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단테 소스테누토 ㅣ 피경원 ㅣ 2023-10-15

by 김지목 posted Oct 19, 2023 Views 117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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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3-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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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5 하늘뜻 펴기


 

안단테 소스테누토(Andante Sostenuto)

(빌립보서 4:1~9)

피경원

 

제게는 뭔가 골똘히 생각할 때면, 사무실 안을 왔다갔다 하거나 공터를 천천히 걷는 버릇이 있습니다.  천천히 산책하며, 운전중 음악을 들으며 하늘뜻펴기를 구상하다가 제가 참 좋아하는 슈베르트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 D.960 가운데 2악장의 지시어  ‘안단테 소스테누토’ 그대로를 제목으로 써도 괜찮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서양음악의 빠르기 지시어로서 안단테는 “천천히 걷는 빠르기로”를, 소스테누토는 “음의 길이를 충분히 끌어서”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안단테 소스테누토는 “생각에 잠겨 산책하듯 음 하나하나를 충분히 눌러서 느리게 연주하라.”는 의미입니다.  눈감고 같이 한번 들어보실까요? (연주음) 이 가을에 천천히 산책하면서 듣기 좋은 음악입니다.

 

굳이 어려운 이탈리아어 제목을 선택한 이유는 오늘 주어진 본문 빌립보서 4장 1~9절 내용을 하나하나 따라가다보면 저절로 밝혀질 것입니다. 먼저 4장 1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고 사모하는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나의 기쁨이요 나의 면류관인 사랑하는 여러분, 이와 같이 주님 안에 굳건히 서 계십시오.”

 

‘그러므로’로 시작하네요.  원래 4장 1절은 앞선 3장 12~21 절 내용의 맺음말인데, 편집 과정에서 어찌어찌 4장으로 넘어갔습니다.  학자들은 빌립보서를 원래의 옥중서신에 나중에 쓰여진 서신 다시 말해 빌립보서 3장 전체와 4장 1절, 그리고 4장 8~9절이 덧여진 거라고 합니다.  오늘의 본문 4장 1절과 2절 사이에도 두가지 서신 간의 경계선이 그어져 있습니다.  4장 1절 끝 문장 “이와 같이 주님 안에 굳건히 서 계십시오.”가 가리키는 내용은 앞의 3장 12~14절로 여겨집니다.  제가 읽어 보겠습니다.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굳이 지난 주일 본문을 다시 읽은 이유는 (저도 이 말씀을 좋아하긴 하지만), 지난주 10주기 추모예배를 드렸던 홍근수 목사님의 몇가지 좌우명 가운데 유일한 성구였기 때문입니다.  과거와 미래 사이인 ‘오늘’을 살아가는 종말론적 삶의 자세를 이보다 잘 표현한 성경 구절은 없습니다.  이미 이루어진 것에 머물러 안주하지 않고, 곧 거기서 탈출해서 앞으로 향하는 ‘탈-향’의 아이디어도 여기서 비롯하였습니다.  전 지난 1월 섬돌향린교회 창립 10주년 예배 하늘뜻펴기에서 “우리 모두 스스로 부여한 소명을 굳게 붙잡고 후회없이 실천할 수 있길 바랍니다. 그리고 언젠가 푯대를 향한 달음박질을 마치고 스스로 부여한 존재의미를 완수하는 그 날이 오면 멋지게 소멸하길 기원합니다.” 라고 말한 적 있습니다.   

 

다시 4장 1절로 돌아가 “나의 기쁨이요 나의 면류관인 사랑하는 여러분”이란 표현을 봅시다. 내가 누구로부터 ‘기쁨’이나 ‘면류관’ 같은 말을 들으면 어떤 기분이 들까? 내가 이런 말을 드릴 만한 분들은 또 누구일까?  지난 며칠간 교회 홈페이지 대문을 장식하던 빌립보서 4장 1절을 읽으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학자들의 재구성에 따라 8~9절로 바로 넘어가야 될 것 같지만, 오늘은 성서 편집자가 정리한 순서대로 따라가겠습니다. 2~3절을 제가 읽겠습니다.

 

“나는 유오디아에게 권면하고, 순두게에게도 권면합니다.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렇습니다. 나의 진정한 동지여, 그대에게도 부탁합니다. 이 여인들을 도와 주십시오. 이 여인들은 글레멘드와 그 밖의 나의 동역자들과 더불어, 복음을 전하는 일에 나와 함께 애쓴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도들에게 권면하는 내용인데, 앞서 2장에 있는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 이야기에 이어서 읽으면 자연스럽습니다. 여기서 빌립보 교회의 두 여성 지도자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불화에 주목합니다. 복음 전파와 봉사 활동에 두각을 나타내던 두 여성 지도자의 충돌은 교회에 큰 짐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두 사람에게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고, ‘진정한 동지’라고 불리우는 이에게도 중재를 요청합니다.  두 사람의 갈등이 노선 때문인지, 성격 때문인지, 감정의 엇나감 때문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우리 교회도 사람이 모인 사회라서 여러 이유로 갈등과 분열의 과정을 거쳐왔고, 지금도 진행중이지만, 사도 바울의 권면은 우리에게 위로를 줍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나와 함께 애쓴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오늘의 린을 이루는 과정에 함께 피와 땀과 눈물을 바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 4절과 5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여기서 “기뻐하십시오”는 빌립보서에서 계속 반복되는 시그니처 구절입니다.  억울하게 옥에 갇혀 고난 당하는 중에 오히려 “기뻐하라”고 권면하는 바울의 믿음이 대단하다.  예전에 다니던 교회에서 QT 또는 GBS(그룹 성서 공부) 때, 그렇게만 평가하고는 끝이었습니다.  내면의 기쁨과 평화를 추구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서 저자는 ‘기쁨’의 외적 실천 방안으로 ‘관용’이란 단어로 제시합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은 “항상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라.”는 말과 동등한 위치에 있습니다.  우리는 힘 안들이고 언제나 기뻐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긍정 마인드나 긍정 심리학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기는 웬지 힘이 들 것 같습니다.  관용을 실천하려면, 역지사지(易地思之)의 태도로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처럼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구원의 기쁨에 눈물 흘리며 찬양하는 신도들을 보기는 쉬워도 소외받는 노동자나 철거 위협을 당하는 세입자, 성소수자에게 관용을 보이는 신도를 만나기는 어렵습니다.  막상 저도 운전대만 잡으면 관용을 실천하기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잠깐.  옥에 갇혀 죽임을 당할지도 모르는 신세인 바울은 무엇 때문에 기뻐했을까요? 답은 빌립보서 1장 18절에 이미 나와 있습니다. “거짓된 마음으로 하든지 참된 마음으로 하든지, 어떤 식으로 하든지 결국 그리스도가 전해지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기뻐합니다. 앞으로도 또한 기뻐할 것입니다.”  앞서 바울은 1장 12절에서 “내게 일어난 일이 도리어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 도움을 준 사실을” 알아 달라고 얘기합니다.  어찌 되었든 간에 복음 전파라는 지상 목표에 도움이 된다면, 내가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거나 죽더라도 유익하다.  사도행전이나, 바울 서신 어디를 읽어봐도 바울이 투옥되거나 고난을 당하는 명백한 이유는 없습니다. 애매합니다.  아직 기독교가 불법화되기 전이었거든요.  아마도 오해를 받았거나 아니면 그가 ‘도시를 소란하게 한 자’로서 정치적 위험 인물로 지목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유없이 당하는 고난으로 더욱 고통스러웠을 터인데, 그러나, 그는 억울하게 수난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도움이 되었다는 점을 발견하고 기뻐합니다. 이는 인간의 계획과 프로그램대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Missio Dei)입니다.  안병무 선생님은 1장 12절에서 바울이 말한 ‘도리어’가 과거의 필연적 연속이 아니라 창조적 전환점이요, 창조자에 대한 신앙에서 생긴 사건이라고 갈파하십니다.  이유없이 당한 일을, 언어도단의 정황을 창조자는 ‘도리어’ 새 현실 창조의 밑거름으로 삼는다는 겁니다. 

 

성서는 이유를 모르는 고난 이면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이 놀랍게 실현되는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이 당하는 고통의 이유가 분명 있을 거라고 주장합니다.  인과율적 사고지요. 욥과 충돌합니다.  위안하러 온 친구들은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앞에 있는 불쌍한 사람과 자신은 다르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려 들었을지 모릅니다.  돌이켜 보면 누군가의 위안자로 나섰던 제 모습도 그러했습니다.  나의 내면의 사탄을 발견하면 물끄러미 응시합니다. 예수님은 또 어떻습니까?  로마 총독 빌라도는 예수의 죄목을 특정하기가 곤란했고, 매질이나 하고 놓아 주려 했습니다.  누가복음 23장을 보면 예수가 “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반대하고, 자칭 그스도 곧 왕이라고 하였습니다.” 라고 고발당하는데, 아마도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는 말씀을 세금을 바치지 말라는 의미로 오해해서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히 해석될 메시지가 아니지요.  예수는 바울의 경우처럼 극히 모호한 동기로 애매한 죄목으로 십자가에 처형되었습니다.  갈릴리 시골 촌뜨기가 억울하게 정치범으로 몰려 십자가에 달린 사건은 당대 역사가나 정치가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그 사건으로 인해 복음이 탄생했고, 세계사의 전환점이 되었으며, 복음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 나아가고 있습니다.  

 

1988년 가을 KBS TV토론에 출연하신 홍근수 목사님도 그냥 북한을 고무찬양하신게 아니라 옆에 있던 사람이 하도 북한을 ‘집단감옥’이니 ‘집단 거지촌’이니 하며 목사님을 흥분시켰기 때문에 문제의 발언이 갑자기 툭 튀어나왔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발적으로 휘말려 들어가는 사건 이면에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 넘어 향린을 쓰고자 하신 창조자의 계획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 다음 6절과 7절을 제가 읽겠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예전에 교회 수련회에 가면, 식사 전 암송 체크하던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오늘 우리는 자연스럽게 ‘사람의 모든 염려와 계산(헤아림)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화‘에 주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통이나 고난은 대부분 그 이유와 맥락을 잘 모릅니다.  인과관계가 뚜렷하면, 덜 억울할 수 있고, 바로 잡을 수 있지만, 고통의 이유를 헤아리기 힘들면 괴로움이 배가됩니다.  세월호, 이태원 참사 유족들의 고통과 괴로움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과거 우리 교회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갈등의 일부 현장에서 제3자로 참여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관용의 마음으로 인내하며 듣기만 해도 매우 고통스러웠는데, 당사자들은 오죽했을까 싶습니다.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선 용단은 만용이었음이 드러났고, 이내 무력감 속에 가만히 침묵할 따름입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관점의 차이든 맥락에 대한 이해의 차이든 당사자 입장에서 오해 받거나 억울하게 생각할 지점들이 발견됩니다.  외부의 악에 대한 정의로운 싸움과 저항의 과정에서 결국 자신이 반대하는 악을 흉내내게 된다는 아이디어가 맞아 보이기도 합니다.  악을 악으로 대항하고, 그대로 거울처럼 반사하고, 똑같은 것으로 앙갚음한다면, 우리는 단지 그 악을 영원히 지속시킬 뿐입니다.  이런 오해와 악의 반복 구조를 깨고 어떻게 하면 ‘평화’와 ‘관용’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이제 나중에 덧붙여진 서신 전체의 맺음말인 8절과 9절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읽으실 때, ‘무엇이든지’의 반복 리듬을 한번 타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형제자매 여러분, 무엇이든지 참된 것과, 무엇이든지 경건한 것과, 무엇이든지 옳은 것과, 무엇이든 순결한 것과, 무엇이든 사랑스러운 것과, 무엇이든지 명예로운 것과, 또 덕이 되고 칭찬할 만한 것이면, 이 모든 것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나에게서 배운 것과 받은 것과 듣고 본 것들을 실천하십시오. 그리하면 평화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저자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참된 것, 경건한 것, 은 것, 순결한 것, 사랑스러운 것, 명예로운 것, 덕이 되고 칭찬할 만한 것을 생각하라고 권면합니다.  참 세련되고 고상한 스토아 도덕철학적 가치들입니다.  국제적인 상업도시 빌립보에 살던 교인들에게 친숙한 언어입니다.  8절의 “생각하십시오.”가 표준새번역에서는 “골똘히 생각하십시오.”, 공동번역은 ‘마음 속에 품으십시오’로 번역되어 있는데, 전 ‘골똘히’란 말이 마음에 듭니다.  ‘안단테 소스테누토’ 지시어를 따라 느리게 음 하나하나를 충분히 눌러서 연주하듯 한발한발 의지를 갖고 꾹꾹 내딛으며 걷습니다.  보행의 리듬은 생각의 리듬을 낳고, 마음의 보행과 두 발의 보행이 묘하게 어우러집니다.  마음 속에서 일이 일어나려면 몸의 움직임과 눈의 볼거리가 필요합니다.  음악이 있다면 금상첨화겠지만, 리듬을 상상만 해도 충분합니다.  스트레스를 뿜어내는 밭은 호흡이 아니라 길고 깊은 숨을 들고 내 쉬며, 느긋하게 생각에 잠겨 듭니다.      

 

바울은 외부의 핍박과 내부의 분쟁에 휩싸인 빌립보 교인들에게 분노와 미움에 사로잡혀 평강을 잃고 사는 대신, 앞서 열거한 가치와 덕목들을 골똘히 생각하라고 권합니다.  훌륭한 가치와 덕목들을 ‘의지를 갖고’ 생각하지 않으면, 일전에 박희규 목사님의 하늘뜻펴기 제목처럼 ‘중력을 거슬러’ 변화하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게 본능에 이끌리거나, 마주하는 악을 자기 내면에 복사하게 됩니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이 있지요.  그리고 바울은 바로 다음 9절에서 실천을 주문합니다.  모든 것이 철저히 관념화되어 있는 헬레니즘 문화에 젖어있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본인의 모범을 본받아 구체적으로 실천하라고 도전을 던집니다.  억울하게 당한 숱한 고난의 과정에서 맛본 하나님의 평화의 경험이 스스로를 모범으로 내세우는 자신감의 근거입니다.  모범이 되신 신앙 선배들에 대해 묵상하고, 궁극적으로 우리들의 맏형 그리스도 예수로 거슬러 올라가는 믿음의 계보를 그려봅니다. 

 

우리 교회에는 각종 회의와 협의체가 돌아가고 있습니다.  오늘도 예배후 제직회, 미래선교연구위원회 4차 사업설명회가 있고, 다음주에는 목회운영위원회가 있습니다.  논의 전에 자기를 낮추신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옆의 형제자매를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합시다.  나와 다른 생각을 하거나 설령 그들이 나에게 적대적일지라도 그들의 칭찬할 만한 점들에 생각을 집중시켜 봅시다.  긴 호흡으로 인내하며 경청하는 의지적 노력이 필요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고상한 가치와 덕목들 가운데 몇가지만이라도 일상의 영역에서 ‘안단테 소스테누토’의 리듬으로 골똘히 생각하고 ‘관용’을 실천하다 보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임재하리라 믿습니다.  

 

이제 다함께 눈을 감고, 길고 깊게 숨을 들고 내 쉬며, ‘평화’와 ‘관용’의 실천과 우리 교회의 회복에 대한 소망을 묵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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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송사) 

 

이제 평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리라 굳게 믿고, 일상의 영역에서 ‘안단테 소스테누토’의 리듬으로 ‘평화’와 ‘관용’을 실천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