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ㅣ 김도현 ㅣ 2024-01-14

by 김지목 posted Jan 14, 2024 Views 121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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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4-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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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요한복음 1장 43~51

 

오늘 본문이 요한복음의 나다나엘에 관한 본문입니다만, 오늘 설교에서 두 가지 이야기를 먼저 좀 길게 하겠습니다. 하나는 마태복음 11장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메시야론, 예수님의 천국론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제가 해외입양인과 함께 살아온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이 두 이야기 안에서 마지막으로 아주 짧게 나다나엘에게로 돌아오는 것으로 설교를 마무리 하겠습니다.

 

먼저 마태복음 11장입니다. 감옥에 있던 세례 요한이 사람을 보내 예수에게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당신이 메시야입니까 하는 질문을 던지는 본문입니다. 이 질문이 일어나는 배경을 위해 약간의 고고학적 지식이 필요합니다. 이미 교우 여러분들이 알고 계시는 그런 지식일 수도 있는데, 제가 조금 말씀드리겠습니다.

 

복음서를 연구하는 성서학자들이 궁금해 하는 사안 중의 하나는, 복음서에는 왜 세포리스라는 도시가 나오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포리스라는 도시는 예수님 당시에 갈릴리라는, 우리로 치면, 작은 나라 비슷한, 일종의 영주 국가라고 할 수 있었던 갈릴리의 수도였습니다. 거기에서 헤롯 왕가의 아들 안티파스가 왕궁을 건설하고 갈릴리를 다스렸습니다. 물론 로마의 식민지 체제 하에서 말입니다. 이 도시는 예수님의 고향 마을 나사렛에서 약 5 Km 북쪽에 있었습니다. 어른이 빠른 걸음으로 가면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에 의하면, 세포리스는 갈릴리의 진주라고 불릴 만큼 화려한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이 도시는 엄청난 비극의 역사도 안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10살 내외의 소년이었던 시절, 수도 세포리스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던 열심당원, , 독립운동가들이었죠, 이 독립운동가들이 세포리스에서 조직적으로 들고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로마 주둔군을 물리치고 세포리스를 장악하는 대 사건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로마는 2개 군단과 4개의 기병대를 보내 세포리스의 독립운동 세력을 박멸해 버렸습니다. 요세푸스의 유대고사에 의하면 로마는 세포리스 가도에 2000개의 십자가를 세우고, 독립운동가들을 처형했고, 주민들을 잡아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주후 6년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이게 예수님의 소년 시절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너희는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던, 그 말씀 안에는 소년 예수님이 세포리스에서 목격했던 바로 그 참혹한 죽음의 십자가의 뉘앙스와 그림자가 생생히 살아있는 말씀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로마는 이 도시를 재건했고, 그 때 한 시간 즈음 떨어진 나사렛에 살던 목수, 사실은 석공이었던 요셉은 세포리스 재건 사업에 나가 가솔들을 먹이며 살았을 수 있습니다. 예수도 아버지를 따라 이 도시를 출입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후 예수님이 한창 활동하시던 주후 20년 무렵엔, 헤롯 안티파스는 거기에서 로마 식민지가 임명한 왕이었고, 세포리스의 왕궁에 살고 있었습니다. 세포리스는 명실상부하게 갈릴리의 수도로, 역사가들에 의하면 갈릴리의 진주라고 일컬어 질 만큼 부유하고 화려함을 자랑하는 면모를 되찾았습니다. 이 도시는 다시는 로마에 저항하지 않았고, 주후 70년 로마의 대침공시, 예루살렘이 파괴될 때도, 로마에 협력했고, 도시는 파괴되지 않고 살아남았습니다. 거기에서 학문과 예술이 번성하기도 했습니다. 서기 5~6백년 무렵에는 거기에 큰 교회가 있었고, 주교좌, 감독 혹은 비숍이 그 교회를 이끌었던 그런 곳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세례 요한과 예수님 사이에 메시야의 역할과 천국이 뭐냐에 대한 그림이 달랐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제자 둘을 보내어 오실 그 이가 당신입니까, 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이 메시야가 맞습니까, 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 당시 세례요한은 세포리스의 감옥에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세례요한은 안티파스에게 당신은 어떻게 동생의 아내를 취해서 왕비로 삼았는가, 그렇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라는 준열한 비판을 퍼부었고, 투옥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간간이 예수님의 활동에 관한 소식을 듣고 근심에 빠진 것입니다.

 

큰 그림으로 보면, 세례 요한과 예수님 사이에는 신학적으로 중요하게 일치하는 부분과 상당한 수준에서 서로 결이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게 마태복음 11장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크게 봐서 세례요한이 생각하는 메시야는 권력과 맞서 싸우고, 그들의 불의를 드러내어, 심판과 회개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왕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 등 권력자들을 거침없이 꾸짖었습니다. 권력의 하수인들인 군인들과 세리들을 책망했습니다. 세례요한이 추구한 것은 일종의 권력교체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악한 권력들 아래에서 고통하고 신음하는 그 시대의 가장 작은 자들과 실질적으로 어울려 지내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고독하게 살면서, 금식하면서, 자신의 영성을 연마하고, 내공을 키웠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선지자였지만, 무리 가운데서 슬픔과 기쁨을 나누는 사람은 그런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같은 출발선에 섰던 분이었지만, 세례요한과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예수님은 지체 장애인, 맹인, 농인, 한센병 들과 어울려 지냈습니다. 사회로부터 질타를 받아 사회적 소외에 내어 몰렸던, 세리들과 창기들과 어울려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여자들과 사마리아인들과, 그리고 이방인들, 혹은 고통을 겪고 있었던 로마의 관원들과도 거리두기 하지 않고 어울려 살고 계셨습니다. 그는 이 작은 자들을 가장 존귀하고, 소중하고, 존엄하고, 위대하게 여기며 그 삶을 이어가고 계셨습니다.

 

세례요한은, 넌 나를 따르는 제자였고, 나의 가르침에 존경을 표했는데, 왜 감옥에 있는 내게 면회도 안 오고 나를 위해서 헤롯 안티파스를 공격하는 일에 나서지 않느냐, 하고 아마도 많이 섭섭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요한의 제자들이 왔다 가고 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게 아니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아니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너희는 요한을 보러 나갔다. 맞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 보다 더 나은 자니라. 그래 맞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 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이야기는 바로 이어서, 이런 말로 마무리 됩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세례요한 보다 더 위대하다.

 

이 말씀 안에 예수님의 메시아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가 깃들어 있습니다.

 

악한 권력을 선한 권력으로 교체하는 이들이 존중을 받고 그들의 위대함이 존중되는 것은 옳기는 옳다. 그러나 그것이 다 일수는 없다. 맹인이 보고,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기쁨이 가득해지는 일이 있어야 하는데, 그들 머물며 함께 하는 것이 메시야이고 그런 공동체 안에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는 것이다.

 

바로 그 사회에서 버림받고 멸시 받으며 편견과 차별, 배제와 혐오, 파괴의 위협에 내어 몰리고 있는 이 분들에 대한 우리의 시선, , 이 분들의 존엄성에 대한 진정한 존중이 당대 최고의 예언자요 선지자인 세례요한에게 부여되는 영광보다 더 클 때, 그런 가운데서 그 사람들과 허물없이 어울려 지내며, 연민과 연대, 포용과 나눔 가운데 살 때, 바로 그게 하나님의 나라다. 그게 메시야의 일이다. 예수는 감옥에 있는 세례 요한에게 이런 답을 했던 것입니다.

 

교우 여러 분, 이 두 길은 사실 상 이어진 하나의 길이지만, 이 두 가지 삶을 만약 우리가 나누어 살 수 있다면, 선택할 수 있다면, 어느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어느 길을 걸으시겠습니까? 둘 다 아니...이 더 어려운 삶일까요? 어느 것이 더 쉬울까요? 하나는 권력교체, 시스템의 혁신을 위한 길입니다. 권력자들과 대결해야하고 감옥을 갈 수도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아픈 사람, 슬픈 사람, 편견으로 소외를 겪고 있는 사람, 일생을 살아도 해법이 없는 지체 장애인과 농인들 맹인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하는 삶입니다. 오래 같이 해야 합니다. 감옥엔 들어갔다 나올 수도 있지만, 이들과 함께 하는 삶은 끝이 없습니다. 이 일은 매일 사람들을 만나고 나누고 위해서 기도하고, 어려운 이야기를 공감하고 경청하는 일입니다.

 

이 생각을 안고, 이제 해외입양인들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이야기 후) 

 

마지막으로 요한복음 1장 나다나엘의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그의 친구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했습니다. 그는 나사렛 사람 예수다, 한 번 만나 보지 않겠느냐고 권고했습니다. 그의 대답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는가? 그는 어쩌면 세포리스 사람, 아니 세포리스의 문화에 흠뻑 젖은 사람일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세포리스 입장에서 보면 나사렛은 참으로 보잘 것 없는 작은 마을일 뿐이었습니다. 고고학자들의 발굴에 의하면, 나사렛 마을의 인구는 5백 정도였고, 회당도 없고, 공공기관도 없는 그런 시골마을이었을 뿐이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나타나엘은 인식론적 원죄에 따는 편견을 여실히 드러내는 인간입니다. 이런 인간이 예수를 만나 메시야를 알고, 다른 사람이 되어 갑니다.

   

미국사회가 인정하는 3대 죄악은 racism, sexism, classism 일 것입니다. 저의 지도교수셨던 레티 러셀교수님께서는 ARSC Against Racism, Sexism, Classism 이란 단체를 오래세월동안 이끄셨습니다. (인종차별주의, 성차별주의, 계급차별주의)

 

특별히 아직도 미국사회속에 실존하는 사회병리현상이 인종차별입니다. Black Lives Matter 운동과 펜데믹때 발생한 Asian Hate Crime 은 미국사회의 구조악이 터져나온 현상입니다.

 

인종차별의 배후에는 White Supremacy 백인우월주의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 배후에는 또 다시 White Subjectivity 백인주체성이 존재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화나 종교를 중심으로 남의 문화나 종교를 함부로 판단하는 문화제국주의(Cultural Imperialism) 를 아직도 견지하고 있다고 봐야합니다.

 

백인들의 삶의 방식과 가치체계인 기독교는 항상 우월하며 세계적 또는 우주적 규범(Universal Norm) 과 기준이 되어 여기에 속하면 Fit(적합) 그리고 그것을 벗어나면 Unfit(부적합) 이라 재단되어 열등하고 종속적 지위가 부여되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사고와 가치체계야 말로 서구의 인식론적 원죄”(Epistemological Original Sin) 이라고 규정합니다. 백인들은 흑인과 동양인만 유색인종이라 여겨서는 안되며 응당히 흰색도 한 가지 색깔임을 인정하고 자신들의 색맹적 차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오래전 이지만 미국의 흑인들은 자신들을 스스로 존중하기 위해 Black is Beautiful 이라는 사회적 계몽운동을 하며 스스로 뿌리깊은 자기 모멸과 노예근성을 척결하고자 했습니다!

 

저는 인간의 피부색에 선악적 이분법을 적용하여 우열의 차등으로 인간을 차별하는 것은 신앙도 신학도 철학도 아닌 범죄적 인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린도전서 612~20, 특히 13

인식론적 원죄(Epistemological Original Sin)에 관하여, 혹은 범죄적 인식(Criminal Perception)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린도 사람들의 인식: 음식은 배를 위한 것이고, 배는 음식을 위한 것입니다...(몸은 음행을 위하여 있고, 음행은 몸을 위한 것),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것도 저것도 아 없애 버리실 것입니다. 몸은 음행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있는 것이며, 주님은 몸을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사들인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십시오.

 

 

 

 

(파송사) 

향린의 교우 여러분,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에서 신음하는 이웃을 기억하고 위해서 기도합시다. 또한 이 땅에서 차별과 혐오를 겪고 있는 미등록외국인노동자들과 이이들, 성소수자들괴 가족들, 장애인가족들과 미혼모가족들, 학교밖 청소년들과 시설퇴소자들, 노숙자들과 탈북이주민들, 그리고 여러 나라들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해외입양인들에게 차별 대신 존중을, 혐오 대신 연대와 사랑의 손길을 내밀도록 하십시다. 우리 주님 예수께서 교우 여러분과 동행하십니다. 아멘.