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시간과 계절은 속절없이 흘러 5월의 끝자락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부활절의 일곱 번째 마지막 주일이고, 다음 주면 성령강림주일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떠나시고 성령의 임재를 기다리는 계절입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마침내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 속에 저희의 자세를 가다듬고 증인의 마음, 증인의 길을 준비합니다. 일상의 게으름으로 나약해진 저희의 죄책을 먼저 고백하오니 용서하시고, 간절한 마음으로 성령을 기다리게 하옵소서.
하나님, 부활절 절기를 지나며 꼭 반세기 전 유신 시절의 부활절을 기억합니다. 1973년 4월 그날, 서울 남산에서는 기독교인 6만 명이 모인 가운데 모처럼 진보와 보수 진영이 한마음으로 부활절 연합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예배 중에, 그리고 예배 후에 “주여, 어리석은 왕을 불쌍히 여기소서” “민주주의의 부활은 대중의 해방이다”는 등의 유인물이 배포되었습니다. 이것은 그 6개월 전 선포된 박정희의 유신체제에 대한 첫 공개적인 반대 목소리였습니다. 자신의 남은 인생 전체를 걸지 않고서는 저항할 수 없는 겨울공화국이었지만 박형규, 권호경, 나병식 등 기장의 뜻있는 목회자와 교우들은 감연히 나섰습니다. 다시 그로부터 한 달 뒤 5월 20일(50년 전 어제입니다!) 이번에는 교회의 유신반대 저항운동을 신학적으로 뒷받침하는 ‘1973년 한국그리스도인 선언’이 나왔습니다. 오늘 다시 읽어도 감동적인 문건입니다. 그것은 도쿄에서 오재식, 지명관, 김용복 등 기독교운동의 숨은 기수들이 당시 김관석 NCCK 총무와 상의해 작성한 뒤 국내로 들여온 것이라고 아주 뒷날에야 밝혀졌습니다.
하나님, 이렇게 해서 당신께서는 한국교회가 한국의 민주주의를 살리는 길에 순교를 각오하고 나서게 하셔서 한국사회를 살리시고, 한국교회도 살리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향린도 일익을 담당케 하셔서 마침내 유신의 심장을 쏘아 새 세상을 주셨습니다.
하나님, 이 반세기 전의 일을 들어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로 하여금 예언자의 사명을 감당케 하셔서 교회 자체를 살리신 기적을 기억하면 오늘도 온몸에 전율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하나님, 많은 사람들이 한국교회는 반세기만에 죽었다고 말합니다. 기장도 죽고, 향린도 죽었다고 합니다. 할 일은 많은데 아무도 십자가를 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무능할 뿐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한 대통령이 1년 넘게 나라의 운전대를 잡고, 무뢰배에 가까운 정권이 나라를 운영하며, 이 사회를 굴욕과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가고 있는데, 아직도 교회는 눈을 감거나 주저하고 있을 뿐입니다. 남부끄러운 세습이 아니면 얄팍한 주도권 싸움으로 날이 새고 해가 기울고 있습니다. 보편적 인권을 말하면 그건 하나님 나라 일이 아니라며 내칩니다. 저희가 어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찾아야 하겠습니까? 반세기 전 그리스도인 선언의 한 구절을 다시 읽습니다.
“우리의 주님, 메시아 예수는 유대 땅에서 가난한 자들, 눌린 자들, 멸시받는 자들의 사이에 계셨고 그들과 함께 살으셨다. (…) 진리를 증거하시는 도상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그러나 백성들을 해방하기 위하여 죽음에서 일어나 변화의 능력을 보여주셨다. 우리는 오늘,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갈 것을 결의한다. 그리하여 주님처럼 소외당한 동포들과 함께 살면서 정치적인 압박에 저항하고 역사의 개조에 참여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이것만이 우리의 사랑하는 조국, 한국 땅에서 메시아의 나라를 선포하는 길이라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 저희가 2023년 오늘의 자리에서 나태함을 벗고 메시아 나라를 찾고 세우는 길에 다시금 나서게 하옵소서. 이를 위해 저희는 반세기 전 교회의 선배들이 자신들의 인생을 걸었던 것처럼 저희의 모든 것을 다 걸고 있는지 돌이켜 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거짓으로 숨기는 자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한국의 역사와 함께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돌이켜 봅니다. 반세기 전 노·장·청의 교회 활동가들이 함께 협력했던 것처럼 저희도 기탄없이 합심하여 선을 이루게 하옵소서. 저희가 지금 습관적 기독교인에 머물고 있지 않은지도 돌이켜 봅니다. 저희가 외식하는 자가 되지 않고, 자기 십자가를 지겠다는 결단 속에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게 하옵소서.
저희 스스로는 소금이라 자처하나 사실은 짠맛을 잃어 길가에 내쳐질까 두렵습니다. 잔꾀도 아니고, 우회나 회피도 아니며, 50년 전 부활절의 선구자들과 같이 역사에 정면으로 맞서는 결기를 갖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성령의 임재를 기다리며 이제 저희의 마음을 비우고 입을 닫습니다. 저희의 속마음을 다 아시는 주님께서 이 시간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옵소서.
(침묵)
오늘도 이 땅에 메시아 나라를 선포하도록 촉구하시고 그 일을 감당할 만큼 저희에게 능력과 권세 주시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