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뜻펴기 20231225 성탄절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인 갓난아기"
사62:6-12 시89:1-4,19-26 딛3:4-7 눅2:8-20
민중신학은 한국사회를 배경으로 태동했기에 상황신학이라고 말합니다. 1970년대 한국상황에서 경험한 민중사건에서 신학의 근원적 의미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민중신학은 서구신학에서 상상하지 못했던 원리를 들추어내었고 이러한 까닭에 전혀 새로운 신학방법론으로써 신학사상계의 유의미한 족적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전태일의 분신을 목격한 민중들이 각성하여 한국사회 변혁의 불씨가 타올랐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는 약동이었습니다. 이러한 한국사회 민중사건을 목도한 학자들은 더이상 교리에 봉사하는 신학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기독교 교리를 이 세상에 완전하게 이식시키는 선교가 아닌, 민중사건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밝히는 신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따라 성서를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서구신학의 도그마를 증명하는 성서해석에서 벗어나서, 성서의 사건들이 모두 하나님나라를 지향하는 민중사건의 기록이었고, 화산맥이 땅 아래로 흐르다가 분출하는 것처럼, 이 시대에도 민중사건이 터져나와서 우리의 성서가 쓰여지는 것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이미 기록된 성서의 민중사건은 하나의 전거 곧 구원역사의 근거로 여기고 오늘날 민중사건에서 구원의 의미를 탐구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민중신학은, 상황신학이라고 해서 단지 특정한 상황에서만 유효할 뿐인 신학인 것이 아니라, 또한 신학방법론이라고 해서 다양한 방법론 중의 하나로 취급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서해석과 선교의 본질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한 혁명의 기제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안병무의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는 민중신학의 혁명으로 신앙의 본질을 톺아내는 삶을 지향하면서 오늘 성탄절을 맞이했습니다.
우리의 성탄절은 새로운 관점에서 이해되는 것입니다. 아기인 예수가 장차 자라서 우리를 악의 세상에서 건져줄 분이기 때문에 이 성탄을 기뻐하며 기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성탄을 이해하고 만다면, 인간의 운명을 정해놓고 교리의 틀을 벗어나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협박하는, 기계주의적인 신정론의 폭력에 굴복하는 것만 같습니다. 민중신학의 혁명적인 새로운 관점에서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고 성탄의 기쁨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공관복음서에서 소개되는 예수 탄생의 이야기들에는, 주전 4세기와 주후 6세기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이 펼쳤던 대 로마 항전의 단초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헤롯 대왕의 등장이나(주전 4세기) 시리아 총독 구레뇨의 호구조사(주후 6세기) 등이 그 단초들입니다. 로마 제국주의의 폭정에 봉기하여 저항했지만 번번히 실패하고 남은 것은 대학살이었습니다. 복음서가 기록되던 주후 60년대와 70년대에도 그런 형편은 매한가지였습니다. 로마제국의 폭력에 다시한번 목숨을 걸고 저항해야 했던 주후 60-70년대의 유대인들은 주전 4세기와 주후 6세기의 경험을 떠올리면서 아기 예수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무참하게 학살을 당했지만 그때의 해방을 향한 숭고한 뜻을 계승하기 위해서 작은 희망을 갓난아기에 투영하면서 항전의 결의를 다졌습니다. 이것이 성탄이었습니다. 해방을 향한 항거의 성공 가능성은 지금 비록 아기만큼이나 작디 작지만 구원을 약속하신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결사항전을 결의했던 것입니다. 성탄은 이토록 눈물겹게 처절했고 죽음까지도 불사한 각오였습니다.
따라서 성탄의 진정한 의미는 해방과 구원을 향한 결의에서 찾아야 합니다. 아기가 자라서 나중에 구원한다는 그런 미래적인 것이 아니라, 지금의 결단! 현재적인 의미로 성탄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넉넉한 여건을 가진 자들의 성탄이 아닙니다. 갓난아기처럼 희망이 한줌밖에 남지 않아서 생명까지도 내걸어야 하는, 절박한 심정을 가진 이들의 성탄이어야 합니다. 해방을 갈망하면서 하나님나라 실현을 위해 자신을 모두 드리우는 이들, 거대한 폭력에 풍전등화처럼 속절 없지만, 하나님의 신실하심, 생명과 정의와 평화의 세상을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으며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놓을 수 있는 이들. 그들이 품고 있는 희망, 그것이 아기 예수입니다. 민중신학자는 민중사건 속에서 보배처럼 빛나는 아기 예수를 가리키면서, 그 아기와 연대하는 민중사건에 동참할 때 비로소 우리가 구원을 얻는다고 증언했습니다. 이른바 민중메시아론입니다.
성탄을 기념하는 오늘,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아기 예수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백린탄 포화에 아이를 잃은 부모의 오열 속에, 오체투지의 간절한 엎드림에, 노동자의 인간다움이 상식이 되는 사회가 되기를 희망하는 오래된 천막 안에, 빼앗긴 생존권을 되찾기 위해 차디찬 밤 보도블럭을 녹이는 온기 속에, 성소수자의 삶을 축복하는 기도의 손 안에, 국가폭력을 좌시할 수 없어 굽힘없이 투쟁하는 이들의 외로움에, 핵오염수를 방류하는 인간종의 만행에도 유영하는 바닷속 생명체들의 무심함에, 기후위기로 미래가 닫혀버린 우리의 절망 속에. 오늘 아기 예수는 그렇게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아기는 연약하지만 새 힘을 안겨주는 신비한 존재입니다. 복음서의 민중들은 과거 로마제국에 의해 대학살의 끔찍한 절망의 역사를 상기하면서도 다시금 비장한 결의를 할 수 있었습니다. 현실을 초극하는 신앙의 신비한 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신앙의 신비함은 갓난아기가 주는 힘과 닮았기에 표징이 되었습니다. 신비한 그 힘은 민중들에게 기쁨으로 작용했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 은총과 같았습니다. 우리가 성탄절에 서로 나누는 기쁨은 바로 그 신앙의 신비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현실을 초월하는 신비로운 신앙의 힘이 우리에게 작용한 결과입니다.
이 성탄에 우리는, 신앙의 신비한 힘을 가지고 민중사건 속에 계신 아기 예수를 영접하러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 누가복음서에 갓난아기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습니다. 포대기, 얇디 얇고 꺼끌꺼끌한 우리의 포대기일지라도 아기 예수를 편안히 두룰 수 있는 정성스러운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구유, 우리가 생명을 살리는 도구가 되어 이 시대 아기 예수의 작은 희망들을 먹이고 양육해가는 우리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잠시 침묵하겠습니다.
……
(파송사)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사랑하심으로 편안히 가십시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입어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포대기와 구유가 되어
신앙의 신비함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성령께서
이 시대 아기 예수를 모시고 영접하는 우리 공동체 위에
늘 함께하여 주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