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동환입니다. 오늘 이렇게 향린의 강단에 초대해주셔서 반갑고 감사합니다. 어느 덧 2023년의 마지막 날입니다. 올 한해 여러분의 삶은 어떠하셨는지요? 지난 한 해를 쭉 돌이켜보니 행복하고 기뻤던 기억들도 떠오르지만 그것보다는 슬프고 괴로웠던 것들이 더 많이 스쳐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고통이 더 깊이 각인되기 때문일까요. 우리 사회 곳곳에 해결되지 못한 아픔의 현장들이 늘어가고, 거기서 더하지는 날짜들과 숫자로서 표현되지 못한 이야기들이 켜켜히 쌓인 것들을 마주하자면 뿌연 안개 속을 운전하듯 아득함을 느낍니다. 또한 그 어느 해보다 하느님의 창조세계는 크게 신음하였고 그로 인해 많은 생명이 스러져가기도 했습니다. 사회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속 시원한 소식 하나 들려오지 않는 요즈음이지만, 그럼에도 한 해를 잘 살아내신 여러분께 위로와 평화의 인사를 전합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아기 예수의 탄생 이후 부모들이 정결예식을 행하러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성전에서 시므온을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계시를 받은 시므온은 성령의 이끌림에 의해 성전에 갔다가 마침 아기 예수를 안고 들어오는 부모를 만나게 됩니다. 시므온은 단번에 그가 그리스도인 것을 알아챕니다. 그리고 아기를 축복하며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 가운데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도 하고 일어서게도 하려고 세우심을 받았으며, 비방 받는 표징이 되게 하려고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의 마음 속 생각들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는 마굿간의 말구유에서 태어나 가난한 목자들과 양들, 동방의 이교도들의 축하를 받으며 태어났습니다. 이는 앞으로 예수가 어떤 위치에서 누구와 함께 살아가게 될 것인가에 대해 잘 드러내 보여주는 상징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시므온의 예언을 통해서는 예수가 전하는 복음과 그의 삶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인지에 대해 보여줍니다. 어떤 이는 걸려 넘어지며 한편 어떤 이는 일으켜 세워집니다.
복음은 선명하고 분명합니다. 복음은 마치 거울과 같아서 그 앞에 서게 될 때에 감추어진 우리의 마음을 훤히 드러냅니다. 화려한 언변과 아름다운 수사도 그 앞에서는 무용지물입니다. 참으로 복음 앞에 서면 마음 깊은 곳의 중심을 드러내기를 요구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2019년 인천퀴어문화축제에 참석해서 축복식을 집례했습니다. 제가 소속되어 있는 기독교대한감리회에는 교단법에는 성소수자 관련 차별법이 있습니다. 동성애에 찬성하거나 동조하였을 때 정직, 면직, 출교에 처한다는 규정입니다. 퀴어축제에서 축복식을 한 것이 동성애 찬성 동조 행위가 되어 고발이 되었고 교단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심사를 받고 재판에 회부되기까지, ‘동성애를 죄라고만 하면’ 없는 일로 해주겠다는 회유가 심심찮게 들려왔다. 때론 아껴주시는 마음에 소나기가 내릴 때는 피하는 거라며 한 번 숙이고 넘어가라 권유해주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마음 속에 수많은 번민이 떠올랐다 가라앉더라구요. 그렇지만 결국 재판을 받기로 결심했고 그렇게 정직 2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이걸로 끝이구나 싶었는데 정직 기간이 끝나고 채 한달이 지나지 않아 또다시 고발장이 날아들었습니다. 이번에도 동성애 찬성과 동조를 했다는 혐의였습니다. 아마 다들 잘 아시겠지만 축복이란 목회자만의 특권도 아니거니와 특별히 능력이 있거나 대단해서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을 향해 어떤 대상의 복을 빌어주는 행위이지요. 복은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것이기에 축복에서 제외될 수 있는 대상은 없습니다. 하물며 사회적 약자는 말할 것도 없지요. 게다가 저희 저희 교회 성소수자 성도님들께 매주 축복기도를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계속해서 퀴어문화축제에 나갔고 부스를 열어 축복식을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끝난 두 번째 재판에서는 출교를 선고받았습니다.
두 차례 감리회 재판을 받으면서 보게 된 것이 있습니다. 재판공간에서 저를 고발한 이들을 계속 만났고 그분들의 주장들을 들을 수 있었는데요, 잘못된 정보와 왜곡된 신앙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더불어 인상적이었던 건 이미 굳어진 마음과 두려움으로 인한 적대적 행동과 분노표출이었습니다. 고발인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공정히 재판을 진행해야 하는 재판위원들까지도 어떤 소통도 하지 않겠다는 태도로 일관했고, 계속해서 저를 향한 적대감을 드러냈습니다. 아마도 그 마음 속에는 두려움이 있었을 겁니다. 동성애를 허용하면 교회가 무너지고 국가가 해체된다는 두려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신앙관이 무너질 것에 대한 두려움들 같은 것 말입니다.
오늘 구약말씀에 보면 유대사람들을 보는 바로의 마음에는 두려움이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태어난 아이들을 죽임으로 그 두려움을 해소하는 방법을 선택합니다. 인간의 마음이 그렇습니다. 낮선 존재를 두려워합니다. 그렇지만 낮선 존재는 언제고 우리 앞에 나타납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됩니다. 알아가려는 노력을 하며 환대하고 포용하며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내쫒고 죽여서 해결할 것인가 말입니다.
복음은 정체 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계속해서 시대에 따라 그 경계를 넓혀가며 우리를 낮섦으로 초대합니다. 복음의 본질은 확정성 그리고 포용성에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은 평생 우리를 어떤 경계를 넘어 가게 하는 시험대에 올려놓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잃어 버린 자가 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점검 하고 ‘복음에 선명성’ 앞에 우리를 세워야 합니다. 예수가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예수는 자신의 시대에 소위 ‘주류’안에 포함되지 못한 이들을 향해 나아갔고, 당시 사회의 질서자체였던 율법이 죄인이라 규정하는 이들과 더불어 먹고 마셨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복음은 이제 성령의 시대를 만나 바울과 사도들을 통해 이방인에게로도 나아갔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도저히 같이 할 수 없는 사람들이 함께 식사를 하게 됩니다. 이방인들도 세례를 받고, 성령의 능력을 입고, 전도자로서 세워집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공동체를 이룹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는 남자도 여자도, 이방인도 유대인도 노예나 자유인도 장애인과 비장애인도 성소수자와 비성소수자도 없습니다.
김근주 교수는 “자각한 여성의 존재가 여성 안수를, 흑인 그리스도인의 존재가 노예문제에 대한 견해를 제고하게 만들었다”고 말하며, “새로운 해석이 등장하는 것은 언제나 새로운 시대, 새로운 상황, 새로운 사람들의 출현”으로 인함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끊임없이 민중을 발견해왔고 이미 존재하나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아니 들리지 않았던 이들의 이야기를 증폭시켜 소개하고 연대하여 왔습니다. 그 안에서 여성 그리스도, 흑인 그리스도, 민중 그리스도에 대한 담론을 발전시켜 왔지요. 이제 성소수자의 존재는 우리로 성소수자 그리스도를 상상하게 만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끊임없이 우리 사회에서 밀려난 이들, 경계 밖으로 내어 쫒긴 이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그들을 호명해야 합니다. 들리지 않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신앙도 신학도 정체되어 있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머무름이 아니라 퇴행을 가져옵니다. 세상이 바뀌어가기 때문입니다. 변치않는 진리의 근간은 굳게 붙잡되, 끊임없이 세상과 소통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진리이면서 또한 동시대적이라고 한다면 반드시 오늘 날의 ‘오클로스’를 교회는 발견해내야 합니다. 저는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느님께서 주신 사명이라고 믿습니다. 그렇게 계속 경계를 넓혀 갈 때, 비로소 복음은 땅 끝까지 펼쳐져 나갈 것입니다.
지금 감리회에는 사상검증 광풍이 불고 있습니다. 전도사들은 목사가 되기 위한 진급 면접에서 동성애에 대해 묻는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소위 ‘반동성애 교육’도 필수적으로 이수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저를 처벌한 ‘동성애 찬성 동조 법’은 마치 국가보안법이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아대고 색출하여 공포와 자기검열로 밀어넣었듯, 저를 돕거나 응원하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감리회의 장로전국연합회는 “동성애 옹호에 가담할 경우 끝까지 추적해 출교할 것이며, 선동하는 자들 역시 발본 색출하여 처벌받게 할 것”이라며 성명서를 내고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성소수자를 축복했다고 목회자가 출교당하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많은 이들은 위축되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못한 채 숨어버리기도 합니다. 엄혹한 상황 속에서 용기를 내지 못하는 것이 어찌 그 사람의 잘못이겠습니까.
사실 저는 출교 당한 것은 비극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서부터 시작해야지요. 우리에게는 정직하게 복음 앞에서 서는 용기. 그리고 훤히 드러난 자신의 마음을 직면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오늘 서신서의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디모데후서 1장 7-8절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주님에 대하여 증언하는 일이나 주님을 위하여 갇힌 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함께 겪으십시오.”
낮선 존재를 마주한 바로 왕은 그리고 예수를 맞이한 헤롯은 결국 죽여 없애는 것을 택했습니다.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그 두려움이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우리 역시 어떤 시기에는 필연적으로 그들과 비슷한 선택지 앞에 서게 됩니다. 이 사회에서 한국인이며, 남성이고, 비성소수자이고, 대학을 나왔고, 비장애인이라는 것 등 어떤 부분에서 우리는 반드시 주류에 속하고 주류가 있다는 것은 비주류 즉 낮선 존재가 있다는 것을 뜻하기에 우리 역시 바로의 위치, 헤롯의 위치에 서게 될 수 있습니다. 거기서 낮선 이들을 적극적으로 부정하든 아니면 침묵으로 동조하든 혹은 긍정하고 배워가든 선택의 상황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 마음의 깊은 곳에 있는 것이 그대로 드러나게 되겠지요. 낮선 이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내쫓을 것인가 아니면 포용하고 환대 할 것인가. 오늘 복음이 우리 앞에 묻는 질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정명성 시인의 <겨울에>라는 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 매서운 삭풍을 멈추게 하거나
무자비한 눈보라를 그치게 하거나
어둡고 차가운 밤을 끝장낼
그런 재주가 내겐 없다
여기는 벌거벗은 동토
그저 그대 곁에서 기나긴 밤을 지새우고자
눈보라 속에서 그대와 손을 맞잡고
다만 그대와 함께 된바람을 맞고자
나는 여기에 있다
그것이 전부고
그것이면 됐다
봄을 꿈꿀 수 없는 혹독한 밤에
우리는 함께 별을 볼 것이므로
폭설이 쏟아지는 날에
우리는 눈꽃을 피울 것이므로
사나운 바람이 부는 들판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노래가 될 것이므로
시에 대한 해설에서 시인은 ‘구원은 함께 견디는 힘’이라 정의합니다. 견딘다는 것은 동시에 기다리는 일이며, 헐벗은 기다림이 숲을 이룰 때 비로소 봄이 온다고요. 사랑하는 여러분, 올 한해 많은 이들에게 또한 저에게도 구원이 되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 우리 앞에는 수많은 낮선 존재들이 나타날 것이고, 또한 우리는 그런 이들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때도 지금처럼 따뜻한 환대와 사려깊은 연대로서 그분들의 구원이 되어주시길 바랍니다. 그분들 역시 여러분의 구원이 될 것입니다. 그때 그리스도의 복음은 더욱 더 온전해져 갈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한발 더 앞으로 다가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