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을 가리는 세상, 영광을 가로지르는 우리 | 유영상 | 2023-10-22

by 유영상 posted Oct 26, 2023 Views 8587 Replies 0
Extra Form
날짜 2023-10-22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하늘뜻펴기 20231022 창조절8

 

"영광을 가리는 세상, 영광을 가로지르는 우리"

출 33:12-23; 시 96:1-13; 살전 1:1-10; 마 22:15-22

 

유영상

 

 

1. 들어가며

 

안녕하십니까. 서로 옆에 계신 교우님들을 마주 보며 평화의 인사 나누겠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를 빕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를 빕니다) 이렇게 인사를 하다 보면 서로의 안부를 묻게 되고, 서로의 취미와 고민을 나누게 됩니다. 그렇게 가까워지는 것 같습니다.
 

저는 커피를 무척 좋아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교회 주변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자주 마십니다. 내일은 어떤 카페에 가 볼까 설레는 마음으로 고민합니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습니다. 지금 방송실에 계시는 박정범 목사님이 커피를 자주 사주세요. 목사님이 좋아하는 카페는 예전 임시사무실 근처에 있습니다. 그곳에 가서 커피를 마실 때면 너무 맛있고 향미가 좋아서 자주 감탄합니다. 그렇게 커피를 마시고 교회로 돌아올 때면 그 맞은편에 조형물 하나가 있습니다.

 

KakaoTalk_20231021_111713566.jpgKakaoTalk_20231021_111715280.jpg

 

제목은 아침을 여는 사람들’. 많은 사람이 다닥다닥 붙어있습니다. 바삐 사는 현대인들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겠죠. 저 조형물과 똑 닮은 장면이 여러 곳에서 자주 보입니다. 바로 지하철이죠. 아침, 저녁 출퇴근 시간에 지하철을 탈 때면 정말 곤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숨이 막히고 땀이 납니다. 그리고 나와 모르는 사람과 원치 않게 몸을 붙이고 있다는 것에 어색한 기분이 듭니다. 불쾌한 감정도 들기도 하죠. 편치 않은 건 분명합니다.

 

작가는 이 작품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본 작품은 아파트에 거주하는 여러 다양한 세대들이 새벽공기를 가르며 직장이나 학교로 출근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아파트 거주자들은 본 작품을 통하여 서로 간에 활기찬 모습과 강한 신뢰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무언가 목표를 향해 아침부터 활기를 띤다는 것, 그 사이에서 풍겨오는 신뢰감, 작품설명은 전반적으로 긍정적입니다. 여러 사람이 이렇게 바삐 움직이니 더욱 활기는 배가 되는 것으로 보이는 모양입니다. 물론 여럿이 무언갈 할 때 힘이 느껴지는 건 맞습니다.

 

그런데 타인과 밀접해 있다는 건 생각보다 양가적입니다. 긍정적인 성격도 발견할 수 있는 반면, 원치 않게 타인이 내 몸에 닿아 있거나 이해관계가 얽혀 있을 때, 우리는 내 구역을 침범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죠.

 

이것은 심지어 타인과 나는 애초에 무관하다는 생각으로 번지기도 합니다. 쉽사리 나만 아니면 돼라는 말이 버릇처럼 나오며, 타인과 나의 연결을 우리의 논리에서 삭제하기도 하죠. 그런 상황 속에서, ‘연대는 가능할까?’, ‘공감은 가능할까?’라는 질문이 듭니다.

 

보통 내 삶이 결정되지 않았을 때, 정처 없이 떠돌 때, 불안할 때 느끼는 공포가 상대에 대한 증오로 확장되기도 합니다. 그 증오는 타인에 대한 관심을 거두고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하는 폐쇄성으로 이어지기도 하죠. “나라도 잘하자와 같이 여러 사회적 조건의 결핍과 박탈감이 서로를 압박하고 외롭게 방치합니다.

 

 

2. 출애굽기 3312-23절 주석 : 영광과 사건

 

이와 비슷한 악조건 속에서도 해방을 경험한 이들이 있습니다. 오늘 제1성서 출애굽기 본문에서 이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종살이하던 땅 이집트에서 탈출했지만 이집트에서의 삶을 추억하며 탈출한 것을 후회하기도 하고(16:2-3), 심지어 이집트에서 해왔던 금송아지 숭배를 다시 하기도 합니다(32:1-35). 그런 이들이 시내산을 떠나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으로 향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여기서 시작합니다.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에서 모세는 하나님께 묻습니다: “주님의 계획을 가르쳐 주십시오.”, “주님께서 친히 우리와 함께 가지 않으시려면, 우리를 이곳에서 떠나 올려 보내지 마십시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필히 약속하라고 요청합니다.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신앙의 모습으로 이집트 제국의 삶을 복원시켰다는 것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었을 테죠.

 

재촉하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약속합니다: “내가 친히 너와 함께 가겠다. 그리하여 네가 안전하게 하겠다.” “네가 요청한 이 모든 것을 다 들어 주마그러자 모세는 다시 요청합니다: “저에게 주님의 영광을 보여 주십시오.”

 

모세에게 하나님의 답변이 썩 분명하게 들리지 않았나 봅니다. 모세는 재차 요청하다 못해 심지어 그것을 보여달라고 하죠.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답변합니다: "내가 나의 모든 영광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나의 거룩한 이름을 선포할 것이다. 나는 주다. 은혜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불쌍히 여기고 싶은 사람을 불쌍히 여긴다."

 

모세는 영광을 보여달라고 했는데, 하나님은 다른 대답을 합니다. 그 영광이 실현되는 내용을 설명하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합니다. 그리고 종지부를 찍습니다. “내 얼굴을 보이지 않겠다.” 영광을 보여달라는 요청이 이런 답변으로 이어졌습니다. 엉뚱하지요. 영광을 보여달라고 했는데, 여기에 답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영광을 지나가는 것으로 설명하고, 얼굴을 보여주지 않겠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이해하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바라는 영광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줄 표징, ‘하나님께서 이곳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구나라며 그들을 안심시킬 확실한 실체였습니다. 그 경험이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출애굽기 24장을 보면,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본적 있습니다(24:17). 그때처럼 확실한 표징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에게 영광은 달랐습니다. 이집트 탈출 사건을 진술한 구절에서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홍해를 건너는 이스라엘 백성들, 이들을 쫓아오던 이집트 군대를 무너뜨리는 상황을 묘사할 때 영광을 드러냈다라는 모세의 고백에 쓰입니다(15:6). 이처럼 영광은 이스라엘 백성을 안심시키는 확실한 표징으로 식별되는 게 아니라, 사건 속에서 해방을 가능케 하는 조건으로 자리합니다.

 

그렇다면 사건 이후에 하나님의 영광은 무엇으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은 3319절에서 하나님의 성품으로 드러납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 앞을 지나가는 것,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선포하는 것, 주님의 것, 은혜를 베푸는 것, 불쌍한 이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죠. 큼직한 사건 속에서 해방과 구원을 가능케 했던 영광은 사건 이후 일상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가리키는 의미로 전환됩니다. 그렇게 사건과 일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순환됩니다. 해방 사건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영광이 일상에서 서로를 돌보는 하나님의 품성으로 계속되고, 그 하나님의 품성은 이 역사 속에서 또 다른 해방의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게 합니다.

 

이집트 해방 사건에서 경험했지만 이제는 일상에서 체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성품은 다음 장 34장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두 번째 언약으로 완성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약속이 됩니다. 우리의 약속은 시대의 과제가 되지요.

 

앞서서 연대는 가능할까?”, “공감은 가능할까?”라는 물음을 함께 나눴습니다. ‘아침을 여는 사람들작품을 봤을 때 오늘의 사회는 이 사회를 무엇이라 상상하는가, 재현하는가?’라고 도리어 물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구성하고 있는 사회는 단지 바쁘게 돌아다니는 이들의 자기 성취 공간일까, 개인이 각기 최대의 능력을 발휘하여 서로에게 폐 끼치지 않고 살아가는 개인의 사회일까. 고민하게 됩니다.

 

사건 속에서 해방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영광, 그 안에서의 연대는 우리를 억압하고 결핍 상태에 놓이게 하는 사회적 조건에 맞서 해방의 역사를 타인과의 관계에서 실천으로 옮기겠다는 선언이겠습니다. 그것을 행할 수 없는 건 우리의 의지가 박약해서라기보다는 그것을 가로막는 사회 조건이 무성하고 촘촘히 가로 막고 있기 때문이겠죠. 우리가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우리의 신체를 관통하고 있는 국가통제코드와 같은 사회의 조건들은 우리를 무력하게 합니다. 서로를 분절시키며 각자도생의 사회로 재현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사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할 수 없는 조건, 해방의 체험을 경험하기는커녕 그것에 대한 반동의 역사만 목격할 수 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때문에 아쉽게도 하나님과 우리의 약속은 유보되었고, 시대의 과제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와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3. 마태복음서 22:15-23 주석 : 하나님의 것은 무엇인가

 

2성서 마태복음서 본문을 함께 읽었습니다. 너무도 익숙한 본문이죠. 또 어렵습니다. 어려운 이유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이 본문의 해석에 쉽사리 동의하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죠. 보통 이 본문은 황제의 것인 세상의 영역과 하나님의 것인 종교의 영역이 구분돼 있다는 논지로 받아들여집니다. 서로 침해하지 않으니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자는 겁니다. 정교분리의 대표적인 근거이지요.

 

그런데 과연 그럴까 생각하게 됩니다. 우선 이 본문은 정교분리의 근거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정치와 종교 둘의 영역이 무 짜르듯이 구분돼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금은 로마제국 황제 아우구스투스에게 봉헌됐습니다.

 

로마제국은 어떤 국가입니까? 지중해 연안을 정복해서 큰 영토를 다시리는 제국이죠. 그들의 통치 방식은 관용이었습니다. 그 기준은 바로 로마제국의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숭배하는가, 납세를 올바르게 하는가입니다. 로마제국의 통치 체질상 속국들에게 조세를 받으며 부를 키워나가고 있었고 그 돈으로 끊임없는 정복과 응징, 학살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과 갈릴리에는 모두가 보편적으로 납부하는 인두세와 더불어 십일조, 그리고 성전세까지 세 가지 종류의 세금을 납부하고 있었습니다. 주체적인 경제권과 권리가 박탈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부담이 더욱 가중된 것이죠. 큰 위기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로마제국의 수탈 아래 급속도로 파괴되었습니다. 납세를 성실히 수행하지 못하면 납세 금액이 저조한 동네를 파괴했습니다. 속국이 마땅한 의무를 지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황제의 명령을 거역한 불신자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폭력은 일상으로 확산되어 이스라엘 민중들 사이에서 증오로 순환됐습니다. 자신보다 가난한 자를 낙인찍고 노역을 하지 못하는 이들, 일을 하지 못하는 이들을 무시했습니다. 성서는 이런 이들을 두고 죄인이라고 지칭합니다. 우리가 정치와 종교의 고유한 영역으로 이해하는 납세와 숭배가 로마제국의 통치 상황에서는 구분할 수 없게 교차합니다.

 

이 특징은 동전이 가지고 있는 문구에서 도드라집니다.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앞면엔 황제 티베리우스, 신이신 아우구스투스의 존엄한 아들”, 뒷면엔 최고의 대제사장, 신들의 보좌에 앉은 황후 리비아”. 로마제국의 상징으로 등장한 두 인물은 이렇게 정치와 종교의 영역에서 최고의 존엄한 칭호로 불리며 정치와 종교의 영역을 부단히 횡단하다 못해 결합하여 화폐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러한 아우구스투스는 이 세상의 주님으로 칭송됐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오늘 마태복음서 본문은 예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당면한 최대의 문제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로마제국의 통치를 받고 있는 지금, 야훼 하나님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심지어는 로마제국 황제를 주님이라 칭송하는 상황 속에서 야훼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가? 그때 약속했듯이 영광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를 가로질러 가고 계신가?’

 

예수님에게 바리새파와 헤롯당원이 다가옵니다. 이들은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집단이지만, 예수님이 18절에서 이들을 통틀어 위선자들이라고 지칭하듯이 로마제국과 이스라엘이 통치국과 속국 사이로 존립하는 데에 공모한 집단, 사건과 일상 사이에서 영광을 가로막는 이들입니다.

 

이 위선자들은 예수님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진실한 분, 하나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는 분,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는 분, 겉모습을 따지지 않는 분. 그런데 실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들에게 진실하고, 참되고,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고, 겉모습을 따지지 않는 주님은 오직 아우구스투스 뿐이라 믿었기 때문이죠. 야훼 하나님만이 주님이라고 알고 있지만 침묵하고 권력에 편승하는 바리새파와 제국 이데올로기를 공공연하게 선전하는 헤롯 당원의 합작이죠. 그런 그들은 예수님에게 납세에 관해 묻습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이들의 간악한 생각을 간파했습니다. 답변을 하기 보다, 납세할 돈을 보여달라고 먼저 말합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이 초상은 누구의 것이며, 적힌 글자는 누구를 가리키느냐?” 바리새파와 헤롯당원, 이 위선자들은 대답합니다: “황제의 것입니다.” 그들이 들고 있던 건 황제를 두고 신, 대제사장이라 적혀 있는 동전이었습니다. 그 돈은 데나리온으로, 로마 황제 권한으로 직접 발행하는 화폐였고, 아우구스투스에게 공물과 함께 봉헌되는 세금이었습니다. 그 봉헌 행위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스스로 식민국 백성임을 인정하는 행위이자, 우리의 주님 야훼 하나님 대신 로마제국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주님으로 섬기겠다는 종교적인 의례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서 납세 실천 여부를 묻는다는 건 굉장히 정치적인 취조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답변합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 이를 듣고 위선자들은 탄복하며 돌아갑니다. 탄복하며 돌아간 이유는 원하는 답을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먼저 돌려 드려라의 맥락상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돌려준다는 건 나의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을 다시 줄 때 그 의미가 통합니다. 애초에 나의 소유였던 적은 없으며 내가 가지고 있는 물품은 하나님께 잠시 빌린 것일 뿐이기 때문이죠. 여기서 황제의 것을 다시 돌려준다는 것, 하나님의 것을 다시 돌려준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각기 고유한 소유를 다시 복원시켜주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신앙 전통에서 창조물 중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은 없습니다. 이 대전제가 무너질 수 없습니다. 이 바탕에서 이 본문을 다시 이해하자면, 하나님에게 돌려드릴 것은 이 세상 전부인 반면에, 황제에게 돌려줄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신앙 바탕에서 황제의 고유한 소유는 애초에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돌려 드리라는 예수님의 답변은 애매모호한, 양쪽의 눈치를 다 본, 정치와 종교 두 범주를 다 존중한 답변이 아니라, 정치적인 취조의 덫을 피하면서 이 세상의 근간으로 야훼 하나님의 통치를 각인시킨 답변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하나님을 세상의 임금과 병존할 수 없다는 걸 우리에게 각인시킵니다. ‘여전히 야훼 하나님이 우리의 주님이다고 완곡하여 말한 것입니다.

 

앞서 출애굽기 본문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주님이라는 선언을 살펴봤습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하나님의 영광을 살펴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보기에 세상을 가로질러 해방의 역사로 나아가야 할 하나님의 영광이 로마제국의 납세에 부딪히고 있는 현실입니다(33:14, 18). 이전에는 이집트였다면,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제국일 테죠.

 

앞에서 우리는 오늘의 사회를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할 수 없는 조건, 해방의 체험을 경험하기는커녕 그것에 대한 반동의 역사만 목격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라 진단했습니다. 예수님도 그러한 상황이지요. 황제의 것과 하나님의 것 사이에 놓인 덫에서 우리가 놓인 역사의 토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다’, ‘해방의 역사를 약속하신 야훼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의 주님이다를 완곡하게 알려주었습니다. 또 그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질러 해방이라는 시대의 과제를 성취하는 그 오래된 약속이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함을 일깨워 줍니다.

 

 

4. 영광과 해방

 

예수님이 놓인 현실과 우리가 놓인 현실 맞닿아 있습니다. 그때든 지금이든 이 세상은 해방을 가능케 하는 영광을 가립니다. 예수님에게 정치적 취조를 하며 덫을 놓았듯이, 지금도 민중의 저항을 소음이라 여기는 사람들에게 그래서 당신 주적이 어디냐? 당신은 페미니스트냐? 인본주의자냐?”라는 낙인 찍힌 질문으로 덫에 빠지길 유도합니다. 또 동전을 보여주며 예수님의 입으로 아우구스투스가 주님임을 선언하려 했듯이, 우리에게는 평화를 위해 무기를 더 사야 합니까? 여성도 군대에 가야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각 가정을 짊어지고 있는 이들의 출근길이 늦어 지고 있는데 장애인 이동권 투쟁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쾌적한 동네를 위해 하루 빨리 재개발을 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묻습니다.

 

영광과 해방 사이에서 그것의 순환을 가로막는 덫이 여전히 존재하는 세상, 개인을 끊임없이 분절시켜 서로 대립각을 세우도록 유도하는 사회, 이 속에서 오래된 우리의 약속은 무엇일까요. 우리를 해방으로 이끄는 하니님의 성품이 일상 속에서 확장되어 사건으로 흐르고, 사건이 일상으로 흘러 해방의 역사가 순환되어야 하겠습니다.

 

 

5. 나가며

 

그때나 지금이나, 그 사이에 몇천년 시간의 간격이 있더라도 우리는 하나님 약속을 시대의 과제로 실천해야 하는 영광을 가로지르는 사람들입니다. 현실은 합리성을 이유로 정의 실현을 끊임없이 유보시킵니다. 각 개인은 서로 분절돼 있다는 믿음, ‘나만 아니면 돼라는 믿음이 역사의 분기점이 될 사건은 기약 없이 미루죠. 황제의 것과 하나님의 것, 타협과 진보, 그 사이에 덫을 설치하고 이 덫에 빠져 사건을 사건되지 못하게 하는 세상, 냉소와 힐난으로 반동의 역사에 힘을 더하는 세상,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우리의 신체를 관통하는 국가통제코드가 우리를 통제하는 세상,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약속이 불가능한 세상이지만 그럴 때일수록 하나님의 영광으로 이 세상을 가로질러야 한다는 시대의 과제 이행이 불가피한 지금입니다. 영광을 가리는 세상 속에서 영광을 가로질러 해방을 경험하시길 빕니다. 일상 속에서 그것을 하나님의 성품으로 순환되게 하는 우리가 되길 빕니다.

 

 

누군가 하나님의 것은 무엇이냐며 시대의 과제를 냉소할 때, 여러분들은 무어라 답변하시겠습니까? 데살로니가 공동체처럼 진노 가운데 우리를 건져 주실 예수님을 신뢰하시겠습니까?(살전1:1~10) 영광을 가로질러 해방을 성취하고 일상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실현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영광을 가리는 덫에 답변하시겠습니까?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