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가 소리지르리라!” | 곽건용 |2023-11-05

by 박정범 posted Nov 11, 2023 Views 103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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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3-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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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20231105 창조절10

 

문자가 소리지르리라!”

시편 19:1-14, 요한13:18-24, 누가복음서 19:37-40

 

곽건용 목사

 

 

안녕하세요.

 

제가 젊었을 때는 이렇게 초청 설교자로 와서 앞에 사설이 긴 걸 싫어했습니다. 바로 설교를 하면 좋겠는데 말을 길게 하는 거예요. 싫어했어요. 근데 제가 그거 하게 되네요. 사설을 좀 하고 시작하겠습니다. 홍근수 목사님이 감옥에 가기 전이니까 아마 팔십 년대 말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교역자들하고 교회의 직원들이 지방에 여행을 갔는데 청주에 들렀어요. 청주, 볼 것도 없는데... 청주 분들에겐 죄송하지만, 청주 별로 볼 게 없잖아요. 그래서 지나가는데 향린교회 간판이 있는 거예요.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이 빨갱이 교회 이름을 그대로 쓰는. 그때는 그렇게 불렸습니다. 향린 교회가. 같은 이름을 쓰는 교회가 있다는 사실이 너무 반가워서 들어갔습니다. 무조건 들어갔더니 목사님이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너무 반가워서 우리 사실은 서울 향린교회 목회자들이라고 얘기했더니 이 목사님이 너무 죄송해하는 거예요. 뭐 몸들 바를 몰라요. 그래서 왜 그런가 했더니. 이름을 허락 없이 썼다는 그 미안함, 이걸 가지고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아이 괜찮다고 정말 고맙다고 격려해 드리고 나온 기억이 있습니다. 향린공동체 교회가 네 개잖아요. 근데 LA에 또 하나 있습니다. ‘나성 향린교회그러면 쟤네들은 무슨 권한으로 저 이름을 갖다 쓰나? 이렇게 생각하실 분이 있을 것 같아서 제가 사설을 하는 겁니다. 1995-6년 당회록을 뒤져보면 나올 겁니다. 저희가 그 이름을 바꿔서 향린교회라는 이름을 쓰겠다고 당회에 공식으로 청원을 했었습니다. 그때 당회원들이 그걸 허락해 주셔서, 우리가 지금 나성 향린교회라는 이름을 쓰는 겁니다.

 

제가 딱 삼십 년 됐는데요. 향린 교회를 사임한 지가 그때도 9311월이었습니다. 30년 동안 몇 번 왔는지 모르겠어요. 기억을 해 보려고 해도 한국에 올 때마다 대부분은 여기 여러분들 앞에 와서 이렇게 말씀을 증언했었습니다. 김경호 목사님이 계실 때 여러 번 했었고 조 목사님 계실 때 했었고, 그다음에 김희헌 목사님 재작년에 와서 말씀을 전했는데 세월이 30년이니까 뭐 당연하죠. 낯선 분들이 많이 계시는 거 당연하고, 또 예배당도 낯설고 제가 오늘 처음 왔습니다. 그래서 몇 달 전에 설교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기뻤습니다. 가볼 기회가 생겼으니까 명분이 좀 있어야 하잖아요. 그냥 와서 뒤에서 앉아 예배드리는 것보다 9년이나 여기서 일을 했던 사람인데 좀 명분이 서겠다 싶어서 초청해 주신 장로님들께 감사했습니다. 오늘 와서 보니까 제가 생각한 거보다 뭐 생각도 그렇게 했지만 제가 낯익은 분들이 많지가 않고, 또 사실 그때 제가 있었을 때 교우였던 분들은 많이 돌아가셨죠. 돌아가신 분들 소식을 듣습니다. 지난주에는 황성규 목사님까지 돌아가셔서 이제 그 예배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반갑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좀 낯설긴 하지만 뭐 그건 자연스러운 거고 여러분을 다시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종교라는 게 어떻게 생겼는지 수많은 사람이 수많은 얘기를 내놨습니다. 종교의 기원에 대해서 오랫동안 가장 많이 받아들여졌던 얘기는 뭐냐면은 우리 사람들의 과학적인 지식이 없었을 때, 부족했을 때 뭐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 그다음에 어떤 자연의 압도적인 그런 천재지변 같은 것, 이런 것들이 일어났을 때 누구한테 빌어야 한다고 생각한 거고 그걸 막아야 한다고 생각한 거고 그래서 종교가 생겼다. 라는 말이 그런 이론이 오랫동안 정설 비슷하게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근데 요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죠. 다양한 분과에서 종교의 기원에 관해 얘기하는데 서로 다른 얘기를 하니까 그게 하나로 모이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저는 이 종교라는 것이 특히 제가 종교를 차별하는 게 아니라 유신론적 종교, 신이 있다고 어떤 절대자가 있다고 믿는 종교는 우리 같이 기독교인들처럼 그런 종교의 기원은 저는 아주 굉장히 고도의 인간의 정신 활동의 산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래전에 그게 있었지만, 돌도끼 들고 벌거벗고 사냥하러 다닐 때도 그런 종교가 있었지만, 어쨌든 그 시대에 사람들에게는 가장 최고의 어떤 정신적인 활동의 집약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존재를 상정하고 있잖아요. 그게 보이는 우리 일상생활과 관련을 맺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종교가 생겨났고 여전히 종교인들이 있고, 또 역사를 살면서 근대 이후 특히 종교가 없어질 거다 뭐 이런 얘기들을 많이 했는데 그들의 주장대로 되진 않았죠.

 

여전히 종교가 있습니다. 오르락내리락하긴 했지만 여전히 종교가 있고, 모양을 달리해서 종교가 계속 발전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쇠퇴하고 있지만, 교회의 쇠퇴와 종교의 쇠퇴는 다른 겁니다. 교회가 줄어든다고 해도, 쇠퇴하고 한다고 해서 종교가 없어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고 오히려 이제 앞으로는 종교가 그동안 우리 근대 이후에 근대라는 게 사실 서양 개념이지만 근대 이후에 사람들이 다양한 어떤 종교 전통들을 만들어 놨잖아요. 기독교, 불교, 회교, 유대교, 그 밖에 또 다른 여러 종교, 서로 자기들이 옳다고 주장하고 자기들이 어떤 절대적인 가치 혹은 진리를 갖고 있다. 혹은 추구한다 이런 생각을 해 왔죠. 그리고 다른 종교를 좀 얕잡아 보고 이래서 틀렸고 넌 저래서 틀렸고 이렇게 해 왔죠. 근데 21세기 이후에는 앞으로는 그런 경향은 더 줄어들 거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종교가 어떤 그 밑바닥에서 가장 깊은 데서는 서로 유사하다, 비슷하다는 생각이 점점 팽배할 거라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종교는 형태는 달라지지만 계속 유지해 나갈 거로 생각합니다. 물론 교회는 문을 많이 닫을 겁니다. 미국에는 정말 문 닫는 교회들이 엄청납니다. 그래서 이 상회, 장로교로 말하면 노회에서는 안타깝게 생각하죠, 문을 닫으니까. 근데 한 편으로는 또 그렇게 섭섭해하지 않습니다. 이거 좀 속내를 까는 건데 목사들이 하는 짓이 이런 겁니다. 그 상회가 다 목사들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한편으로 섭섭하고 안타까워하지만 또 그렇지 않은 면이 있어요. 왜냐하면, 부동산이 생기는 거예요. 교회가 문 닫으면 예를 들어 백 년 전에 그 교회를 만들어 놨던 사람들이 건물이 있잖아요. 그 건물의 소유권은 어디에 있냐면 상회에 있습니다. 노회에 있어요. 지방회, 노회, 이런 데서 가지고 있어요. 그럼 그 사람들은 돈이 생기는 거예요. 몇백만 불이 생깁니다. 좋은 일 한다 그러죠. 좋은 일 하겠죠. 근데 좋은 일만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교회가 교회를 비롯한 모든 종교가 다 이렇게 하락하고 있는데 그래도 저는 종교가 없어지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이유는 뭐냐 하면은 그 종교인들 가운데 소수의 사람은 여전히 어떤 그 절대적인 가치 Nirvana라고 부르는지, 구원이라고 부르는지 뭐라고 부르던 그 절대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게 종교가 그 통로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죠. 다른 어떤 무슨 학문이나 무슨 명상, 명상도 종교의 일종이니까 그런 것들을 통해서 학문적인 건 말고 이 뇌를 쓰는 거 말고, 뇌와 가슴을 동시에 쓰는 그 통로를 통해서 어떤 절대적인 가치나 구원 같은 거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다. 그런 사람들은 줄어들겠지만, 없어지진 않을 거다. 그게 종교가 계속 존속하는 하나의 이유죠. 사실 그런 사람들은 소수죠, 지금까지도 소수였고요. 우리가 다 그런 절대 진리를 추구해서 교회 나오는 건 아니잖아요. 사실상 매우 현실적인 사람이 그리워서 이런 거 있지 않습니까? 홍근수 목사님이 저를 미국으로 보내면서 물론 제가 자발적으로 갔지만, 목사님이 많이 권유했습니다. 왜 가라고 그러셨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가라고 그러시면서 '야 네가 가면은 사람들이 막 몰려올 거야, 너 같은 목사 없으니까' 다 보수적인 교회거든요. 지금도 그렇습니다. 삼십 년 했는데요. LA에서 한인 교회로서 열린 교회, 다섯 손가락 안에도 못 들어갑니다. 그렇게 작아요. 그러니까 야 네가 가면은 사람들이 목사님 표현 그대로 구름 떼처럼 몰려들 거라고 했어요. 구름 떼는커녕, 근데 제가 깨달았어요. 메시지가 좋거나 이래서 사람들이 오는 것만은 아니다 하는 거죠. 오랜 인연 인간적인 인연 그건 못 끊는 겁니다. 목사는 꼴 보기 싫은데, 말도 안 되는 소리 계속하는데, 못 옮겨요 교회를 그런 거죠.

 

그래서 보통 사람들에게는 종교가 왜 계속 유지 되느냐 하면은 제가 좀 저렴하게 얘기해서 이렇게 말씀드렸지만 어떤 연대가 필요하거든요. Solidarity라는 게 여전히 우리 인간에게는 필요합니다. 정으로 연결됐던 어떤 이념으로 연결됐든 뭐가 됐든 지 간에 그게 필요합니다. 내가 나 혼자가 아니라는 자각이, 인식이 필요합니다. 나 말고도 나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있어야 안심이 되거든요. 근데 그게 종교가 될 것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종교의 어떤 차이 불교나 기독교의 차이 같은 것들은 점점 옅어질 것이고, 그런 연대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계속 종교인으로 남아 있을 그것이라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게 앞으로는 여태껏도 중요했지만, 앞으로는 더 중요해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구약을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비록 학위는 못 받았지만, 구약을 공부하고 말씀드린 대로 우리 김 목사님 말씀하신 대로 책도 여러 권 썼는데 구약을 공부하면서 느낀 것 말씀드리고 그다음에 제가 오십 년 넘게 기독교인으로 살아오면서 느낀 것 말씀드리고, 얘기를 끝내겠습니다.

 

저는 구약을 공부하는 게 구약이 문서이지 않습니까? 문서, 책이에요. 그 책은 사람들이 만든 책입니다. 글자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에요. 사람이 만든 책입니다. 우리 손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절대적으로 인간적인 과정입니다. 학자들이 뭐가 원문에 가까운지 찾아서 그걸 편집한 책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한글 성경은 그걸 번역한 것이고 번역이 잘못됐다고 그래서 계속 개정하고 있는 겁니다. 앞으로도 계속 개정할 거예요. 왜냐하면, 원문이 개정이 될거거든요. 히브리어 원문이 얼마 후에는 개정될 겁니다. 물론 얼마가 될지 몰라요. 제가 처음에 학교 갔을 때, 삼십 년 전에 이미 하고 있었습니다. 구약성경 오판을 새로 편집하는 일을 하고 있었어요. 근데 아직도 안 나왔어요. 그 일을 전 세계에 구약 본문비평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데 아직도 안 나왔습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인간적인 과정을 거쳐서 나온 책이에요. 저는 그걸 공부한 겁니다. 이거를 어떻게 하면은 제대로 정확하게 분명하게 확실하게 이해해서 사람들에게 얘기해줄 거냐? 그 생각으로 공부했어요. 그래서 언어도 많이 공부해야 하고, 머리 아픕니다. 그래서 성서학자들이 머리가 빠집니다. 저도 많이 빠졌어요. 농담이 아니라 정말 성서학자들이 머리 빠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이 본문을 연구하는 사람들 사본 연구하는 사람들은요, 머리 성한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많이 빠졌어요. 그게 이렇게 점 하나 일점일획이라고 그러잖아요 이 점 하나 붙어있느냐, 떨어져 있느냐, 어디 붙어있느냐, 이걸 가지고 서로 논쟁하고 싸우고 네가 맞다, 내가 맞다 난리 칩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책이 지금 우리 책인데 그러니까 제가 얼마나 그 텍스트를 이해하는 데 집중했겠어요. 이거를 이 사람은 어떻게 얘기했고, 저 사람은 어떻게 얘기했고 그러다 이 사람, 저 사람 거 보지 말고 본문만 보자. 그래서 본문은 뚫어지게 종이가 찢어지게 읽고 별짓을 다 했습니다. 그러면서 살아왔어요. 그러다가 몇 년 사이에 조금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내가 이거 맞게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왜냐하면, 저는 구약을 공부하는 사람이죠. 동시에 크리스천이잖아요. 이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 있다고 믿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시기를 원하는 뜻이 거기에 담겨 있고, 우리는 그걸 찾아내야 하는 그런 크리스천으로서 살아오고 있으니까 이게 다가 아닌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이제 점점 생각이 달라지고 있었어요. 근데 제가 생각하고 고민하고 잠정적으로 내렸던 결론을 우리 말로 표현하기가 좀 힘들었습니다. 성경도 그런 경험을 한 사람이 쓴 겁니다. 그런데 표현하는 수단이 언어밖에 없는 거예요. 글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글로 표현한 거지. 글이 성경을 쓴 사람의 경험을 다 담고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글로 표현 안 되는 부분이 많은 거예요. 근데 학자는 그걸 못 꺼내 냅니다. 학자는 못 해요. 왜냐하면, 그 사람이 대하는 건 텍스트니까 못 꺼내죠. 저는 그 한계를 알고 있었어요. 제가 학자이기만 하다면 또 학자이기만 한 사람 많습니다. 내가 구약 학자인데 크리스천 아닌 사람이 있어요. 유대교인도 아닌 사람이 있어요. 그냥 학문으로서 구약 성서를 문서로, 고대 문서를 연구하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근데 저는 아니거든요. 그래서 이게 다가 아닌데 하는 생각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정말 하나님의 섭리는 놀랍습니다.

 

미국에 가면, 그런 거 많이 봅니다. 외로우니까 드라마도 많이 보고, 영화도 많이 보는데 제가 예능을 안 봤거든요. 근데 우연히 유튜브에서 어떤 예능을 봤어요. 한 이십 분도 안 되는 건데 첼리스트 장한나 씨가 나오는 예능을 봤습니다. 사회자는 유재석 씨고요. 그걸 보다가 제가 이 소름이 그냥 쫙 끼치는 걸 느꼈어요. 아 저렇게 말해야 하는 건데 나는 왜 저렇게 말을 못 할까? 아 그래서 쟤는 천재고, 나는 범재로구나 하는 생각을 한 겁니다. 뭐라 그러냐 하면 이 친구가 첼리스트잖아요. 첼로를 하다가 어느날 지휘자가 됐잖아요. 지휘자가 된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근데, 그 얘기가 작곡가는 악보로 표현하지 않습니까? 콩나물로 안 되니까 온갖 기호를 붙여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여긴 빠르게 해라, 느리게 해라, 등등의 기호를 붙이잖아요. 연주자는 그걸 보고 해석을 하는 거예요. 작곡자의 의도를 해석하는 거예요. 근데 연주를 할 때는 그런 걸 잘 몰랐는데 연주만 할 때는 몰랐는데, 지휘하게 된 이 계기가 이런 경험을 했다는 거예요. 어느 날 악보를 이렇게 보는데 악보가 막 소리를 지르더래요. 악보가 콩나물이 막 소리를 지르더래요 나 여기 있어 나 여기 있어 그러면서 막 소리를 지르더래요. 이거구나! 내가 왜 텍스트만 공부하는 것에 만족하지 못했는지 깨달은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을 들은, 경험한 사람은, 후대에 전하기 위해서는 글로 밖에는 표현 못 합니다. 녹음기가 있습니까? 녹화장비가 있습니까? 없잖아요. 글로 표현한 거예요. 근데 글에는 다 안 담겨요. 하지만 그 글에 담으려고 했던 사람은 그 소리까지 담고 싶었던 거예요. 안 되는 거지. 근데 그걸 읽는 사람이 할 일은 뭐냐 하면은 그 아우성을 살려내야죠. 글만 이해하는 게 다가 아니라 물론 글을 이해해야 소리를 살려낼 수 있습니다만, 글을 개떡같이 이해하면서 소리를 살려내지 못해요. 글을 정확하게 과학적으로 합리적으로 정신의 최대한의 역량을 발휘해서 그 텍스트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소리가 들리는 겁니다.

 

제가 구약을 공부하면서 느낀 것이 종교가 왜 계속 존재 할까 하는 물음과도 연결됩니다. 오십 년 이상 크리스천으로 살면서 느낀 건 이겁니다. 저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매우 부조리하고,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그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저는 그런 사람이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산상수훈에 말씀은 어떻게 그대로 하겠어요. 그중에서 제일 마음에 안 드는 게 왜 못 하니까 마음에 안 드는 겁니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왼뺨이 먼저인지 오른뺨이 먼저인지 모르지만, 뺨을 한 대에 맞으면은 다른 뺨을 들이대라. 그다음에 속옷을 달라고 하면 겉옷까지 내어줘라. 오리를 가자 그랬으면 십 리를 가 줘라. 저는 이 말이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아니 왜 이렇게 해야 하지? 뺨을 때리는 놈은 맞상대해서 때리진 않을지언정 내 다른 뺨을 내밀라는 게 말이 되냐고요? 그리고 속옷 달라는 데 속옷만 주면 되었지, 왜 겉옷까지 주냐고요? 오리를 억지로 가자 그러면은 오리만 가면 됐지, 왜 십 리를 가 주냐고 억지로 가자 그랬잖아요? 자기가 좋아서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 얘기는 근본적으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게 이건 자선을 베풀라든지, 긍휼을 베풀라든지 넉넉하게 줘라. 이런 얘기가 아니에요. 뺨을 때리는 놈이 나쁜 놈이죠. 그렇잖아요 그냥 폭력은 나쁜 겁니다. 그런데 더 맞아 주라는 거예요. 속옷 달라는 놈 나쁜 놈이죠. 가난해서 없어서 헐벗어서 그러면 그냥 속옷만 주면 되지. 왜 겉옷까지 줘야 하냐? 이거예요. 저는 이해할 수가 없었고 야속했어요. 하지도 못할 행하지도 못할 얘기를 왜 하라고 아니 당신은 그랬어? 만나면 이렇게 묻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근데 이것도 어느 날, 이게 이런 뜻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겁니다.

 

여러분 이거는 저항하라는 얘기에요. 저항의 방법입니다. 억압자, 권력자에대한 저항의 방법이에요. 근데 저항의 방법이라도 말이 안 되죠. 더 맞으라는 얘기 아니에요. 근데 어느 날, 계시처럼 깨달은 겁니다. 이게 어떤 한 사람이 이렇게 되면은 걔는 얻어맞고, 끝나는 겁니다. 어떤 한 사람이 오른뺨을 맞았는데, 오른뺨 맞았으면 그냥 끝나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저항을 떼 지어서 하면은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 어떤 나무에 올라 있는데 그걸 흔들어서 떨어뜨리려고 하지 말고 서로 다 나무에 기어 올라가 가지고 나도 때려봐 내 옷도 벗겨 봐 날 억지로 끌고 가봐 이러면 못 합니다. 그걸 강제하는 놈이 못해요. 무서워서 도망가죠. 혼자 저항하면 폭력적으로 할 수 있어요. 두들겨 패면 되니까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게 다섯 명이 되고 열 명이 되고, 백 명이 되고 천 명이 되면은 못합니다. 이게 이른바 비폭력 저항이라는 거예요. 혼자 비폭력 저항하는 거는 판판이 질 수밖에 없어요.

 

비폭력 저항은 연대가 기본입니다. 연대하지 않으면은 그냥 판판이 지는 거예요. 저는 우리 신앙이 이렇게 연대하게 만들어 주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걸 계속 얘기해야 하는 것이 바로 종교라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