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한반도 정세와 통일선교의 길 (강정구)
제가 하늘뜻펴기를 한다니까 노재열 장로가 꿈같은 일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저도 갑자기 성령이 충만해지는 것 같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진실과 정의와 민중을 바탕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올바른 지침을 내려 주시는 그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지침에 따라서, 목사님께서 제시한 '현 한반도 정세와 통일선교의 길'을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먼저 한반도 정세에 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지난 4·27판문점선언, 6·12 북미공동성명, 6·13 지자체선거를 계기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본격적으로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곧 6·12 북미공동성명으로 외적인 탈냉전이 본격화되고, 4·27 판문점 선언과 6·13지자체 선거로 내적인 탈냉전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는 경천동지할 변화이면서 역사의 아름다운 발전을 이끌어낼 강력한 추동력이 될 것입니다. 곧 한반도에 본격적인 평화와 통일의 시대가 열리게 될 것입니다. 6·12로는 무엇보다 한반도가 전쟁위기에서 벗어나 우리 7천만 민족의 생명권이 보장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또한 절대성역인 주한미군 철수 이야기가 미국 대통령과 미국 국방장관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왔습니다. 또 1976년부터 해마다 세계 최대 규모로 진행되던 한미연합전쟁연습이 북측을 자극하는 도발적인 훈련이란 점을 시인하였고 또 중단한다고 했습니다. 바로 트럼프 대통령과 주한미군사령관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1976년부터 지금까지 무려 40년 이상 방어훈련이라고 한국과 미국이 앵무새처럼 외쳐오던 거짓말이 미국의 입을 통해 탄로가 난 셈입니다. 또 이 위협에 언제나 노심초사하면서, 이의 중단을 요구해 왔던 북측의 주장이 타당하다는 것을 인정한 셈입니다. 진실이 진실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작년의 화급한 전쟁위기, 그 끔찍스런 공포의 1년은 다시 되풀이 되어서는 절대 안 될 일입니다. 여러분은 잘 모르시겠지만, 6·25이후 한반도는 최소한도 10번 이상의 아슬아슬한 전쟁위기가 있어 왔습니다. 이런 위기 속에서도, 미국 핵전담 대사였던 갈루치의 말처럼, 전쟁으로 폭발하지 않았던 게 기적이라고 봐야 할 정도입니다.
이제 우리는 73년 만에 맞이한 이 평화의 시대에 평화를 제도화하고 정착화 하여, 다시는 한반도에 전쟁위기가 재발하지 않도록 매듭을 지어야 할 민족사적 과제를 짊어지고 있습니다.
이제 73년 만에 이렇게 엄청난 역사적 전환을 가져온 주역들에 대한 평가를 해 보겠습니다.
장기 구조적 측면에서, 이 획기적 전환을 가져온 출발은 무엇보다 북측의 핵무력 완성과 평화이행 선언입니다. 다음 단기 행위적 측면에서는, 우리 문재인대통령의 평창 평화올림픽 만들기와 한반도 전쟁막기의 전략과 정책입니다. 또한 미국의 전통이나 주류와는 거리가 먼 트럼프 대통령의 결단입니다. 이 세 가지가 서로 결합해서 4·27 판문점선언과 6·12 북미공동성명이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작년과 재작년 평화소모임 발표에서 북측은 오바마 말기에 핵시험과 미사일시험을 집중해 미국본토를 위협할 단계에 까지 거의 와서 미국에 협상을 제안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또 이 전략은 북측의 입장에서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몇 번이나 말했습니다. 왜냐면 미국이 직접적인 위협을 받지 않으면 한반도의 긴장조성은 미국에 꽃놀이패가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바마라는 사람은 최소한 임기 말기에 북측의 핵시험을 핑계로 전쟁을 벌일 정도로 전쟁광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주장을 민주당 국제토론회에서 말했더니 사회를 보던 문정인 교수가 너무 급진적이라고 했습니다. 급진적이 아니라 북측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합리적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은 2차대전 이후 지금까지 미국 본토가 직접적인 위협을 받은 적이 단 두 번 있었습니다. 첫째는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 때입니다. 둘째는 북측이 작년 9월 수소폭탄시험과 11월 ICBM시험의 성공을 통해 미국 동부의 수백만이 죽을 수 있는 북측의 핵미사일 사정권에 들어왔을 때부터입니다.
미국이 이런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면, 협상에 나올 리가 없습니다. 물론 미국의 전통적 주류나 전략가들이 집권했더라면, 위협을 느끼면서도 협상하지 않고, 계속 한반도 전쟁위기만 조성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저는 평화소모임 발표에서 힐러리가 당선되면 한반도는 장기 구조적 위기 속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트럼프가 당선되면 단기 국면적 위기를 맞을 수는 있겠지만 장기 구조적 위기를 벗어나는 돌파구가 생길 수 있다고, 말해 왔습니다. 트럼프가 미국의 표준 우등생이 아닌 기발한 발상을 하는 특기생이기 때문에 한반도가 전기를 맞은 셈입니다.
우리 모두 이 세분의 결단을 높게 평가하면서 이 기조가 지속될 수밖에 없도록 밀어주고 이끌어 주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미국이 합의나 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던 못된 짓거리를 이제는 불가역적으로 못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이제 4·27과 6·12를 통한 내적인 탈냉전에 관해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4·27을 통해서는 위로부터의 내적 탈냉전을, 6·12를 통해서는 밑으로부터의 탈냉전을 본격화 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결과지만 한국사회의 냉전수구 숭미·반북의 첨병이고 마지막 보류인 자유한국당이 대구-경북 지역을 제외하고 거의 전멸한 게 이번 선거입니다. 이들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박정희와 박근혜의 고향인 구미에서도 자유한국당이 패배하고 민주당이 시장으로 당선되었습니다. 이 결과, 자유한국당은 이제는 더 이상 수구냉전식으로 빨갱이몰이, 종북타령, 북측을 무조건 배격하는 맹목적 반북주의를 펼치지 않겠다고 선언할 정도입니다. 외적인 탈냉전도 내적인 탈냉전의 뒷받침이 없으면 그 성과를 기대하기 힘듭니다.
이제 우리의 과제는 외적으로는 미국이 싱가포르 북미 공동성명을 뒤집지 못하도록 곧, 불가역적이 되도록 쐐기를 박는 것입니다. 또 내적으로는 수구냉전세력이 다시 권력을 장악해 반민주-반평화-반통일-반민중으로 역사가 후퇴하지 못하도록 불가역적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제까지 한반도 정세에 관해 말씀드렸습니다. 이제부터는 통일선교의 길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진실과 정의와 민중을 바탕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지침을 내려주시는 예수님께서는 북측 땅에 예수쟁이를 많이 만드는 일에는 관심이 없을 것입니다. 이보다는 당신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세상인 평화적이고 화해협력적인 남북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매진하라고 말씀 하실 것입니다. 이 길이 바로 올바른 통일선교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측과 북측을 아울러 평화롭고 아름다운 세상, 아름다운 한반도를 만들기 위해서 해야 할 일들은 수없이 많습니다. 가장 우선적인 군사문제를 비롯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 분야에 걸쳐 수없이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시간관계상 세 가지에 국한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통일 방법론입니다. 통일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한반도에 냉전이 해소되고 평화가 보장되지 않았기에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을 따름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탈냉전-평화시대가 열렸기 때문에 가장 큰 장애물이 사라지고 있는 중입니다. 이제는 어떤 방식으로 통일을 진행시켜야 할지를 생각할 때 입니다.
결론적으로, 골드만 삭스의 2009년 제안인 중국-홍콩식의 연방제 통일방안입니다. 물론 이런 방식은, 2000년 6-15공동선언 2항과 거의 같습니다. 또한 제가 6-15공동선언 직후인 2001년에 제안한 아리랑통일민주공화국 수립방안과도 같습니다. 저의 방안을 중심으로 간략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통일 한반도에는 한 국가, 곧 연방 중앙국가가 존재합니다. 또 남쪽 지역에는 남측 지역자치 정부가, 북측에는 북측 지역자치정부가 존재합니다. 남측은 자본주의를, 북측은 중국식의 개방사회주의를 그대로 유지합니다. 연방국가 수반은 남북이 쉽게 합의할 수 있는 분이 있으면, 예를 들어 고 문익환 목사님 같은 분이계시면 그분을 수반으로 모시고, 그렇지 않으면 남북 양측의 수반이 윤번제로 2년씩 돌아가면서 맡는 것입니다.
통일연방 국가의 수도는 서울도 평양도 아닌 개성으로 합니다. 국가 운영은 개성공단이나 올림픽 등 남과 북이 공동으로 추진할 수 있는 일들은 연방정부 곧 통일국가가 관장합니다. 남과 북 공동으로 추진할 수 없는 일들은 지역정부가 맡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서서히 연방정부가 남북을 통틀어 종합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부분을 넓혀 나갈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이런 방식으로 연방정부의 권한을 점진적으로 확대하면, 20년 내에 완전 통합도 가능합니다.
둘째 남북 역사관의 상승적 또는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결합입니다. 남쪽의 역사관은 몰역사적 결과론이라는 잘못을 가지고 있습니다. 북쪽도 역시 발생적 결정론이라는 잘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잘못된 역사관을 동시에 극복하여, 서로 장점은 받아들이고 단점은 수정하는 역사관의 상승적 결합을 이루어야 합니다.
남측의 몰역사적 결과론이란 “지금 현재가 좋고 북쪽보다 우위에 있으니까 남쪽의 과거도 좋았다”며, 과거를 미화·정당화 하는 역사 왜곡입니다. 북측의 발생적 결정론이란 “처음이 좋았으니까 지금도 좋고, 남측은 옛날이나 처음이 좋지 않았기에 지금도 좋지 않다”는 결정론적 역사관을 가집니다. 분명 잘못입니다.
남측은 자신의 과거 잘못을 반성·회개하고, 북측의 과거에 존경과 긍지를 가지면서 한반도 미래를 설계해야 합니다. 북측은 과거에 대해 긍지를 가지지만 현재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남으로부터 배울 것은 배우고 본받아서 한반도 미래를 설계해야 합니다.
이런 상호 이해와 존경의 바탕에서, 또 상호 겸손의 바탕에서 남과 북이 손을 잡으면, 70년 이상 냉전적대로 상대를 부정해 왔던 과거의 잘못이 치유되고 양쪽이 더욱 커져 아름다운 한반도의 미래를 이룩하게 될 것입니다. 곧, 1 + 1은 2가 아니라 3, 5, 10 이 되는 상승효과를 나타낼 것입니다.
셋째, 마지막으로 한반도 미래상입니다. 그것은 한반도가 탈(脫)외세-비동맹-중립의 위치에서 평화조정자와 동북아세력균형자로서의 새로운 위상을 정립하고, 더 나아가 동북아경제평화협력체 형성의 주역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한반도의 장기적 자주와 평화 정착에 긴요합니다.
또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이 각축을 벌이는 신냉전이 한반도에서 폭발되는 제2의 청일전쟁이나 제2의 6·25 또는 제2의 병자호란과 같은 민족참화를 예방하기 위한 절대적 조건을 창출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크지도 작지도 않은 한반도가 일체의 군사동맹을 배제하고, 모든 이웃 나라들과 우호친선협력관계를 견지하면서 이런 역할을 자임할 경우, 강대국들의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습니다.
지금 문재인 정부가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남과 북 또 중국과 러시아 모두를 연결하는 에너지-물류-교통 연결망 등은 동북아평화경제협력체 구축의 기초가 될 것입니다.
이제 마무리를 해야겠습니다.
남과 북 및 해외의, 8천만 우리 민족구성원 모두가, 힘을 모아 이루어 낼 평화통일, 또 한반도를 넘어서 동북아 전체에서 우리 한반도가 평화조정자와 세력균형자로서 새로운 위상, 이 얼마나 가슴 뿌듯하고, 감격스런 우리의 자화상입니까?
그렇지만 이런 아름다운 한반도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역사의 주체로서 그 직분을 다 함으로써 일구어낼 수 있는 결과물입니다.
고맙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향기로운 예물 되어 (삼하 18:5-9,15,31-33, 엡 4:25-5:2, 요 6:35,41-51)
[분단의 신학을 떨치고 일어나자]
최근에 홍근수 목사님이 1987년에 작성하신 “한국교회와 민족통일”이란 강연문을 읽었습니다. NCCK에서 주최한 통일문제협의회에서 발표하신 것인데, ‘통일에 대한 신학적 조명’이라는 부제를 갖고 있습니다. 이 강연은 다음과 같은 예화로 시작됩니다.
한 젊은 사람이 어느 날 저녁 스승의 집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스승이 집 앞 잔디밭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지요. 그래서 ‘뭘 찾고 계시냐?’고 물었더니, ‘집 열쇠를 잃어버려서 찾는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젊은이도 합세해서 열심히 찾습니다. 한참 동안을 찾았지만 열쇠가 나오지 않자, 젊은이가 스승에게 묻습니다. “열쇠를 어디서 잃어 버렸습니까?” 그랬더니 스승은 굽혔던 허리를 펴고 일어나 손으로 먼 곳을 가리키면서, “저쪽 차고 앞에서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젊은이는 스승에게, “아니, 열쇠를 잃어버린 곳에서 찾아야지 왜 엉뚱한 곳에서 찾고 계십니까?” 하고 물었겠지요. 스승은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거기는 깜깜해서 잘 안 보여~”
홍목사님은 이 예화를 통해서 두 가지를 묻고 있습니다. 하나는 잃어버린 통일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하는 역사의식에 관한 질문이요, 다른 하나는 우리도 잃어버린 곳에서 찾지 않고 그저 환하고 편리한 곳에서 찾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리 삶의 방식에 관한 물음입니다.
통일을 잃어버린 곳은 어딘가요? 그곳은 외세가 우리 민족을 나누기 시작한 지점이요, 외세를 등에 업은 자들이 국민들 위에 군림하면서 분단을 고착화시킨 지점입니다. 이 땅에 번갈아가며 등장했던 독재정권은 정권유지를 위해 분단을 활용했을 뿐, 통일을 원하지도 않았고 통일을 할 능력도 없었습니다. 우리 국민들이 그 사실을 깨달았고, 직접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지지난 겨울 촛불혁명을 통해서 마침내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정권을 세웠습니다.
긴 분단체제의 옛 질서가 여전히 여러 곳에 남아 있고, 정부가 추진하는 활동에는 한계가 있지만, 통일을 잃어버린 지점에 대한 역사적 회한은 어느 정도 해소되어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문제는 두 번째 것입니다. 분단이 길어지면서 남북이 서로 적대시하는 삶에 익숙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마치 열쇠를 잃어버린 곳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찾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삶이라 하겠습니다.
불행하게도 한국 개신교회에는 남북이 화해와 통일의 길을 걷는 흐름을 훼방하고 거역하는 집단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전쟁 이전 세대에 형성된 사회적 유전자가 교회에서 강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과 북이 분단된 채 정권이 수립되는 과정에서, 북의 사회주의 정권이 취했던 조처들이 남한 사회에서는 박해와 수난의 기억으로 저장되었습니다. 게다가 한국전쟁의 몸서리치는 경험은 북을 적으로 대하는 정신습관을 갖도록 했습니다. 이 두 가지 어두운 경험은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를 반북주의로 물들였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 가지 사실은 한국교회가 회개해야 할 사항입니다. 그것은 반공이데올로기를 조작하여 국민들을 통제한 독재정권과 밀월관계를 이루면서 기득권을 누린 사실입니다. 그 과정에서 단물을 맛본 사람들은 기독교를 어용종교로 만들고자 했는데, 그것은 예수의 정신을 위협하는 교회의 타락이었습니다.
한국교회에는 여전히 분단신학이 횡횡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는 분단의 신학을 떨치기 위해 노력해온 교회의 활동이 있습니다. 남북의 화해와 통일을 위한 교회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서슬 퍼런 독재정권이 국민들을 위협하던 1984년이었습니다. 일본 도쿄 부근 도잔소(東山莊) 국제센터에서, 남북의 통일을 주요의제로 삼은 국제회의가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주선으로 열렸습니다.
이 모임으로 물고가 터지자 2년 후에는 스위스 글리온에서 남과 북의 교회가 분단 이후 처음으로 직접 만나서 통일을 다짐했고, 또 2년이 흐른 1988년에는 <88선언>으로 불리는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선언’이 탄생했습니다. 이 선언이 남한 기독교 통일운동의 발판이 되었고, 그 이후 홍근수, 문익환 목사를 비롯한 많은 신앙인들이 남북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헌신적인 활동을 해왔습니다. 통일이 되는 그날까지 우리 교회는 이 뜻과 흐름을 이어가야 하겠습니다.
[성서묵상: 그리스도를 본받아 새 삶의 규범을 세우자]
오늘 사무엘하서의 본문은 왕조가 세워지던 때에 생긴 일입니다. 다윗의 셋째 아들 압살롬은 ‘온 나라에 칭찬이 자자한 왕자’였습니다. 인기를 누리며 힘을 모은 그는 형제를 살해하고 아버지를 거슬러 반역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다윗은 얼마 동안 아들에게 예루살렘 성을 내주고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결국 다윗은 노련한 방식으로 압살롬을 교란하여 모반을 잠재우고, 성으로 되돌아와서 왕조의 기틀을 다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아들을 잃은 다윗의 회한을 다루고 있습니다. 정권의 위기는 넘겼지만, 죽은 아들을 생각하며 다윗은 통곡합니다. 그러나 다음 이야기를 읽어보면, 죽은 아들을 위해 슬픔을 더 이상 표현할 수도 없는 다윗의 곤경을 서술합니다. 그렇게 성서는 권력을 둘러싼 역사의 명암을 보여줍니다.
어찌 보면 부질없는 삶처럼 보이는 인간들의 흥망성쇠, 그리고 비극으로 점철되어 이어지는 역사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 것일까요? 오늘 성서본문은 통곡하는 다윗의 목소리를 통해 무엇을 들려주고자 하는 것일까요? 어쩌면 그것은 평화의 감각을 얻기까지 감내해야 하는 삶의 이율배반과 아이러니에 관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평화의 감각을 얻기 위해서는 개인의 고통이나 역사의 비극에서 오는 초조한 반작용을 넘어서는 무엇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단지 미래에 대한 희망만도 아니며, 현재에 대한 세세한 관심만도 아닙니다. 평화의 감각은 눈앞에 보이는 고통이나 비극을 관통하는 어떤 담대함에 대한 파악이요, 권력이나 명성에 대한 욕망을 초월한 어떤 무한한 호소에 대한 민감한 느낌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고통스런 민초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보는 것입니다.
함석헌 선생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는 책에서 우리 민족이 겪은 수난을 독특한 방식으로 읽어낸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난으로 점철된 역사를 왕조의 관점이 아니라, 민중을 향한 하나님의 뜻으로 읽는 것이었습니다. ‘학대받은 여종’처럼 보이는 민중들, 그들을 역사의 수레바퀴를 끌고 가는 ‘가시면류관을 쓴 여왕’으로 그려낸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민중에 대한 지극한 믿음에서 비롯된 생각입니다. (함석헌 저작집, 30:97)
하지만 평화의 감각을 갖지 못한 정신은 눈앞의 비극에 떨며 결국 권력의 포로가 됩니다. 민중들을 개돼지로 보고, 하나님의 뜻을 곡해합니다. 몇 년 전 총리 후보로 지명되었다가 인사검증에서 문제가 된 문모 씨는 교회의 장로이기도 했는데, 그가 그려내는 역사해석과 종교이해는 기이합니다. 그는 ‘조선민족의 게으름을 고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일본 식민 지배를 받게 하였다’고도 하였고, ‘그런 민족성으로 독립을 했으면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됐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를 막기 위해 남북분단을 시켰다’는 논리를 대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학식 있고 높은 지위에 오른다 한들, 식민주의 종놈의 근성을 버리지 못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어떤 믿음과 마음으로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우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옛 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이 되라’고 권하며 (4:22-24), 오늘 본문에서 새로운 삶의 규범을 제시합니다. 이것을 개인윤리가 아니라 공동체의 윤리, 특히 긴 세월을 대립과 반목으로 지내온 남과 북이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기 위해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으로 삼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분단되어 지내온 지난 칠십여 년 동안, 남과 북은 적대적인 방식의 언어와 행위와 정신에 익숙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는 삶이었습니다. 이제는 31/32절에 나오는 권면처럼, 나쁜 것은 버리고 좋은 것은 취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악독과 격정과 분노와 소란과 욕설에 담긴 모든 악의를 버려야’ 하며, 대신 ‘서로 친절히 대하고, 불쌍히 여기며,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본받는 사람’(imitator of God)이 되는 길이요, 하나님 앞에서 ‘향기로운 제물과 예물’로서 자기 몸을 내어주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입니다.
요한복음 본문에서 예수님은 ‘나는 생명의 빵이다’는 말씀을 반복합니다. (egō eimi ho artos tēs zōēs / 35,48,51절) 그러나 유대인들은 믿지 않고 수군거립니다.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우리가 그의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어떻게 이 사람은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는가!” 이것은 자신들의 현실경험이 도리어 인식의 덫이 되어버린 경우에 해당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끌어주지 않으시면 내게 올 수 없다. 믿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다.” (44, 47절) 성경이 말하는 영원한 생명이란 ‘호모 데우스’(homo Deus)가 추구하는 생물학적 목숨의 불멸을 뜻하지 않고, 영원하신 분과의 동행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으로 인도하시는 분이 그리스도요,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생명의 빵’이며, ‘그 빵을 먹은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살 것’입니다. (51절)
통일을 향해 가는 우리 민족이 앞으로는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경제지상주의의 빵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생명의 빵을 먹겠다는 꿈을 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 민족이 평화의 비전을 든든히 갖고, 개인적인 만족 너머에 있는 ‘시대와 역사의 부르심’을 품고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바쳐진 향기로운 예물이듯, 우리 민족이 세계의 평화를 위해 사용될 향기로운 예물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 길을 함께 걷기 위해서 우리 향린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길로 인도해주실 것을 믿고, 화해와 통일의 길을 당당하게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평화를 꿈꾸십시오.
고통과 비극을 꿰뚫는 담대한 평화,
욕망과 바람 너머에서 들려오는 호소에 귀 기울이는 평화를 꿈꾸십시오.
평화를 이루십시오.
그리스도가 주신 생명의 빵을 먹고,
자신을 향기로운 예물로 드려서 평화를 이루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