시대의 갈망이자 예언의 꿈으로 나타납니다. 바벨론 제국에 의해 나라를 잃게 된 파멸의 시대에 그런 꿈을 꾼 예레미야의 예언은 참으로 처절하지만, 그 꿈과 예언은 죽지 않고 시대를 타고 흐르며 역사를 움직여갑니다.
[길 잃은 양을 돌보는 예수 / 마가복음 6:30-34, 53-56]
오늘 마가복음의 본문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둘 씩 파송하였던 이야기의 결론에 해당합니다. 그들의 선교활동은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으로 이루어졌고, 특히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민중들의 삶과 관련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목자 없는 양처럼 길을 잃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은 예수공동체의 이야기입니다.
이 공동체의 성격은 민중들에 대한 그 시선과 태도에 달려있습니다. 선교활동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려는 제자들에게 갈릴리의 민중, 오클로스들이 몰려듭니다. 그들은 도움을 얻고자 심지어 제자들보다 먼저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거기에 계셨습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시선입니다. 34절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서 큰 무리(오클로스)를 보시고, 그들이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으므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여기서 ‘불쌍히 여기다’는 단어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ίζομαι)라는 헬라어는 연민의 마음이 깊어서 애간장이 타는 경우를 의미합니다. 민중들과 함께 하는 예수의 행동은 이 애간장타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53-56절에서도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그들은 병든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옷이라도 만지고자 합니다. 질병과 고통을 해결할 길이 없는 사람들이 예수에게 와서, 그를 만지고 모두 나았다고 복음서는 말합니다. 예수의 공동체가 벌이는 운동은 치유와 회복이라는 증언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복음서의 이런 증언과는 달리, 예수 운동이 생명력을 잃고 제도 안에 길들여진 형식신앙으로 왜소화되기도 합니다. 한국교회는 지난 수십 년 간 이데올로기와 자본의 포로가 되어 예수운동의 꿈을 잃고 예언과 진리를 스스로 저버리는 뼈아픈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이제는 교회가 어둠에 깊이 잠겼다는 느낌, 복음이 길을 잃었다는 직감, 종교적 진실과 진심이 실체를 잃고 단지 언어적 잔상에 의존하고 있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있습니다. 교회는 여전히 성공주의와 결합된 값싼 은혜에 물들고 배타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정신세계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 자체가 사회적 적폐가 되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 공동체는 어떤가요? 가야 할 길은 분명합니까?
많은 인문학 서적들은 말하기를,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을 들여다보라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권하지 않습니다. 길은 우리에게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갈 길이 예수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의 복음이 지닌 특징은 복음을 전하는 예수 자신이 바로 메시지가 된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의 복음은 다른 무엇을 얻기 위한 도구나 수단이 아니라, 복음 자체가 추구될만한 존재론적 목적이 됩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의 복음이 남을 지배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낮은 자들과 함께 하는 이야기로 구성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복음의 부름에 참여하여 생명의 길을 걸었던 사람들이 없지 않았습니다. 교회로 모인 자신들의 사명을 낮은 곳에서 평화를 위해 일하는 것에서 찾고, 그러한 공동체를 통해 일어나는 생명 사건이야말로 역사의 그루터기에서 새롭게 돋아나는 ‘의로운 가지’라고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길을 예수에게서 찾고자 합니다. 자신들의 길을 열기 위해서 예수에게 주목합니다.
[장벽을 허문 그리스도 / 에베소서 2장 11-22절]
에베소서의 본문은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화해하게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입니다. 오늘 본문이 있기 전에 있는 열 개의 절에서, 바울은 갈등과 적대감으로 분열된 세계를 묘사합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분열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있는 장벽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이방인으로 지칭하며, 그들의 삶이 약속의 언약과 무관하며 ‘하나님 없이’(atheos) 사는 삶이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삶, 그렇기 때문에 생겨난 장벽과 그 장벽에 부딪치며 커져가는 적대감, 그것들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요? 바울의 권면은 ‘마음의 수련’이나 ‘제도의 개선’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13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피’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피!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삶을 씻는 길이 예수의 보혈에 있다는 바울의 고백은 매우 심오한 것입니다. 그 고백이 근본주의 신학으로 인해 ‘싸구려 대속신앙’으로 해석된 것은 기독교 신학의 가장 큰 비극일 것입니다. 예수의 피가 상징하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요, 예수와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예수와 연합함으로써,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사람들 사이의 장벽이 무너지고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평화는 어떤 정책이나 프로그램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초대받은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를 발견할 때 평화를 경험합니다. 평화는 단지 적대감이라는 정서의 종결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입니다. 14절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라고 고백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깊은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평화’라는 고백은 14-17절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네 가지 활동에 대한 깨달음에서 비롯됩니다. 첫째는 갈라진 사람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몸으로 담을 허물어서 원수 되게 하는 것들을 없애고, 둘째는 계명의 율법을 폐하고, 자기 안에서 둘을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 평화를 이루시며, 셋째는 적대감(hostility)을 십자가로 소멸하여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시며, 넷째는 멀리 떨어진 이방인에게도 또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모두 평화를 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이렇게 경험할 때, 사람들은 장벽에 갇혀 살아가지 않고 새로운 관계를 이루게 됩니다. 18-22절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가족을 이루며,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놓은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 되며, 주 안에서 자라나 성전이 되고, 마침내 하나님이 성령으로 거하실 처소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 되는 삶]
예수가 놓은 길은 신비입니다. 그가 흘린 피는 힘으로 보면 정치범의 고통이지만, 뜻으로 보면 구원하는 사랑입니다. 평화를 얻는 것은 그리스도를 얻는 것이요, 그리스도를 얻었다 함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했다는 것이요, 하나님과의 화해는 불신과 적대감을 씻고 서로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 평화의 진원지를 그리스도의 피에서 찾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이 보수적인 기독교 신앙을 벗어나던 50대 초반, 새로운 신앙의 방향을 선언한 시가 있는데, <흰 손>이라는 제목의 장편 극시(劇詩)입니다. 이 시는 예수의 보혈이 ‘대속’의 현실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신자들의 생명과 예수의 생명이 ‘하나가 되는 사건’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김경재, 함석헌의 종교시 탐구, 168)
우리가 예수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어지는 것입니다. 적의로 가득 찬 역사에서 새로 지어진 길은 십자가가 낸 길입니다. 그 십자가의 길을 걷는 믿음의 모험을 우리 공동체가 하기를 바라며, 함석헌의 시(詩) <흰 손>의 한 대목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이놈들아 갈보리에 흘렸던 피
그 피 네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 위해 네 몸 위에, 네 혼 위에 흘려
네 피 된 산 피말이지?
네 만일 그 피 마셨다면야,
그러면야 지금 그 피 네 속에 있을 것 아니냐?
네 살에, 뼈에, 혼에, 얼에 뱄을 것 아니냐?
바늘구멍만한 상처 네 손에 나봐라,
댓줄기처럼 그 피 아니 내 쏘랴?
네 온 몸 그 피 입어 그 피에 젖을 것 아니냐?
네 손이 왜 희냐?
피는 한 방울 아니 묻고 표지만 든 흰 손,
아니 흘려서 아니 묻었구나.
네 피 흘릴 맘 한 방울 없어
그저 남더러 대신 흘려 달래 살고 싶더냐?
십자가 소리만 들으면 눈물 나지!
네 푸른 입술이 히스테리로 떨지!
우는 말 말아라.
눈물 소리 말아라.
대속(代贖)이라!
둘도 없는 네 인격에 대신을 뉘 하느냐?
사랑하는 외딸 얼굴에 든 허울도
어미 사랑으로도 바꾸진 못해
제 얼굴 제각기 쓰고 건너다보다가
한숨으로 헤어지는 인생 아니냐?
심장의 육비(肉碑)에 새긴 기록을,
영혼의 미간에 박힌 죄악의 허물을,
대신을 누가 대신한단 말이냐?
맘은 있다손 어떻게 하느냐?
너 살고 싶으냐?
대들어라, 부닥쳐라.
인격의 부닥침 있기 전에
대속이 무슨 대속이냐?
그의 죽음 네 죽음 되고
그의 삶 네 삶 되기 위해
부닥쳐라, 알몸으로 알몸에 대들어라!
벌거벗은 영으로 그 바위에 돌격을 해라!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길을 잃었을 때는 그리스도를 구하십시오.
그리스도를 구할 때에는 그의 피, 십자가의 길을 구하십시오.
그리스도는 자신의 몸으로 담을 허물고 하나 되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어
자매형제들과 평화를 이루어 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