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뜻펴기 20230709 성령강림후6
“주님께서 원하시면"
창24:34-38, 42-29, 58-67 시145:8-14 롬7:15-25a 마11:16-19, 25-30
성서일과에 따라 지난주의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오늘 이어집니다. 지난주는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는 고뇌 가운데서 보여준 자기비움의 신앙에 대해 묵상했다면, 오늘은 이삭의 혼처를 찾는 이야기에서 자기비움을 실천하는 신앙인이 갖춰야 할 자세에 대한 것을 묵상하게 해줍니다. 자기를 비운 신앙인이 발휘해야 할 사업작풍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자신의 탐욕, 즉 타인을 자기뜻대로 지배하려는 의지를 비운 그 마음자리에 하나님의 뜻이 심겨지고 생동할 수 있게 하는 신앙인의 자세에 대해 묵상하려는 것입니다. 그 자세란, “주님께서 원하시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하는 의지입니다. 그리고 오늘 창세기 본문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주님께서 원하시면" 주님께서 원하신 그 일은 우리가 계획한 것보다 아름답게 성사된다는 것까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면!” 이같은 고백과 삶의 자세가 하나님나라를 향하여 광화문 시대를 연 우리 공동체의 새로운 동력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창세기는 오래된 문서들의 편집본 입니다. 팔레스타인 삶의 자리 곳곳에 뿌리내린 야훼신앙의 문서들이 있었습니다. 야훼 공동체가 외부 강대국의 침입으로 멸망의 위기를 맞게 되자야훼문서들, 즉 야훼신앙을 유지하게 하는 두루마리들을 소실되지 않도록 한 곳으로 수집했습니다. 또 포로로 잡혀가서는 수집한 두루마리들을 진화된 신앙으로 더늠하고 편집하는 과정을 거쳐서, 오늘날 우리에게 제1성서, 구약성서로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창세기를 읽을 때는, 이것이 팔레스타인 어느 지역의 신앙고백이었는지, 수집한 자료를 어떻게 해석해서 발전시켰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오늘 창세기 본문과 같은 민담설화는 전형적으로 오래된 야훼문서에 해당합니다. 반복되는 장면을 많이 삽입하여 특별히 강조하려 한 의도가 보이는 바, 후대의 편집과 가미가 두드러지는 설화입니다. 처음에는 짧은 이야기였겠으나 단편소설급으로 분량을 채우고 문학예술적인 면모도 나타나는만큼, 오늘의 민담은 야훼공동체에서 즐겨 읽혀졌고 그만큼 중요한 야훼사상이 스미어 있음을 예상케 합니다.
이삭의 혼처를 구하는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브라함의 심복입니다. 자식의 혼인은 유목민족에게 더욱 큰 문제였습니다. 주인이 책임져야 할 중차대한 거사를 종이 위임을 받아 처리해가는 내용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주인에 대한 충심과 겸손함으로 결국 혼사를 성공시킵니다. 이삭의 혼처를 찾아 가나안 지역을 벗어나 멀리 여행을 떠납니다. 혼처를 찾아 멀리 떠나는 것은 당시 부족 간의 화합과 연대의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어느 샘터에서 만난 리브가는 이 종을 환대하며 집으로 초대하고 가족과 함께 청혼에 응합니다. 창세기 본문 중간에 건너뛴 부분의 내용입니다만, 이튿날 종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면서 리브가를 곧바로 데려가려 합니다. 그러자 리브가의 부모는 딸 리브가와 이별을 위로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열흘 간의 말미를 달라고 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 공동체와 다른 이방문화를 보여주는 단서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지체할 수 없음을 고하자 리브가의 가족은 딸에게 “부디 크고 전투적인 종족의 어머니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같은 축복 또한 동방민족의 문화입니다. 이삭과 리브가의 결합은 머나먼 부족 간의 연대였습니다. 이러한 시도는 자칫 부족간의 전투를 야기시킬 수 있는 모험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부족의 존망을 결정지을 만한 큰 일을 성사시킬 수 있었던 비결은, 그가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겼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 민담의 주제입니다. 종은 샘터에 도착해서 쉬면서 “주님께서 원하시면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지게 해주십시오" 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하는 표징을 구합니다. 샘터이니 곧 처녀들이 물을 길러나올 텐데 물을 마시게 해주는 처녀를 만난다면, 그리고 그가 샘터 둔턱까지 올라서 종의 낙타에게까지 물을 마시게 해주는 처녀를 만나게 해주신다면, 그때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임을 알고 그 처녀와 이삭의 혼사를 도모하겠다는 기도였습니다. 모든 일은 종이 구한 표징대로 이루어집니다. 리브가에게 초대를 받고 그의 가족을 만나고 이튿날 리브가를 아브라함의 집으로 데려가는 모든 일이 잘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인도하신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잘 된다”는 교훈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제1성서에서 이러한 낙관적인 메시지는 야훼 공동체가 비극적인 상황 속에 처했을 때 많이 공유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셔서 모든 일을 완성시키신다는 희망의 메시지는 창세기에서 요셉의 설화 외에서는 잘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포로기, 암울한 시기에 신앙을 잃지 않기 위해 이 이야기는 반복해서 읽혀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었던 야훼 공동체는 이 민담을 나누면서 통쾌해하며 기쁨을 나눴을 것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고 막막한 현실을 직면한 공동체에 이 민담은 공동체에 대한 포기가 아니라 공동체를 향한 헌신을 독려했을 것입니다. 포로로 억압받는 어려움 속에서 부족 또는 계파 간 사상의 차이로 분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가 되어 기적적으로 어려움을 함께 헤쳐나갔던 경험을 하고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고 고백하며 이 민담설화를 발전시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1성서 창세기의 이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의미가 되는 것은, 야훼 공동체는 어려움을 직면하더라도 우리가 신앙을 잘 지켜내면 결국에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었음을 고백하게 한다는 희망을 남겨주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자기비움을 충실하게 수련하면서, 겸손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기다리는 신앙을 지켜낸다면, 통쾌하고 감사가 넘치는 결론을 얻을 것이라는 이 민담의 교훈이, 오늘 우리의 마음을 울려주기를 빕니다.
다른 한편으로, 주인의 거사를 완수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끝까지 기다리며 인내한 아브라함의 종의 고뇌는 또 얼마나 깊었을까, 자기의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던 그의 마음을 휘젓는 불안감은 어떻게 떨쳐냈을까 생각해봅니다. 기다림은 십자가입니다. 자기를 비운 그 자리에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과정은 인내와 고난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인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곧 하나님의 성육화로 신앙체계를 정비한 종교입니다. 부활과 하나님나라의 소망을 위해 십자가의 고난이 필연적임으로 표방하는, 고난의 종교가 바로 우리의 종교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하나님의 뜻이 표징으로 완전하게 나타나기까지, 그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샘터에 리브가가 오기를, 나에게 물을 마시게 해주기를, 낙타에게까지 물을 마시게 해주기를 기다렸습니다. 리브가의 가족이 자초지종을 빠짐없이 이해하기까지, 리브가의 오빠 라반이 승락하고 부모가 승락하고 최종적으로 리브가가 청혼을 승락하기까지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징표가 빠짐없이 모두 나타나기까지 다 기다렸을 때 종은 단호한 결정을 내리고 지체없이 귀환을 합니다. 리브가의 가족이 딸과 이별하는 위로의 시간을 기다려달라는 요청은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뜻이었던 까닭에 기다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난하게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인내에 유혹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은 그것을 탐욕(epithymian)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말하는 탐욕 또는 정욕은 심리적인 욕심이거나 육체적인 타락이 아닙니다. 탐욕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하여 자신을 주장하는 오만함입니다. 타인을 자기화 하여 지배하려는 폭력입니다. 그 탐욕이 아브라함의 종을 얼마나 괴롭히며 유혹했을까요? 리브가가 낙타에게 물을 마시게 했을 때쯤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이해했노라고 인간적으로 판단하고, 그 순간 탐욕을 부려 리브가를 납치하듯 데려가고서 종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하고서 행한 것이라고, 자기 정당성을 항변할 수 있지 않을까요? 탐욕은 기다리지 못합니다.
오늘 로마서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탐욕에 자유롭지 못한 자신의 연약함에 대해 탄식하고 있습니다. 세례를 통해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시는 칭함을 받고 자기비움의 헌신으로 땅끝에까지 선교함으로써 거룩한 지경에 이르기를 힘써온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손이 닿지 않은 마음 깊은 곳에 탐욕이 있어서 괴로운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24절,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자신의 부덕함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덕은 선을 이루는 힘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따르려는 속사람의 의지가 자신의 부덕함으로 꺾여버리는 연약한 사람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탐욕을 지켜보면서 한 가지 원리를 깨닫습니다.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 육신의 지체에는 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결단한 사람에게 죄는 죽은 상태로 있지만, 탐욕이 그 죄를 일으켜서 세례를 받은 자를 악으로 인도한다는 관찰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따르기로 한 ‘속사람'의 그 마음에, 탐욕에 의해 되살아난 죄가 육신의 지체를 지배해서, 다시 ‘옛사람'이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원리 대로 바울은 율법에 대해서도 설명합니다. 율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는 표준으로서 율법도 하나님 은혜의 산물임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율법으로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유대인들, 곧 바울의 적대자들의 탐욕이 율법을 기준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을 죄악으로 이끌고 있음을, 바울은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의 그리스도인에게 율법주의자들로부터 해방하는 신앙의 자유를 가르쳤던 것입니다.
스스로 깨달은 그 원리로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전파함과 동시에 그 원리를 자신에게도 적용하면서 자기자신을 끊임없이 비우려고 분투했다는 점에서, 사도 바울은 존경받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율법주의자들에게 만연한 죄악을 비판하면서도 그 죄성이 혹시나에게는 없는지 살피면서 하나님 앞에 온전한 존재가 되기를 힘썼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발길이 닿았으나 피조성에 묶여서 죄의 세력에 휘둘리고 있는 신앙의 절규를, 바울은 우리에게 솔직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자기비움 영성의 깊은 차원입니다.
사도 바울의 곤고한 고뇌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하나님의 은총으로 해소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죄악으로 이끌려 결국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우리 실존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얻었다는 고백입니다. 그 가능성이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 죽음을 받아들이신 예수.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일으키시어 부활하게 하신 그 사건을 구원의 가능성으로 믿게 된 것입니다. 죄악의 세상이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탐욕을 부리게 하고, 그 탐욕이 우리의 죄를 일으켜서 곤고하게 만들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부활의 첫 열매를 맺어주신 하나님의 은총으로, 우리는 언제나 죄의 법, 죄의 권세와 싸워나갈 수 있는 힘, 하나님나라의 덕을 쌓아갈 수 있는 희망을 얻은 것입니다. 죄의 법에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의 법 안에서 고난과 죽음의 반복적인 연단으로 우리의 속사람을 양육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사도 바울로 하여금 그의 고뇌에서 해방시켰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멍에는 고난과 죽음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우리 마음에 안식을 안겨주는 길입니다. 고난과 죽음이 참 안식이라는 이 역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개입으로 가능합니다. 자기비움의 과정에서 발견한 탐욕, 그 탐욕에서 해방하여 완전한 구원에 이르기를 갈망하는 이에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희망을 선물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은 우리가 그 선물을 받는 것임을 우리는 잘 압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이 선물을 잘 받지 않았을까요? 탐욕을 이겨내려고 하나님의 선물을 기다리는 이에게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은혜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11:28-30)
복음의 힘으로 우리의 탐욕, 이 시대의 탐욕을 이겨나가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창조해가는, 우리 향린 공동체 되기를 기도합니다.
잠시 침묵합시다.
(침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