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서신 자리 ㅣ 남기평 ㅣ 2023-08-13

by 김지목 posted Aug 16, 2023 Views 137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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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3-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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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서신 자리

마태복음 1425-32

 

먼저, 예수님의 평화가 여러분들과 여러분들의 가족 구성원들 그리고 주변 이웃들에게 가득하기를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처럼 우리 주변에는 과제가 산적합니다. 그 과제를 푸는 숙제는 개인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크게는 공동체에게, 더 크게는 국가라는 공동체에게도 주어졌습니다. 각각이 감당해야 할 역할과 의무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불협화음이 나타나고, 결국에는 약자에게 그 책임과 무게들이 쏠리게 됩니다. 이들은 극단적 선택으로 내몰리게 되고, 선택지가 많이 없기에 가장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됩니다. 이를 막아주는 것이 공동체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공동체의 존재여부, 쓸모여부 즉, 효용성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팬데믹이라는 긴 터널의 끝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지난 3년 간, 미우나 고우나 국가 공동체의 쓸모를 톡톡히 체감했습니다. 재난상황에서 <컨트롤 타워>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여러 참사를 통해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은. 이 컨트롤 타워가 사라진 느낌입니다. 작년부터 우리는 줄곧 재난을 맞닥뜨렸습니다. 그런데 이 재난의 결과들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예방이나 방제차원에서의 논의도 없어졌고, 시시비비만 가릴 뿐입니다. 이는 국회라고 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이들의 정쟁은 소음 그 이상의 수준으로 눈살을 찌푸릴 뿐입니다. 지난 30년 동안 대한민국은 각자도생의 삶을 살라고, 정부, 사회 그리고 그들이 지향하는 교육이 지금의 청소년들과 청년들을 그렇게 우리 모두를 떠밀었습니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나 자신의 관리와 나 자신의 평화에만 몰두하고, 이를 침해받으면 공정의 잣대를 들이밀며, 타인의 자유와 평화 따위는 쉬이 침범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이곳에서는 이해와 대화는 자체가 없습니다. 그저 나 자신의 안위와 지엽적인 개인의 자유에만 집착할 따름입니다.

오늘 구약에서도 요셉의 형제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셉과 형제들은 대화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단절되었습니다. 서로를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들의 단절과 분절은 이윽고 요셉을 죽이려는 음모로까지 이어집니다. 형들은 요셉을 발견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창세기 3719절 하반절입니다.

 

19b., 저기 꿈꾸는 녀석이 온다.

 

꿈꾸는 자는 이상주의자이거나 몽상가로 치부되기도 합니다. 때로는 낭만주의자로 비춰집니다. ‘자체가 자신의 안위와 개인의 자유에만 집착할 때에는 은 비판의 대상이고, 지적의 대상이 될 때가 많습니다. 꿈을 꾼다는 것은 도전할 마음을 갖는 것이고, 도전할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실패를 받아드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 과정을 참지 못하면, 요셉이 구덩이에 던져졌던 것처럼, 그 꿈은 저기 모를 깊은 구덩이에 던져질 것입니다. ‘은 히브리어로 하람חֲלֹם을 사용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복수형으로 사용할 때, 하람은 하찮은 일로 그 뜻이 변합니다. 어찌 보면 분단된 대한민국 사회에서, 남북뿐만 아니라 남남도 여러 조각으로 파면화 된 사회에서 꿈들은 하찮은 일, 쓸모없는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통일은 다 되었어라는 묵직한 문익환 목사의 읊조림 또한 현실을 모르는 꿈일 뿐이라고 우리는 무시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의 신약의 이야기는 정말 많이 알려진 물 위를 걷는 기적사건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전 이야기는 우리가 익히 기억하는,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풍성한 나눔이 끝난 후, 예수님은 제자들을 강 건너로 보냅니다. 예수님은 산에 올라가 홀로 기도합니다. ‘홀로는 헬라어로 μόνος모노스를 사용합니다. ‘홀로, 유일한이라는 뜻과, ‘격리된, 고립된, 분리된이라는 뜻도 지닙니다. 23절을 보겠습니다.

 

23.무리를 헤쳐 보내신 뒤에, 예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올라가셨다. 날이 이미 저물었을 때에, 예수께서는 홀로 거기에 계셨다.

 

밤은 어둠입니다. 예수님이 보통 늦은 밤이나 새벽에 하나님과 일대일로 기도하는 장면이 사복음서 곳곳에 있습니다. 밤은 어둠이지요. 예수님은 홀로 고뇌합니다. 그리고 새벽을 맞이하지요. 밤이 지나면, 해가 뜹니다. 이는 만고의 진리입니다. 자연의 법칙입니다. 우리의 생체리듬에만 차이가 있을 뿐, 기어코 아침은 찾아옵니다. 이렇듯 우리들도 하루의 시간을 겪어내는 것처럼, 선택과 결정의 순간도 옵니다. 이 순간이 지나면 이에 대한 책임도 지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어둠의 시간에서 광명의 시간으로 바뀌는 것은 어찌 보면 한 끗 차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누가 대신해주지 않습니다.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이 있고, 받아드리고 앞으로 헤쳐나가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가혹하다고 느껴지지만, 그래야 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선택의 순간마다 기도를 합니다. 그 기도의 내용은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증언하는 예수님의 진정성과 그 책임을 지는 자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로 고백하는 것이고, 기꺼이 제자가 됩니다. 예수님이 서신 자리는 기도의 자리였고, 책임지는 자리였고, 이를 증명하고 몸소 행하는 자리였습니다. 이것이 괴롭지만 하나님의 뜻입니다.

 

25절에는 이른 새벽이라고 나옵니다. 개역개정에는 사경이라고 번역하는데, 새벽 한 시에서 세 시 사이를 말합니다. 곱씹어 생각해 본다면, 새벽 한 시와 세 시는 가로등이 없거나, 밝은 손전등이 없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간입니다. 바로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시간이지요. 그야말로 어둠입니다. 어둠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두렵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물 위로 누군가가 걸어온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유령입니다. 바로 두려운 존재입니다. 까무러칠 일입니다.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비유가 있습니다. 물과 어둠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부정적인 비유입니다. 보통 하나 정도만 사용하는데, 여기는 두 가지 부정, 즉 절체절명의 위기상황 혹은 엎친데 덮친격이라고 불 수 있습니다. 어두운데, 배까지 흔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예수도 우리에게는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네 인생이 그렇고, 바로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할 때가, 우리에게는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상황일 때, 우리는 긴장하게 됩니다. 모든 것을 낯설게 받아드립니다. 불안한 상황이기도 하고, 조심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사소한 것들 조차도 나를 해하게 하는 위협으로 받아드립니다. 제자들이 예수를 보자마자, 유령이라고 말했듯이, 어떤 것이 예수의 뜻이고, 선한 의도 인지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오늘도 새롭고, 우리들은 내일도 새롭습니다. 팬데믹 이후 우리들은 뉴노멀을 살아오고 있습니다. 3년 동안 인간 군상은 팬데믹 상황에 적응하면서, 변했습니다.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 그리고 전세계가 변했습니다. 비단 팬데믹을 겪은 것 뿐만 아니라, 시간이 흘러가면 우리가 인지하지 못할 때가 많을 뿐이지, 변합니다. 그 변화에 적응하는 것이 우리들의 숙제이지요. 영원한 숙제입니다. 광복을 맞이한 지 78년이 지났습니다. 78년 가까이 분단된 채 살아오고 있습니다. 너무 길었습니다. 여전히 어둠이고, 폭풍 안의 배처럼 우리는 여전히 흔들리고 있습니다.

 

유령은 헬라어로 φάντασμα판타스마를 사용합니다. ‘유령, 귀신, 환영, 허깨비로 번역합니다. 이 단어는 단 두 번만 신약성경에서 사용합니다. 똑같은 기적설화를 증언한 마가복음과 오늘 본문 마태복음에만 사용한 단어입니다. ‘판타지의 어원이 되는 것입니다. ‘환상은 서사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는 맹점이 있습니다. 환상을 사실처럼 본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기승전결이 있습니다. ‘가상의 인물이 살아 움직입니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이야기에 숨을 불어넣을 수 있지만, 실제가 아닙니다. 욕망의 투영일 수도 있고, 이기의 반영일 수 있습니다. 논리의 완결로만 따지만, 더할 나위 없습니다. 환상은 이데올로기입니다. 이데올로기가 완벽합니까? 그럼 예수가 판타스마(이데올로기)입니까? 실제입니까? 우리들의 믿음은 판타스마입니까? 실제입니까? 우리의 신앙을 여전히 허깨비로 인지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이 서신 자리는 판타스마입니까? 실제입니까? 실제를 선택하셨으면, 기도하고 행동하며, 책임지고, 괴롭지만 나아가는 자리이고, 판타스마라면, 허깨비를 보고 계시니, 대화나 설득, 화해가 되지 않습니다. 실제로 나오십시오. 논리의 완결로 결론짓는 게 아니라, 논리를 확장하고 책임지는 자리로 나와 연대해야합니다. 예수님이 서신 자리로 나오십시오.

 

제자들이 한 배에 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용이 없습니다. 그때 예수는 27절에서 말합니다.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공동번역에서는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 그런데 NIV는 재미있게 번역합니다.

 

"Take courage! It is I. Don't be afraid.“

용기를 가져라! 걱정하지 말아라. 좀 더 쉽게 번역하자면, 쫄지 말고 걱정 붙들어 매라.

 

오늘 여기 모인 우리들에게, 물 위를 태연하게 걸어와 다가온 예수님이 말합니다. 어둠에 머물러 있는 이들, 풍랑을 만난 모든 이들 그리고, 좁은 길을 걷고 있는 신앙인들에게 꼭 필요한 말입니다. 예수를 믿고 쫄지 않고 버틴다는 것, 그야 말로 신앙의 여정에서나 인생의 여정에서 쉽지 않는 일이지요. 모험입니다. 판타스마라고 생각했던 예수의 실제로 다가가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실제라는 마음의 바탕에, 두 발을 딛고 서 있으라고 권면합니다. 물 위로 나오라고 손짓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흥미로운 일이 벌어집니다. 바로 베드로라는 인물이 갑자기 툭 등장하는데, 이렇게 말합니다. 28-29절입니다.

 

28-29.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시면, 나더러 물 위로 걸어서, 주님께로 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예수께서 "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갔다.

 

베드로는 실행에 옮깁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베드로의 말입니다. “주님, 주님이시면, 나더러 물 위로 걸어서, 주님께로 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유령으로 다가온 예수님에 제자들은 놀랐습니다. 그리고 면대면으로 예수님이 용기를 가지라고까지 했는데, 아직도 베드로는 예수인지 긴가민가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금 확인하고 물 위를 걷기 시작합니다. 물 위는 걷는 것은 베드로의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선포 이후, 베드로의 실행이 있었기에 걷기 시작합니다. 우리들의 마음가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행하는 선한 일들은 주님의 명령을 곱씹어 봐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서신 그 자리는 예수와 함께했을 때, 위험하지 않은 자리입니다. 위태로운 자리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두려워하지 말라, 라고 우리에게 당부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짠 듯이 다시금 거센 바람이 불어오고, 무서움에 사로잡힙니다.

이스라엘에서 물은 상당히 무서운 존재입니다. 갈릴리 호수를 바다로 칭하고, 그곳에 거친 파도와 풍랑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물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물은 죽음을 상징하고, 유령이 사는 곳으로도 인식했습니다. 물 아래는 알 수가 없고, 물속에서는 1분 이상 숨 참기도 어려웠으며, 알 수 없는 존재들이 안에 서식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물 안개, 곧 해무가 낄 때면 여러 헛 것들을 많이 보이기도 하거니와, 밤 속에서의 물소리는 이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 물을 이긴다는 것은 실체를 알 수 없는 두려운 존재를 이긴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베드로는 그 사실을 깨닫고 다시 무서움과 두려움에 침잠합니다. 용기가 사라진다는 것은 다시금 무서움과 두려움이 스멀스멀 올라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럴 때, 신앙인들은 예수님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우리가 다시금 곱씹어 봐야하는 것은 예수님의 자리는 배 안이 아니라, 갈릴리 호수 위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을 물 수면 위로 초대합니다. 배가 없어도, 두 발로 물위에 서도 가라앉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시편 8510-13절은 예수님의 서신 자리를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10 사랑과 진실이 만나고, 정의는 평화와 서로 입을 맞춘다.

11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는 하늘에서 굽어본다.

12 주님께서 좋은 것을 내려 주시니, 우리의 땅은 열매를 맺는다.

13 정의가 주님 앞에 앞서가며, 주님께서 가실 길을 닦을 것이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31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곧 손을 내밀어서, 그를 붙잡고 말씀하셨다.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

 

NIV에서 믿음을 ‘belief’로 안 쓰고 ‘faith’를 사용했는데, belief는 신앙고백에 가깝다면, faith는 확신, 신념, 신뢰에 더 가깝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적은 사람보다는 확신이 부족한, 신뢰가 부족한 사람아, 가 맞습니다. 예수의 명령이나 그 뜻을 실행하는데 있어서는 신앙고백의 차원보다는 예수님를 얼마만큼 신뢰하고 확신하고 있는지가 더욱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베드로와 같은 실행력 또한 중요합니다. 여기 모인 우리들은 심장이 시키는 일을 해왔지요. 더 나아가서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자부하면서 살아왔지요. 그런데 지금 우리를 돌아보면, 어떤 모습일까요? 심장이 시켜서, 물 위에 발을 내딛기를 망설이는 베드로인지, 주님의 명령을 듣고 물 위로 나서는 베드로인지,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허우적 되고 있는 베드로인지를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이 세 가지 모습에는 한결같이 예수를 신뢰하고 그의 제자임을 확신하는 지를 묻고 있습니다. 신뢰와 확신은 심장을 강하게 하고, 심장이 시키는 일을 용기백배로 실행에 옮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배 밖에 계심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3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함께 배에 오르니, 바람이 그쳤다.

 

예수와 제자들이 다시금 배에 오르니, 바람이 그쳤습니다. 공동체의 중요성입니다. 어떤 공동체에 소속감을 느끼느냐에 따라서 어떤 바람은 바람따위로도 느껴지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능히 이겨낼 수 있고, 심장이 시키는 일을 충분히 하고도 남는 그런 공동체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서신 곳이 배 밖이지만, 줄곧 배밖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 돌아올 공동체가 중요합니다. 함께 부대끼고, 공감하는 신앙인들이 있는 공동체말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중요합니다. 천양희 시인의 <사람의 일>이라는 시는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고독 때문에 뼈아프게 살더라도

사랑하는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

 

고통 때문에 속 아프게 살더라도

이별하는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

 

사람의 일이 사람을 다칩니다

 

사람과 헤어지면 우린 늘 허기지고

사람과 만나면 우린 또 허기집니다

 

언제까지 우린 사람의 일과 싸워야 하는 것일까요.

 

사람 때문에 하루는 살 만하고

사람 때문에 하루는 또 막막합니다.

 

하루를 사는 일이 사람의 일이라서

우린 또 사람을 기다립니다.

 

사람과 만나는 일

그것 또한 사람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향린교회가 사람의 일을 중시하고, 사람의 일을 정성껏 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겠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이 계신 자리로 나아가고, 물 위를 걷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바람은 그치고, 어둠이 걷히고, 배는 다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좋은 공동체이고, 혼란스러운 대한민국 사회가 그렇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배밖에 한 걸음 한 걸음 우리 모두 걸어봅시다. 한 발작이 기적이 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의 일입니다. 한 주가 우리 모두가 사람의 일을 충실히 해나가는 신앙인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행동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이 서신 자리로 나아가십시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