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쳐다보는 사람들 ㅣ 김지목 ㅣ 2023-05-21

by 김지목 posted May 21, 2023 Views 121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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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3-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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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1 향린주일예배 부활절7 

 

“하늘을 쳐다보는 사람들" 

행1:6-14, 시68:1-10, 32-35, 벧전4:12-14, 5:6-11, 요17:1-11 

 

우리는 오늘 부활절기의 마지막 주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 부활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키신 하나님께서 죽임의 권세를 거절하셨다는 확신으로, 하나님나라를 이루는 신앙인의 힘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의 삶에서 부활의 경험을 튼실하게 건설하면서 하나님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신앙은 세상의 질서를 초월하는 신비이며, 신앙인이 삶으로 성취해나가야 할 목표입니다. 삶으로 부활사건을 경험하고 부활의 의미를 깊이 성찰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하나님나라를 이룰 수 있도록, 우리는 오늘도 교회로 모입니다. 부활의 의미를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우리 공동체 안에서 부활사건이 경험되고, 부활신앙의 신비함을 깊이 성찰하고 서로 나누면서, 하나님나라를 체험하는 향린 공동체 되기를 빕니다. 

 

올해 부활절기에 꾸준히 읽어온 사도행전의 오늘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작별을 하고 승천하신 장면입니다. 이 장면을 한 장의 화폭으로 상상해서 그려봅시다. 그림의 위쪽에는 예수께서 구름에 가리우고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풍성하게 표현된 흰색의 구름 속에는 성령을 상징하는 듯 붉은 기운도 스며있습니다. 구름에 묻혀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산 위에서 바라보는 열한명의 제자들이 아래쪽에 그려져 있고, 제자들 가까이에는 천사가 있는데 제자들에게 중요한 말을 건네는 듯 적극적인 동작을 취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산 위에 서 있는데 그들 앞에는 산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펼쳐져 있고, 그 길은 예루살렘 도시로 이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길의 종착점으로 보이는 지점에는 소박한 다락방이 기도처로 그려져 있습니다. 

 

상상으로 그린 그림이 잘 그려지셨나요?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일을 교회의 축일로 정하고 기념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이 장면에 담긴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승천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관심을 두며 밝게 그림을 그렸습니다. 또 스승과 작별하여 슬퍼하며 근심하고 어리둥절해 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보았습니다. 화폭의 위쪽은 밝게, 그리고 아래쪽에는 어두운 분위기가 공존하는 그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승천”이라는 제목의 이 그림 안에는 희망의 메시지가 도드라지게 그려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구름 속으로 멀어져가지만 이내 내려올 것만 같은 성령의 약동이 작지만 분명하게 그려져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발길이 마지막에 닿는 다락방에는 작은 빛 한줄기가 그려져 있어야, “예수의 승천”이라는 이 그림은 완성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성령의 강림과 교회의 탄생이라는 희망으로 기억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사도행전 본문은 구름 타고 승천하시는 예수님의 초능력에 초점이 맞춰져서는 안 되겠습니다. 천사들을 통해 “예수께서는 다시 오신다”고 증언된 바,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의 초능력에 작품감상의 주의를 뺏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시는 것은 부활의 완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늘로 올라가시는 모습은 예수님의 본을 따라 부활사건의 신비를 체험하라는 메시지로 읽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그림의 보다 중요한 메시지는 교회의 탄생과 희망입니다. 오늘 저는 그리스도교 교회가 어떤 배경에서 탄생했으며, 교회가 희망이 되는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조금 전에 그린 상상의 그림에서 제자들의 모습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제자들의 모습을 어떻게 그리셨나요? 부활하시기 전, 예수께서 당하신 고난사건은 다만 예수님만의 고난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십자가 처형이 있던 날, 혼돈과 절망으로 예수님과 함께 수난을 경험해야 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나라의 기대가 무너지고 희망의 빛이 죽음에 사그라진 순간을 제자들 또한 온몸으로 겪어야 했습니다. 절망이라고 하는 정신적 외상이 그들의 생명을 모두 잠식하기 직전에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듣고 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극적인 반전이 제자들의 마음과 정신을 휘저으며 다시금 기대와 희망을 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내 다시, 예수님은 제자들을 떠나십니다. 이번에는 진짜, 영영히 떠나시는 모습을 올려다보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이때의 제자들의 심경은 어땠을까요? 심리학에 문외한이지만 요사이 두어달 새에 제자들이 경험했을 정신적 외상은 적지 않은 충격으로 남 았을 것만 같습니다. 절망과 희망의 극적인 사이를 널뛴 제자들의 정신은 또 하나의 고난 그 자체라 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의 사도행전 그림에다 열한명의 제자들의 모습을 다양한 정신적 외상을 당한 자들로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어리둥절한 얼굴, 울고 싶지만 울음이 터지지 않는 얼굴, 실어증에 걸려 말을 못하는 얼굴, 극심한 스트레스로 아픈 몸을 이끌고 서 있는 모습, 그럼에도 웃는 얼굴, 감사의 눈물을 흘리는 얼굴, 예루살렘으로 나있는 길로 가려고 발을 들었지만 내딛는 일에 힘겨워하는 모습 등으로 제자들을 그려보았습니다. 

 

그런 열한명의 제자들에게 천사가 전하는 말은 새로운 국면을 여는 노둣돌이 됩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하늘을 쳐다보면서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서 하늘로 올라가신 이 예수는,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을 너희가 본 그대로 오실 것이다.” 이제 제자들의 할 일은 기다리는 일이었습니다. 기다리면 보내주시는 성령이 임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약속을 떠올랐습니다. 기다림! 여기에서 희망이 잉태합니다. 기다림 중에 솟아나는 생명의 약동, 그 희망의 주체는 성령입니다. 요한복음서에 보혜사로 설명된 성령은 “파라클레토스” 곧 돕는자, 변호자의 의미를 지닙니다. 희망을 이끌어 오는 주체인데 우리를 도와주는 존재로 주체성을 우리에게 일정정도 양도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시말해 기다리는 제자들은 성령의 도움으로 하나님나라의 주체가 될 수 있습니다. 고난당하여 온전하지 못한 채 ‘하늘만 쳐다보던’ 제자들이 온전히 치유되어 부활승천하신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나라의 주체가 되는 길은, 기다림과 성령의 임재라고, 그리스도교는 가르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고 친히 승천하는 모습을 보여주신 까닭은, 제자들이 자신처럼 부활사건을 체험하는, 부활의 주체가 되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요한복음서 말씀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인 것 같이, 제자들도 하나가 되어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 함께 있게 해달라는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그러나 아직 제자들은 어리둥절하게 ‘하늘을 쳐다보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다시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면, 그 기다리는 마음에 성령이 임재하여, 더이상 어리둥절하지 않은 존재, 올리브 산을 내려가 예루살렘에서 부활하는 사람들이 되고, 부활하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확장하여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를 이루게 됩니다. 이것이 교회가 탄생한 배경이며, 오늘날까지 교회가 전승된 이유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수난당하는 사람들, 고통 가운데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면서 마음밭에 성령을 모신 사람들이 모여 그리스도교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령강림절을 교회의 생일로 지킵니다. 성령강림의 능력과 신비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분리되어 있어서 우리는 예수께서 건져주기만을 기다리는 존재가 되는 것을, 승천하시는 예수께서는 원하지 않습니다. 주객을 분리시켜서 인간은 신의 선택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가르침은, 종교가 지배권력의 시녀로 전락했을 때 생겨난 타락한 교리일 뿐입니다. 로마의 종교가 그러했고 권력체계를 유지하려는 세력이 종교를 활용할 때 강요된 이데올로기였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종교는 인간으로 하여금 신을 모시는 존재가 되도록 가르치고, 모두가 신을 모셨으니 평등한 공동체를 이루도록 가르칩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과 하나인 것처럼, 제자들도 나아가 세상이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도록 기도했습니다. 제자들이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성령을 보혜사로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을 쳐다보던’ 제자들은 예수께서 승천하기 직전까지도 예수님의 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아직 ‘하늘을 쳐다보는 사람들’이었기에 그랬을까요? 오늘의 사도행전 6절에 제자들은 예수께 이렇게 묻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나라를 되찾아 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 하나님나라를 이루는 일을 예수께 전적으로 의존하는 물음입니다. 하나님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한 자들로 채워진 나라입니다. 초월적 존재가 뚝딱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부활하여 이루는 나라입니다. 제자들이 부활사건의 주체가 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승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으로 심신이 찢겨진 제자들을 위로하고 치유하기 위해 성령을 보혜사로 보내주셨습니다. 

 

그리스도교 교회는 “하늘을 쳐다보는 사람들”이 성령을 모시고 부활사건의 주체로 변화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부활사건의 시공간적 확장으로 하나님나라의 성취를 꿈꾸는 곳! 바로 교회입니다. 이를 위해서 교회는 ‘기다림’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기다리는 시간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도록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간절한 기다림의 마음밭에 성령이 임재하시는 체험을 교회의 동력으로 삼아야 합니다. 부활사건을 체험한 사람들에 의해 이 땅위에 하나님나라가 성취되듯이,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는 감동으로 교회가 세워져야 합니다. 광화문의 새 교회당에서 ‘기다림’과 ‘성령임재’를 위한 프로그램이 많이 기획되고 신비한 체험을 서로 나누는 다양한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한편, 승천하는 예수님을 떠나보내는 “하늘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형편을 헤아려본다면, 6절의 제자처럼 “부활하셨으니 그 권능으로 이 세상을 바꿔주십시오!”라고 호소하는 심정도 이해가 갑니다. 절망과 고됨으로 더 이상  견디기 힘든 순간들을 우리는 왕왕 겪고 삽니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나의 삶을 연타할 때, 소박한 바람조차 허락되지 않는 현실에 억울함을 호소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하나가 쉽지않은 것들의 연속, 그것을 헤쳐나갈 힘이 부칠 때 저는 종종 “하늘을 쳐다보는 사람”이 되곤 합니다. 내 속에서 만들어진 모순, 두 가지가 충돌할 때 인내력이 고갈되고 불평과 한숨으로 하루가 잠길 때도 있습니다. 퇴보하는 역사의 순간을 마주할 때 민주주의를 위해 흘린 피값이 원통해서 분노와 무기력을 왕복하기도 합니다. “하늘을 쳐다보는 사람들”은 우리 실존의 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음을 종종 떠나기도 합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의 편지는 “하늘을 쳐다보게” 될 때 도움이 되는 말씀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신앙인을 위로합니다. 자신을 낮추고, 깨어있어서 고난을 이겨내기를 바라는 권면입니다. 자신을 낮추면 하나님께서 돌봐주시고, 깨어있으면 굳건해진다는 권면으로 본문을 요약해 봅니다. 

 

지난주에 여신도회서울연합회 1,2지구 연합 찬양제가 있었습니다. 9개 교회가 찬양제에 참가한 행사였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지난 3년간 열리지 못했다가 이번에 오랜만에 개최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교회 여신도회도 참가하고 인기상을 받을 받을 만큼 잘 하셨습니다. 청년여신도회와 희년여신도회, 그리고 장년여신도회 분들이 한 무대에 서신 모습이 참 좋았습니다. 아름다웠습니다. 그때 불러주셨던 찬양 중에 “행복”이라는 노래의 가사 일부가 마음에 남아있습니다. 

 

눈물날 일 많지만 기도할 수 있는 것

억울한 일 많으나 주를 위해 참는 것

비록 짧은 작은 삶 주 뜻대로 사는 것

이것이 나의 삶의 행복이라오

세상은 알 수 없는 하나님 선물

이것이 행복 행복이라오

 

눈물날 일이 많지만 기도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고백할 수 있는 역설은 어떻게 가능한 승화일까요? “하늘을 쳐다보는 사람들”을 치유하고 하나님나라의 주체로 변화시키는 성령이 우리 마음을 만질 때 가능한 신앙의 신비입니다. 오늘부터 한 주간 부활절 마지막 주간입니다. 다음주일 성령강림주일로 가는 길목에서 성령의 임재를 통한 신앙의 신비를 묵상합니다. 성령강림절기에 그 임재를 체험하는 계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상상하며 그렸던 “예수의 승천” 그림에서 한 줄기 빛을 내던 작은 다락방처럼, 우리 광화문 새 교회당이 이 시대의 희망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잠시 침묵합시다

 

(침묵)

 

 

 

(파송사)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능력의 손 아래로 자기를 낮추십시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걱정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 (벧전5:6-7) 

 

 

(공동축도)

 

축복의 기도를 나눕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주시는 친교가 우리 가운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고후1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