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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지식을 초월하는 사랑 ㅣ 이성환 ㅣ 2018-07-29

by 이성환 posted Aug 03, 2018 Views 242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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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8-07-29

지식을 초월하는 사랑(사무엘하 11:1-15, 에베소서 3:14-21, 요한복음 6:1-21)

2018.07.29 성령강림절 열째주일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극심한 무더위로 심신이 많이 지쳤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럴 때 일수록 우리의 몸과 마음을 잘 추스르길 바랍니다. 긴 호흡으로 언젠가는 끝날 이 여름을 견뎌내시길 바랍니다. 이번 더위를 1994년 여름과 비교하던데 그해 여름 저는 슬래트 지붕아래 자취방에서 선풍기도 없이 지냈던 기억이 있습니다만 무엇보다 그해 여름은 폭염에 더해 요동치는 한반도 정세가 더 큰 기억으로 남습니다. 1994년 초 한반도는 정말로 전쟁 직전까지 갔었습니다. 이후 남북정상회담이 추진이 되는가 싶더니 결국 김일성 주석의 사망으로 남북관계가 다시금 경색되고 소위 조문정국으로 그야말로 위태위태한 여름을 지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것에 비하면 지금은 어떻습니까? 북미간 종전선언을 과연 언제 할까, 이미 지났지만 65주년이 되는 7.27 정전협정일에 할까, 8.15광복절에 할까, 아니면 9월 유엔총회에서 할까, 이런 전망을 하는 요즘 상황은 그해 여름에 비하면 희망이 뚜렷이 보이는 그나마 견딜만한 더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더위가 지나고 한반도의 평화가 선선한 바람과 함께 우리에게 다가오기를 소망합니다.

 

한주가 시작되는 지난 월요일 아침, 우리는 한 진보정치인의 비보를 접해야 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번 한 주간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간을 보냈으리라 생각합니다. 직접 빈소에 찾아가 조문을 한 분들도 꽤 있던 것으로 압니다. 그만큼 평소 그가 꿨던 진보정치의 꿈과 희망에 동의하는 마음들이 우리 가운데에도 간절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그의 삶이 다시금 조명되면서 정말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는 사실이 이 사회에서 회자되고 공감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론 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죄를 저지르고도 잘만 먹고사는 이들을 보면서 분노하게 됩니다. 결국 잘못과 실수를 대하는 자세의 차이가 이렇게 삶과 죽음을 가르기도 합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도 한편으로 제 마음속에 자리 잡는 무거움은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죽음을 선택한 이유에 대한 것입니다. 그는 왜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을까? 왜 그럴 수밖에 없었나? 과연 그가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만일 그가 죽음이외의 다른 길을 선택했더라면 어땠을까? 이런 고민들이죠. 

 

만약에 그가 살아서 이 모든 것을 감당했더라면 어땠을까. 언론과 수구세력들의 뭇매를 견뎌야 함은 물론이고 진보의 이름으로 그에게 가져다 댈 정의, 윤리도덕의 잣대 또한 감내해야 했을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세우려는 정의가 그가 평생토록 헌신해온 노동의 꿈, 그 모든 것을 흔들어 댔을 수도 있었습니다. 만일 이러한 가정과 그에 따른 고뇌가 그를 더욱 침잠하게 만들었다면 우리 또한 그의 죽음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죠.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내가 그 무엇을 한 것이 없지만 보편적인 인식구조 안에 내가 포함되어 있고 그 인식이 어느새 편견이 되어 어느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갔다면, 나 또한 가해자 일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러한 감수성을 지니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혹여 예수를 십자가로 내몰았던 그 군중가운데 있지는 않은지! 나의 행동과 생각이 우리의 이웃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았는지, 항상 나를 살펴야 한다는 것이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죄의 생산구조 안에서, 구조악의 시스템 안에서 하나의 부속으로 작동할지도 모른다는, 의식을 항상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가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 한 정치인의 죽음 앞에서 드는 생각이었습니다.

 

오늘 제1성서 본문은 한 인간의 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다윗이 저지른 대표적인 죄상을 고발한 본문이 오늘 읽은 사무엘하 11장입니다. 너무나도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만 오늘 본문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다윗의 주도면밀함과 사악함이 드러납니다. 

 

1절에 보면 다윗은 왕들이 출정해야하는 전쟁에 나서지 않고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왕으로서의 책임을 방기한데서부터 일이 시작됩니다. 다윗은 우연히 엿보게 된 밧세바라는 여인을 자신의 권력과 위계를 이용해 성폭행 한 것이죠. 그 여인에게 남편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그랬습니다. 지금의 시대정신으로 이 사건을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죠. 이와 비슷한 사건이 최근에도 있었습니다만 나중에 선지자 나단의 한 마리 양을 빼앗은 이야기를 통해 다윗을 꾸짖지만, 그것도 문제죠. 여성을 양으로 비유한 나단도 미투 대상이 되고도 남습니다. 가부장과 왕권이 뒤섞인 당신의 시대상을 감안하고 봐야할 일이지만 이 사건의 본질은 다윗이 절대권력을 이용해 억압과 착취라는 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거기에 더해 다윗은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더 큰 죄를 저지릅니다. 살인이죠. 그 여인의 임신사실을 알고 남편인 우리야를 궁으로 불러 치사한 후 부인과의 잠자리를 유도합니다. 그러나 율법에 의거 전쟁 중에 부인과의 잠자리는 안 될 말이었습니다. 비록 출애굽 한 히브리인은 아니지만 가나안에서의 전쟁과정에 다윗의 휘하가 된 우리야는 율법 지켰던 것입니다. 오히려 왕인 다윗이 율법을 어기려 했던 것입니다. 

 

결국 다윗이 계획했던 아이의 아버지가 자신인지 모르게 할 알리바이는 실패했습니다. 이제라도 사실을 고하고 사과를 했더라면 사건이 더 큰 비극으로 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잘못을 덮으려고 더 큰 죄를 짓고 맙니다. 총사령관인 요압에게 우리야를 전장에서 죽게 만들라고 전갈을 보냅니다. 요합은 다윗의 명령대로 그를 사지로 몰아 죽게 만들죠. 그리고는 모든 상황들이 의도치 않은 사건처럼 꾸밉니다. 

 

우리는 다윗이 저지른 것과 같은 죄악을 우리 역사에서 자주 봐왔습니다. 거짓은 더 큰 거짓을 낳습니다. 또 그 거짓을 감추기 위해 혹세무민 합니다. 또 진실을 말하는 소수를 곤경에 빠뜨리거나 윤리도덕적인 흠결을 들춰내어 망신을 줍니다. 이런 식으로 진실을 알고 있는 이들의 입을 막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왠지 모를 죽음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참으로 부조리한 세상입니다. 

 

무소불위의 권력! 그것만을 맹목적으로 좇아 살아온 이들이 이 땅에는 너무나도 많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만 있다면 모든 게 잘 될 거라고 그렇게 믿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미망에 불과합니다. 헛된 지식입니다. 에베소서는 신앙의 본질은 지식이 아니라고 증언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지식이상의 가치를 추구합니다. 바로 사랑이죠. 예수의 사랑은 이 땅의 모든 지식을 초월합니다. 이것은 구도의 길을 가는, 득도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사건을 대하는 자세, 우리의 삶이 전적으로 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지혜와 지식을 구하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아니겠습니까?

 

오늘 요한복음 본문은 유명한 오병이어의 기적이야기입니다. 네 복음서 모두가 공히 전하는 기적사건은 십자가 부활사건을 제외하면 이 오병이어의 기적사건이 유일합니다. 마리아의 처녀잉태 사건은 마태와 누가에만 기록되어 있을 뿐 마가와 요한복음은 그것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그만큼 오천 명을 먹인 급식사건은 수많은 이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데 중요한 전환적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과 나머지 공관복음에서 편집한 오천 명 급식사건의 내용과 의도는 달리 해석되기도 합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사건의 시기를 세례요한의 죽음이후로 이야기하는 한편, 요한복음에서는 유월절 즈음으로 편집해 놓았습니다. 세례요한의 죽음이 헤롯의 잔치자리 가운데 놓여 있기 때문에 예수의 오병이어의 기적사건과 헤롯의 죽음의 잔치가 극명하게 대비되는 게 바로 공관복음의 편집의도입니다. 

 

반면 요한복음의 오병이어의 기적사건은 유월절과 감사기도, 그리고 남은 부스러기를 모으라고 한 예수의 명령 등을 통해 성만찬적인 요소가 녹아 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요한복음에 최후의 만찬자리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세족식이 대신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관점과 의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네 복음서에 나타나는 공통점 하나는 제자들과 예수의 의견대립입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수많은 이들을 먹일 대안을 찾아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이 사람들을 다 먹이려면 이백 데나리온도 모자라다고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다른 공관복음서에 묘사된 제자들과 예수와의 갈등은 오늘 요한복음의 본문에는 다소 완화 된 듯 보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시각과 예수의 관점이 다른 것은 요한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은 그들에게 없는 이백 데나리온을 보았고 예수는 한 아이가 갖고 있는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보았습니다. 

 

같은 위기에 처했음에도 제자들과 예수는 다른 대안을 내놓았다. 이것은 기적의 재료를 이백 데나리온 이라는 가능성 없는 곳에서 찾는 제자들과 우리 안에서 그 기적의 가능성을 찾는 예수와의 차이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수가 베푼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과의 잔치자리, 그 잔치의 재료는 무엇이었습니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표현되는 가난함, 궁핍함이었습니다. 예수가 일으킨 기적의 조건, 기적의 재료는 이백 데나리온이 아니었습니다. 이백 데나리온은 제자들로 대표되는 이성과 지식을 가진 이들의 대안입니다. 

 

공관복음서에 나온 제자들은 무리들을 흩어 제각기 알아서 사먹게 하자고 합니다. 각자도생이죠. 지금의 시대정신과 맞닿아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시장의 원리에 맡겨서, 돈으로, 합리적인 대안으로! 그러나 예수는 그런 것을 기적의 재료로 삼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은 오병이어 기적사건이 가능했던 것은 제자들의 지식이 아니라 나눔이라고, 결국 사랑이라고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2001년 저는 WCC 중앙위원회에 스튜어드로 참여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시겠지만 WCC라고 하면 세계교회협의회라는 에큐메니칼 교회연합 단체입니다. 총회가 8년마다 한 번씩 열리고 중앙위원회는 2년 마다 한 번씩 열리게 됩니다. 보통 스튜어드라고 하면 행사를 돕는 자원봉사자 개념인데 전 세계 기독청년들이 신청하고 서류심사를 거쳐 모집을 하게 됩니다. 당시 회의는 독일 포츠담에서 열렸고 스튜어드로 참여한 청년들은 전 세계 40여 개국에서 온 6,70여명 정도였습니다. 당시 기독청년 단체에서 일하던 저도 신청해서 스튜어드로 참여하게 된 것이죠. 

 

본 회의가 시작하기 전 2주 정도를 함께 모여 중앙위원회에서 논의될 여러 주제를 미리 점검하고 논의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그리고 각 대륙과 나라의 문화를 접할 수 있는 말하자면 장기자랑 같은 시간을 갖기도 했습니다. 워낙 여러 나라에서 모여서 매일 저녁 대륙별로 진행을 했는데 제 기억에 남는 이들은 독일 청년들이었습니다. 평가야 어찌되었든 당시 제가 그리 바라던 통일을 이미 경험한 나라 아닙니까?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그 역사적이고 감동적인 경험을 한 이들에 대한 기대가 있었던 것이죠. 개최국이다 보니 10명이 넘는 청년들이 함께했는데 노래와 춤이 섞인 공연을 마친 후 그들은 ‘우리는 하나다.’ 라는 구호가 적힌 전지를 들고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개중에는 눈시울을 붉히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모든 순서를 마친 후 저는 한 독일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는 통일 된지 10년도 넘었는데 우리는 하나라는 구호는 시기가 지난 것 아니냐’ 제게 대답을 한 친구는 동독 출신이었는데 그는 ‘아니 우리는 아직 통일이 되지 않았어’라고 답을 했습니다. 사실이 그랬습니다. 제대로 섞이질 않은 거죠. 당시 독일 청년들은 자신을 소개할 때 반드시 출신지역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동독과 서독 청년들은 서로 어울리질 않았습니다. 

 

기장총회에 와있는 독일 선교사의 증언도 그렇습니다. 그는 동독출신이었고 대학은 서독에 있는 학교로 갔다고 합니다. 그 학교에도 동독출신의 학생들이 좀 있었는데 거기서도 마찬가지로 동과 서로 나뉘어 지냈다는 것이죠. 바닷가로 MT를 갈 때면 동서로 갈리어 따로따로 모여 놀았다는 겁니다. 

 

독일통일 30년이 다되어 가는데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동독과 서독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아직도 버젓이 살아남아 사람들을 가르고 차별한다는 것입니다. 

 

평화와 통일을 준비하고 기대하는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할 대목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도와 시스템으로 대변되는 사람의 지식은 헛된 것일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 우리는 종전을 선언하고 평화를 선포하는 신앙인으로서의 운동을 하고 있고 북미간의, 남북간의 제도적 평화체제를 마련하라고 요구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한 제도와 시스템이 정착되는 것이 지금의 목표일 수는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마련이 된 후, 우리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평화운동을 통일운동을 벌여 나가야 할 것입니다. 종전을 외치고 평화를 선언할 우리 공동체가 가져야할 것은 지식이 아닙니다. 보다 완벽한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토론이 아닙니다. 우리는 나눔과 사랑에 기반을 둔 전혀 새로운 길로 나서야 합니다. 그것이 요한복음의 오병이어 기적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일 것입니다.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가지 않는 이들,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이치를 거슬러 살아가는 이들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 이것 하나로 세상의 모든 제도와 시스템, 사람의 지식을 초극하며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진실을 세워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침묵하겠습니다.

 

내가 추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되돌아보십시오.

만일 그것이 우리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거든 

가던 길 멈추고 삶의 좌표를 예수께로 맞추십시오.

그리고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친 그 길로 걸어가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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